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4. 김정권 장로의 교회생활 회고 I : 따뜻한 영혼들과의 대화

profkim 2020. 4. 18. 17:01


      김정권 장로의 교회생활 회고 I : 따뜻한 영혼들과의 대화(1)







    회고를 시작하며

 

  무척 혼란스러운 세월을 살아 왔다. 세계2차 대전, 조국광복, 한국전쟁, 4.19 민주학생혁명, 5.16군사혁명 그리고 조국의 산업화, 오늘은 정보사회이며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살고 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국민이 희생되고 민족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와중에 우리나라 복음화는 급속히 이루어 졌다.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우리 교회는 설립되지 아니했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많은 국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오로지 하나님에게 만 의지하여 어려운 세월을 이겨내려 하였다. 나는 우리교회 초기에 학생으로서 교회에 참여하였고 거의 한 평생을 교회와 더불어 하였다. 그래서 나의 심연에는 교회가 있고 항상 교회를 머리에 그리며 살아간다

 

 지난 57년간 우리교회는 아주 많은 변화와 성장을 이룩해 왔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이 우리 교회의 오늘은 알지만 지난날의 신앙생활이나 영적 활동을 알리가 없다. 나는 이것을 경계해 왔다. 우리교회의 선교활동, 나눔, 섬김, 교제 그런 것들은 모두가 역사성을 갖고 있다.

 

 내가 이글을 쓰는 것은 우리교회의 지난 흔적들을 밝혀서 미래로 나아가는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우리교회는 과거역 

 사를 비교적 잘 정리하여 보관하고 있는 편이다. 교회40사와 50년사를 간행하였고 역사의 원 자료가 되는 회의록과 각종 기록물들을 보관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형식적 자료는 주로 객관적이고 양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자료 위에 우리가 더 필요로 하는 것은 평가, 가치화, 느낌, 구체적 역학관계 등과 같은 이면에 관한 기록이다. 나는 내가 교회생활을 통해서 경험했던 것들을 가치화하기 위해서 이글을 쓰기로 했다.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나는 지혜를 얻기를 바란다. 어떤 경우라도 지나간 일들은 우리에게 미래로 나아갈 지혜를 제공한다. 그러나 역사를 기록하고 음미하지 않는다면 지난 지혜는 미래의 지혜가 될 수 없다.

 

 교회 역사부에서 이 글을 청탁했을 때 나는 주저함 없이 허락했다. 이글을 쓰는 것은 무척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나 미래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에게는 지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글을 기쁨으로 쓰기로 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린다.

 

                

 따뜻한 영혼들과의 대화(1-3) 차 례    

 

김정권 장로 교회생활 회고 I    

 

 프롤로그  

  1. 방 황

  2. 크리스마스이브

  3. 천우교회 회상

  4. 1953년 겨울 부흥회

  5. 교회부흥과 시련

  6. 명설교가 최명순 목사

  7. 2교회당 건축

  8. 초대 장로와 장로의 단명


김정권 장로 교회생활 회고 II 


  9. 부흥사 박경남 목사

10. 박경남 목사 시절의 장로

11. 초대 우리교회 여성도 들

12. 초대 우리교회 장립집사

13. 50, 60년대 주일학교 교육

14. 사소한 일에서 생긴 갈등

15. 당회의 현명한 판단

16. 교회의 정체와 갈등

17. 편견과 오해

18. 지켜져야 할 일

19. 장로의 고민


김정권 장로 교회생활 회고 III

 

20. 교회정체성과 역사인식

21. 크로스 웨이 훈련과 농어촌교회 지원

22. 교회설립 사십 주년: 초기 지도자 초청과 교회사편찬

23. 교회 설립 50주년과 교회당 리모델

24. 교회 주차장과 컨벤션 홀의 구상

25. 침산유치원에서 침산어린이 집까지

26. 나와 동역한 신앙의 동지들

27. 교회와 사회복지 사역

28. ? 역사가 중요한가?

29. “나눔과 섬김의 교회교회 지표를 향하여

에필로그  

교회 중요 연표

   

<일 러 두 기>

 

1. 이 책의 내용은 반드시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적 흐름은 연대순으로 이루어 졌다.

2. 인명 뒤에 ( )내에는 (출생연도- 소천연도)가 기록 되었으나 없는 경우는 조사가 불가능 했던 경우이다.

    소천연 도가 없는 경우는 생존해 계신 분이다.

3. 우리교회 명칭은 4번 다르게 사용 되었다.

 

첫째, 북부교회(19519-19523)

둘째, 천우교회(19524-19583)

셋째, 천일교회(19583-19653)

넷째, 침산제일교회(19653- 현재)

 

4. 우리교회 교회당은 대구광역시 북구에 세 번 건축 되었.

   

1교회당 1952-1955년 침산동 222-4

2교회당 1955-1979년 침산동 266-1

3교회당 1979-현 재 침산동 22-100


5. 이 글에 나오는 연도는 2008년을 기점으로 한 것임

 

 

    프 롤 로 그

  


  우리 민족은 오랜 시간 좌절과 갈등의 세월을 보냈다. 근대화 과정은 매우 순탄치 않았으며 19세기 말 나라의 사정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시작한 18세기 말 먼저 우리나라에 유입된 가톨릭의 신자는 많은 분이 순교하였고,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후에는 우리 신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핍박으로 순교자가 속출하였다.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기에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되고 확산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아니면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나라를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셔서 미국, 캐나다, 불란서, 독일 등에서 선교사를 당시로서는 세계의 오지인 한국으로 보내주셨다.

 

 이 분들의 한국에서 역할은 의료, 교육, 사회운동, 민중계몽 등을 통해 복음 전파에 힘썼으며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개신교 선교사들의 의료와 교육 사업은 근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근대화 과정에서 무척 불행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일본 한국강점(韓國强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픈 상처이었다. 광복과 더불어 일어난 한국전쟁(1950-1953)3,000만 국민 중 300만 여명이 희생되고 전국토를 폐허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민족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켜서 광복 후 60년이 지나도록 그 갈등의 고리를 끊을 수가 없다.

 

 한국전쟁은 북쪽에서 수많은 피난민을 남쪽으로 이동시켰으나 믿음의 형제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 했으니 초대교회가 박해를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난 사도와 제자들에 의해 여러 곳으로 복음이 전파된 일과 주후 130년경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에 유대인이 살 수 없도록 조처한 후 그들이 세계 각 곳으로 퍼 저 나간 것과도 흡사하다.

우리 교회는 한국전쟁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침산의 어두움을 밝히고 박토(薄土)와 같은 이 땅에 옥토(沃土)를 일굴 것을 명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산하며 이웃에게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여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원하셨다.

 

교회 설립 후 57년이 지난 우리 교회는 그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를 향한 우리의 비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그 것을 평가 할 필요를 느낀다. 과거 우리 교회가 경험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신앙생활에서 얻은 영적 감동을 후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미래를 조망 하는 힘을 갖게 한다.

나의 회고 중에는 우리 교회의 빛나는 역사도 있을 것이고 잘못되고 부끄러운 역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라도 특정인을 자랑하고, 높이 세우려는 것이 아니며, 또 어떤 이를 질타하고 낮추려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사는 그저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아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자료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지 특정인의 공과(功過)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과거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깨닫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한다. 나는 사실을 가능한 진솔하게 진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개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역사하신 일들의 맥락(脈絡)을 이해하기 위한 것임을 이해하여주기 바란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과거의 흔적이 희미해지기 때문에 나의 회고는 남아있는 기록과 옛날 분들의 증언과 나의 기억으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나의 회상이 왜곡 될 수 있을 개연성(蓋然性)이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사실 확인을 위해 증언 등을 활용하였다.

우리 교회는 다행히 초기부터 당회록, 제직회록 등 기록이 잘 보존되어있고 초기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는 것이 조금 있어 다행이며 아직 제1세대 중 생존 하신 분들이 있어서 더욱 다행스럽다.

