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 이야기

[우표 이야기] 31. 1930s 9.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profkim 2026. 5. 5. 17:04

위대한 세계의 영부인이신 엘리너 루스벨트에게 드리는 영광의 튜림 Ⓒ 2026 J. K. Kim

 

1930s 9.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세기를 이끌어 온 따뜻한 지성”

-경제 대공황, 더스트 볼, 뉴딜 정책-

 

제 9 화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제 9 화(第 9 話)의 우표 목록

 

1930s 9.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1930s 9. Eleanor Roosevelt, First Lady

 


미국 우정국의 우표 설명


엘리너 루스벨트는 매우 목소리가 크고, 활동적이며, 영향력 있는 영부인이었다. 그녀는 여성 기자들을 위한 기자회견과 자신의 연재 칼럼을 통해 여성, 청소년, 소수자, 그리고 소외계층의 권리를 옹호했다.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뉴딜정책으로 유명한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FDR, 1882~1945 대통령 재임 1933~1945)의 영부인이신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는 매우 목소리가 크고, 활동적이며, 영향력 있는 영부인이었다. 그녀는 여성 기자들을 위한 기자회견과 자신의 연재 칼럼을 통해 여성, 청소년, 소수자, 그리고 소외 계층의 권리를 옹호했다. 에리너는 경제 대공황기에 대통령 부인으로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펴나가는 동안 그를 뒤에서 지원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해서 내조한 영부인이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영부인의 전통적인 역할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21년 남편이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그녀는 남편의 “눈, 귀와 다리”가 되어 전국의 민생 현장을 직접 방문하였고 여성 기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기자회견을 350회 이상 열어 여성 언론인들의 입지를 넓혔으며, “나의 하루”(My Day)라는 일간(日刊) 칼럼을 30년 가까이 연재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영부인이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엘리너 루스벨트, 안나, 아기 제임스, 1908년 뉴욕 하이드 파크에서 정식 초상화.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엘리너 루스벨트는 대공황 시기에 소외된 빈민, 노동자, 청년, 그리고 소수 민족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부 정책에 적극적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연방 정부 요직에 여성이 더 임명되도록 남편을 설득하는 등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인종 차별 철폐와 여성 인권 향상에 앞장섰는데 1939년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이 인종 차별로 공연장을 빌리지 못하자, 엘리너는 해당 단체(DAR)에서 탈퇴하고 링컨 기념관 앞에서의 야외 공연을 성사시켜서 큰 반향(反響)을 일으키게 되었다.

 

  1939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 1897–1993)은 워싱턴 D.C.에서 공연을 계획했고. 당시 가장 적합한 장소는 미국 혁명 딸들(DAR, 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이 단체는 미국 독립운동가의 후손 딸들의 모임)이라는 단체가 소유한 ‘콘스티튜션 홀’(Constitution Hall)이었는데 DAR은 “백인 예술가만 이 무대에 설 수 있다.”라는 내부 규정을 근거로 흑인인 앤더슨에게 대관을 거절했다.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인입니다. 해리스 & 유잉의 초상화, 약 1932년. 이미지 출처: IanDagnall Computing / Alamy 스톡 사진

  당시 DAR의 회원이기도 했던 엘리너 루스벨트는 이 소식을 듣고 즉각 DAR에 편지를 보내 "당신들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라며 회원 직을 전격 사퇴했고 이 사실을 자신의 신문 칼럼 “나의 하루”(My Day)를 통해 대중에게 알렸다. 그리고 내무장관(Secretary of the Interior) 하워드 익스(Harold L. Ickes, 1874–1952, 내무장관 재임 1933-1946)를 설득하여 연방 정부가 관리하는 링컨 기념관 앞 야외 광장을 공연장으로 사용하게 주선하였다.

  결국, 1939년 4월 9일 부활절 아침, 마리안 앤더슨은 실내 공연장 대신 링컨 동상 앞 야외 계단에 섰고 인종을 불문하고 약 7만 5천 명의 시민이 광장에 모였으며, 수백만 명이 라디오 생중계로 이 공연을 들었다고 한다. 앤더슨은 첫 곡으로 '나의 조국, 그대에게(My Country, 'Tis of Thee)'를 불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선언한 링컨 대통령의 동상 앞에서 울려 퍼진 이 노래는 미국 민권 운동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미국 민권 운동의 서막(序幕)이 되었다.

 

  남편의 사후에도 그녀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UN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UN 인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세계인권선언(1948)'을 기초하고 채택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로로 엘리너 루스벨트는 “세계의 영부인”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사후에도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기억되고 있다.

엘리너 루스벨트가 세계인권선언 포스터(영어)를 들고 있는 모습, 뉴욕 레이크 석세스. 1949년 11월.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엘리너 루스벨트가 미국의 영부인으로서 수행한 대국민 활동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이었으며, 현대 영부인의 역할에 대한 표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엘리너 루스벨트의 중요 활동은

 

  첫째, 현장 방문과 민생 파악 (남편의 '눈과 귀')을 위해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대신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습니다.

 

  둘째, 탄광, 수용소, 빈민가, 공장 등을 직접 방문하여 서민들의 고통을 눈으로 확인하는 등 한 해에만 수만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길 위의 영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셋째, 현장에서 들은 국민의 목소리를 매일 저녁 대통령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여, 뉴딜 정책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역할을 했다.

위대한 세계의 영부인이신 엘리너 루스벨트에게 드리는 영광의 튜림 Ⓒ 2026 J. K. Kim

  넷째, 1935년부터 1962년 사망 직전까지 “나의 하루”(My Day)라는 칼럼을 거의 매일 신문에 기고해서 국민과 직접 소통했다.

  다섯째, 여성 기자 전용 회견을 열어서 여성의 언론계 진출과 직업적 입지를 크게 넓혔다.

 

  여섯째, 정기적인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소외 계층을 위한 대변인을 자처했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남편의 내조자로서, 더 나아가서 인권 운동가로서, 사회개혁운동가로서, 자상한 영부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며, 소외되고, 차별당하던 시대에 국민을 품어 안은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다. 대통령 부인으로 할 수 있었던 역할의 전범(典範)을 만든 사람이라 하면 어떨까?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2026년 5월 5일(화) 어린이날에

Ⓒ 2026 J. K.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