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년 된 한옥건물 교회당, 영천자천교회
자천교회는 1800년대 말에 미국 북 장로교회 선교사 안의와 목사의 전도를 받은 권헌중이 자천리에 자리 잡으면서 1898년부터 가정교회 형식으로 출발했는가 보다. 그러나 1904년 서당 겸 예배처소로 사용하던 초가자리에 현 교회당을 건축하여 예배를 드렸다. 교회당은 한 양식을 절충한 형태고 남녀 석을 완전히 분리하는 칸막이를 중간에 설치하여 개화기 우리사회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간에 교회당의 변형이 있었으나 2005년 건축당시의 원형으로 복원하고 2008년 교회 남동 편에 있는 한옥을 기증받아서 대지와 건물이 확장되었다. 이런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서 2010년 경상북도 영천시는 “자천교회주변 성역화사업”을 공식으로 발표하여 주변 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영남지방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115년 된 한옥교회 자천교회를 소개한다.
자천교회 위치와 가는 길
자천교회(통합, 담임목사 손산문, 054-337-2775)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3리 773에 소재한다. 대구에서 20번 고속국도 동쪽으로 가다가 출구번호 23(북영천 IC)에서 빠져나와서35번국도 북쪽으로 접속하여 올라가면 보현산 자락에 영천 화북이 나온다. 자천교회는 여기 있으며 마을에 고즈넉이 앉아있는 교회는 110년이 넘는 연륜을 자랑하며 개화기 이 지방에 있었던 복음사역의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
한국에 복음전래
한국에 기독교의 전래는 1884년 중국에 와 있던 알랜 선교사(Dr. Horace Newton Allen, 1868-1932, 한국명 안련; 安連)가 한국에 입국하여 의료 활동을 하였다 특히 1886년에 광혜원을 설립한 것은 큰 사건이다. 1995년에는 미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정식 파송을 받은 아팬셀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한국명 아편설라(阿扁薛羅)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한국명; 원두우; 元杜尤)) 등이 입국하여 조선 개화기를 이끌어 갔다 이분들과 후속하여 입국한 선교사들에 의해 학교와 병원이 설립되고 서양식 문물을 들여와 한국인으로 눈을 뜨게 하였다.
영남지방의 기독교 전래는 이보다는 조금 늦은 1891년 베어드 선교사(Rev. W. M. Baird, Ph. D, DD, 1891 부산으로 입국-1896년 서울로 전근, 1931년까지 한국사역, 한국명; 배위량)가 부산에 선교지부(station)을 설치하여 복음을 전파하며 미국으로부터 선교사들을 불러들여 영남지방의 복음 전파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베어드 선교사는 영남지방의 최초의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자료: 손산문(2018). “대구-경북지역교회사의 관점에서 본 베어드 선교사의 전도 사역의 의미”. 경안논단, 11, p. 102, 112, 113)
베어드 선교사는 처남인 아담스(Rev. James E. Adams, 대구사역 기간 1896-1923, 한국명 안의와) 선교사를 초청하였고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를 기지로 하여 폭 넓은 선교 활동을 하였다. 아담스 목사가 먼저 한국에 입국하고 그 부인과 갓 난 아들은 뒤따라서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선교의 큰 역할을 하였다. 아담스 목사는 베어드 목사가 닦아 놓은 기반을 이어 받아서 대구 스테이션을 운영하였다.
대구 경북에 복음 전래와 자천교회
아담스 목사의 부인은 넬리 딕 아담스(Nellie Dick Adams, 대구사역기간; 1897-1909) 이며 그 때 갓 난 아들은 에드워드 아담스(Rev. Edward Adams, DD., 한국 사역기간; 1925-1963, 한국명; 안두화; 安斗華, 계명대학교 설립자, 2대 학장 역임)로서 영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분들이다.