우리 교회는 이미 40년사와 50년사를 간행한 바 있어서 형식적 역사 자료는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내가 쓰는 회고록은 형식적 자료 보다는 우리 교회 이면사(裏面史)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침산제일교회의 뒤안길이라 할까? 숨어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다. 특히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 들이다.

 

 우리는 형식적 논리에 의해 전개된 사실보다 우리 삶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역사성을 무척 중시한다. 그래서 내가 관여했던 영역에서는 거의 그 역사를 정리해 두었다. 나는 특수교육을 전공했기 때문에 13년 전에 한국특수교육백년사”(1994)를 편찬하였고, 내가 대구대학교 교수로 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사십년사”(2001)를 편찬하는 일에 선두에 섰었고, 영광학원오십년사”(2001) 편찬위원장으로 학원사를 편찬하였으며, 우리 교회 사십년사(1991)와 오십년사(2001)” 편찬위원장으로 교회사를 펴냈으며, 내가 교수 정년퇴직 할 때 110년 전 사진으로 부터 7, 80년 전 사진, 그리고 최근의 귀중한 사진을 모아 사진으로 보는 한국특수교육의 역사”(2002)를 영문과 국문으로 간행하여 세계 100대 도서관과 국내 중요 도서관에 보내서 비치하게 하였다. 2006년에는 한국특수교육의 이면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광복 후 1세대를 중심으로 28명을 선임하여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한국특수교육의 뒤안길에서라는 책명으로 책을 간행하였다. ? 이런 작업이 필요한가? 후세대의 정체성 확립과 미래로 나아가는 지혜를 얻고자 함이다.

 

 나는 침산제일교회에서 1961년 서리집사, 1967년 집사 장립, 1970년 장로 장립하여 우리 교회 57년 역사 중 교인으로 56년 제직회 회원으로 47, 장로로 38년을 지냈다. 내가 우리 교회에서 경험한 것은 우리 교회 역사 자료라 사려 된다. 이 회고를 집필하는 것은 나에게 무척 수고로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교회 정체성 확립과 앞으로 발전에 기여 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수고로움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1. 방   황 

 


   우리나라 광복은 우리 손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라가 두 동강이가 되고 광복 후 우리 사회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3년간 미군정통치(美軍政統治) 아래 좌우익(左右翼)은 격렬한 투쟁을 하였고 좌익은 공산주의 즉 북한을 지지하고 북쪽에서 통일하기를 바라는 반면 우익은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민주통일을 원했기 때문에 이념 갈등이 아주 심한 상태였다.

 

 우리가 광복을 맞은 1945년은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이 우리 강토를 강점(强占)하고 그들은 수탈정책을 수행하여 우리의 것을 강탈해 갔다. 농업사회의 일반적 경향인 농토에서 생산되는 것이 국가 산출물의 전부인데 일인들은 소위 공출(供出)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빼앗아가고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는 젊은이는 군대로, 나이가 조금 든 사람은 보국대(報國隊)로 징집하여 가고, 처녀들은 정신대(挺身隊)로 강제 징집해갔다. 이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서 이름 없는 희생자가 된 분들이다. 주권을 잃은 국민이 겪어야하는 아픔이 아니겠는가?

나라 잃은 국민을 누가 보호 해주겠는가? 우리는 억울한 죽음을 수 없이 당하고 욕보고, 빼앗기고, 얻어맞고, 일인의 왕을 숭배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 하여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에 갇히었다. 애국하는 글을 썼다하여 수난을 당하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자녀들은 무학 무식꾼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말을 빼앗기고 창씨개명(創氏改名)하여 조선의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이름을 갖지 않으면 쌀 배급을 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만행이 어떠하였는가!

 

 더욱이 일본은 1860년대에 산업화 사회로 전환되어 1900년에는 이미 상당한 산업 사회로 성장해 있었고 우리나라를 강점 할 때에는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산업이 성장해 있었다. 이들은 이런 힘으로 세계열강과 겨루어 한국으로 진출하였고 결국은 한국을 강점하게 된다.

 

 이들은 오로지 수탈이 목적이어서 한국의 부흥이나 한국 민의 안위(安慰)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이민족 간의 관계(전쟁이나 산업 경쟁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술이나 경영전략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 국민을 단순 노동자로 머물게 하였다.

 

 이런 결과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1945년 광복 당시 우리 민족은 가진 것이 전연 없었다. 자원도, 기술도, 지식도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사회 지도자도 부족하였고, 학교에 교사도 부족하였다. 기업을 경영 할 만 한 인재도 없었다. 생산은 없고 소비만 있으니 모든 것은 농산물에 만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농업사회 이었다. 우리 민족은 아시아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백성이었고 가난은 우리 국민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이었다.

 

 더욱 어려웠던 것은 미군정기(美軍政期; 1945-1948)에 민주 계열과 공산 계열의 극한 대립이 있었다. 미군정은 소위 민주적 원칙에 의해 두 계열을 모두 인정하고 불법이 아니면 허용하는 정책을 펴 나아갔다.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은 극에 달해서 거의 이 3년간은 무법 천지였다.

 

 일본 사람이 한국에 대해 승자(勝者)이었고, 우리는 패자(敗者)이었다면 이는 이민족(異民族)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광복 후 우리나라의 좌우익은 같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같은 민족 사이에 승자와 패자가 생기는 것은 국가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수탈한 역사와 우리나라의 좌우익 간의 투쟁은 성격이 전연 다르다.

 

 첫째, 이민족 간의 투쟁은 투쟁이 끝나면 공간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에 계속 충돌이 적어지지만 동족 간의 갈등은 같은 공간에 머물기 때문에 갈등이 종식되지 아니한다.

둘째, 같은 민족 안에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면 갈등과 투쟁이 계속된다.

셋째, 민족 내에서 갈등은 누구의 승리로 끝나서는 아니 된다. 승자가 있다면 그는 패자를 승자로 만들어야한다.

이것이 국가 간 전쟁과 국내의 전쟁의 차이이다. 그러나 광복 후 3년간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공산주의자들은 북으로 쫓겨 가든지, 잠복하든지, 소멸하였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라에서 혼란이 극에 달했으니 사회가 안정 될 리 없었다. 민족 간의 투쟁은 결국 한국전쟁으로 연결되고 오늘과 같이 광복 60년이 지나도 분단국가로 남게 만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조선조를 통해 서구의 합리주의 또는 실용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실학사상(實學思想)을 수용할 도량이 없었다. 모든 문물이 일본에 앞서있던 우리나라가 19세기에 와서 역전된 것이다. 소위 근대화 과정을 일본이 우리보다 100년 먼저 시작한 것이다.

 

 사회적 혼란과 근대 지식의 축적이 없는 우리나라가 겪어야하는 고통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다. 1945년부터 1950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5년간은 우리나라가 아무 준비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은 한국전쟁으로 극에 달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사회체제가 무너지는 아노미 현상에 이르렀다.

 

 이런 혼란은 주후 130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인을 이스라엘에 살지 못하게 한 이산(diaspora)의 효과와 비슷하였다. 이북에서, 서울에서 모든 국민은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에게는 배고픔과 불안과 실향이라는 고통이 주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은 일본의 한국 강점을 종식시킴과 동시에 민족의 분열을 가져왔고, 상당한 기간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 할 무거운 과제를 부여했다. 우리 사회의 혼란과 빈곤은 국민 모두에게 고통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이 오로지 그분께 귀의하여야만 하고,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깨달음을 주셨다.

 

  

    2. 크리스마스이브

  


  우리 민족에게 1950년은 슬픈 해이다. 광복 후 민족 간의 대립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그해 628일 내가 살던 서울에 이북의 군대가 진주(進駐)하였다. 전쟁이 일어나고 고작 3일만이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모든 교통이 두절되고, 학교가 폐쇄되고, 모든 것이 마비 상태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도시는 속수무책이다. 교통이 마비되어 물자가 흐르지 않는다. 이해 여름 3개월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첫째 먹을 것이 없었다. 다행이 여름이어서 채소류로 연명하는 상태이었다. 매일 공습(空襲)으로 불안하고 특히 전쟁에 관한 지식이 전연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연 알지 못하였다.

