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 장로의 교회생활 회고 III : 따뜻한 영혼들과의 대화(3)
따뜻한 영혼들과의 대화(3) 차 례
20. 교회정체성과 역사인식
21. 크로스 웨이 훈련과 농어촌교회 지원
22. 교회설립 사십 주년: 초기 지도자 초청과 교회사편찬
23. 교회 설립 50주년과 교회당 리모델
24. 교회 주차장과 컨벤션 홀의 구상
25. 침산유치원에서 침산어린이 집까지
26. 나와 동역한 신앙의 동지들
27. 교회와 사회복지 사역
28. 왜? 역사가 중요한가?
29. “나눔과 섬김의 교회” 교회 지표를 향하여
에필로그
<일 러 두 기>
1. 이 책의 내용은 반드시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적 흐름은 연대순으로 이루어 졌다.
2. 인명 뒤에 ( )내에는 (출생연도- 소천연도)가 기록 되었으나 없는 경우는 조사가 불가능 했던 경우이다.
소천연 도가 없는 경우는 생존해 계신 분이다.
3. 우리교회 명칭은 4번 다르게 사용 되었다.
첫째, 북부교회(1951년 9월-1952년 3월)
둘째, 천우교회(1952년 4월-1958년 3월)
셋째, 천일교회(1958년 3월-1965년 3월)
넷째, 침산제일교회(1965년 3월- 현재)
4. 우리교회 교회당은 대구광역시 북구에 세 번 건축 되었다.
제1교회당 1952년-1955년 침산동 222-4
제2교회당 1955년-1979년 침산동 266-1
제3교회당 1979년-현 재 침산동 22-100
5. 이 글에 나오는 연도는 2008년을 기점으로 한 것임
따뜻한 영혼들과의 대화(3)
20. 교회 정체성(正體性)과 역사인식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이나 기관은 혼란스럽고 결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개인이 어떤 이유로 과거를 망각했다고 하자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일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을 모르니 정체성이 있을 리 없다. 또 지금까지 자신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주변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된다면 이 사람은 극에 달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기망각에 빠진 사람은 다른 어떤 것을 잃은 사람보다 더욱 비참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배워야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미래 지향적 일을 할 수 없다. 교회는 역사성 위에 세워진 믿음 공동체이다. 구약의 역사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엡 5:23)와 그의 사도들이 사역한 터(엡 2:22)가 있고, 수천 년을 도도히 흘러온 믿음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믿음사역이 이루어져온 과정은 곧 우리의 역사이며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다. 우리는 “믿음”이 아니면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믿음 때문에 만나고, 공동체를 이루고, 사역을 한다. 교회의 역사는 믿음의 확산을 위한 사역이 이루어져온 과정이다.
우리 교회는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싸움이다. 삶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마귀의 역사가 있다. 우리가 이룬 역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에 관한 역사이다. 복음 전파는 생명을 전파하는 것이고 교회사역은 생명을 부활시키는 사역이기에 우리 선조가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갔는가를 아는 것은 곧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가? 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 교회가 믿음의 터 위에서 견고하게 집을 지어 왔는가? (엡 2: 20-22). 그렇지 않으면 인간적 계획 위에 교회를 세워 왔는가? (마 7: 26). 나는 우리 교회가 이루어온 모든 사역을 이 두 가지 근거에서 평가하고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도정(道程)이 이 두 가지 근거에 모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 관해 우리 사역이 이루어 젓 다면 하나님 뜻에 합당한 토대를 쌓은 것이고 즉 반석위에 세운 집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모래위에 세운 집이기 때문에 우리를 돌이키고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어떠하던 교회 사역이 인위적으로 이루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과거의 사역이 어떤 것이라 해도 오늘의 우리를 아우르는 힘이 그 속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뜻대로 이룬 역사는 믿음의 사역이고 그렇지 아니한 것은 불신앙의 역사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와 믿음의 행위로 돌아오는 계기를 만드는 은혜가 있었다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어떠한 우리의 과거라도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오늘의 우리를 만든 자원이며 침산제일교회는 어떤 교회라고 말 할 수 있게 하는 자원이다. 우리는 과거를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과거 경험을 항상 반추해야 한다.
침산제일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른 점이 많다. 그 것은 다른 교회가 갖고 있는 경험과 우리의 경험이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를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 교회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 교회의 직분 자가 되고자하는 분이나 교역자로 부임하신 분은 우리 교회 역사를 학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교회에서 성공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첩경이고 성공적인 목회를 보장하게 될 것이다.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분만이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고 또한 미래로 나아갈 비전을 갖는다. 통계학에서는 추리통계가 있다. 즉 예언을 하는 통계이다. 예언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 자료가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에 대한 미래 예측은 과거 역사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지난 일들 중 잘 못한 것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잘못을 계기로 우리가 더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면 그것이 어찌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겠는가? 다윗이 선한 사람인가? 그가 저지른 잘못이 결코 적다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종이 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그 배후에 믿음이 역사하는가? 아니면 불신앙의 마귀의 역사인가? 를 평가해야한다. 교회의 나눔과 섬김에 대한 평가는 그 행위에 있지 아니하며 믿음에서 우러나온 성령의 인도하심 이어야한다.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펴 나아갔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계획에 머무른다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 할 것이다(고전 13: 1-3).
하루는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아와서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를 질문하였다(마19: 16-22; 막 10: 17-31; 눅 18: 18-30).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 하셨다. 그 청년이 어느 계명입니까? 예수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마 19: 18, 19) 청년은 자신이 있었다. 그런 계명이라면 나는 항상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는데 또 무엇이 부족 합니까?” 라고 반문하였다.
진실로 이 청년은 이들 계명을 지켰을까? 청년의 자신 만만한 대답에 대해 예수는 전연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다. 즉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19: 21). 이 청년은 부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 청년은 예수께서 제시하신 계명 중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계명을 결코 지킬 수 없었던 사람이다.
계명 지킴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계명은 인간을 사랑하는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하는 계명을 지키기가 쉽겠는가? 결코 쉽지 아니하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모 공경은 너무 즐겁고 쉬운 일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후자이다. 힘들고 어려운 계명이 아니라 쉽고 즐거운 삶의 계명이다.
만일 부자 청년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이웃에게 나누었다면 그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소유를 팔아 나누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는 그에게 더 요구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 3). 어떤 행위라도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율법주의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갈 5: 6). 사랑은 믿음에서 나오고 믿음의 실체이다. 우리 교회가 “나눔과 섬김”을 교회 지표(指標)로 한다고 하여 우리 교회가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가 진정 믿음에서 나온 사랑의 결실인가? 아니면 사람의 성취욕이나 전시 효과를 노리는 인간의 바벨탑은 아닌지, 우리는 우리 교회의 지난날의 일들을 이런 척도에서 평가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부자 청년과 어떻게 차별화 되는가? 우리가 부자 청년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비판해 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가 아주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지역사회 섬김, 농촌 교회와 협력하는 일, 해외 복음의 오지에 선교사역을 하는 일 그런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사역이 고린도전서 13장 3절의 말씀과 갈라디아서 5장 6절의 말씀에 대해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주인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 대답 할 수 있어야한다. 그것은 주인에 대한 믿음이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21. 크로스 웨이 훈련과 농어촌교회 지원
정규채(鄭圭采; 1986년 11월-1995년 4월 시무) 목사는 석 윤 목사 후임으로 우리 교회 부임하시어 8년 6개월여를 시무하셨다. 정 목사는 목사님의 자제로 정규 중고등학교 교육을 마치고 경상대학과 총회신학대학원에서 정규과정을 이수하여 목사가 되신 분이다.
정 목사는 대학 재학시절 대학생선교회(CCC) 활동을 열성적으로 하신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CCC는 대학에서 전개되는 기독교 학생활동 중 아주 뜨거운 운동이다. 캠퍼스에서 전개된 기독 활동이 각양각색이지만 CCC는 가장 성서적이고 뜨거운 성령운동으로 이해한다. 내가 대학 캠퍼스에서 경험한 바로는 지극히 건전한 학생운동이라고 판단된다. CCC활동을 하신 분들이 건전하고 열성적이다.
정규채 목사는 정직하고 성실하신 분으로 천성적으로 심성이 어진데다 교역자 가정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신 분이다. 나는 정 목사 선친과 많은 접촉은 없었으나 몇 차례의 만남에서 오랜 교역자 생활에서 배어나는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곤 하였다.
정 목사는 부임 후 의욕적인 활동을 많이 전개하였다. 처음 독립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흔히 절차와 합의의 중요성을 모르시는 경우가 많다. 정 목사께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장로로 부터 시정해 달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었다. 장로는 나이가 많고 목사는 젊으니 자연 장로의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정규채 목사는 정말 온유하신 분이다. 장로의 요구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수용하고, 개선해 나아가신 분이다. 나는 지금도 그러한 정 목사의 온유한 심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땅을 기업으로 얻으실 것이다.”
정 목사가 CCC출신인 관계로 교인훈련에 있어 사영리(四靈理) 교육에 치중하였고, 크로스 웨이(cross way) 3년 과정을 개설하여 교인들의 성경 지식을 향상 시키고 교회생활의 활력을 높이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시었다. 내가 침산제일교회 사십년사를 보니 제1회로 이 3년 과정을 모두 마친 분은 열여섯 분으로 이진도, 박동일, 남원섭, 김금홍, 김서운, 이강숙, 송은숙, 추정숙, 이계순, 노지현, 박덕근, 이규숙, 이성현, 전금자, 강희숙, 김복란 등의 아름다운 이름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정 목사 시무기간에 우리 교회는 농어촌 교회를 돕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를 보조하기로 하고 1987년 5교회를 시작으로 매년 늘려서 1996년에는 17교회로 확장해 나아갔다. 우리 교회가 해외 선교에 힘을 기우리는 시기는 2000년대 와서의 일이고 1980, 90년대는 국내 교회를 지원하는데 힘을 기우렸다.
농어촌교회를 지원하는 것은 자립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농어촌교회의 열약한 상황을 도시교회가 지원하여 농어촌에 말씀사역이 왕성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농어촌교회가 어려웠던 시절 우리 교회가 이들 교회를 지원한 것은 선교대상을 아주 잘 선택한 것이라 사려 된다. 그러나 다행히 요사이 농어촌 교회가 경재 면에서 상당히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이 있어서 더 열악한 교회를 찾아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교회가 농어촌 교회를 지원한 것은 잘한 일이며 도시 교회가 농어촌에서 산업 현장으로 나온 교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농어촌 교회의 어려움을 도시 교회가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정규채 목사 재임 시 시행한 농어촌 교회 지원을 확장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교전략이었다고 사려 된다. 앞으로 해외선교를 확장 하더라도 농어촌 교회 지원은 계속해서 시행해야한다.
정 목사는 해외선교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다. 당회에 해외 선교의 당위성을 제안 하시곤 하였다. 그러나 당회는 국내선교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직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 할까.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해외선교에 대한 강조를 하였다. 이런 정 목사의 꿈은 오늘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란과 중국 그리고 필리핀 등지에 까지 우리가 선교 대상을 확장하는 것은 이미 정 목사의 꿈이 자라난 것이라 생각한다.
담임목사가 활발히 활동하기 위해서는 당회의 전폭적 지지가 필요하다. 젊은 목사가 그만큼 능소능대(能小能大)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장로는 목사를 초빙하여 강단을 마꼈으면 항상 그 부족을 채워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담임목사로 왕성한 목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어야한다. 모든 장로가 그리 생각 할 수 있겠는가?
나를 목사편이라 말하는 분 도 있었다. 그렇다 나는 목사편이다. 나의 모든 신앙생활 여정 특히 장로로서의 여정은 목사 편 이었다. 나는 침산제일교회 담임목사를 지원하는 사람이다. 목사가 목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장로의 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목사가 잘못하면 간절한 심정으로 바로 잡아야한다. 주의 몸이신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무한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기저에 있어야한다. 칭찬이나 권면이나 그 무엇이라도 깨끗한 심정과 넘치는 사랑으로 할 때 모든 것이 통한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교회 안에서 누구의 편을 하겠는가? 고린도교회의 파당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교회 안에 공조직이외에 지연(地緣), 학연(學緣), 혈연(血緣)을 이유로 붕당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인간의 붕당은 교회를 소란하게 할 것이다. 교회 안에 이파 저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술수이다. 장로들 사이에 내가 몸을 사려서 목사에게 할 말을 다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와 담임목사의 담화는 모든 사람이 있는데서 하지 아니하였다. 가능하다면 둘이서 한다. 사람을 나타내고자 하면 여러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다. 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대화를 하는 것이지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충고는 상대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하고 우리 교회의 유익을 생각하면서 이루어 져야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항상 명심하고 지켜야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실수하고 뒤에는 후회하게 된다. 장로, 집사, 권사는 항상 말을 삼가해야한다. 말 할 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해야 한다. 말의 실수가 없다면 아주 성공적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하게 되어있다. 더욱이 흥분한 상태에서는 말을 하면 아니 된다.
정규채 목사께서 하루는 40일 간 금식기도를 하시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아마 내 추측으로는 목회를 한번 쇄신해 보고자 하는데서 연유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열정을 갖고 계셨다. 40일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수행한다는 것이 쉽게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금식기도가 시작되고 과정의 반은 지났다고 생각되는데 정 목사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나와 강희숙 사모가 D기도원을 방문하여 간곡히 설명하고 교회로 돌아오시도록 했다. 정 목사의 열정이라 할까? 자기 쇄신을 위한 매달림이라 할까? 그런 자기갱신을 위한 열정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금식기도를 하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을 허락하셨을 것이다.
무한이 노력하시고 도전하시는 정 목사의 자세는 오늘 그로 더 크고 역량 있는 목사로 발전하게 하셨을 것이다. 나는 2003년 우리 교회 50년사 간행 기념예배 설교를 통해서 정 목사의 역량을 볼 수 있었으며, 내가 부산 장전교회를 방문했을 때도 그의 지도력과 성공적인 목회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 드리고 앞으로 정 목사의 목회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한한 영광을 받으실 것을 믿는다.