아담스 목사는 배위량 목사가 서울로 전근됨에 따라 대구 station의 책임자가 되었고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반면 경북지방의 모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했다. 또 존슨(Dr. Woodbridge Odlin Johnson, 대구사역 기간 1898-1913, 한국명 차인차) 선교사와 브루언(Rev. Henry M. Bruen, 대구사역 기간 1899-1941, 한국명 부해리) 선교사와 팀이 되어서 대구의 동산(東山)으로 선교본부를 옮겨 여기서 적극적 선교활동을 한 분들이다. 현재 이 동산에 1910년대 선교사 주택이 3동 남아있으며 대구동산병원, 신명고등하교, 대구성경학교자리에는 제일교회(1994년 건축)가 서있으며 청라언덕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아담스 목사는 1898년 대구에서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순회전도여행을 하였는데 이때 영천과 청송 경계에 있는 노귀재(奴歸岾)에서 권헌중(1865~1925, 1915년 영수시무, 1922년 장로장립)을 만나게 되고 아담스 목사의 전하는 복음을 권헌중이 받아드림으로 자천교회는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권헌중은 경주지방의 서당 훈장이었는데 가족과 같이 대구로 삶의 터를 옮기는 중이었던가 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노귀재에서 아담스를 만나고 복음을 받아드리게 된다. 대구로 가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영천군 화북면 자천리에 자리 잡게 되었고 자천교회를 세우게 된다.
자천교회 설립
권헌중은 자천리에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서당 겸 예배처소로 삼았다. 기록이 소실한 지금 그 정확한 설립연도는 알 수가 없지만 현 교회당이 1904년에 지어졌고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린 점으로 보아 확인 할 수는 없지만 1903년을 교회는 설립연도로 하고 있음을 공식화하고 있다.(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그러나 1898년부터 가정교회 형식의 예배를 드리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한다.
자천교회 현 담임 손산문 목사는 자천교회 개황을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소상하게 실어서 교회를 잘 소개하고 있다. 많은 참조가 될 것이다.
자천교회당의 건축적 특성
자천교회는 우진각 지붕으로 된 한옥이다. 우진각 지붕은 일자형 평면의 지붕형태로 초가지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추녀가 네 귀 처마에 있으며, 지붕 좌우에 합각이 없는 형태이다.
손산문 담임목사의 기술한 교회당 특성을 보면 “영천 자천 교회는 개신교 선교 초기[1900년대 초]의 한옥 교회당으로 영천 지역에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구조와 외관은 대체로 한국 목조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내부 공간구성은 서양 초기의 그리스도교 양식인 바실라카식 교회 형식을 일부 채용하는 등 한·양식 절충의 교회당이다. 이는 우리나라 교회건축 초기의 시대적, 건축적 상황과 교회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잘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공간의 절충적 구성 수법 등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손산문 담임목사는 교회당 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영천 자천 교회는 우진각 지붕의 단층 목조 한옥 교회당으로 평면은 장방형으로 정면 2칸이고, 측면 4칸이다. 내부공간은 강단 2통 칸에 예배석 4통 칸, 온돌방 2칸으로 꾸며져 있다. 즉 중앙 2칸에는 예배석을 배치하고 예배석 앞으로 강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예배석 뒤로는 온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천 자천 교회당은 남녀 석을 구별하는 칸막이가 설치되어있다. 이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형하여 사용해 왔으나 2005년 원형발굴에 의한 보수가 이루어져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았다. 출입문은 양 측면에 남녀 구분해 두었는데, 개화기 남녀의 구별을 잘 나타내는 교회당 구조이며 이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인다. 전국에 유일하게 한옥(韓屋)형 교회로서 교회당 연륜 115년을 자랑한다. 자천교회당은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무화재일 것이다.