 

 그해 625일은 주일이었다. 그 당시 국군은 주일 마다 외박 휴가를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군인이 휴가를 떠난 상태에서 북쪽 군인이 내려온 것이다. 종이로 만든 메가폰(megaphone)을 든 군인들이 국군 장병은 속히 귀대하라는 메시지를 길거리를 돌면서 전했다. 트럭에 실린 군인이 계속 의정부와 춘천방향으로 나아가고 민심은 흉흉하였다. 6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시민은 반석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안전하다는 방송이 있어서 우리는 국군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그러나 이런 신뢰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였다. 27일은 포성이 아주 가까이 들려오고 피난민 행렬은 청량리-동대문 가도에 넘치어 났다.

 

 우리 가족도 피난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머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십리(往十里)로 가자고 하셨다. 내가 살던 신설동과 왕십리는 지척이었다. 그것이 피난일까? 왕십리의 아는 집으로 갔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 북쪽 군대의 공격 대상이었다. 수 없이 많은 포탄이 떨어지고 우리는 이불 밑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하나님의 돌보심인지 우리 가족은 무사하였다.

 

 새벽 3시쯤 되었을 것이다. 밖에서 인민공화국 만세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잠복했던 남노당원(南勞黨員)들일 것이다. 민족의 비극은 그렇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소위 반동(反動)을 색출하여 학살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광복 후 남로당에 가입했던 사람들이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사면정책(赦免政策)으로 자수하고 결성한 단체가 보도연맹(保導聯盟)인데 이들은 남쪽과 북쪽 모두에게서 학살의 대상이었다. 이런 민족의 수난은 민족 지도자들의 유연성 부족과 우리 민족의 포용력 부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은 유엔군과 국군의 서울 진격의 계기가 되었고 내가 사는 곳에는 928일 유엔군이 들어왔다. 지난 3개월은 공산주의자들의 천지였다. 3개월은 나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인간으로서 기본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 어려움이 어떠했겠는가?

 

 유엔군과 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 때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가하게 되었고 유엔군은 후퇴하여 다시 서울을 내어주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1. 4후퇴이다. 12월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계속 유엔군은 후퇴를 하였다. 우리 가족은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만 해도 겨울 준비로 김장이며, 장작을 준비하는 것 등 겨울을 지낼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서울에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시민이 피난길에 나섰기 때문에 서울은 거의 공성(空城)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1224일 출발하기로 정하고 모든 준비를 하였다. 우리가 출발하는 날이 크리스마스이브 이었다. 아침에 가족들은 모두 힘에 겨운 짐을 하나씩 짊어지고 대대로 살아오던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나섰다. 신설동에서 동대문 까지 몇 시간이 걸렸는지 거의 정오나 되어서 도착하였다. 모두 걸어본 경험이 없는데다가 짐을 지고 나선길이니 얼마나 시간이 걸렸겠는가?

 

 마침 동대문에서 전차(電車)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탈 수 있는 거리는 을지로 입구까지였다. 을지로 입구에서 부터 걸어서 남대문을 거처 서울역, 용산을 지나 한강 부교(浮橋)를 건너는 것으로 하루해가 꼬박 가버렸다. 1950년 크리스마스이브는 나의 피난 첫 날이었다.

 

 노량진 아는 분의 집에서 우리 가족이 하루를 신세지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마당에서 밥을 지었으나 반찬이 없었다. 집주인이 김치를 내어다 주었는데 식구가 많아 금방 없어지고 처음으로 소금으로 밥을 먹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집 없는 신세로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을 다시 음미하게 되었다.

 

 좁은 공간에서 선잠을 자고난 우리 가족은 아침 일찍이 영등포를 향해 출발하였다. 당시 모든 기차는 영등포역에서 출발하였다. 물론 여객열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차라야 화물차이고 그것도 화물차 안에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화물차 지붕 위에라도 탈 수 있으면 행운이라 생각했다. 당시 화물열차는 부산으로 휘발유를 운반하러 가는 차이어서 빈 드럼통으로 차있었다.

 

 우리는 무작정 영등포로 향해 걸었다. 그러나 우리의 행보는 아주 느렸다. 노량진을 아침 일찍이 출발해서 저녁 7시가 넘어서 영등포역에 도착한 것이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움이 깔려있고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영등포역에는 인산인해(人山人海)이었다. 화물열차는 여러 개가 정차해 있었는데 어떤 것이 먼저 출발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떤 열차를 타야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화물차 지붕위에는 이미 사람이 꽉차있었다. 우리는 한 열차를 정하고 가족들이 각기 올라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가족은 모두 흩어져 앉기는 했지만 모두 같은 기차에 탔다. 이날이 성탄이었고 성탄 저녁을 화물차 지붕 위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 하셔서 우리가 탄 열차는 밤 9시경 출발하여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KTX1시간 40분이면 오가는 길을 나는 195111일 오전 2시에 대구역에 도착했으니 며칠을 왔는가? 나의 대구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 천우교회 회상(回想)

 


  우리 교회의 처음 명칭은 천우교회(天佑敎會)이었다. 나는 1952년 여름 천우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침산동 222번지에 있었는데, 현 침산로터리에서 서쪽 방향의 길(현 침산제일교회 방향) 60m-70m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교회 토지가 상당히 도로로 편입되었다. 그 당시는 로터리에서 현 교회로 오는 도로가 개설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도로는 상당히 뒤에 개설되었다.

 

                 1952년 제1교회당 앞에서 구락부학생과 교인들 좌측에 임종헌 목사(당시 총신 대 학생) 


 교회당은 목조로 짓고 벽은 전통적 한옥을 건축하는 방식의 진흙 벽 이었으며 지붕은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철판으로 되어 있었다. 건평 40평으로 조그마한 교회이다. 바닥은 마루를 놓았으나 육송(소나무)이었고, 교회당 뒤편으로 방 두 칸과 그 가운데 부엌 한 칸을 넣어 목사 사택과 전도사 사택 또는 목사를 돕는 사람이 쓰기도 했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으나 전쟁 중의 교회이니 이도 감사한 일이었다.

 

 내가 처음 교회에 참석했을 때에는 마루를 깔지 못한 상태로 가마니를 펴놓고 예배를 드렸다. 지금 기억으로는 1952년 성탄 전에 마루를 깐 것 같다. 교회 담장도 기둥을 세우고 널 판지(3부 송판)로 담장을 세웠다. 물론 교인들이 손수 일을 했다. 교회 일을 거의 교인들이 손수 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교회 재정이라야 담임목사와 여전도사 은사금을 지불할 정도였으니 요사이처럼 선교, 나눔, 교회 관리에 쓸 수 있는 예산은 거의 없었다.

 

 천우교회 담임목사는 최명순(崔明順), 여전도사는 임종숙(林鐘淑; 1952,4,1-1953,3,1 시무))이었다. 당시 교회체제는 목사 1, 여전도사 1인이 보통이었다. 최 목사는 우리 교회 초대 담임목사이고 이분이 교회 설립을 노회에서 승인 받았으며 처음으로 장로를 세워 조직교회로 교회를 확고히 하신 분이다. 임종숙 전도사는 임종헌 목사(당시 총회신학대학 학생)의 누이로 우리 교회 초기에 많이 헌신하신 분이다.

 

 우리 교회는 산격교회에서 나온 산격동 토박이 교인과 피난민 교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시 상황이니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았으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향한 열정은 뜨거웠다. 교회는 당시 교인들의 절실한 문제 해결과 당하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몸부림으로 예배는 뜨거웠고, 기도는 간절하였으며 말씀에 대해서는 항상 갈망하였다.