22. 교회 설립 사십 주년: 초기 지도자 초청과 교회사 편찬
교회 설립 40주년은 1991년이다. 아직 우리 교회가 많은 일을 하기에는 힘이 부족한 때이었다. 교회 설립 40주년을 맞아서 교회 40년사를 편찬하는 일과 초기의 교역자와 직분자를 초청하여 담론도하고 기념예배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당회에서 논의하여 추진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 초기에 시무하신 목사 분들은 실로 고생을 많이 하신 분들이다. 교회 재정적 여유가 있었으면 잘 대접하고 교회가 감사의 표시도 했어야했는데 그리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었다.
2대 담임목사이신 김길순 목사 내외분, 3대 담임목사이신 이의호 목사 내외분, 캐나다 거주하시고 있는 4대 담임목사 박경남 목사 내외분, 5대 담임목사 정계종 목사 내외분을 초청하였고 초대 장로이신 박영훈 목사 내외분, 1950년대 우리 교회에서 신학생으로서 봉사하셨던 서울구파발교회 담임목사 임종헌 목사 내외분, 서울당산교회 담임목사이신 박정훈 목사 내외분을 초청하였다.
1991년 10월 2일 초청인사 간담회와 저녁시간에 교회 설립 40주년기념세미나를 가져 지난 과거 우리를 회상 할 수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세울 수 있었다.
초대 장로이신 박영훈 목사께서 “초창기 교회의 사역” 이란 주제로 발표하시어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았으며, 대구 성지교회 담임목사이시고 우리 교회 6대 담임목사이신 황해영 목사께서 “장년기 교회의 역할” 이란 주제로 발표하시어 우리 교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시었다.
그리고 10월 3일에는 교회 설립 40주년기념예배와 이광섭 집사취임, 박태규, 최창흥 집사 장립, 서복순, 박순자, 최갑연 권사취임식을 가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 교회 초기 담임목사와 사역자들이 모인 기념예배는 참으로 의미 있는 일 이었다. 특히 기념예배에서 박경남 목사께서 “법궤를 메자”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신 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다. 박경남 목사의 우리 교회 기여를 후세대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런 모임을 갖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벌써 많은 분이 소천 하시었고 이제 이 분들의 연치(年齒)가 높아서 1991년에 모인 것과 같은 일은 어려울 것이다. 교회 설립 40주년에 가진 행사 중 값진 일이라 나는 생각한다. 교회가 어려울 때 몸으로 어려움을 감내한 분들이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니 세월의 빠름을 느끼게 된다. 이 분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 오늘 우리 교회 자산이며, 교회 미래가 여기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기념예배를 드린 후 팔공산을 관광하고 많은 담론을 하였으며,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서로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동대구역 귀빈실에서 떠나기 전 환담을 하고 작별을 아쉬워하며 또 만나기를 기약했다. 그러나 그 후 김길순 목사, 박정훈 목사는 소천 하셨고,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생기고 외국으로 떠나신 분들도 있어서 그때 만나지 못했으면 그런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2008년 5월 오후 예배에 키가 헌칠하게 크고 미남 노신사가 예배실로 들어서는데 아무래도 정계종 목사 같았다. 내가 “정 목사님 아니요?” 하니 “김 장로 아니요?” 오랜만의 해후(邂逅)였다. 옛날 교우들이 반가이 만나고 오랜 안부를 물었다.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미국 라성에서 생활하신다는 말씀을 들었고 사모님은 수년 전 소천 하셨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교회 설립 40주년에 기념이 될 만한 작업은 사십년사 편찬이었다. 전 교우를 상대로 보관하고 있는 자료 즉 주보, 사진, 인쇄물, 증서, 헌금봉투 등 교회와 관련 있는 자료는 무엇이나 가져 오도록 하였다. 옛날 교인들을 통해서 많은 자료가 수집되었다. 내가 모은 자료가 상당히 있었고 교인들이 가져온 자료로 그 부족부분을 채웠다. 이 때 자료를 비교적 많이 주신 분들은 이정선 권사, 김금홍 권사, 장귀남 권사, 김순조 권사 등이고 김금홍 권사는 아주 잘 모아 놓으신 분에 속한다.
10여 년 전 제주도 교육청에서 나에게 특강 요청이 있었다. 제주학생박물관 개관식에서 특강을 해 달라는 것이다. 당시 제주교육청 교육감이신 강정은 선생은 제주도에 아파트가 늘어 가면서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주택에 가지고 있던 물건을 모두 버리게 되고 그 물건 가운데 제주도 교육에 관련된 역사자료도 다 버리게 된다는 논리이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버리면 쓰레기가 되고, 모아서 보관을 하면 후손에게 귀중한 문화재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모든 교사와 학생이 자기 집에 있는 옛날 교모, 교패, 교과서, 통신표, 상장, 교구, 베지 등 무엇이나 학교교육에 관련된 것을 모았다. 소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 2만점 이상을 모으게 되었고, 제주도학생박물관에는 한번에 2천점 정도를 전시 할 수 있게 전시장을 만들었다. 강 교육감의 배려로 제주도 교육문화유산이 보관될 수 있었다.
우리는 과거를 무척 소홀이 여기고 있다. 누구나 미래에 대한 생각은 많이 한다. 그러나 과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과거를 망각한 사람은 현재 자기정체성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미래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과거에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일찍이 당회에 역사부를 설치하고 교회사를 편찬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오늘 교회역사가 백년이 되는 교회가 간행하는 교회100년사를 보면 그 과정 역사(過程 歷史)가 빠져 있음을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교회 설립은 100년 전인데 지나온 자료는 없고, 100년사를 만들려니 과정(過程)을 설명 할 수 있는 원자료(原資料)는 이미 다 버려버린 상태이다. 세심히 모으지 않으면 당연한 귀결이다. 자료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면 누구나 저지르는 과오이다.
나는 역사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침산제일교회 사십년사를 만드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2000년에 우리 교회 50년사를 만들 때가 헐 씬 쉬었다. 오십년사 제작은 사십년사가 바탕이 되어서 쉬웠던 것이다. 사십년사는 내용의 구조, 진술방법, 책의 형식 모두가 새로이 만들어야 했다. 더욱 나는 무척 바쁜 생활을 할 때였다. 교육인적자원부의 교육과정 개발, 학교 교과서와 교사용지도서 개발 등으로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였다.
내 연구실의 조교가 컴퓨터로 워드를 하고, 박승길 집사가 원고의 글을 쓰고, 내 연구실 조교들이 편집을 하는 과정을 거쳤다. 자료를 찾아 맞추어 넣어야하고 부족한 자료를 찾아야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안병즙 장로가 부족한 부분의 표를 만들고 교정도 보는 일을 하였다. 편찬위원으로 이진도, 남원섭, 이춘희 집사도 같은 수고를 하였다.
역사편찬은 형식적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구성원의 교회 활동에 대한 가치부여, 느낌, 상황 설명 같은 것은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사십년사와 오십년사에서는 “회고”를 넣기로 하였다. 사십년사에는 박영훈 목사, 임종헌 목사, 이의호 목사, 황해영 목사, 한종희 목사, 김정권 장로, 안병즙 장로, 정규채 목사 등의 글이 실렸고 오십년사에는 정규채 목사, 송재영 목사, 장귀남 권사, 김금홍 권사, 홍영숙 집사, 이계순 권사, 임번식 집사 등이 글을 써서 우리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간증하였다.
나는 이런 신앙 간증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 교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심층적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매년 교역자와 교직자들이 회고를 써서 보관 하는 것이 미래 교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우리 교회의 자랑은 당회록과 제직회록이 제1회부터 오늘까지 온전히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온전히 보관하고 있는 교회가 많지 아니하다. 사십년사와 오십년사의 근간이 된 것은 이들 회의록이었다. 나는 몇 년 전 교회에 금고를 하나 구입했다. 이 금고는 돈을 넣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당회록과 제직회록을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구입한 것이다. 아주 큰 화재야 어찌 하겠는가. 그러나 작은 화재에서는 회록을 보존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2006년 당회록과 제직회록을 5부 영인(影印)하였다. 제1회록부터 2005년까지를 영인해서 분산 보관하기로 했다. 만약의 사태를 위한 조처이다. 그 중 1질(당회록 I과 II; 제직회록 I과 II)은 은행에 보관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역사자료는 앞으로도 잘 보관되어 후세대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침산제일교회 교인은 우리 교회가 역사자료를 잘 보존하고 관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한다. 우리 교회 만큼 역사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 교회도 드물다.
영인본의 소재(所在)는 역사부 기록으로 남기고 그 소재가 항상 파악되어야 한다. 1질(영인본 1)은 역사부에서 원본과 같이 보관하고, 1질(영인본 2)은 역사부장이 보관하고, 1질(영인본 3)은 김정권 장로가 보존하고, 1질(영인본 4)은 은행 security box에 보관하고, 1질(영인본 5)은 교회에 보관하며, 역사부장 인수인계시 이 영인본도 인수인계 하도록 하고, 김정권 장로 보관 본은 유고시 원로장로 가운데 역사부장을 역임한 분에게 인계 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런 인수인계는 역사부에서 관장하여 소실되지 아니하도록 해야 한다. 역사부는 이 영인 본의 소재를 매년 파악하고 기록으로 관리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서 2006년부터 우리 교회 역사부 주최로 “교회역사 편찬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게 되었고 매회 타 교회 10개 교회에서 20명, 우리 교회에서 20명이 참석하는 세미나를 열게 되었다. 2007년에 제2회 세미나를 가졌고 매년 개최하여 우리나라 교회역사편찬을 돕는 일을 함으로 우리 교계에 기여하고자한다.
사심년사와 오십년사를 간행한 후 이런 경비로 책을 만들 것이 아니라 나눔과 섬김에 쓰는 것이 더 낳지 아니하냐? 라는 이의를 제기한 분이 있었다. 나눔과 섬김은 매우 중요하다. 또 우리가 전력을 다 하여 해야 할 우리의 사명이다. 그러나 나눔과 섬김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디서 배웠는가? 성경에서 배운 것이다. 성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런 진리를 몰랐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다. 우리 교회에 관한 기록이 없으면 우리 교회가 앞으로 어떤 신앙노선을 가야하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를 알 수 없게 된다. 우리 성도가 더 빛나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 교회의 역사 정립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경재적 가치로는 가늠 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무형 문화유산이며 해아 릴 수 없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선진들의 신앙 족적은 후세대에 자산이며, 지혜이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나는 우리 교회 교역자, 교직자, 신입교우 들이 우리 교회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우리 교회 교회사를 읽어서 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의 적응력이 한층 높아 질 것이다.
23. 교회 설립 50주년과 교회당 리모델
우리 교회 설립 50주년을 맞이하는 2001년에 교회 건물을 리모델(remodel)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당회원 사이에 공유(共有)하였다. 우리 교회당은 처음 지을 때 그리 잘 지은 건물이 아니다. 우선 냉난방 시설이 엉망이었다. 이유는 건축당시 초현대식으로 한다고 중앙집중식으로 하여 천장에 난방 장치를 설치하여 더운 바람이 천장에서 아래로 내려오도록 했는데 이는 잘 못된 판단이었다. 천정에서 바닥까지의 거리가 멀어서 상당히 강력한 힘으로 더운 공기를 분출하지 않으면 아래로 내려오기 어려웠다.
더욱이 건축당시 건물의 천정 부위를 제대로 공사를 하지 못하였다. 불실한 천정 때문에 거의 열을 날려 버리는 형편이었다. 천정 안에 닥트(duct)를 설치하고 더운 열을 아래로 내려 보낸 다는 발상은 아예 맞지 아니하는 설계였다. 충분히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아니한 설계를 한 샘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중앙집중식 난방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교회 예배실에 온풍기를 설치하여 난방을 하였지만 더운 열이 위로 올라가는 관계로 천정의 불실은 난방 효과를 감소시켰다.
제3교회당을 건축 할 때 냉방 설계는 아예 하지 아니했다. 그런데 대구광역시의 도시교통 해소책의 일환으로 신천대로를 건설하게 되었다. 신천대로가 개설된다면 우리 교회는 소음으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천대로 개통 전년도에 설립 형 냉방기(air condition)를 설치하게 되었다. 대구시내에서 우리 교회가 아주 일찍이 냉방기를 설치한 것이다.
여름철 교회가 제일 시원한 곳이 되었다. 교인들이 일찍이 교회에 나오고 교회당이 피서지였다. 냉방은 차가운 공기가 아래로 내려가니 천정의 불실에서 오는 효과는 적었던 편이다. 예배실에 냉방기와 난방기가 설치되어 있으니 공간을 많이 차지하였다. 더욱이 여름철이나 겨울철에 그 소음은 상당한 것이어서 예배드릴 때 어떻게 소음을 줄일 것인가? 등이 과제였다. 그리고 예배실 2층은 여름에 무척 더울 수밖에 없었다. 겨울철에도 열이 위로 올라가 2층은 너무 더워서 고생을 하곤 하였다.
천정을 수리하여야 한다는 것은 당위였지만 천정만 고칠 수가 없었다. 연관된 것이 너무 많았다. 당회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특별헌금을 하기로 하였다. 헌금 목표를 8천만원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는 제안이 있었다. 천정만 고친다면 8천만 원 으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관련된 것도 손보아야 하기 때문에 2억 원을 하기로 결의하고 헌금 작정을 하였는데 계획대로 헌금이 되었고 공사가 끝날 때는 모두 2억 5천만 원의 헌금이 되어서 리모델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리모델 내용을 보면 천정을 현재와 같이 아름답게 고쳤고, 천정 매립형으로 개별난방기 11대를 설치하여 소음 없는 냉방으로 완벽하게 해결하였다, 벽면을 기존 벽 앞에 새로 설치하여 이중벽이 되도록 하였으며, 예배실 바닥을 조정하고 온수 보일러로 난방 시설을 설치하여 소음 없는 난방이 되도록 하였다. 이로서 냉난방은 해결되었고 현재는 쾌적한 예배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예배실 2층 상단에 멀티미디어실(침산제일교회 50년사. 196-197 참조)을 만들어 예배의 시각화와 음향을 효율화 하도록 하였다. 예배실내의 방음 장치를 효율적으로 설치하여 예배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실의 장비는 새로 교체하지 못하였다. 빠른 시일 내 교체 할 필요가 있다. 예배당 1층 로비도 모두 손을 보아 아름답게 꾸며서 예배당에 들어오는 분들이 마음에 평안함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교회 건물의 리모델 경비는 아주 저렴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IMF의 지원을 받는 위기에 직면해 있어서 경기가 불황인 상태였다. 그래서 거의 절반의 가격으로 교회당을 리모델을 할 수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예배실의 의자도 새로 들여 놓기로 하였다. 1층에 68개(5인용)를 1차로 구입하였고 2층은 다음해 바닥을 카펫으로 바꾸고 의자를 1층과 같은 것으로 38개를 구입하여 비치함으로 리모델과 비품 교체를 완료였다. 교회 리모델을 끝내는데 총 경비는 대략 3억 원 정도가 들었다고 보여 진다.
