단 상(斷 想)

[단상(斷想)] 욥의 자괴감(自愧感)

profkim 2020. 4. 16. 13:42



                              욥의 자괴감(自愧感)

 

 

 


 

  욥에게는 절친한 벗들이 있었는가보다. 욥이 시련을 당하고 있을 때 먼 거리에서 욥을 찾아 왔으니 말이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Eliphaz), 빌닷(Bildad)과 소발(Zophar)은 먼 거리를 무릅쓰고 욥에게 문병을 왔다하니 그 우정은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도 무척 교분이 두터웠을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와서 그 참상을 보았을 때 놀라고 기가 막혔을 것이다. 이들은 욥과 며칠을 같이 지냈는가 보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하기 보다는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게 된다. 친구들이 생각할 때 현재 나타난 상황으로 보아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참혹한 상태가 되었다고 단정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 많던 재물은 없어지고 열 자녀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재앙이겠지, 보는 입장에서는 분명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욥에게 죄를 지었으니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다시 서라는 충고를 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인과관계(因果關係)로 욥을 설득하였다. 과거 과학이란 인과(因果)를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증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하나의 원인에서 하나의 결과가 도출된다고 생각 했을 때 이야기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하나의 결과는 수 없이 많은 원인에서 연유한다고 믿는다. 그러니 인과로 설명 할 수만은 없다. 과학에 혼돈이론(chaos theory)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은 과학의 혁명이다. 단순한 논리로 어떤 결과를 판단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찌 하나의 원인에서만 연유하겠는가! 무척 다양한 이유에서 생겼을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이런 점을 간과하고 충고를 하였다.

 

  욥의 친구들이 3차에 걸친 충고를 통해서 점차 저주라는 양식(樣式)으로 굳어져가고 이성 보다는 감정적 발언을 하여 욥을 아프게 하였다. 사람이 남을 힐책할 때 가장 똑똑하다고 한다. 자기는 옳고 타자는 잘못이라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것이 인간들의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변호한다. 그리고 욥은 자신의 화려하였던 과거 생활을 회상한다. 그때에는 영광이 항상 머리 위에 있었고,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젊은이, 늙은이, 유지들, 지도자들이 모두 욥을 존경하였고, 욥은 그 성의 장로로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며 원로 이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빈민, 고아, 과부, 맹인, 지체부자유 등을 돌보며 그들의 후원자이며, 가난한 사람의 돌봄이며, 불의한 자를 척결하는 해결사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인가? 욥의 과거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의 행동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이런 선한 일을 한 분들에게 고난이 닥치면 그 행위와 당하는 고난의 관계를 연관 지우려한다. 만일 행위 때문에 구원이 이루어졌다면 이런 논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구원은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한 행위와 고난은 관계가 없다. 오히려 고난이 닥쳐왔을 때 더 의연해질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다.

 

 욥은 과거 영광스러운 삶을 회상한다. 욥의 이야기에 대해 타자(他者)들이 모두 순종하고 수용하였다. 그리고 욥의 이야기나 처사(處事)를 기다리는 모습들이었다. 모든 사람의 갈 길을 결정해 주는 으뜸 자리에 있었다. 욥이 누린 영광과 권위는 그의 물질에서 연유한 바가 크겠지만, 그의 인품 즉 인격적 감화가 컸다고 보인다. 이런 잘나가던 사람에게 닥친 고난은 더 아프고 힘들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경우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끝까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의의 사람임을 보인다.

 

  욥이 모든 것을 잃고 나니 대적들이 놀리고, 침을 뱉고, 굴레 벗은 자들이 되었고, 허물어진 성에 진입한 군대처럼 달려든다고 노래한다.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물어져 간다. 욥의 처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중요한 것은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두렵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도래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환란 중에서라도 믿음위에 굳건히 서면 평안하고, 용기가 솟아나며,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욥의 큰 고민은 이런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에 있지 않았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무너지는 것이다. 문제는 밖에서 왔는데, 무너지는 것은 내면세계이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분명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욥의 내면세계가 붕괴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응답을 얻지 못한 데서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일이다. 욥의 고민은 친구들의 조롱이나 이웃들의 비난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는 않았나 하나님과의 단절이 자괴감(自愧感)을 갔게 하였고 절망하게 한다. 이때 그는 노래하기를 내 수금은 애곡성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이 되었구나."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어려울 때 믿음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야 말로 복 받은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면 우리가 가장 걱정할 일이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자세가 욥의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