 

 피난 나온 성도가 몰려오고 이들 성도들에게 교회는 안식처이었다. 이분들의 텅 빈 가슴은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었다. 고향을 잃고, 집을 잃고, 모든 재산을 잃은 사람의 허무함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이산가족이 된 분들의 아픔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피난 나온 곳에서 생활수단이 없는 분들은 더욱 힘들었고,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노점상이나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분들은 오로지 주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간절한 신앙인이었다.

 

 그 당시 소위 양키시장(현 대구교동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이 많았고 우리 교회 근처에 성광중학교가 있었는데 초대 목사이신 최명순 목사와의 관계로 성광중학교 교장 백운기 목사, 음악을 전공하신 소규천 목사 등 많은 교사(박원호 집사, 김정태 집사, 이동욱 집사 등)가 우리 교회 교인이었다. 학생들은 주일날 교회에 의무 출석이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출석확인을 받아가야 했다. 새로 시작한 교회이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활발한 교회이었다.

소규천 목사는 찬양대 지휘를 하셨는데 그 당시로서는 그만한 지휘자는 대구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성광중학교 팀은 초대교회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사려 된다. 그러나 교회가 시련에 접했을 때 교회 문제를 잘 해결하는 힘의 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의 한 세력이 되었다.

 

 교회가 시련에 접하게 되면 교회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방안의 창출보다는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에 따라서 대립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었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우리 사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만들고 끊임없는 대립으로 치닫게 한다. 교회나 사회의 지도자는 전체를 아우르는 문제해결 방법을 갖고 있어야한다. 찬성하기도 쉽고 반대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 해결의 방법은 아니다. 타협점을 찾아 모두가 승리하는 해결방안을 갖고 있어야한다.

 

 광복 후 우리나라 국민은 두 개의 이데올로기(ideology)를 극복하지 못하고 60년 이상을 싸우고 결국은 분단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같은 운명의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 집단은 대립적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아니 된다. 설득과 합의에 의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포용해서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설립 초기에 넘치는 활력으로 발전해 왔고 또 교인간의 심한 갈등으로 오랜 시간 치유해야하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아직 성숙되지 못한 교회가 겪어야하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만일 초기에 교회를 잘 아우를 수 있었다면 우리 교회는 5, 60년대에 장족의 발전을 하고 선교활동과 나눔과 섬김에 앞장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었을 것이다.

 

 천우교회 설립 초기는 대구노회 북시찰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북부교회, 산격제일교회 등과 이웃하여 왕래가 있었으며 합동 행사도 있었다. 우리 교회가 설립되고 몇 년 후에 북성교회, 북일교회, 신기교회, 대도교회 등이 설립되어 이웃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왔다. 대구시 전체가 하나의 노회로 구성되어 있어서 우리 북시찰은 대구의 북부 지방과 반야월, 하양 까지 북시찰에 속하여 아주 큰 집단 이었다.

 

 우리 교회는 북시찰에서 항상 리더의 역할을 해왔으며 이웃교회와 교류하면서 공동체의 사명을 다 해왔다. 그러나 교세는 크게 확장되지 못하였다. 50년대 사회적 불안과 기본 생활이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 재정이 원활 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1953, 4년에 걸쳐 이웃 교회인 산격교회(현 산격제일교회)가 미군의 원조를 받아 교회당을 새로 신축하게 되었다. 이에 자극되어 우리 교회 지도자들도 새 교회당 신축을 계획하게 되었다. 붉은 벽돌로 제2교회당 자리에 멋있는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4. 1953년 겨울 부흥회

 


   교회는 195311월 부흥사경회를 갖게 되었다. 강사는 전재선 목사로 내 기억으로는 상당한 고령이신 것으로 기억된다. 교회당 내부에는 만국기를 실에 연결하여 수 없이 붙이고 강대에도 부흥사경회라 잘 써 붙여 전쟁으로 피곤한 영혼들이 은혜를 갈망하면서 말씀을 갈구하였다.

 

 연일 집회는 성황이었다. 저녁시간 집회에 너무 많은 교인이 회집하여 마루가 내려 않는 일이 생겼다. 집을 건축하는 것이 허술 하기도 했겠지만 교인이 많이 회집한 것도 사실이었다. 매시간 은혜가 충만하였다. 성도들은 전쟁으로 상실한 자아정체성(自我正體性)을 믿음으로 채우는 일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전재선 목사는 당시 전국을 순회하는 부흥사이셨고 우리 교회에서도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셨다. 모든 성도는 그 시대 상황에 비추어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때는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장로 선출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여 정 순(정준민), 박영훈, 김중산 집사를 장로로 선출한 상태였고 오는 110일에는 장로 장립식을 갖기로 한 때여서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때이기도 하였다.

 

 전 목사의 부흥회는 우리 교회로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한국전쟁 휴전 후에 교회 안정과 부흥을 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갈등을 예고하는 의미도 있었다. 인간의 심리는 매우 미묘해서 합리화 하고자 하는 경향은 항상 있어왔다.

 

 임종숙 전도사가 사임하시고 19533월에 김예득 여전도사(1953,3,15-1953,12,30 시무)가 부임하셨다. 김 전도사는 인품이 고매하시고 후덕하신 분이다. 부자 집 맡 며느리 감의 인상이었으며 불과 10개월 우리 교회 시무하셨지만 많은 인상을 남기신 분이다.

 

 김 전도사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정이 있으셨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홀로 계신 분이셨다. 그런데 부흥사경사이신 전재선 목사 역시 혼자이셨다. 교회 몇 분이 두 분을 중매를 하신 모양이다. 아마 두 분의 결혼에 하자는 없으셨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이 일이 성사가 되어서 그해 12월인지 이듬해 1월인지 우리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두 분이 나이 차이는 많이 있었지만 모두의 축복을 받으면서 혼인예식을 마치었다. 그리고 김 전도사는 우리 교회를 사임하시고 떠나시게 되었다.

 

 이 결혼은 우리 교회에 또 다른 문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북쪽에서 많은 피난민을 남쪽으로 밀어냈다. 어떤 이는 2, 3일 피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갈 양으로 간단한 준비로 집을 나선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자녀 한 두 명만 데리고 길을 나선이도 있어서 오늘과 같은 이산가족이 생기게 되었고 반세기 이상 분단의 아픔이 계속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을 두고 혼자 피난 나온 분들이 많았다. 목사가운데도 이런 분이 있었다. 6, 70년대를 거처 우리 교계의 뜨거운 감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전쟁 희생자들이다. 최명순 목사 역시 이런 케이스였다. 한국전쟁이 3년 간 계속되었고 이제 휴전이 되어서 겨우 전쟁의 직접적 위협은 면한 상태이지만 1953년은 전쟁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피난민도 북한 지역이 아니면 귀향하는 그런 시기였다. 이때 이북 고향에서 이미 결혼을 하여 가정이 있는 최명순 목사와 처녀 성가대원인 최옥금 씨 사이에 결혼문제가 대두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중혼(重婚)이니 목사로서 불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일을 저지하려 했고 최 목사는 이 일을 철회 할 수 없었다. 전재선 목사와 김예득 전도사의 결혼은 최 목사 문제의 전조라고 교회 지도층은 생각 하였다. 한국 교계는 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목사와 장로의 중혼 문제로 심심치 아니하게 문제가 제기되고 많은 분들이 고민하고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10, 20, 30년을 기다리고 양심적 목회자는 혼자 살 수 없어서 아주 늦게 목회를 접고 재혼한 분도 있어서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리 교계는 1970년대 까지도 북쪽에서 남하하신 교회 지도자의 중혼 문제로 논쟁이 되곤 하였다. 국가가 분단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야기 하였으며 한 평생을 가슴에 못을 박고 산분들이 허다하다. 더욱이 신혼 초에 남하하신 분들도 많아서 이런 분은 혼자서 평생을 살아가야하는 아픔도 있었다.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 혼자만의 문제이었고 이분들이 노년이 되어서 그 외로움은 어떠하였겠는가?