공사가 끝나고 새로 만들어진 예배실에서 연로한 여 성도들께서 이런 좋은 예배실에서 예배드리다 천당 가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는 말씀들을 하여 교인들의 마음에 흡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적으로 보아 아름다운 성전에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성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그런 곳에 매여 있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 분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사람의 심령에 거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성전에서 우리 주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기쁨위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 분이 흠향 하 실만한 향기로운 삶을 사는 헌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 리모델을 계획하고 추진하는데 회의적인 분도 있었고 걱정이 많은 분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교회 지도자는 상황에 비추어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추진 할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계산으로 가늠하지 아니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세상의 계산으로 하나님의 일을 가늠하게 된다. 교회가 무리를 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지만 우리 힘에 어느 정도 부치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해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룰 수 없다. 믿음의 분량대로 이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계산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하신다.
이번 공사는 규모 면에서 작다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일을 기성회에서 담당하도록 당회가 결의 하였다.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계획과 공사를 추진하였다.
24. 교회 주차장과 컨벤션 홀의 구상
우리 교회는 제3교회당을 계획 할 때 충분한 공간을 계획하지 아니했다. 공간적으로 너무 협소해서 언재나 공간 부족을 실감해야 했다. 처음 교회 부지를 구입 할 때 168평을 매입 했으니 비록 이곳이 상업지구여서 부지의 90%를 건축을 할 수 있다 하여도 바닥 면적 110평을 넘기가 어려웠다.
본당 공사가 끝나고 교회당 남쪽의 2필지 169평을 구입해서 사회 교육관을 건축하여도 본당 419평과 사회교육관 683평을 합해 1,102평에 불과했다. 이 중 주차공간으로 사용 할 수 있는 것은 150여 평에 불과했다. 오늘과 같이 차량이 급증하는 마당에 우리 교회 주차공간은 절대로 부족한 현상이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주차 문제는 더욱 심각해 졌다. 그리고 현재는 어려우나 지날 수 있다하여도 날로 늘어가는 차량 문제를 교회는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청소년을 위한 공간과 회의실 등을 확보 하면서 주차 공간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층 350평으로 하고 1, 2층은 컨벤션 으로 하며 3층 이상은 주차장으로 계획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주차장 건축은 정부에서도 무척 환영하는 바이고 또 지역사회 기여도 할 수 있다고 생각 했기에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라고 보았다.
컨벤션은 청소년 체육관, 대 소 회의실, 사회교육실, 교회교육 시설 등을 포함하고 주차장은 1개 층에 60대 수용 규모로 5층이면 300대 주차가 가능 하다고 보았다. 주차 수요가 더 늘면 위로 더 증축하도록 계획하면 필요에 따라서 공간 확보가 가능 하다.
그래서 나는 2001년 교회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로 하였다. 교회 남쪽 그리고 기독교방송국 동쪽의 옛날 한옥 마을(북구 침산동 18-19, 20, 22-62, 65, 68, 70, 71, 74, 75, 80, 82, 83, 84 등 13필지와 부속 도로를 합하여 610평)이 가장 적지라고 생각했다. 만일 한옥 13채를 산다면 장방형의 대지를 확보 할 수 있고 주차장 구조 역시 가장 효율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당회에서 이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장립집사에게도 설명을 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교회에 저축되어 있는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그 진척은 지지부진(遲遲不進) 이었다.
박태규 장로 주택과 그 남쪽 주택(22-74, 75) 합해서 86평, 2채를 매입하고 진전이 별로 없던 때 풍문에 들려오기를 이곳이 재개발 지역으로 아파트 단지가 계획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2002년 말 경인데 2003년 봄부터 토지 매입에 들어가서 우리 교회 소유 대지도 팔라는 것이다. 무척 난감(難堪)한 상황이었다.
아파트 개발회사에서 직원이 내 사무실로도 여러 차례 찾아와서 팔라는 부탁을 하였다. 나는 오히려 회사가 아파트 계획을 포기하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민들도 교회에 대해 압박을 가해 왔다. 마치 교회가 땅 장사를 하는 것과 같이 비추어졌는가 보다. 교회로서는 일찍이 자금도 확보하고 더 적극적으로 부지 확보에 박차를 가했더라면 아파트 단지는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에서 2, 3채만 더 확보했더라도 우리 계획이 실현 되었을 것이다.
교회가 어떤 일이든지 진척이 어려운 것은 합의과정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원만이 합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일의 기밀 유지와 빠른 처리를 위하여 소위원회를 두어 운영해 왔다. 그러나 항상 불평은 있었고 결과에 대한 불신도 있어왔다. 일을 담당한 사람은 이런 불평과 불신을 항상 감내할 태세가 되어있어야 한다.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 미숙하면 간절한 심정으로 조언하고, 돕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자세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기서인(責己恕人)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책인지심(責人之心)으로 책기(責己)하고, 서기지심(恕己之心)으로 서인(恕人)하라”에서 온 말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나무랄 때 가장 똑똑하고, 신랄하고, 비판적이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라는 뜻이다. 또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용서 할 때 가장 어리석다는 것이다. 어리석을 정도로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도(道)를 일깨우는 말이다. 하물며 기독교인이야 이 이상의 사랑으로 남을 바라보는 사람이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러나 우리 현실은 항상 깨지고, 넘어지는 일이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다.
교회에 일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같이하고 교회의 약점을 항상 보완해서 교회계획이 실현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컨벤션과 주차장 건축에 우리 교회가 너무 시간을 허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제2의 방안을 구상했다. 교회 앞 중앙로를 건너 아직 옛 주택으로 남아있는 곳을 주목하였다. 교회 옆은 아니지만 길 하나 건너면 되니 우리 교회 부속 건물과 주차장으로 개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토지 확보를 1차-3차 계획으로 수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제1차 토지확보(912평)가 이루어지면 컨벤션과 주차건물은 완성된다.
제2차 토지확보(178평)가 이루어지면 지상 편의시설(휴식 공간, 놀이 공간, 숲의 조성 등)을 확보한다.
제3차 토지확보(279평) 계획이 이루어지면 직원 사택 및 게스트 하우스 등을 건립한다.
교회가 이런 시설을 확보함으로 국내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초석을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제2의 방안은 제대로 논의도 해보지 못하고 접어야했다. 이 주변의 상황을 몇 분 집사에게 조사 하도록 부탁하였다. 여러 각도에서 조사를 마친 분들의 보고에 의하면 아파트 단지 파급효과로 교회 주변의 땅값이 모두 올라서 현 실정으로는 추진하기가 힘들겠다는 보고였다. 나의 판단 역시 우리 교회 여력으로 추진하기가 무척 어렵겠다는 판단이었다.
나는 제1 및 2의 방안을 구상하며 우리 교회 현실로 가장 적은 경비로 필요 공간과 주차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라 여겼다. 교회가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무소유는 아니더라도 최소의 소유와 최대의 섬김을 실천해야 하고 또 그렇게 교회를 운영해야 하지만 필요 공간의 확보와 주차 공간의 확보가 현실적 해결과제였기에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계획을 이루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섭리를 우리 교회에서 이루실는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 분의 자기 계획을 실현하실 것이다. 나는 그 계획이 선히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한다.
아파트에 편입 예정인 대지를 매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좋은 값에 팔아서 대안을 마련하자는 안과 그대로 가지고 있음으로 고층 아파트가 교회 건물 쪽으로 접근하는 것도 막고 교회가 한정된 토지에서 더 확보는 못해도 매도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어느 입장이나 다 교회의 유익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 교인 사이에 마음이 나뉘는 것은 허용 할 수 없다. 서로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교인들은 각자 자기 생각이 있고, 어떤 모임이라도 구성원들은 각자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한 뜻으로 모아 나아가는 것이 용이하지 아니하다. 이런 점을 교인 각자는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어떻게 공동체에 협력하고 자기조절을 해야 하는가? 를 살피고 나아가 공동체에 협력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교회는 이익집단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이 아니면 모일 이유가 없는 집단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연결하여 우리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간다.”(엡 2: 20-22)
개인의 생각이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 드려져야 하는가? 개인의 생각은 존중되고 항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회의에서 결정은 이 모든 것이 고려된 위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존중되어야한다. 나의 의견이 중요한 만큼 남의 의견도 중요함을 인정해야한다. 더 나아가 의결된 내용을 비판하던지 비방해서는 아니 된다. 의사 결정전에 충분히 비판하고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지켜야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교회에서 발언은 교회와 성도의 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봉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해야 한다. (벧전 4:11)
교회에서 합의 과정이 느리다는 것은 민주적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가 있으나 이것이 민주주의의 단점임을 우리는 보완해야하는 지혜도 있어야한다. 교회 일은 의논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견을 효율적으로 제시하고, 상황을 빨리 판단하여 자신의 의견을 조정 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한다.
우리가 믿음 때문에 모인 집단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 사역은 우리가 사망에서 새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 새 생명으로 옮기게 한 능력은 믿음이다.
우리는 단순한 세상의 계산만으로는 교회와 선교와 섬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나 이룰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산지라고 믿으면 그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근년에 컨벤션과 주차장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확고한 믿음을 심어 주시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 우리에게 그럴 만한 믿음의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나 보다. 우리는 그분에게 더 큰 믿음을 구해야한다. 바다에 빠진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야 왜? 의심하느냐?” (마 14: 31)라고 힐책(詰責) 하셨다.
오늘 교회는 사람의 힘으로 무엇이든 하고자한다.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실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무엇이든 하고 사람 냄새가 나지 아니했으면 한다. 교회 직분자의 이름이 빛나고, 특정 성도가 빛난다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믿음의 부유한 자가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25. 침산유치원에서 침산제일어린이집까지
교회는 선교를 위하여 항상 교육과 의료를 병행하여 왔다. 우리 교단에서도 이런 사회에 기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오곤 하였다. 우리 교회는 아주 일찍 유아교육의 필요를 느끼고 유치원을 개설하기로 하였다. 유치원 설립하는 일을 내가 책임 맡게 되었는데 제2교회당 교육관 30평 건물(교회당 남쪽에 있는 건물)에서 유치원을 시작하기로 하고 1965년 3월 1일자로 개원하도록 하였다. 교회에서 광고하고, 포스타도 만들어 이웃에 알리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20여명의 어린이를 모집하였다. 첫 모집으로서는 많이 모은 것이다. 운영하는 도중에 입원하는 원아가 있어서 그 수는 25, 6명에 달했다. 그러나 1학기를 끝내고 나오지 않는 어린이도 있고 해서 원아 수는 유동적이었다.
대구시교육청에 설립 인가를 신청하는 중에 원아를 모집하였다. 설립 인가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유치원을 시작했다. 내가 대구시교육청과 협의하여 1965년 4월 1일자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대구시교육청에서 설립 인가증을 받아서 정식 유치원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설립자 및 이사장에 정 순 장로, 첫 원장에 박경남 목사, 원감에 김정권 집사, 수석교사로 김초자 선생(현 대구금성유치원장)을 모시고, 우리 교회 청년인 김화지 선생(우리 교회 첫 예배 처를 제공했던 김혜문, 송정자 집사 셋째따님)을 교사로 하여 출발하였다.
김초자 선생과 김화지 선생은 탁월한 교사였다. 김초자 선생은 약관으로부터 지금까지 대구 유아교육계의 선두 주자로 크게 활동하는 분이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 경재사정으로는 자녀를 유치원에 보낼 수 있는 집이 많이 있지 아니했다. 그래서 원아 모집에 항상 어려움이 있었고 연말과 연초에는 원아 모집에 모든 신경을 쏟아야했다.
유아교육기관은 자연 그 어머니들이 교회를 출입하게 하는 매체가 되었고 또 부모교육을 통해서 그들이 교회에 친숙해지는 효과를 갖게 되었다. 60년대 아직 우리 사회가 암울하던 때이다. 우리 교회는 작지만 부모에게 빛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유치원 1회 졸업생가운데 현재 우리 교회 집사도 있다. 그들은 벌써 중년을 넘기고 있다.
김초자 선생은 자기 유치원을 설립하기 위해서 2년간 근무하시고 사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화지 선생을 수석 교사로 하고 1967년 3월 최정숙 선생(후에 정달원 집사와 결혼하여 정 순 장로의 둘째 자부가 됨)을 교사로 채용하여 유치원을 맡기게 되었다. 그리고 박경남 목사 사임으로 김정권 장로(당시 집사)가 원장을 맡고, 전주석 장로(당시 집사)가 원감에 임명되고, 교회에서 유치원 회계를 파견하기로 하고 배상호 장로(당시 집사)에게 부탁드려 유치원 일에 협력하도록 하였다.
이때 유치원의 일상적 일들을 전주석 장로, 배상호 장로 등 일을 담당한 분들이 시간을 내어 손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려운 유치원 살림이어서 손수 우리 손으로 처리할 것들이 많았다. 제2교회당의 교육관은 장방형의 한 칸짜리 건물로 시설이나 설비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소소하게 손 볼일들이 적지 아니했다.
이 체제는 6년간 1972년까지 지속 되었다. 김화지 선생이 1968년까지 봉직하고 가정이 이사하게 되어 유치원 교사를 사임하게 되어 최정숙 선생이 수석 교사가 되고, 남미자 선생(현 집사)을 교사로 채용하여서 1년간 수고 했고 1970년부터는 임인순 선생(현 집사)이 교사로 수고 하였다.