권헌중 장로의 교회 설립과 교육적 안목
권헌중 장로는 본래 경주 지방에서 서당 훈장으로 활동해왔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곳으로 이주하게 된 이유는 의병활동을 한 전력 때문에 몸을 피하여 은둔 할 곳이 필요했고 일본인을 피해 청송에 은둔하다가 대구로 거처를 옮기려고 가솔을 이끌고 이동하던 중 노귀재에서아담스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권헌중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대구로 가려는 계획을 접고 영천 화북면 자천리에 자리 잡게 된다. 자천리에서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서당 겸 예배처소로 삼았는데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어 1904년 자비를 들여 현 교회당을 짓게 된다. 그러나 완고한 유교관습에 젖어있는 주민들의 반대를 무마하는 일 등 권 장로의 헌신은 돋보인다.
권헌중 장로는 서당훈장이었기 때문에 선교사의 교육적 안목과 쉽게 접목되었을 것이다. 교회에 2년제 신교육기관인 신성소학교(新星小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의 기회가 많지 않던 때 농촌인 자천지역의 청소년이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는 일을 하였다. 선교와 교육 그리고 의료는 항상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이 촌에서 신교육의 장이 열린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일 것이다. 이 신성소학교는 남아를 중심으로 개교했으나 후에 여학생도 받아 교육하였다하니 여성교육에도 기여한 바가 클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 후의 경과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권헌중 장로의 후손들
권헌중 장로 이후 그 후손은 현재 6대까지 내려왔는데 앞의 2대는 모두 소천 하였고 후 4대가 생존해 있으며 이 후손들은 매년 8월 15일 자천교회에 모여 “가족신앙수련회”를 갖는다하니 귀한 일이라 하겠다. 또 산업사회가 되면서 권 장로 후손도 모두 자천을 떠나게 되었고 자천에 사는 사람이 없음으로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외현손녀 중 제주도에서 변호사생활을 하는 김정은과 부산서 변호사 생활을 하는 김고운은 멀리 있으면서도 자천교회에 등록교인이 되어 교인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한다하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크다.
자천교회의 현재
김찬영은 현재 자천교회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영천 자천 교회는 2005년 원형발굴에 의한 보수가 이루어져 옛 모습을 찾아, 30여 명의 신도를 갖고 있는 작은 교회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전국에 유일하게 한옥형 교회에서 바쁜 일정을 잠시 내려놓고 쉼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처치스테이(church stay)’를 시행하고 있다. 또한 인근 문화기관과 연계한 염색체험, 제빵체험과 지역사회에 각종 봉사 및 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손산문 담임목사는 2005년 교회당 복원공사를 마치고 2008년 기증된 한옥을 정비함으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약 1,300여 평의 대지위에 예배당, 사택, 한옥 교육관, 식당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전국에서 연간 8천-1만 명의 방문객을 수용하는 교회가 되었다고 한다.
자천교회는 영천시의 문화관광사업에도 일조하는 교회가 되었다. 영천시의 보현산 일대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연계한 네트워크에도 상당히 기여하여 영천시에서 운영하는 “별빛 나이트 투어”나 영천문화체험“ 등에 활용되고 있다한다.
영천시에서는 자천교회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2010년 “자천교회 주변 성역화사업”을 발표하게 되고 이에 따라서 2011년 사업의 일환으로 문간채 보수공사와 별채와 대문채, 담장 일부를 보수하였다. 본래 정문으로 사용하던 자천8길 소로에 나있던 교회 정문(지금도 사용하고 있음)을 화북길(구 국도)변 화북파출소 앞으로 내어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자천교회의 비전
자천교회는 이런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전개할 것이며 지금 시행하고 있는 church stay를 신앙수련회 또는 교회역사 기행과 같은 목적적 topic을 중심하여 발전시켜 나갈 것이며, 한국기독교 역사교실, 독서교실, 문화체험교실, 작은 음악회 등과 같은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는 한편 복지와 문화에 소외되어있는 농촌 주민들의 생활을 높이 고양할 것이라 한다.
필자는 손산문 목사와 새로 난 교회정문 앞에서 젊은 목사의 원대한 비전을 들으면서 겨울 석양이 내려앉으려는 시간에 자천을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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