 

 교계는 더러 정략적으로 이런 문제를 제기한 경우도 있었다. 중혼을 한 일이 없는데 하루아침에 중혼자가 되어서 교회를 떠난 분들도 있었다. 인간의 모략은 그 지혜가 놀라울 정도로 교묘한 면이 있다. 나와 동문수학(同門修學)한 목사 한분은 농촌 목회를 하면서 혼자서 홀아비 아닌 홀아비로 30년을 살아왔다. 나이 들어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이 어려워 그는 목회를 접고 재혼한 뒤에 농사일을 택했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결과라 할까? 남과 북으로 갈리는 것이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아픈 상처를 남겼는가? 민족의 비극이요, 못난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이런 아둔함을 남긴 것이다

 

 최명순 목사는 명설교가이며 대구 교계에서는 알아주는 유능한 목사이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이 재혼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1953, 4년경의 이런 일이 쉽게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전쟁은 사람들을 더 율법적으로 만들고 남을 용납 할 만 한 아량을 갖지 못하게 한다. 삶에 여유가 없다고 할까?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어떤 사실이 옳은가? 그른가? 로 가치 판단을 하게 되니수용 아니면 거부가 된다. 그래서 적절한 문제해결 방안을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5. 교회부흥과 시련 

  


  최명순 목사 부임 이래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오던 교회는 최 목사 중혼 문제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새로 장립한 세분의 장로는 중혼을 허용할 수 없었고 목사와 대립 할 수밖에 없었다. 목사 장로 간에 언성이 높아지고 고성이 오가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성광중학교 측에서는 최 목사를 두둔하게 되었다. 대립각이 생기고 교인 간에 갈등이 야기 되었다. 당회는 195489일자로 최명순 목사를 권고사직 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당회 조치로 이 문제가 단순하게 끝난 것이 아니다. 이 여파는 김길순 목사 시무 기간 동안에도 계속 되었고 제2교회당 건축 계획에도 많은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교회에 갈등 소지가 있는 사안(事案)이 생기면 교회 지도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방향으로 처리해야하는가? 교회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다.

첫째, 교회 지도자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둘째, 교회 건덕을 유지하는 일과 하나님께 돌려야하는 영광을 가늠해야 한다.

셋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넷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권면하고 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교인 전체의 동요를 최소화해야 한다.

 

 잘못한 사람을 나무라고 벌을 주는 것으로 치리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잘 못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없다. 어떤 잘못을 행했더라도 온유한 심령으로 감싸고 그의 죄는 철저히 가려내고 그 사람을 불쌍한 영혼으로 보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원해야한다.

 

 당회원은 최 목사의 중혼을 허용 할 수 없는 것이고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해야 하지만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최 목사를 설득 해보았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 왔을는지 그리고 대립적 입장이 아니고 하나의 공동체로서 이견(異見)을 갖고 있는 사람들(최 목사의 편이 되어 교회를 어지럽게 한 분들)을 설득하는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더 원만한 결론에 도달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교회 문제가 발생하면 지도자들은 좀 더 냉정해야한다. 갈피를 잡지 못하면 감정이 앞서게 되고, 문제 핵심에서 떠난 해결 방안을 생각하게 된다. 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그래서 주님 앞에 간구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순종하는 심령으로 기다려야한다.

 

 문제 해결에 애정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 못했을 때 예를 들어 내 아들이 잘못했을 때 나는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최 목사의 처신은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최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전 교인의 과제이고 특히 지도자가 어떤 지혜로 문제를 풀어 가느냐가 중요하다.

 

 최 목사의 중혼 문제는 최 목사만의 문제이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아픔이요 비극이라 생각된다. 수십 년을 혼자 살아가면서 목회생활을 한 많은 교육자들의 아름다운 생활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그들이 지키려는 절개(節槪)는 단순한 율법주의자의 그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들이 그의 삶속에서 느끼는 고통을 누가 이해해 주었겠는가? 늦게나마 재혼을 했을 때 그들이 당하는 수모는 또 어떠했겠는가?

 

 최 목사의 중혼문제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온 세대에게는 깊은 상처였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누구의 공과(功過)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교인과 교회 지도자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최 목사의 중혼 문제는 우리 교회에 오래도록 멍에를 지웠다. 2교회당 건축은 처음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교인들이 입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자연 교회부흥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우리 교회 역사에서 50년대는 이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본다.

 

 교회는 문제가 없는 곳이 아니다. 그 문제가운데 특히 칠계(七誡)에 관한 문제는 심각한 타격을 교회에 입힌다. 그것은 교인들이 용납이 잘 아니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중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어느 교회나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시련이 반드시 교회의 정체(停滯)나 쇠퇴(衰退)를 가져온다고는 보지 않는다. 어떤 시련이라도 그 해결방법을 성경의 원리에서 찾으면 시련이 교회부흥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시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축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이든 단순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전체적 맥락(脈絡)에서 이해하고 해결방안 역시 전체적 맥락에서 찾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도출 할 수 있다. 교회가 평안하고 은혜로울 때 시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그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믿음에 굳건히 서서 진리의 수호자가 될 수 있는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다음 교회의 유익을 생각하고, 위로부터의 지혜를 얻어서 해결하고자 하는가? 에 달려 있는 것이다.

 

  

   6. 명설교가 최명순 목사

  


  최명순 목사는 30대이었다. 이북 평양이 고향이신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1. 4 후퇴 시 피난오신 분이다. 피난생활은 무척 힘들고 어려웠다. 목사라도 밤톨만한 사탕을 입에 물고 다니는 것이 흉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흉이 될 수 없었다. 모두 굶주리는 시기이니 어찌하겠는가? 양복이라야 미국 교인들이 모아 보내준 구제품으로 만족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시기였다.

 

 나는 최 목사의 설교에 매료되곤 하였다. 강약의 조정이며 웅변조의 설교는 젊은이에게 무척 감명 깊었다. 그 당시 웅변은 젊은 층에게 선호되는 것이었다. 요사이 웅변은 설명하는 형식이지만 50년대의 웅변은 책상을 한번 내려치기도하고, 고성을 지르기도하여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형식이었다. 최 목사의 설교는 항상 힘이 넘쳤다. 그리고 강조 할 때는 열변을 토하곤 하였다. 최 목사의 설교 때문에 많은 교인이 모인 것 같다. 그래서 52, 53년은 교인 수가 날로 증가하는 추세이었다. 그리고 교회에 활력이 넘쳤다고 생각된다.

 

 최명순 목사는 사회생활에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다. 당시 교인은 최 목사의 권유로 우리 교회에 참석하신 분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사회성이 탁월하신 분이었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재능이 있으셨던 것 같다나는 최 목사의 권유로 야간 성경학교인 대구성서학원에 등록하였다. 이 학원은 3년 과정이고 13학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최명순 목사를 위시하여 총신대학 교수(피난 시 총신대학이 대구에 있었음), 윤철주 목사, 이광우 목사, 계일승 박사, 김계웅 목사, 차태화 목사 등이 강의하는 쟁쟁한 성경연구학원이었다.

 

 한국전쟁으로 교인들은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과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는 간절함 그런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일찍이 모여서 기도를 한다. 그 분위기는 용광로와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 강사는 누구든지 성령이 인도 하는 대로 기도하세요.” 라고 하면 벌 때처럼 기도가 시작되고 결국은 목소리 큰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도하게 된다. 나는 이때 뜨거움 그리고 간절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은 단순한 수난이 아니었다. 이런 수난은 우리 민족에게 영적 각성을 촉구 하였고, 전국으로 복음이 급속히 확산 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교회 교인 십여 명이 이 학원의 학생이었다. 이금희 전도사도 이 때 같이 성경을 공부한 학생이었다. 당시는 탈 것이 없어서 우리 일행은 걸어서 다녔다. 나는 2년하고 1학기를 다니고 낮의 학교와 병행하는 것이 어려워 그만 두었다. 그러나 나의 신앙생활에 있어 이 때 체험은 큰 자산이 되었다.