매년 원아 모집의 어려움과 제2교회당 건립을 추진하면서 유치원을 잠시 휴원(休園)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당시 교회건축은 제2교회당 자리에 구 교회당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 건축할 계획이어서 제2교회당 교육관을 사용 할 수 없을 것으로 예칙 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유치원이 휴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당 재건축은 교회 부지가 준 공업단지여서 교회 건축을 허가 할 수 없다는 구청의 방침으로 좌절되고 교회당 신축은 계속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현 교회당 부지를 확보하고 건축해야하는 일 때문에 모든 것이 늦어졌다. 따라서 휴원이 9년 간 이나 지속 된 것이다.
제2교회당에 1979년 12월 입당하고 어느 정도 정비가 끝난 뒤 1982년에 재 개원하기로 하고 이사장에 김정권 장로, 원장에 안병즙 장로(7년간), 교사에 김명희, 한명희 선생을 채용하여 교육청에서 재개원 인가를 받았다. 그 뒤 정규채 목사가 6년간 원장을 역임 하셨고, 양영석 장로가 7년간, 허인숙 집사가 1년간 원장 일을 맡았다.
우리 교회 사회 교육관을 건축한 1997년 이후 시설이 좋아지고 공간도 상당히 확보된 상태여서 침산유치원은 교회 인근에서 무척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원아 모집도 순조롭고 운영의 어려움도 해소되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교회 주변에 대형 유치원이 세워지고 시설과 설비가 좋은 유치원이 생겨서 우리 유치원이 고전을 하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원아 모집이 어려워지고 유치원 경영에 문제가 제기 될 때 우리 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맡 벌이 부부 때문에 탁아 문제가 사회의 큰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교회는 유치원과 병행해서 1999년에 어린이집을 설립한다. 어린이 집은 양성(兩性)이 모두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회 상황에서 필요 불가결의 것이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이 제도는 생활 보호 대상자나 빈민가정을 돌볼 수 있어서 더욱 좋고, 부모가 모두 직장에 나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이기에 우리 교회가 사회를 지원하는 역할도 담당한다는 점에서 무척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하였다. 이런 일이 지역사회와 같이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유치원과 양립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2002년 어린이집 허인숙 원장에게 유치원 원장도 겸임하게 하였다. 어린이집은 수요가 점증하는 반면 유치원은 감소하는 현상이었다.
두 기관을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서 2003학년도부터 유치원을 잠정 휴원 하였다가 2004년 교육청에 폐원 신청을 하였다. 유치원은 중도에 9년의 휴원 기간을 제하면 모두 30년간을 운영하였다. 유치원은 자연스럽게 어린이집으로 통합되게 된 것이다.
이 기간에 우리 유치원을 졸업한 사람은 약 1,000명에 달한다. 1960년대 교육여건이 아주 좋지 아니했을 때 유아교육을 시작해서 우리 사회의 유아교육 여건이 많이 좋아 졌을 때 이를 접고 사회의 요구에 부응해서 어린이집에 집중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우리 교회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우리 사회를 지원하고 주민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한다.
오늘 우리 교회 어린이집은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기관이 되었다. 어린이집 설립 때부터 원장으로 수고하신 허인숙 집사가 2003년 8월에 사임 하고, 2003년 12월 이경혜 원장이 부임했다. 두 분은 모두 혼신을 다하여 원장 직을 수행 했다고 나는 본다.
어리이집은 설립 이래 정원 70명을 항상 채우며 대기하는 어린이가 있을 정도로 운영이 활발하다. 특히 초기에 고문을 맡으셨던 권영락 장로와 현재 고문이신 양영석 장로의 치밀하고 성실한 어린이집 관리는 부모의 신뢰를 높이며 그 분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다.
앞으로 사회복지법인이 설립되면 자연히 법인에 소속 되겠지만 유치원과 달리 어린이집은 우리 사회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직업 전선에서 바쁘게 살고 있는 젊은 부모들에게 안심하고 자녀를 위탁 할 수 있는 생활 및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지적인 교육과 더불어 그들의 영혼이 풍요로워 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침산제일어린이집”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를 교육시키고 양육하는 것처럼 넘치는 사랑으로 어린이를 돌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들 어린이 마음 깊이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심겨져 싹 트게 되리라 믿는다.
어린이집을 통하여 아직 믿음의 반열에 서지 못한 부모들이 우리 교회를 출입하게 된다. 그들 부모는 교회를 출입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 교회는 구원 얻지 못한 수많은 백성들이 교회를 출입하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전도 사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현재 우리 교회 주일학교 유치부가 무척 활발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린이집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린이집의 사역이 날로 왕성하여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기원한다.
26. 나와 동역한 신앙의 동지들
나는 이 회고록을 통해서 침산제일교회에서 만나 동역한 동지들에 대해 약간의 담론을 하기로 한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많은 목사와 장로, 집사, 권사를 만나게 하시고, 침산동산에서 이 분들과 믿음의 동지로 지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린다.
내가 1970년 장로 장립한 이후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실한 믿음의 동지들을 만나서 서로 가슴을 나누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음을 감사한다.
정 순 장로를 통해서 칼빈주의 신앙의 진수를 알게 되었고 그 분의 철저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장로의 길을 배웠다. 내가 장로 장립한 1970년부터 정 장로가 도미하신 1978년까지의 기간은 나에게는 장로 수업의 기간이었다. 정 장로는 장로로서 다양한 경험과 노회 그리고 신학교의 일을 보면서 그의 지평은 총회에까지 이르렀으나 나는 그럴만한 재목이 되지 못해서 교회 외에 대외 활동은 하지 아니했지만 정 순 장로의 폭넓은 활동은 우리 교회 입지를 상당히 확고히 하는데 기여 하였다. 나의 장로 생활에도 큰 힘이 되었다고 사려 된다.
박영훈 장로와 김중산 장로는 아직 내가 성숙한 교인으로 활동하기 전에 떠나셔서 가르침을 받을 시간이 없었다. 무척 아쉬운 일이다.
황약슬 장로는 1957년 장로 취임을 하시기 전에는 협동장로로 시무하셔서 나와는 몇 년을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중고등부 부장을 담당하고 있을 때 황 장로는 항상 친절한 후원자이셨다. 불행하게도 내가 1958년과 1959년을 군 생활을 하여 그 분의 삶과 신앙생활을 본받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음이 아쉽다. 황 장로의 따님인 황혜순 선생과 황정순 선생이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열심히 봉사한 것과 이름을 정확히 기억 할 수가 없으나 조카인 황 선생도 무척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였다.
이재흥 장로는 1964년 장로 장립하셔서 그 이듬해 교회를 떠나셨지만 1962년에 서리 집사로 임명되시어 사회생활을 통해 얻으신 풍부한 경험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모든 일을 잘 처리하시는 능력자이시었다. 나처럼 교회 밖을 잘 모르고 자라난 사람에게 다른 세계를 보는 눈을 길러 주셨다. 무척 짧은 기간이나 인상 깊고 많은 것을 배웠다.
나와 같이 장로 장립한 김생한 장로와 안병즙 장로는 거의 동시대에 일을 같이하신 분들이다. 두 분 모두 나보다는 연배이셨다. 우리 교회에서 안병즙 장로는 1959년에 서리집사, 김생한 장로는 1960년에 서리집사, 나는 1961년에 서리 집사에 임명되었으니 거의 동시대라 할 수 있다.
김생한 장로와 안병즙 장로는 나보다는 경륜도 앞서고 사회생활도 모두 앞서는 분이어서 우리는 항상 좋은 의논의 상대가 되곤 하였다. 두 분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신 분들이다. 불행히 김생한 장로는 장로 장립과 거의 동시에 서울로 이사하셨고 그 다음 자녀를 따라서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기셔서 우리는 장로로서 동역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없었다.
안병즙 장로는 교회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대학교에서 장기간 같이 근무하였기 때문에 교회 일이며 인생사에 대해 많은 것을 담론할 기회가 있었다. 항상 정의감에 불타서 앞장서 나아가는 모습을 나는 흉내 낼 수가 없었다. 안 장로는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시곤 하였다. 형제같이 아껴주시고 나에게 일이 생기면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해결하시었으니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의 연수 겨우 79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육신의 정으로 생각한다면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승리자로 우뚝 서서 그 분이 주시는 면류관을 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1973년에 강영목 장로가 장립을 하셨다. 강 장로가 장립하심으로 장로는 모두 4인이 되었다. 우리 교회 장로가 단명이라 교세에 비해서 장로 수가 적은 편이었다. 3인에서 4인이 되었으니 다소 보완이 된 샘이다. 강영목 장로는 내가 기성회장으로 제3교회당을 건축할 때 건축현장의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해 주셨다. 현장에 사람이 꼭 필요한 때 그 일을 해주신 것이다. 1979년은 거의 건축현장의 일을 보셨다.
강영목 장로는 1978년 한종희 목사께서 비산제일교회를 떠나시게 될 때에도 비산제일교회를 맡아 인도하시어 교회 어려운 일을 처리해 주셨다. 1980년에는 농촌 교회를 담임하시는 일로 우리 교회를 떠나시게 되었다.
배상호 장로는 1979년에 장로 장립하시었다. 물론 집사시절에도 교회 일을 두루 맡아하신 우리 교회 기둥이시다. 항상 나의 후원자 이셨고 동역하는데 평안한 협력자이시었다. 말없이 묵묵히 모든 일을 처리하는 분이다. 배 장로는 60년대 나와 같이 유치원 일을 수행하신 것, 주일학교 유년부 일을 맡아 하실 때 유년부를 부흥 시키신 것, 장년부장으로 헌신 하신 것 등을 기억하며 항상 좋은 협력자로서 교회 일을 같이 염려한 것 등 모든 것이 나의 신앙생활의 본이 되었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날로 강건하심과 영적 부흥과 육신의 잘됨이 영원하시기 기원한다.
박성덕 장로, 전주석 장로, 김승조 장로는 1980년 8월에 장로로 장립하셔서 20년 이상 우리 교회에서 많은 수고를 하셨고 우리 교회 초석을 놓는데 크게 기여하신 분들이다.
박성덕 장로는 최고의 지성인으로 학구파이며 교회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도록 노력하신 분이다. 더욱이 성경이 다 닳도록 밑줄을 쳐가며 읽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나는 박 장로의 이런 자세를 통해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 박 장로는 월남 전선의 고엽제 피해자로 2년이나 일찍 장로 은퇴를 하시어 아쉬움이 있었다.
전주석 장로는 우리 교회 설립 해인 1951년부터 우리 교회 교인이시다. 지금 우리 교회에 1951년 설립 당시 참여했던 분은 거의 없다고 본다. 아주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미국에 거주하지만 전 장로의 동생이신 전일웅 장로와 그 가족이 우리 교회 설립에 참여한 가정이 된다. 2005년 장로 은퇴하시기까지 26년 간 장로로 그 직임을 선히 감당하셨다. 초대 교인으로 자부심이 크실 것이며 교회를 염려하는 심정이 작다할 수 없다. 그 이름이 복되시기를 기원한다.
김승조 장로는 제2교회당 뒤편에 사시면서 우리 교회 교인이 되었다. 집사로 10년간, 장로로 26년간을 교회 봉사하시고 기성회장으로, 더욱이 최근에는 초대 선교위원장으로 우리 교회 선교의 지평을 넓히는 일에 앞장섰다. 본인의 생각이 옳다고 하면 그대로 일을 추진하는 분이다. 오랜 장로 생활에서 여러 가지로 협력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
박병옥 장로와 안현즙 장로는 1984년 장로 장립하여 당회원으로 동역자가 되었다. 두 분은 모두 우리 교회 오래된 분들이다.
박병옥 장로는 학생 시절부터 우리 교회 교인이고 유노미 권사의 신앙을 유전 받아 신실한 주의 종으로 항상 든든한 나의 동지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선임 장로 직을 박 장로에게 넘기고 은퇴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옛 교인으로 해야 할 일이라 사려 된다.
박병옥 장로는 2001년 교회 예배실과 로비 리모델을 할 때 기성회장으로 수고를 많이 했다. 그래서 교회 설립 오십주년 기념예배를 아름다운 성전에서 드리게 되었다.
안현즙 장로는 안병즙 장로의 형으로 우리 교회 오래된 교인이다. 늘 협조해 주시고 격려해주시며, 12년간의 장로 생활을 통하여 교회 유익을 많이 걱정하신 분이다.
이재한 장로, 권영락 장로, 양영석 장로 세분은 1988년 장로 장립하신 분들로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으신 분들이다.
이재한 장로의 순수한 믿음과 교회 사랑은 내 마음에 오래 남아있다. 사회교육관 건축 당시 기성회장으로 잘 마무리하셨고 우리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이 장로의 대를 이어 이순호 장로가 되었으니 이재한 장로의 복이 아닌가?
권영락 장로는 나의 든든한 후원자이었다. 18년간 장로로 봉직하면서 나를 많이 도와주시고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다.
내가 양영석 장로 교장 정년 퇴임식에서 그를 “사람 같은 사람”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부산 교육계 중진 앞에서 주저함 없이 그렇게 말하였다. 자신 있게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속에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양 장로는 일을 맡으면 결코 소홀함이 없는 분이다. 정확하시고 성실한 자세는 모두의 본이 되기에 충분하다. 양 장로와 같이 당회원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을 감사드린다.
장로 세움이 10여년이나 없었다. 이진도 장로를 1998년 세우고 우리 당회원으로 같이 일하게 되었다. 이 장로의 작은 아버지와 나는 친구사이 이다. 이시곤 박사는 미국 나성에 있는 아카페신학대학 총장으로 지금도 봉직하고 계시는데 이 목사를 통해서 이진도 장로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믿음의 가정에서 훈련된 신앙인이다. 그의 성실과 근면은 우리 교회의 보배이다.
박태규 장로, 임번남 장로, 이종목 장로 세분은 2001년 장로로 세움을 받았다. 박태규 장로와 이종목 장로는 60대에 장로 장립을 하신 것이다. 그동안 장립집사로 계시면서 교회에 봉사하신 분들이다. 은퇴연령을 앞당기어 2007년에 은퇴를 하시었으니 장로 시무는 7년에 불과하신 분들이다. 두 분은 짧은 시간에 교회 일에 있어서 무엇이고 바르게 해보고자 노력하셨다고 생각한다.