 

 최명순 목사는 이 학원에서도 명강사이셨다. 최 목사는 설교나 강의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신 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의 목회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시든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라 생각된다. 삼손이 머리를 깎였을 때 위로부터의 힘이 사라진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 교회 장로들은 교인 앞에서 항상 최 목사의 설교를 칭찬하고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이런 좋은 관계가 중혼 문제로 악화되고 서로 건널 수 없는 간격을 만들게 되었다. 설교자에게 도덕성은 무척 중요한 가치이다. 좋은 설교는 그 것이 도덕성위에서 이루어질 때 가치를 발하게 된다. 물론 설교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령이 충만해야하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적 준거에 위배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아인스타인(Einstein, A)우리 행위에 도덕성이 있을 때에만 삶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갖게 한다.”고 하였다. 도덕성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존엄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다 해도 그것이 도덕적으로 바르지 아니하면 추()에 불과하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뜨겁게 사역해야 하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일들은 도덕성 위에서 행하도록 하신다. 교회는 생명운동을 전개하는 곳이지만 또한 도덕적 가치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생명의 부흥은 그 자체가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7. 2교회당 건축

  


  우리 교회는 1954110일 첫 장로 장립식을 갖고 정 순, 박영훈, 김중산 장로를 세웠다. 이로서 조직교회(組織敎會)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 목사 중혼 문제로 최 목사는 준당회와 제6회 당회(1954711)까지만 당회장으로 역할을 하게 되고 제7회 당회에서는 정 순 장로가 소집장으로 회합하여 최 목사를 권고사직하기로 결의 하게 된다.

 


                                                

              1954년 1월 첫 장로장립식(정 순, 박영훈, 김중산 장로 장립) 



                                                                                          

                          1957년 2월 박경남 목사 위임식(황약슬 장로 취임, 

                          우리교회 첫 집사로 장립한 윤병련, 이춘하, 권영식)


 그해 8월 충청북도 충주교회 시무하시는 김길순(金吉純) 목사를 청빙하기로 하였고 김 목사는 8월 말경 우리 교회에 부임하셨다. 교회당 건축은 이미 최명순 목사 재임 시 계획 했던 일이고 이미 상당히 추진되어 온 일 이기에 교회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추진 할 수밖에 없었다.

 

 제1교회당을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제2교회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195518일 대구시 북구 침산동 266-1번지의 답(; ) 531평을 1,593,000(현 화패로는 1,000분의 1, 1,593)에 매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131일 등기 이전서류를 받기로 하였다.

 

 이 땅을 매입할 당시는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대구 시민운동장, 이 마트, 침산로터리를 연결하는 길)가 있었고 교회 부지는 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현재의 침산로터리는 계획되어 있어서 교회 부지가 로터리에 접하게 되며 로터리에 133(침산동 266-9번지)이 편입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당 위치와 제2교회당 위치는 그림 1과 같다.

 


             1, 2교회당 부지와 주변 지적도


사진 설명:  1교회당 부지(침산동 222-4)   2교회당 부지(침산동 266-1)   1교회당 부지 중 도로편입부분(침산동 222-5)

2교회당 부지 중 침산로터리 편입 부분(침산동 266-9)   현 침산소방서(침산동 266-7)    현 침산로터리

 

  

  당시 당회에서는 19551월 교회건축 헌금을 300만환을 작정하기로 하고 당회에서 150만환 작정하고 제직회에서 150만환을 작정하여 헌금하기로 하였으나 교회 갈등의 후유증이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헌금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쉽지 아니하였다. 약화되어있는 교세에 비해 무리한 계획이었다.

 

 당초 붉은 벽돌의 아름다운 교회당을 계획했으나 도무지 승산이 없는 계획이었다. 김중산 장로는 고향이 이북이시었고 최명순 목사와 비슷한 사정으로 가족을 이북에 두고 오신 상황이었다. 대구에 오래 머물러 계실 수 없었다. 1955년 가을 고향 가까운 춘천으로 이사하시게 되었다. 교회당 건축 중 김 장로께서 떠나시고 정 순 장로와 박영훈 장로 두 분이 수고하시게 되었다.

 

 처음 계획대로 지을 수가 없어서 흙벽돌로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변경하였다. 미군들이 쓰던 흙벽돌 제조기를 대구시를 통해서 구입하고 교회 부지로 정한 땅이 진흙이어서 그 흙을 파서 벽돌을 제작하게 되었다. 건축에 필요한 벽돌의 수가 얼마인지 계산도 없이 일만여 장을 만들었고 그 중 반 정도는 건축에 사용되었으나 나머지는 없어졌다. 계획이 없이 무조건 벽돌을 제작한 것이다.

 

 제1교회당을 떠나 제2교회당 부지로 이사를 했는데 교회당이 준비 된 상태에서 이사한 것이 아니라 천막을 치고 이사를 했다. 기초공사를 하고 그 위에 흙벽돌을 쌓아갔다. 여름은 닥아 오고 우기로 접어들면서 흙벽돌 공사는 매우 힘들어졌다. 흙벽돌이 물에 약해서 비를 맞으면 부서져 버리는 것이다. 우선 쌓아 올린 것은 보호를 해야 하니 비만 오면 무엇이고 덮어놓아야했다. 요사이처럼 비닐이나 천막 같은 것이 흔하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물자가 절대로 부족한 시기이니 덮을 것이 마땅치 않았다. 비만 오면 야단이 엇다. 교인이라야 몇 되지 아니한 대다 비가 온다고 교회에 나오는 이가 몇이나 되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김길순 목사는 천막에서 생활하시면서 피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김 목사는 자녀가 많으셨다. 그 당시 먹는 것이 큰 문제인데 교회는 양식공급도 제대로 해드리지 못하였다. 우리 교회 역대 담임목사 중 가장 고생하신 분이라 나는 생각한다. 김 목사는 비만 오면 고역을 치르셨다. 다행히 교인이라도 나와 있으면 좀 쉬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족과 더불어 쌓아가는 벽돌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비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교회는 교회 부지 중 일부를 매각하기로 하였다. 로터리에 접한 땅 70(침산동 266-6266-7)19557월에 매각하였다. 평당 3,000환에 매입한 땅을 4,000환에 매매하였다. 1,000환이 남은 샘이다. 그러나 로터리에 접한 요지 70평을 때어 주고 교회 진입 통로만 남았으니 요사이 식견으로 본다면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이다. 이 땅을 매매하여도 교회당 건축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70평은 침산파출소 쪽으로 현재의 침산소방서에 35(침산동 266-7), 그 북쪽으로 소규모 공장 35(침산동 266-6)으로 분할되어 건축되었다가 후에 공장으로 쓰던 땅은 교회에서 다시 구입하였다.

 

 여름 우기에 급하게 지붕을 올리게 되었다. 함석지붕을 올렸는데 그러고는 벽을 처리하는 것, 천정을 하는 것, 마루를 놓는 것, 어느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김길순 목사는 어려운 교회건축을 마치지 못하시고 19559월에 사임하시고 충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당회는 육군정보학교 문관 군목(文官 軍牧)으로 계신 이의호(李義鎬)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당시 군에서 문관 군목을 현역으로 전환하는 계획으로 갈등하시다가 이듬해 3월 군으로 복귀하시게 되어 5개월 만에 우리 교회를 떠나시게 된다. 이 시기는 교회당 건축에 별로 진전이 없었다. 또 계절도 늦가을과 겨울을 지나는 시기여서 가마니 교회로 만족해야만 했다.

 

 교회당 창은 문을 달지 못하고 문종이를 발라 바람을 피하였고 교회당 입구에 원목으로 탑을 만들어 종을 달고 예배시간을 알리게 되었다.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 가마니 교회 시기인 1955년 여름 방병덕 목사 사경회가 있었다. 교인들은 울부짖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교회의 교회당 완공이 절실한 기도의 제목이었다. 이 사경회 기간에 강사 목사 외에 두 분의 목사가 오셔서 철야기도를 인도하시고 같이 기도 하게 되었다. 어떤 이유에서 두 분의 목사가 오셨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교인과 은혜를 같이 나누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는 간절하였다. 강사 목사는 교인들을 질타하시고 격려 하였지만 교인들은 그에 부응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우리와 같이 기도회에 참석했던 두 분의 목사 가운데 한 분이 의성교회를 시무하고 계신 박경남(朴京南) 목사이셨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당회는 19563월 박 목사를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게 되었다.

 

 박경남 목사는 36세의 왕성한 나이셨고 아들 3(박헌명, 헌욱, 헌승)을 데리고 이사 오셨다. 우리 교회 오셔서 딸(박헌영)을 얻으셨다. 박 목사는 제2교회당 건축에 있어 마무리를 담당 하셨다. 그는 목수, 미장이, 정원사로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천정을 하는 일, 마루를 놓는 일, 벽을 치고 바르는 일 등 수고가 많았다. 1959년 가을 제2교회당 헌당식을 드리게 되었다. 이로서 제2교회당 건축은 끝을 내게 되었다. 63평 교회당 건축이 4년이나 걸려 지었으니 우리 교회 능력이 얼마나 약화되어 있었는가를 가늠하게 한다.

 

 제2교회당 건축은 무리한 계획이었다. 다른 교회 건축에 자극되어 시작했다는 점도 무리였고, 최 목사 건으로 교회가 깊은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건축을 추진 한 것도 문제였다. 우리 교회는 경재 능력이 넉넉한 분이 별로 없었다, 정 순 장로가 가장 낳으셨던 편이나 이 시기 사업이 잘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정 순 장로는 전력을 다해 교회를 섬긴 분인데 그는 수입이 없을 때에도 생활비의 십일조를 하신 분이다. 초기 교회의 모든 짐을 거의 혼자서 져야하는 입장이셨으니 무척 힘드셨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50년대 교회는 그에게 의존한 바가 크다.

 

                               

 서민층으로 구성된 우리 교회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시간을 가지고 조금씩 준비하는 것이다. 2교회당 자리에 교회당을 다시 건축해야 한다는 계획은 일찍부터 해왔다. 흙벽돌 교회에 대한 불안과 장기간 시간을 가지고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흙벽돌 교회당의 장점도 많았다. 흙벽돌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요사이 상식이 되었지만 웰빙(wellbeing) 건물이라는 점과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흙벽돌의 단점은 물에 약하다는 점인데 만일 물만 차단할 수 있다면 날로 단단해 진다는 점이다. 흙벽돌 건물이 붕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한 것은 기우였다. 그래서 제2교회당 건축 시 외벽을 물 차단 용 기름종이를 넣고 그 위에 시멘트를 발랐다.

 

 제2교회당이 완공되기까지 교회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1956년 가을 박영훈 장로께서 서울 수복에 따라 고향인 서울로 돌아가시고 정 순 장로 혼자 남게 되었다. 19572월에 박경남 목사 위임식, 황약슬(黃約瑟) 장로 취임과 윤병련(尹炳煉), 이춘하(李春夏), 권영식(權寧植) 집사의 장립식을 갖고 교회 조직을 튼튼히 하였으나 황 장로는 1959년 봄 가정 사정으로 교회를 떠나 춘천으로 가시게 되었고, 이춘하 집사와 권영식 집사도 장립 후 교회를 떠나게 된다.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됨으로 피난 왔던 분들은 대구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전쟁 휴전(休戰) 후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갈 곳으로 가게 되어 이동이 많아졌다.

 

 

    8. 초대 장로와 장로의 단명  

  


  세분의 장로 장립식이 1954110일 있었다. 19519월경 첫 예배를 드린 후 25개월 만에 조직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1교회당에서 장립식이 있었고 교회는 떡국으로 잔치를 벌였다. 세 분의 장로는 새로운 각오와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신 분 들이였다. 그러나 세분 모두 피난오신 분들이고 토박이 교인 가운데 장로로 장립하신 분은 없었다.

 

  이런 이유가 우리 교회 장로가 단명한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김중산 장로는 2년을 채우지 못하시고 교회를 떠나셨고, 박영훈 장로는 장로 시무 210개월 만에 서울로 귀향 하시게 된다. 정 순 장로만이 19783월 미국으로 이민 가시기까지 242개월 시무하시었으니 가장 장수하신 장로이시다.

 

 한국전쟁으로 정착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장로 장립을 하였으니 피난 교회가 겪어야하는 어려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19572월 장로 취임하신 황약슬 장로께서도 19593월 교회를 떠나셨으니 역시 2년여의 시무를 하신 셈이다. 19644월에 장로 장립하신 이재흥 장로는 그해 서울로 전근이 되시어 거의 장로 시무를 못하신 편이다. 1960년대까지 우리 교회 장로는 무척 단명이라 생각된다.

 

 장로로 피택(被擇)되신 분들은 당시 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신 분들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생활의 근거지로 대구에 안착하신 분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생활의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을 때 자연스레 교회를 떠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보면 교회는 지역에 기반을 두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산격과 침산의 토박이들이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 했다면 장로의 이동은 아주 적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우리 교회 상황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첫째, 정 순(鄭 舜 일명 鄭俊民; 1915-1985)

 

 

  정 순 장로는 초대 장로 중 가장 장기간 시무하시고 우리 교회에서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초창기 그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에 대한 애정과 헌신으로 일관하신 분이다. 지나칠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시고 열심이셨다. 그의 생애는 교회를 위하는 것에 실존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정 순 장로는 평양이 고향이시다. 아마 전형적 평양 기질을 소유하신 분이라 생각된다. 분명하고, 결단력 있고, 추진력이 있으신 분이다. 교회가 어려울 때 거의 혼자서 짐을 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 순 장로는 전통적 보수 신앙인이시다. 칼빈주의에 심취해 계셨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 다는 바울이나 칼빈의 교의(敎義)에 충실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율법적 행위에 대해서도 엄격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시인 할 줄 아는 분이다.

  

  순 장로는 자기 집안 일 보다 교회 일에 더 많은 것을 바치신 분이다. 정 장로 내외분이 교회에 바친 열정은 용광로와 같은 것이었다. 그 불이 너무 뜨거워서 주변에 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곤 하였다. 나는 정 장로 내외분을 볼 때마다 감동하곤 하였다.

  

 김길순 목사 시무 시절 김 목사로부터 정 장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정 장로요? 나 목회 못하겠소이다.” 이유는 목사 사택에 양식이 다 떨어진지 오래라는 것 이었다. 정 장로는 그길로 쌀 한가마를 사택에 보냈다고 한다. 이런 유의 일들은 빈번했다. 그 당시 없으면 정 장로를 바라보고 해결하기를 바랐으니 말이다. 정 장로의 사업이 왕성했으면 교회 문제도 잘 풀려 나아갔을 것이나 50년대 말 사업이 생각만큼 잘 된 것 같지는 아니했다. 정 장로가 어렵다는 것은 교회가 어렵다는 말과 동의어 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총회신학교가 대구로 피난을 왔고 따라서 우리 교회에 총신학생이 많이 출석했다. 이들은 교회부설 구락부(俱樂部; 초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초 중학교육을 시키는 비정규학교) 교사로 수고하였다. 당시 우리 사회는 너무 어려워서 이분들에게 제대로 사례를 하지 못하였다. 신학생은 항상 가난했고 허기진 배를 달래가며 학업을 계속하던 때이다. 이분들이 돈을 빌려 달라 한다면 갚을 능력이 있을 리 없다. 정 장로는 이분들에게 넉넉히 용돈을 주어 어려움을 덜어 주곤 하였다.