박태규 장로는 교인들의 가려운 부분을 잘 찾아내어 시원하게 하신 분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마음고생도 있으셨을 것이라 사려 된다. 날로 강건하시고 영혼과 육신이 잘되는 복을 누리시기 기원 한다.
임번남 장로는 우리 교회 초기부터 우리 교회에서 자라난 분이다. 그에게는 남다른 교회 사랑이 있다고 생각 한다. 김순조 권사의 믿음 생활을 유산으로 받아 교회를 사랑하는 법을 아는 분이라고 나는 본다. 교회 미디어부를 잘 관리하고 있는 임번식 집사와 더불어 형제분이 우리 교회 기둥 같이 헌신하시는 모습에 대해 항상 감사가 넘쳐난다.
이종목 장로는 항상 긍정적 사고로 일을 바라보시고 믿음으로 사리를 판단하시는 분이다. 장수대학 초창기 어려운 일을 맡으셔서 애를 많이 쓰셨다. 깊이 감사를 드린다.
김규현 장로, 신재학 장로, 이광섭 장로 세분과는 아주 짧은 기간 당회원으로 같이 지냈으나 세분의 믿음이 반석과 같고 겸손과 온유가 있으니 우리 교회 미래가 무척 밝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김규현 장로의 영천 치일리 수양관 헌납과 사회복지법인 설립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계신 것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 성령께서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할렐루야로 하나님께 찬양 드리고 영광을 올려 드린다.
신재학 장로는 전통 있는 믿음의 가문 출신으로 항상 겸손하고 성실하며 맡은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다. 당회 서기로 당회록을 정리 할 때도 항상 의문점은 물어서 정리하시는 섬세함을 갖고 있는 분이다.
이광섭 장로는 교회 할 일도 많고 그에게는 열정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일찍이 불러 가셨다. 이 장로가 다 이루지 못한 일들을 후세대와 그 남은 유족이 잘 이룰 것이라 믿는다.
나는 금년에 이순호, 박동문 두 분을 장로로 세운 것을 감사한다. 나의 38년간의 장로 시무가 끝날 즈음에 젊은 피로 수혈되어 우리 교회가 새 힘을 얻고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도약 할 것을 믿는다.
2001년 교회설립 50주년을 맞아 교회당 리모델을 계획하고 수행하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송도호 집사, 사회교육관 리모델을 선두에서 이끌어간 이순호 장로와 송도호 집사, 박명남 집사 화장실 리모델을 위해 수고해주신 박명남 집사, 새신자실과 역사자료실을 리모델 할 때 협력해 주신 우수하 집사 등 나와 같이 힘을 합했던 여러 이름을 주님 앞에서 부르며 깊은 감사를 드리고 그들 이름이 날로 복되기를 기원 한다.
1950년대 우리 교회에서 헌신하신 임종헌 목사는 서울구파발교회에서 은퇴하시어 원로목사이신데 임 목사는 우리 교회 첫 제직회원으로 구락부와 주일학교 일로 많은 수고를 하신 분이다. 들려오는 소식은 건강이 여의치 못 하시다고 한다. 속히 건강하시기를 기원 한다.
임승원 목사는 서울현대교회 원로 목사이신데 우리 교회에서는 천우구락부 교사로 수고하셨으며 손재주가 탁월하시어 교회 주보나 기타 인쇄물을 잘 만들어 공급해주셨다.
두 분의 건강을 기원하며 이 분들이 흘린 땀이 오늘 침산에서 열매 맺고 있음을 전해 드리고 싶다. 이미 서울당산동교회에서 은퇴하신 후 소천하신 박정훈 목사의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빛날 것과 사모와 세 아드님들이 주안에서 복을 누리시기 기원한다. 박 목사는 대구 피난 생활 중 총신대학교 학생으로서 우리 교회 구락부 교사 등으로 수고 하셨다.
나와는 우리 교회 외에서도 특별한 인연이 있었는데 내가 군복무를 할 때 경기도 이동에서 6개월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때 박 목사께서는 일동교회를 담임하셨다. 나는 수시로 찾아가서 폐를 끼치곤 하였다. 그때 박 목사는 신혼이셨는데 내가 체면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 교회 초기 집사이시고 서울로 귀향하신 후에는 서울 문화교회에서 장로로 지금은 원로 장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영수 장로의 건강과 그 부인이신 김관옥 권사와 자녀 손들에게 시온의 대로가 열릴 것을 기원 한다.
1950년대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원으로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 윤원식 선생과 김경희 선생의 강건하심과 미국 볼티모아에 거주하는 임종배 장로, 계명대학교의 명예교수인 배인호 장로와 교장으로 퇴임한 이승주 장로와 그의 형제 이응주 목사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더하시기 기원한다. 우리 교회 초기에 청년으로 헌신하고 서성로교회 장로로 시무 중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홍재기 장로의 영혼과 그 유가족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 한다.
우리 교회의 오늘을 이루는데 기여하신 수많은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느 한 두 사람의 기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신 분들의 이름은 하늘나라 생명책에서 찬란한 이름으로 발견될 것이다. 직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그 분들이 영광되기를 기원한다.
27. 교회와 사회복지 사역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 8) 고 명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길은 어떤 것인가?
첫째는 복음 증거를 위한 사역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때를 따라서 그 식구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일일 것이다(잠 31: 13-15).
셋째는 주인을 섬기듯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
우리의 삶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내면세계에서 샘솟는 생명력이 넘쳐 나와야 한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을 죽어있는 사람에게 전달하여 그를 부활 시켜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 경제력, 권력 그 모든 것은 이런 일을 하기위한 도구(道具)에 불과하다. 우리는 도구를 활용하여 내면세계의 생명을 이웃에 전달한다. 도구는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우리 교회가 많은 것으로 이웃과 나누고 섬겨왔으나 교회의 미약한 힘만으로는 많은 이웃을 충분히 섬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 해왔다고 본다. 몇가지 중요 사역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 열린 도서관의 사역
1996년 침산열린도서관을 개설하여 이웃에게 정보와 공간을 개방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1997년 우리나라가 IMF지원을 받는 상황이 되었을 때 도서관을 구직자 쉼터 및 취업 정보센터로 전환하여 운영(1998.6.14) 하고 실업자에게 취업을 알선 하는 등 어려운 국가 상황을 타개하는 일에 일조를 하였다.
이 도서관은 2000년대 들어서 많은 문화 강좌를 열어 지역 주민과 교인들에게 문화 향상을 도모하였다. 2000년에 무료 꿀벌학교를 열어 컴퓨터교실, 영어교실, 율동교실, 어린이 탁구교실, 동요교실, 학습반 등을 운영함으로 빈곤층 가정의 어린이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문화 강좌도 열어 성인들의 교양을 높이는 일과 이웃 주민과 유대 강화에 기여하였다. 강좌 내용은 플라워 디자인 강좌(2000), 커피애호가 교실(2004-6), 중국어회화반(1999-2008), 미용과 메이크업 무료 강좌(2004, 2005), 디지털카메라 강좌(2005, 2008), 무료 바이올린 교실(2005, 2008), 선물포장, 아로마 테라피와 천연용품 만들기(2006, 2008), 간병인 양성 과정(2004, 2006) 주부 독서 클럽(1기; 2004, 2006. 2기; 2007-2008), 풍선아트 강좌(2004) 등을 통하여서 이웃을 섬겼다고 생각 한다.
열린 도서관은 특히 청소년 봉사학교(2004-2008)를 개설하여 청소년들이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봉사 정신과 실제 활동을 함으로 이웃을 섬기는 정신과 기술을 익히는 훈련을 하였다. 그리고 학령기 자녀를 둔 부모를 위한 강좌를 개설하여 자녀교육을 지원하는 일도 하였다.
나. 침산장수대학
침산장수대학은 우리나라가 IMF 위기를 겨우 넘긴 2000년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의 문제는 닥아 오는 우리 사회의 중요 해결과제라고 생각하여 우리 교회는 노인 복지 대책의 일환으로 장수대학을 설립하였다. 우리 교회가 수행한 뜻 깊은 일 가운데 하나이다. 노령 인구가 우리 장수대학을 통하여서 한글을 깨우치고, 게이트볼, 서예, 종이접기, 윷놀이, 스포츠마사지, 영화감상 등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노인의 삶을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침산장수대학은 2000년 설립하여 2008년 현재까지도 건실하게 잘 운영되고 있다. 매년 1, 2학기 매 학기 8주씩을 운영하며, 현재는 재적 인원이 120명을 헤아리는 큰 노인대학이다. 우리 교회가 세운 예산은 다른 부서에 비해 많은 편이지만 이 예산이 단순한 기관 운영 경비가 아니다. 노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노인들이 우리 사회 일원으로 참여하게 하는 중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게 된다. 장수대학에서 사용되는 경비는 이웃에 대한 나눔과 섬김을 실현하는 경비이다.
지금까지는 자체 운영체제 이었으나 앞으로 전담 목회자가 있어 효율적으로 운영하여야 하겠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노인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 사역자도 노인 문제를 전문한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 사역 중 하나로 노인 문제를 다루게 되겠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가 공동으로 재정 지원을 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우리나라는 초 고령화 사회(超 高齡化 社會)로 전이(轉移)되고 있으며 국가와 교회는 앞으로 도래하는 사회를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교회의 장수대학은 앞으로 노인복지 사역의 초석이 될 것이다. 노인요양원, 노인 병원, 치매 요양원 등과 같은 더 전문기관으로 발전되어 우리 사회의 짐을 분담해야 할 것이다.
다. 북 대구 가정폭력 상담소
우리 교회가 이웃을 섬기는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을 상담하여 구제하는 일이다.
2005년 12월(북구청 등록1호) 우리 교회는 대구지방검찰청 상담 위탁기관으로 지정 받아 가정 폭력 상담을 해왔다. 이 사업은 특히 그늘진 곳에서 어렵게 생활 하시는 우리 이웃에게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는 일이다.
이 사역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자녀교실, 결혼 예비교실, 무료 법률상담, 가정생활 세미나, 부모교육 등의 활동을 하였고 매일 상담원(자원봉사자)이 교회 가정폭력 상담실에서 내담자와 상담도 하였다.
라. 침산제일노인복지센터
노인복지센터는 2008년 1월 14일 북구청에 등록(제47호)하여 공식 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5월 29일에는 재가장기요양기관(在家長期療養機關)으로 지정되어 전문 사회복지 사역을 하게 되었으며 전문 인력이 가정을 방문하여 노인을 지원하게 되었다.
마. 독거노인, 소년 소녀 가장 돕기, 반찬 나누기
우리 교회가 아주 작은 일이지만 독거노인과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일 그리고 매주 반찬을 나누는 일 등을 10년 이상 실행해 왔다. 많은 여성도들이 화요일이면 교회에 모여 오전에는 반찬을 만드는 팀이 음식을 장만하고, 오후에는 집집마다 배달하는 봉사자들이 나와서 발품을 팔고 있다. 요사이 집안일도 바쁜 때이지만 수많은 성도들이 자원 봉사자로 수고하여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을 섬기고 있다.
이분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분들이다. 그들의 수고가 하늘나라에 기억 될 것이다. 이들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과 축복이 넘칠 것이다. 우리 교회가 자생적으로 실행하는 이런 일들이 앞으로 더 큰 사역으로 발전 되더라도 그 정신을 이어 받아 세상의 빛이 되도록 하여 많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등대(燈臺)가 되기를 기원 한다.
바. 교회는 국가 복지정책에 어떻게 기여 할 것인가?
우리 사회는 민주 복지 사회이다. 민주주의는 국민 개인이 국가 사회의 주인이 되는 사상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에 토대하고 개인이 가장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반면 복지주의는 전체주의적 색채를 갖는다. 모든 국민이 다 같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선진 제국에서는 복지국가 건설에 역점을 두어 왔다. 빈곤층과 소외계층, 장애인 등 사회에 적응이 어려운 분들에게 사회가 생존권, 의료 조치, 교육 등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 결과 국민 가운데 과중한 세금을 부담해야하는 계층이 나오게 되고, 그들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 복지 수혜자는 안일한 생활 태도로 근로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국민 전체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데 복지정책으로 말미암아 생산성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부는 과중한 복지기금을 부담하느라 부채를 많이 지게 되었다. 이런 결과 일부 국가에서는 복지 망국론(福祉 亡國論)이 나오고, 재원 고갈로 계속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 어려워져 가고 있다. 단순한 물질적 복지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변형된 복지정책으로 소위 정신적, 심리적 건강과 물질적 복지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복지정책을 잘 수행하여 국민 누구라도 그 삶이 힘들지 아니하게 조처하는 일은 너무 중요한 일이지만 물질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과 정신적 강화가 반드시 뒤 따라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정책에서 간과(看過) 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 국가는 사회복지 실현을 위한 정책이나 기금의 확보를 해야 하지만 복지 운영은 복지법인에서 하게 되어있다. 우리 교회는 국가가 인정하는 인격체가 아니다. 그래서 교회는 복지법인(福祉法人)을 설립하여 국가 복지사업에 참여해야한다.
교회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반문을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교회의 헌금으로 나눔과 섬김을 실천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예산만큼 방대 할 수 없다. 또 국가는 누구에게 복지 운영을 맡겨야 하는데 이 일을 맡을 기관은 영적으로 살아 있어서 복지 수혜자에게 물질 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 각성도 동시에 제공 할 수 있을 때 최선이 된다. 복지 운영자가 영적으로 살아 있다면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고품질의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 내담자들(수혜자, client)은 만족할 만한 복지 수혜자가 될 것이다. 현 시점에서 보면 종교단체가 사회복지를 운영하는 것이 그 효율성을 높이는 첩경이 된다.
국가는 복지 기금을 제공하여 국민의 짐이 가볍게 되도록 해야 하며, 교회는 이런 기금을 효율적으로 운영함으로 몇 배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은 질 높은 복지 서비스를 받음으로 물질적 정신적(영적)으로 차원 높은 삶을 영위하게 된다.
국가 복지정책에 교회가 참여하여 우리의 “나눔과 섬김”을 실현 한다면 국가에 기여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질적으로 개혁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사회복지 사역은 사회복지법인을 통해서 더 확대되고 효율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사회복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아니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과거 한국전쟁을 할 때의 고아원 중심의 사회복지와 현재 우리가 수행하고자하는 사회복지는 그 차원을 달리 하는 것임을 이해해야한다. 오늘 사회복지 정책은 노인, 장애인, 생활이 어려운 분 등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일을 한다. 사회복지 사역은 곧 이웃을 섬기는 일이 된다.
국가와 사회가 협동해서 국민을 섬기는 일이며, 우리 사회를 정의롭고, 평등하며, 모두를 아우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이런 사명이 있고, 이런 일을 잘 수행함으로 국가와 더불어 우리 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 것이다.
28. 왜? 역사가 중요한가?
우리 교회는 1951년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이제 58년이란 세월을 지내오며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토착(土着)이란 “생물이 어떤 곳에 침입하여 거기에 정주(定住)하는 일” 이라고 국어사전에서는 정의하고 있다. 토착은 이주(移住)하여 일정 기간 적응과정을 거쳐서 그 자연에 순응하여 부자유함 없이 자기 세계를 형성한 것을 의미한다. 일정 기간의 적응과정은 새로운 환경에서 그것에 적응하고 나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 교회는 대구 침산동에서 정착하여 이 지역사회의 일부가 되어 지역 발전에 기여하는 “토착 교회”가 될 정도로 발전하여 왔다.
토착을 논의 한다는 것은 역사적 해석과 그 역사에서 얻어진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확인하여 우리를 이해하고 그 것을 우리 일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다.
나는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정립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역사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세계적 역사연구의 경향이 미시사(微視史)연구를 강조하고 있음을 논의하여, 우리 교회의 역사 정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 역사 정립 방법을 논의 하고자 한다.
가. 정체성과 역사인식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 지난날을 기억하고 소중히 여기며 잘 정리하여 벤치마킹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이다. 현재가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고 우리의 생명을 불사르는 시간이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만일 우리가 과거의 모든 기억을 망각했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겠는가? 자기 상실감과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과거사는 지나간 일들이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과거경험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자료 이다. 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역사는 너무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다. 과거사가 자랑스럽고 찬란한 것도 있지만 부끄럽고 잘못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우리의 지혜이며 자산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복음을 받은 후 벌써 한 세기를 넘겼다. 우리나라 개화기 서구의 선교사가 도래하여 교회를 세우고, 신교육 방법과 의료 사업을 운영하여 우리 사회에 새로운 장르를 연출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를 경험 하게 하였다. 아직 합리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던 19세기 말 서구의 선교사가 갖고 들어온 의료 기술이나 신교육 방법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홀 선교사가 평양에서 오복래 라는 맹인 소녀를 처음 만난 것은 1894년이었으나 청일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교육을 할 겨를도 없이 서울로 철수하고, 남편 William Hall의 서거로 1895년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1894년 가르치기 시작했던 맹인소녀 오복래 교육을 위하여 뉴욕맹학교에서 뉴욕포인트를 배워 가지고 1897년 한국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당시 배재학당 교과서인 초학언문(초등국어) 책을 한지에 기름을 먹여 자신이 바늘로 점역하여 교과서를 만들고 이것으로 오복래를 가르치게 된다. 이 첫 번째 점자교과서 표지에 홀 선교사는 자필로 이 책의 의미를 글을 써놓아 우리가 이 책이 1897년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홀 선교사가 1894년 오복래를 만나 교육을 시도한 흔적은 오복래의 아버지 오석형 목사를 1894년 첫 신자로 맞게 되었고 홀 선교사가 1895년 미국으로 귀향해서 오복래를 가르치기 위해 뉴욕맹학교에서 점자를 배워 돌아온 정황으로 보아 1894년 홀 선교사의 교육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한다. 큰 강의 연원이 실개천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는데 그 실개천 저 위에 개천으로 연결된 옹달샘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홀 선교사의 행적을 우리는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가? 그의 기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로제타 S. 홀 선교사의 유품 즉 사진, 선교 보고서, 인쇄물, 홀의 기록 등이 없다면 오늘 우리는 홀의 업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십여 년 전에 한국특수교육 백년사를 편찬할 때 홀 선교사의 손녀(Phillis King Hall, Dr. Sherwood Hall의 딸; 한국에서 출생 함)를 통해서 우리나라 특수교육 초창기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자료는 한국특수교육 백년사(1995)에 많이 수록되었고 그 외 역사 정리에 많이 활용되었다. 만일 이 자료가 나에게 건네지지 않았다면 홀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으로 남아있지 안으면 역사는 망각되고 역사 현장에 있던 사람이 사라질 때 그 내용도 사라지게 된다. 구전(口傳) 역시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되고 변형될 수밖에 없다.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역사인식은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역사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 과거사는 현재 우리를 아우르는 힘을 가지며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자료이다.
둘째,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의 경험은 후세대에게 중요한 자산이 된다. 현재의 경험은 반드시 기록이나 자료로 남겨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자료를 항상 각성(覺醒)의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
셋째, 과거의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미래를 조망(眺望)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 정체성이 정립되어있지 않으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정체성은 “본디의 모습”이라고 국어사전에서 정의한다. 본디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어떤 모습이 계속 변해가고 환경과 경험의 축적에 따라 점차 변하게 된다. 우리가 토착화를 논하는 것은 우리의 본디의 모습이 보다 한국적이 아니었다는 전제이다. 외래 신학사상을 받아들여 여과 없이 우리나라 교회에 적용하던 시절도 있었다. 가톨릭에서는 오래도록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고 교인들은 뜻도 모르는 미사 용어를 듣고 앉아 있어야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좀 더 우리 것으로 채우자는 주장이다.
토착화는 무엇이고, 우리 것은 무엇인가? 아마 정의하는 사람에 따라서 백가지 정의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분별하게 외래문화를 여과 없이 수용해서는 아니 되고 보다 우리 교회 풍토에 알맞고 우리 교회 풍토에 적합한 것으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영구불변의 것이지만 신앙생활은 우리의 전통과 무관하지 아니 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래되어온 후 점차 정착된 것이다.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킨 복음은 주로 미국북장로교회나 감리교회 선교회를 통해서 전래되었고 그 것이 우리 것으로 자리 잡는 데는 몇 단계의 과정을 거처 왔다.
첫째, 새로운 기독교 신앙을 수입(복음의 받는)하는 단계
둘째,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한국 교회에 적용하는 단계
셋째, 기독교 신앙이 한국 교회에 자리 잡는 단계
넷째, 한국적인 것으로 재구성되어 새로운 우리의 교회 풍토를 조성하고 우리에게 알맞은 신앙을 확산 하는 일 등이다.
우리는 외래문화를 수입해서 활용한 경험이 있다. 또 그것을 변형시켜 활용한 경험도 있다. 그런 경험은 무가치하고 버려야 할 것인가?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그런 모든 과정을 거친 결과이다.
우리의 과거사 중에는 부끄러운 것도 있고 자랑스러운 것도 있다. 못한 것도 있고 잘한 것도 있다. 부끄럽고 잘 못한 것 때문에 밝은 미래를 보장 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그 것은 구성원의 깨달음과 미래에 대한 대책을 합리적으로 세울 때 일이다. 지난 역사에 대한 비판과 평가 그리고 그 것을 미래를 향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 할 수 있으면 긍정적 과거나 부정적 과거 모두가 미래로 나아가는 자산이 될 것이다.
스위스는 근대화 과정에서 외국에 용병을 보낸 일이 있다. 농업사회에서 국토의 9할이 산악인 국가가 생존하기란 그리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용병을 하게 되었고, 피 값으로 먹고사는 국민은 “피를 팔아서는 아니 된다”는 각성이 있었다.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일상화 하며,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어 부를 창출해야만 했다. 이런 필요를 느끼고 있을 때 불란서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스위스로 이주해 온 시계 기술자를 통해 시계 산업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산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 하였다. 그래서 스위스 국민은 산을 개발하여 오늘의 관광 대국을 이루었다.
스위스는 1998년에 GNP 4만 불을 넘어섰다. 스위스 Lüzern시에 가면 산 절개지에 슬픈 얼굴로 죽어가는 사자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을 사자기념비(Lövendenkmal)라 하였다. 이것은 용병(傭兵)으로 팔려가 전쟁(戰爭)에서 창에 맞아 죽어가는 “스위스 청년의 심벌"이다. 스위스국민은 지금도 선조가 피를 팔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스위스국민은 피를 파는 일은 다시 없어야한다는 각성이 있다.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국제사회에서 영세중립국의 자격을 인정받게 되었다. 영세중립국을 지키려면 강한 군사력이 있어야 함을 스위스 국민은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월남에서 피를 팔았다. 그러나 우리 국민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기억하지 않고 있다. 오늘의 우리의 삶과 월남파병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며 1960년대 이후 우리가 산업화를 이루어가던 시절의 절박함도 잊고 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 될 것들을 잊음으로 오늘의 오만이 생겨나고 계속되는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역사는 우리에게 “너는 누구이고 너의 미래는 이러해야 영광이 있을 것이다”라고 지시한다. 과거 우리의 경험은 소중히 보관, 관리되고 항상 평가하여 현재를 이해하고 그에 토대해서 미래로 활기차게 나아가게 하는 힘을 내재(內在)하고 있다.
요사이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일종의 역사연구이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 변방의 역사로 간주하여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작란이다. 만일 고구려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있고 보존되어 왔다면 오늘과 같은 중국의 조작극은 없었을 것이다.
동북공정이 무엇인가?
동북공정은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로써.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는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이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이다.
중국은 왜? 이런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가? 중국은 현재 중국 국경의 역사적 정당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역사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역사적 조작을 통해서라도 현재 국경의 정당성을 인정 받고자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사(過去事)는 있는데 그 역사가 없는 것은 역사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 가정, 교회, 기관, 민족, 국가가 자료를 남기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역사가 존재 할 수 없다.
나. 역사 정리에서 미시사적 접근의 중요성
미시사(micro history)는 1970년대의 규칙적 진보 관념을 철저히 신봉했던 근대 이론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종래의 거대담론이 가지고 있는 미세한 틈새를 연구함으로써 모자이크의 조각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 보다 더 정확한 실재에 다가가기 위한 연구 방법이다. 즉 미시사는 역사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방법의 변화로써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미시사는 연구 방법에 있어서 문화사와 마찬가지로 매우 세밀한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공동체 안의 관계망을 복원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으므로 이야기체의 서술 방식을 가지고 있다. 즉 종래와는 확연히 다른 역사 연구로서 미시사는 역사학의 지평(地平)을 넓힐 한 가지 방법으로 그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종교적 개인주의의 당연한 귀결이 바로 종교개혁”이다. 그래서 개인의 등장을 추적하려면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개인이 전체에 매몰되어 지나온 세월이 너무 길다. 중세 이후 개인에 대한 재발견으로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보다 더 개인의 실존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탈현대라 할 수 있다. 개인의 경험, 느낌, 가치 부여는 전체 역사를 정리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실제자료’란 바로 무수한 개인, 그 자체에 대한 연구다. 근대라는 구조를 ‘개인’의 일상을 통해 읽어내려는 노력이 있어왔으며 탈현대의 탈구조주의는 더욱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구성원의 신앙 활동, 믿음생활, 교회에서 전도활동, 교회기관의 구체적 활동상황, 교회사역에 관한 연구를 강조하게 된다.
일반인의 인식으로 역사는 국사나 민족사 그리고 교단과 같은 거시사가 역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 문화의 형성은 민초의 역사이고, 구성원의 역사가 모여 공동체 역사가 정립되는 것이다. 실제 상황을 빼버린 거시사(巨視史)는 형식적 논리에 한정될 가능성이 높다.
한 교회의 사역자들의 활동이 곧 그 교회의 역사자료이며 한 교회의 담임 목사와 기관 운영자들이 그들이 사역한 운영한 자료와 활동의 이유나 평가를 자료로 남겼다면 그것이 곧 교회의 역사이다. 한 교회의 역사가 한국 교회의 역사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나 GMS(총회 산하 세계선교회; Global Mission Society)의 활동이 한국교회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속에는 구체적 교회 현장의 생생한 본질적인 것은 없다. 최근 세계적으로 미시사(微視史)연구를 중요시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개 교회사가 필요하고 개 교회사는 형식적이고 양적인 기록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활동에 대한 평가가 요구된다. GMS의 활동이 역사자료로 남겠지만 모든 선교사의 선교활동이 수집되고 보관되고 평가될 때 GMS의 생생한 역사가 존재하고 GMS의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교회의 발전과정 전개(展開)의 장르는 짧은 시간에 다양하게 변해 왔다. 원시로부터 초현대까지를 우리는 모두 경험하였고 어느 면(특히 하드웨어)에서는 선진국 보다 월등한 면도 있다고 보면 우리의 변화가 급속했다고 보아야한다.
우리는 복음을 받은 후 무척 어려운 세월을 살아왔다. 일제 강점이라는 뼈아픈 경험, 광복 후 사회적 혼란, 1950년 한국전쟁에 의한 사회파괴와 혼란, 극에 달하는 가난 등 피곤한 세월을 보내야했다. 일본 강점기를 벗어났으나 우리의 희망은 불확실하였다. 이런 사회상황에서 교회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었겠는가? 일본 강점기 우리 믿음의 선조는 극한의 고통과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순교를 개의치 아니한 믿음의 선각자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수 만 교회, 수십만 교역자, 천만성도를 자랑하며, 호대한 교회 세력을 자랑하고 무시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에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그 입지를 확보했으니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진 후 첫 세대, 둘째 세대 모두 사라지고 광복 후 첫 세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역사가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없다면 후세대는 그들을 기억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제1차 전도여행 기록에서 바나바의 행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2차, 제3차 전도여행에서는 바나바의 행적을 찾을 수 없다. 바울이 제2차, 제3차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 바나바는 전도여행을 하지 않고 쉬었는가? 그렇지 않다. 바나바도 바울처럼 열심히 전도여행을 했을 것이다. 다만 바나바는 기록이 없을 뿐이다. 바나바도 서신이 있었고, 전도여행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 우리는 그를 재평가하게 될 것이다. 바울의 행적을 누가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이 바울행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의 역사가 백년이 되었는데 막상 역사책을 발간하고자 하니 실제 역사자료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가 복음 사역은 했으나 그 활동의 중요한 자료는 작성되지 못했고, 교회가 여러 가지 활동을 했으나 그것을 왜했는지, 무엇을 했는지, 결과는 무엇이고, 평가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교역자들과 사역에 참여한 교인들의 느낌은 어떠했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런 것의 필요를 인식하였다면 자연 자료가 수집되고 잘 보관되었을 것이다.