  정 순 장로는 청년들과도 잘 어울리는 신세대이셨다. 당시 우리 교회는 직장여성이 많았다. 교회 주변에 대한방직, 제일모직, 내외방직, 삼호방직을 위시한 여공을 필요로 하는 공장이 많아 이들이 우리 교회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객지생활이고 교회는 그분들의 안식처였다. 5, 60년대 직장구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이들 여자 청년 가운데 정 장로를 아버지와 같이 따르는 청년들도 많았다. 그들과도 잘 어울리는 젊음이 그에게 있었다.

 

 제3교회당 부지를 결정 할 때 현 교회 위치를 강조한 것도 정 순 장로이다. 그의 의견은 중앙로(中央路)로 진출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2교회당 부지에서 흙벽돌 건물을 헐고 재건축 하려는 계획이었으나 그 부지가 준공업단지(準工業團地)로 되어있어서 건축허가를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제3의 부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때 7호 광장 근처에 넓이가 3,000평인 과수원이 나와서 그것을 매입하고자 젊은 집사와 장로들이 방문하였다. 평당 3,000원 이니 900만원이면 살 수 있었다. 현 제3교회당 부지는 168평을 처음 매입했는데 평당 65,000원을 주었다. 대지대금으로 10,920,000원을 지불했으니 교회 지도부가 너무 어리석지 않았는가? 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현재 7호 광장과 우리 교회 부지를 비교하면 그렇게 생각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로 침산을 지킬 것을 명하신 것이다. 현 위치에 머무르게 된 것은 정 순 장로의 주장이었다. 하나님께서 정 순 장로로 하여금 현 교회 위치를 지키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우리 교회는 침산에서 할 일이 있는 교회이다. 세상의 상식으로 보면 넓은 부지 호화로운 건물이 좋겠지만 우리 교회는 넓고 크지는 않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사명을 주신 것이다.

 

 19808월 제3교회당 헌당식이 있었다. 정 순 장로 내외분이 미국에서 오셔서 참석하시었다. 교회 열쇄를 당회장에게 증정하는 순서를 맡으시었다. 부지 선정과 교회 건축에 그분이 쏟은 정열 등을 고려 할 때 내 마음속에 감사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정 순 장로에게 어떤 고마움의 표시도 하지 못하였다. 우리 교회가 크게 표창하는 일도 없었고 그분의 교회에 기여에 대해서도 감사한다는 표시를 하지 못하였다. 지금도 송구한 마음이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정 장로의 수고와 사랑을 기억하시고 하늘나라에서 영광이 빛날 것으로 믿는다. 그는 의인이라 하나님께서 그 후손에 복에 복을 더 하셨다.

 

  맏아들 정근영 장로는 내외가 의사로 뉴욕에서 성공적으로 살아왔으며, 둘째 아들 정수영 집사 내외는 기업인으로 뉴욕에서 성공한 사례이다. 셋째 아들 정호영은 뉴욕의 모 기업의 간부직원으로 아버지의 믿음을 잘 이어가고 있다. 딸 정 선, 정선영, 정순영도 뉴욕에 거주 하면서 기업인으로 또는 목회자 사모로 잘들 살고 있다. 정 장로 부인이신 오신복 권사는 지금도 기도의 어머니로 강건히 지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 찬송을 드린다.

 


  둘째, 박영훈(朴英勳; 1924-? ) 장로

 


  박영훈 장로는 30세에 장로 장립을 하신 청년 장로이셨다. 박영훈 장로 역시 서울분인데 1951년 피난 오셔서 침산 변전소 뒤 신천 뚝 아래 주택에 거주하시면서 동생들과 자녀를 많이 거느리시고 지내셨다.

 

 정 순 장로 댁에서 생산되는 와이셔츠를 판매하시는 중간 도매상이라 생각되는 일을 하셨다. 박 장로는 본래 서울에서는 양복점을 경영하셨고 양복 제조의 달인이셨다. 그러나 피난 나와서 그런 일을 할 수 없으셨던 모양이다.

박 장로는 심성이 온유하신 분으로 매우 부지런하시고 믿음생활에 열정을 가지신 분이다. 최명순 목사 중혼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단호한 입장을 취하시고 정 순 장로와 더불어 잘 대처해 나아가셨다.

 

 우리 교회 초창기에 제직회와 당회 서기로 회록정리를 잘하시어 우리 교회 초기 역사를 정리하는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우리 교회만큼 제직회와 당회 회록이 잘 정리된 교회도 드물다고 생각 된다. 우리 교회가 교회50년사를 잘 정리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회록이 잘 기록되고 보존되었기 때문에 아주 쉬웠다고 사려 된다.

 

 유년부 초대부장 김준도 집사 뒤를 이어 유년부장을 맡으셔서 주일학교 운영도 성실히 하신분이다. 여름성경학교를 운영하시면서 교사들에게 식사 대접을 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중국집에서 만든 호떡을 점심식사로 대신 공급한 것 등은 기억에 새롭다. 50년대 초 교사들에게 이런 대접이라도 오히려 과한 것이었다고 사려 된다. 전쟁 중이고 모두가 갈급한 때이니 불평 같은 것은 오히려 사치였을 것이다.

 

 제2교회당을 건축할 때는 수시로 교회에 오셔서 관리하고 김길순 목사와 협의 하시고 교회당 건축을 독려하시었다. 피난생활에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한 상황이니 무엇 하나 넉넉한 것이 없었다. 경제의 뒷받침이 없는 상황에 교회를 건축한 다는 것은 지도층에게는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박영훈 장로가 피난오신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교회 원로장로로 교회를 지키고 계셨을 것이다.

 

 현재 초대 장로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하신 분이다. 우리 교회 40주년 기념행사, 50주년 기념행사시 참석하시어 세미나와 예배에 동참하시었고, 200711월에는 우리 교회에 오시어 우리 교회 초기 역사 사실을 증언해 주시어 교회초기 역사 정립에 큰 도움을 주시었다.

 


  셋째, 김중산(金仲山; 1909-1977) 장로

 


  김중산 장로는 원산에서 피난 오셔서 조그마한 공장을 경영하셨다. 한국전쟁 당시 소위 1. 4후퇴 때, 2, 3일 원산을 떠나있으면 곧 귀향 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 한 분(김경희 선생)만 대동하고 남하한 것이 가족과 평생 이별하게 된 것이다. 그 심중에 항상 가족에게로 돌아 가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김 장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시고 춘천에서 생을 마감하셨으니 분단국가의 소시민이 겪어야하는 아픔이 아니겠는가.

 

 19541월 장로 장립하시고 1955년 가을 속초로 떠나셨으니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장로로 시무하신 샘이다. 그의 심중에 고향 가까이 가야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을 것이다. 김중산 장로는 강직하신 분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대구를 떠나야하는 이유 중 또 하나는 하시던 사업이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초대 장로 세 분은 교회 운영에 있어서 협력이 잘 이루어지고 항상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었다. 그러나 생활이 안정되고 생활지반이 정착된 상태가 아니었다. 세 분 모두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분들이었다.

우리 교회를 이해하는데 교회 설립 당시 구성원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집사와 장로 대부분이 언제나 떠날 수 있는 분들이니 안정이 어려웠다. 거기에 더해서 최명순 목사 중혼 문제가 있어서 성광중학교와 대립하게 되니 더 어려웠다. 이시기 김중산 장로는 당회원의 일원으로 잘 대처하신 분이다. 항상 차분하시고 무척 이지적이신 분이다. 그러나 사업적 역량은 크지 않으셨던 것 같다.

 

  초기 우리 교회를 잘 섬기신 세 분 장로의 이루어 놓은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어려웠던 시절 교회의 초석을 놓으신 노고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이 분들의 노고가 아니었으면 오늘 우리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전쟁의 혼란기 수고하신 세 분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정오의 해같이 빛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