단위 교회에 대한 연구는 우리나라 교회 사역과 복음사역의 흐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전체 교회가 이해되고 그 정체성이 확립될 것이다. 한국적이란 우리 사회 구성원인 개인이 우리 풍토에 알맞은 것으로 정착되었는가의 문제이며 한국교회가 우리풍토에 적응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 역사적 평가가 요구되며 역사적 평가가 정당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역사자료가 정리되어 있어야한다.
다. 개 교회의 역사와 정체성
몇 년 전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Yok Jakarta)에 회의참석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자카르타 대학에 근무하는 교수 한 분이 나에게 한국드라마 “겨울연가”를 감명 깊게 보았다며 여러 가지 화두로 이야기를 한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이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깊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 뒤 이 드라마를 볼 기회가 있어서 하루 10시간씩 이틀을 보았다.
준상이라는 청년이 교통사고로 과거를 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기가 누구인지?, 준상은 혼란스럽고, 좌절하게 되고, 갈등하며 자기상실 속에서 힘든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과거를 망각한 개인이나 교회, 국가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좌절하는가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과거경험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년기의 불청객 ''치매'' 즉 알츠하이머병은 그 대표적인 질환으로 간주된다. 더군다나 획기적인 치료 방법이 아직 없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의 레이건 전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스스로가 알츠하이머병 환자임을 밝혀 전 세계에 이 병에 대한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알츠하이머병이란 도대체 어떤 병인가. 알츠하이머 질환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환자에게 있어 임상 증상이 동일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지능상실이 운동기능장애보다 항상 먼저 일어난다는 점이다. 초기엔 기억, 언어능력 상실이 되고 여기서 더 진행되면 일상생활을 못하게 된다. 이러한 알츠하이머 질환의 증상은 초기에 기억상실 증상을 나타낸다. 기억상실이 일어나면 자아가 파괴되고 일상생활이 어렵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상실이며, 능력의 상실을 의미하며, 미래지향이 어려움을 의미한다.
한 교회의 지난 역사를 잘 아는 교역자와 그렇지 못한 교역자는 무엇이 다른가? 전자는 그 교회의 정체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과 많은 부분이 일치되어있다. 따라서 안정감, 자신감, 일의 효율성 등이 높다. 그러나 후자에게는 그런 것이 낮으며 상당기간 적응 기간이 요구된다. 신임교역자가 부임한다면 우선 그 교회의 역사적 정보를 많이 공유하도록 해야 한다. 신임 교역자가 그 교회에 가장 빨리 적응하는 전략이 될 것이다.
모든 교회는 칼라를 가지고 있다. 그 것은 역사의 소산이다. 교회의 역사가 양적 질적으로 잘 정리되어 역사적 의미를 추구 할 수 있을 때 자기 것이 무엇인지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국적 교회의 토착화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
첫째, 교회는 교회 활동의 과정(過程), 결과와 평가에 대한 원 자료를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해야한다.
둘째, 자료를 분류하여 저장하고 활용이 가능하도록 보관해야 한다.
셋째, 가장 우리적인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한 정의(교회가 이상으로 하는 것)가 있어야한다.
넷째, 가장 우리적인 것에 견주어 평가가 있어야한다.
다섯째, 주기적으로 역사를 정리하여 간행한다.
이런 도정을 거치지 않고 계속 활동만한다면 한국적 교회의 토착화는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적인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한다. 교회는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 가야하며 이에는 과거의 경험,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 현재의 주변상황 등 많은 요소가 작용 할 것이다.
라. 교회에서 역사자료를 관리하는 전략
교회는 교회 활동에 관한 모든 자료를 정리하여 보관해야 한다. 특히 역사자료는 영구보존해야 한다. 다음 몇 가지 사항은 교회 지도자가 유념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교회는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역사위원회”를 두어야한다. 조직이 없으면 역사자료는 수집되고 보존되지 못한다.
둘째, 교회 활동과 선교 활동은 기록으로 남겨야한다.
교회 활동은 목적적 활동이기에 다음과 같은 의도가 있어야한다.
➀ 교회 활동(수련회, 사경회, 선교활동, 청소년 캠핑 등등)의 목표
➁ 교회 활동의 목표를 행동으로 표현할 책크리스트를 작성해야한다.
예) 캠핑에서 “협동심 기르기”를 목표로 했다면
부족 → → → 충족
1. 식사준비에서 역할 분담을 잘 했는가? 1 2 3 4 5
. 2.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 했는가? 1 2 3 4 5
. 3. 식사 준비 순서가 잘 조정되었는가? 1 2 3 4 5
➂ 책크리스트로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
교역자, 부서책임자, 참가자, 참관자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원봉사자가 책크리스트(checklist)에 품등을 정 하도록 한다.
➃ 수집된 자료로 평가를 한다.
수집된 책크리스트와 활동상황을 평가하여 잘한 것과 잘 진행되지 않은 것을 평가하고 개선점을 기록으로 남긴다.
➄ 개선점과 다음 교회 활동에 반영한다.
평가 결과는 기록으로 보존되고 다음 교회 활동에 항상 연계 되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역사자료는 조직적으로 분류하여 보관하지 않으면 훗날 활용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자료는 가능한 분류체계에 의해 분류하고 컴퓨터에 홀더를 만들어 파일로 보관하도록 하고 홀더와 파일의 리스트를 컴퓨터와 서류로도 보관하도록 한다.
넷째, 매년 담임목사, 협동 교역자, 부서장, 교인 그리고 교육기관의 부장, 교사, 학생 대표, 학부모 대표가 회고를 쓰도록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역사자료가 될 것이다.
다섯째, 교회의 역사자료는 매년 정리하여 별도 홀더와 파일에 보관하도록 한다.
교회의 정체성은 과거 경험과 현재 상황에서 결정된다. 우리는 역사적 비판과 오늘의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에 따라서 그 얼굴이 결정되며 이런 정체성이 분명 할 때 자신감(自信感), 자애감(自愛感), 자존감(自尊感)을 갖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게 된다.
마. 맺는 말
우리는 다음 세대에 훌륭한 문화유산을 넘겨줄 책임이 있다. 그것은 후세대가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된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도정에서 얻은 경험은 후세대에게는 그들의 삶을 영위하는 중요한 지혜이다. 이런 지혜를 유산으로 받지 못한 세대는 매우 불행하다.
다음 세대는 우리의 모습이며 이들이 성공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얻어진 지혜가 다음 세대에 면면히 연결되어 가도록 우리는 유산으로 남겨 주어야한다.
다음 세대가 더욱 행복하고, 의미 있고, 효율적으로 살아가도록 우리가 오랜 시간 투자하여 얻은 경험적 지혜 즉 신앙생활에 대한 각성(覺醒), 전략(戰略), 평가(評價) 등을 넘겨주어야 하며 이런 우리의 노력은 후세대의 시간과 노력을 절감하게 할 것이다.
29. “나눔과 섬김의 교회” 교회지표를 향하여
이 글은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나의 제언: 나눔과 섬김의 교회가 되도록 하자” 라는 주제로 기독교 전문잡지인 “목회와 신학” (1991년 12월호 34-45)의 권두 칼럼으로 실린 글을 수정하여 여기에 다시 실린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以信得義)”는 원리와 믿음의 실현 가치가 사랑이며, 사랑은 희생이 아니라 자기완성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은 완전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며 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삶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새 생명을 얻고 도움을 받아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게 된다.
나는 나눔과 섬김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자기를 실현해 가는 사람의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나눔과 섬김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 얻은 백성의 참된 삶의 표현일 뿐이다.
탈현대사회 교회가 중세기독교에 비해 무엇을 개혁해야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려 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성서 복음주의에 오늘의 교회가 충실하고 바르게 서는가에 있다고 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즉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마 22: 37, 38)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 하라(마 22: 39, 40)고 하신 명령”을 교회가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있다. 오늘 교회가 이 지상명령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 교회 개혁의 방안은 이 새 계명을 효율적으로 지켜가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송재영 목사 부임 후 ‘나눔과 섬김“을 교회지표로 설정하게 되어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했으며 미래 우리 교회의 나아갈 길을 잘 설정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송 목사가 나의 1991년 ”목회와 신학“에 실린 글을 읽고 이런 교회지표를 정한 것은 아니다. 성서의 원리를 잘 숙고하면 누구나 이런 지표를 생각하게 된다.
가. 교회의 참 모습
최근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부흥을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대형화와 전 세계로의 복음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외형적으로 한국교회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참모습이 얼마나 보존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한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고, 성도들이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가는 것이다(엡 2: 20-22). 성도나 교회는 진정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될 때 참모습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도나 교회에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다면 그 결과는 분명할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는 성령의 열매 대신에 육체의 욕망(갈 5: 19)을 따라 모든 악이 성행하게 되고 외식과 가증한 것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e)을 따라 지음을 받았고(창 1: 26)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리를 주셨다(창 1: 28). 그러나 인간은 죄악으로 그 형상을 상실하고 다스리는 권리도 잃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 죽으심은 인간의 본래의 형상을 되찾고 인간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의 자리로 회복시키시는 대 역사요 죄로 죽었던 인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주님께 여쭙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 하나이까" 바리새인의 관심은 천국이 임하는 때에 있었고 메시야가 오시면 바로 지상 천국이 이루어질 줄 알았기 때문에 천국이 임하는 때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질문과는 거리가 있었다.
첫째, 우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즉 천국의 실현은 가시적인 것이 아닌 것이며,
둘째,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도 못하리니" 즉 천국의 임함은 공간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고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 20-21)고 대답하신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천국이 임하는 시간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과 같이 보이나 이 답변 속에는 현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천국은 바로 인간 속에 있음을 분명히 설명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면 우리 속에 천국이 임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천국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넣어주는 생명운동이 될 것이며 이 삶의 활력을 전하는 것이 복음 전파 일 것이다.
오늘 교회의 모습은 마치 중세에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세속의 권세와 야합한 교회와 흡사하여 그 모양은 호화찬란하여 권위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 우리는 조용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유일한 길은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원하시는 일이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베다니 마르다의 집에 예수님께서 방문 하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 접대를 위해 매우 바쁘게 음식 장만을 하였고 그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밑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때 마르다가 예수님께 항의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바쁜 일을 돕도록 요청했다(눅 10: 38-42).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나무라셨고 오히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마리아의 선택을 칭찬하셨다. 이 두 여인의 삶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예수님이 잡히시기 일주일 전 베다니 시몬의 집에 계실 때 마리아는 귀한 향유 나드 한 옥합을 가져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여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행적도 전해지는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이날도 마르다는 일을 보았다고 기록되었다.(요 12: 13)
말씀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딤후 3: 15).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되는 것이다(벧전 1: 23).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20: 31). 우리가 예수 안에서 듣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될 것이다(엡 4: 21-24).
우리의 구원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믿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는 말씀사역이 바로 서야 한다. 모든 인간이 해석하고 가르치는 성경 내용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 아래 가르쳐야 한다. 인간의 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해서는 안 된다. 가르치는 사람은 겸손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성경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고찰하여 아주 두려운 마음으로 해석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믿음의 길로 인도하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도달한다면, 성경을 잘못 가르치면 믿음도 바로 서지 못할 것이고 구원사역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복주의(祈福主義; shamanism)적 가르침은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일시적 흥분을 일으키게 하여 마치 환각제의 효과와 같게 할 것이다. 그래서 차츰 생명력을 잃어가게 한다. 말씀 듣는 것과 삶, 믿음과 생활의 괴리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말씀에 바로 세움을 받았다면 믿음의 분량대로 생활할 것이고 생명력 있는 삶으로 활기가 있을 것이다.
나눔과 섬김은 성경 말씀에 바르게 섰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나눔과 섬김 같이 보이는 행동 즉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네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행위가 있다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 3).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친다. 진정한 나눔과 섬김은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은 믿음에서 믿음은 성경의 원리를 이해하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연유(緣由)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복음 전파사역(행 2: 14-36) 성령 충만(充滿)과 말씀 증거(행 4: 31), 모이기를 힘씀(행 2: 46-47), 물건을 통용(행 2: 44-45, 4: 32)하는 것 등인데 이런 것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생명의 뿌리이며 믿음에서 사랑의 역사가 나오기 때문에(갈 5: 6, 딤전 1: 5) 사랑은 살아있음의 표현이다. 생명의 불꽃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에서 나오지 아니한 사랑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고 허구이다. 초대교회의 사역은 강력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구원받은 생명이 환희(歡喜)에 넘치는 삶을 영위해가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인 것이다.(롬 14: 17) 오늘 교회의 생명력은 구원받은 사람의 환희에서 나오는 자율적 행동으로 간주(看做)된다.
나. 나눔의 자세
교회의 사명은 나눔을 적극적으로 또 바르게 수행할 때 살아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다(갈 5: 6). 나눔의 기초는 믿음이다. 즉 믿음의 행위가 나눔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써 믿음이 온전케 되느니라(약 2: 22). 믿음과 사랑은 안과 밖의 관계이며, 동전의 앞 뒤 면과 같은 관계이다. 더욱이 바울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딤전 1: 5) 그 이상의 말을 하는 것은 헛됨을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사랑을 실현하고 이웃의 아픔을 나누며, 기쁨에 동참하는 정조이입(情操移入)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나눔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여서 나눔의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1) 평등성의 원리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 하셨는데 그가 만드신 피조물은 어느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다. 바닷가의 모래 한 알이라도 같은 것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솜씨이며 바로 조화(cosmos)의 원리이다. 만일 똑같이 생긴 사람 셋이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어떤 혼란이 생길 것인가를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른데 무엇이 평등 한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각기 독특한 존재 이유가 있으며 그 존재 이유가 선·악(善 惡)의 개념이나, 호·악(好 惡)의 개념으로 평가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각기 존재 이유를 충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IQ 150인 사람은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맡기신 사명이 있는 것이고, IQ 50인 사람도 그 나름대로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IQ 150은 훌륭한 사람으로, IQ 50은 못난 사람으로 평가하고 IQ 50인 사람을 실패작, 싹수가 노란 사람으로 치부하고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차이에서 생긴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은 표준(standard) 그리고 대량생산에서 이루어 낸 동종동형(同種 同形; uniform)의 제품이다. 표준에 맞아야하고, 표준 형태와 다르면 잘못 되었고 실패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기준에서 편견을 갖게 되고, 자연현상인 차이에 대해 차별 대우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은 사회 표준에 비추어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평등하게 만드신 것을 인간은 편견을 가지고 차별 대우를 한다. 우리가 진정 성서의 원리로 돌아간다면 존재하는 모든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귀한 존재 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최고의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마 25: 14-30)를 통해 그 개념을 잘 설명하신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충성스럽게 일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이때 그 주인은 충성스런 종(faithful servant)임을 칭찬한다(마 25: 21).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충성스럽게 일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보고할 때 그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을 칭찬하는 것과 같은 똑같은 칭찬(마 25: 23)을 하셨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엄한 벌(마 25: 28-30)을 내리게 된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벌 받는 이유는 주인에 대한 불신앙과 게으름을 벌한 것이지 그가 얻은 소득 때문이 아닌 것이다.
교회는 각 지체로 구성되고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사람들로 구성이 된다(롬 12: 48). 각 지체는 상보적이고 유기적 관계에 있다(고전 12: 12). 바울은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 16)고 가르친다.
여기서 생각해야할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각 지체의 높고 낮음은 없다(고전 12: 12-27).
어느 지체라도 그것이 없으면 그 생존에 위협을 받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적 원리는 역할 분담과 유기적 관계로 교회를 설명할 수 있다. 오늘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많고 주인도 많다. 그와 대조적으로 천한 사람, 낮은 사람도 역시 많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그의 조건, 능력, 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전 12: 11).
그런데 우리의 나눔의 태도는 가진 자가 우월자요 나눔을 받은 자는 열등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나눔이 아니라 “자선(慈善)을 베푸는 중세적 태도”이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태도이다. 자선은 상하개념(上下槪念)에서 출발한다. 높은 사람, 갖은 사람, 지배자가 가련하고 불상한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피지배자에게 베푸는 시혜(施惠)이다. 우리는 자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청지기로서 주인의 것을 나누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 소외된 많은 사람들이 있다. 심신의 손상으로 말미암아 사회생활에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장애인),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고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과 범죄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 생활력을 못 가진 과부,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 생활능력이 부족하여 빈곤한 분들은 특히 우리의 나눔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회와 가정의 문제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고, 이들 나름대로의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는 것이다.
교회는 이들과 나눔을 가짐에 있어 동정이나 자비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체에게 공급하는 자세로 해야 한다. 물질적 나눔보다 더 중요한 것은 편견 없이 형제자매로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둘째, 우리 이웃의 아픔과 고통이 우리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과 유기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게 된다(고전 12: 26).
도시 교회의 부유함과 농촌 교회의 빈한함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농촌 교회의 아픔이 도시 교회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유기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찌 그에게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요일 3: 17). 우리 사회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 모두가 우리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들의 아픔이 모두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오늘 도시교회의 예산 가운데 어느 정도의 비율이 나눔에 쓰여 지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요즘 흔히 집단이기주의, 개교회주의 등으로 표현하듯이 자기교회 발전과 자산증식에 열중하는 동안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헐벗고 가련한 모습으로 외진 곳에 서 계시게 될 것이다.
2) 청지기의 원리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예화를 들어 가르치셨다(눅 16: 1-9).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렸고 주인은 그로 그 직을 정리하게 하였는데, 청지기가 직을 그만둔 뒤의 일을 걱정하여 주인에게 기름 백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오십 말을 탕감해주고, 밀 백석을 빚진 자에게는 이십 석을 탕감해주었다. 이런 소행은 이중으로 주인의 재물을 손해 보인 행위로 주인은 그를 결코 용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인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눅 16: 8).
여기서 주인과 청지기는 모두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주인이 원하는 대로 사용함으로써 주인을 기쁘게 하는 직임이다.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주인의 일을 수행한다(마 20: 8; 눅 12: 42).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의 집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자는 그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복이 있을 것이다(눅 12: 43). 그리고 주인은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게 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를 우리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그는 결코 지혜로운 자로 칭찬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늦었지만 또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에게 탕감해 주었지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계산과 인간의 윤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즉 재물, 직위, 건강, 시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시 24: 1; 롬 14: 8). 그래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나눔의 태도 가운데 “내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생각은 긍정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을 내가 주의 뜻대로 나누고 있음을 확신하고 조금도 자긍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 교회의 나눔은 어떠한가. 나눔을 널리 선전하여 교회의 이름을 빛내고 있지는 않는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신(마 6: 3) 예수님의 교훈은 우리의 행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나눔을 은밀히 하라고 경계하신 주님의 가르침은 오늘 교회에서 어느 정도로 지켜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헌금이 개 교회 발전에 모두 쓰여 진다면 헌금의 의미는 상실될 것이다. 헌금은 개 교회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고 교회는 그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대로 그것을 사용해야 하며 그 주인이 은밀히 나누기를 원한다면 그런 방법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교회의 나눔이 매우 인색하다. 주님은 한탄하시며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 종에게 그 직을 정리할 것을 명하시게 될 것이다. 주의 뜻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재물, 직위, 시간은 개인의 탐욕에 따라 쓰여 진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세상적인 것이요 영의 세계를 생각지 않는 불의한 청지기이다.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얻었으며 모든 것을 받았다. 우리가 노력하여 많은 것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셨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우리의 죄악을 돌아보시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값없이 은총으로 모든 것을 후하게 주신 것이다.
우리가 행해야 할 나눔의 원리는 내 것을 나누는 입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빚진 자(고전 6: 19-20)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청지기로 집안 식구에게 나눌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수고하며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 35)고 교훈하였다.
다. 섬기는 삶
교회의 섬김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그로 하여금 섬기는 삶을 영위하게 할 것이다. 주님을 섬김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일이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형제를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일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주께서 오른쪽에선 사람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 35,36; 막 9: 37)고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한 결 같이 그런 일이 없었다고 송구스러워할 때 왕은 말하기를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 25: 40)고 답하신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바로 우리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
우리의 섬김의 자세는 나의 삶 전체를 통한 것이기 때문에 특정 시간, 특정 상황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삶은 바로 일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 17)고 하셨다.
1) 낮아져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마 20: 28). 큰 자가 되고자 하면 의당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마20: 28; 막 9: 3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 14). 예수님은 스스로 섬기는 본을 보이셨다. 선생의 섬김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본을 받아 섬기는 자세로 또 종의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벧전 4: 10).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 11) 이런 섬김의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섬기는 자세를 몇 가지 찾아본다.
첫째, 교회는 섬기는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어떤 직분이나 은사가 더 귀하고 소중하며 어떤 직분은 천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롬15:25).
둘째, 서로 섬겨서 모두가 큰 자가 되어야 한다(마 23: 11). 서로가 종의 자세가 될 때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셋째, 모든 섬김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의 삶의 표현일 것이다. 이런 사람의 삶은 섬김으로 나타난다.
넷째, 섬김을 위한 섬김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외식이고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접받기를 즐기고 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이런 행위가 얼마나 가증스러운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교회 직분 자들이 권위의 상징이고 그것이 위계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 교회에서 진정한 섬김은 없을 것이다. 목사나 장로이기 때문에 대접받아야 한다면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생각이다. 장로는 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섬김의 본(행 20: 35)이 되어야 한다.
2) 일을 사랑함으로
잠언의 기자는 현숙한 여인을 노래하였다.“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상고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누어주며”(잠 31: 13-15). 이 현숙한 여인은 집안일을 살펴서 필요한 일을 제 때에 수행(잠 10: 5)하는 규모 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나옴을 서술한다(잠 31: 30). 그리고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는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살전 1: 9; 살후3: 8). 바울 사도는 자신의 천막제조업을 계속하면서 교회를 섬겨서 많은 교회에 본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종에서 자유를 얻었다(레25: 10; 렘 34: 8,9), 양심의 자유를 얻었고(고전 10: 29),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고(롬 7: 1-4; 갈 5: 1), 그래서 예수 안에서 참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요 8: 36; 갈 2: 4). 자유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환희이다. 성령이 충만하여 수행하는 일은 그 모두가 기쁨이다. 바울이 수없는 고난을 당했으되 오히려 그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음은(행16: 25, 26) 그를 제약하고 있는 조건이 그를 어찌할 수 없음이다. 칼이나 창이나 감옥이나 그를 위협하는 어떤 것도 그를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넘치는 기쁨 가운데 행하는 일들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는 것이며, 이런 일을 통하여 교회, 이웃, 가정을 섬기게 되고 그럴 때 변화된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교회가 하는 일은 자발적이고 활력이 넘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그것이 교회의 일이든 직장의 일이든 어느 정도나 자율적이고 그 일을 통하여서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지 또 그 삶이 긍정적인지 그리고 적극적인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특히 직장에서의 섬김은 어떤지를 더 따져보아야 한다. 직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터전이다. 거기서 내 인생이 실현되고 있으며, 거기서 내 빛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시간을 채우고 급료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직장을 생각하고 있다.
성령의 감동하심과 주님께 받은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에게 일의 의미는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구원을 얻기 전에 인간은 일이란 힘이 드는 것과 고통의 상징이었지만 은총의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은 즐거움이요,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좋은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모습이 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많은 일을 수행하여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이 쉽고,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며 그것이 어렵고 무겁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애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 28-30)고 하셨다. 믿음에 토대한 일이 아니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그러나 믿음에서 나온 수고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영과 육을 강건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 교회는 많고 교인의 수는 놀라울 정도로 증가해서 일천만 성도를 자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천만 성도를 헤아리는 오늘 우리 사회는 무엇이 변했는가. 아름다운 교회당이 늘고, 교회 재산이 증식되었고, 기도원이 생겼고, 종교재단의 빌딩이 세워졌는데, 또 수많은 목회자와 교회 직분 자가 생겨나서 교회 지도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많아졌는데, 우리 교회 안에는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는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심령에 넘치는 기쁨과 주어진 일이 어떤 것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즐겨 수행하는지 의문스럽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겨우 채우는 월급쟁이의 신분에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해 가는 주의 자녀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만든 제품은 그 품질이 다를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한 일은 오류가 적으며, 확실하고, 누구나 그리스도인에게 일을 맡길 때는 안심할 수 있어야 한다.
섬김의 자세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은총의 생활을 영위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섬김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수행하는 그 자세가 바로 섬김인 것이다. 이런 은총의 생활이 믿음에서 연원하는 것이고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고 섭리이기 때문에 그 순서를 논한다면 믿음이 없는 섬김은 존재하지 아니할 것이다(빌 2: 16).
교회는 교회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은 어디나 성전이다(고전6: 19-20). 그들이 이르는 곳에는 변화가 있어야 하고 생명 역사가 있어야 한다. 말만 많이 하고 실천이 없다면 그 것은 허구요 죽은 시체에서 나오는 썩는 냄새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의 역동적이고 활력에 찬 삶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은 그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재음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의 힘을 믿게 될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것이 헛됨은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에 기초하지 아니한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눅 5: 5; 요 21: 3). 믿음의 사람들의 수고는 모든 인류에게 복을 주게 될 것이다.
잠언 기자는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 34)고 하셨다. 믿음이 역사하여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다(벧후 1: 5-7). 사랑의 역사는 우리를 부지런하게 만들 것이고 그것이 주 믿는 자의 축복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넘치는 힘과 활력과 광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지런하여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헛된 것이다. 우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다(시 127: 2). 믿음 없는 부지런함은 피곤하고, 힘들고,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라. 맺는 말
오늘날 한국 교회의 왕성함은 실로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다. 그러나 이런 외적 성장에는 반드시 이물질이 섞이게 마련이다. 바울의 선교에 항상 다른 복음이 뒤따랐던 것과 같다. 그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모습은 사라지고 교회가 형식주의나 권위주의에 빠지게 된다. 더 나아가 물질적 부요함은 모든 것을 물질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물질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교회 본래의 사명 즉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일과, 믿음의 증거 즉 사랑을 실천하는 본질적 일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이런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근본 자세에 있어서는 우리 주님이 전혀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고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다.
오늘의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성경말씀을 공부할 기회가 많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날로 더 확산되어야 하리라 본다. 그러나 말씀이 바르게 해석되고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 사고나 경험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조하는, 그래서 많은 성도가 성경적 진수(眞髓)를 맛보지 못하고 가르치는 자의 편의에 따라 오도(誤導)된 말씀을 배우게 해서는 안 된다. 신학교 교육은 물론이고 모든 가르치는 사람들, 주일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바르게 가르칠 수 있도록 자질을 함양시켜야 한다. 가시적·외형적인 일에 정신을 쏟기보다는 지도자 양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다. 믿음이 아니었다면 모일 이유가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였기 때문에 그 나타남이 있어야 한다. “믿음의 표현은 사랑이다”. 사랑은 나눔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나눔의 자세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나눔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믿음 안에 있는 형제자매, 아직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분들 그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각기 소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높고 낮음이 없는 것이다. 나눔의 자세는 평등성의 원리에 의해서 수행해야 한다. 유기체로서 교회를 생각하여 형제(지체)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느껴 저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의 것이고 우리는 오직 그의 청지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에게 나눔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청지기의 본분을 잘 수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청지기가 주인 행세를 하면 불의한 청지기가 되고 그 직분을 계속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이 섬기러 오신 것 같이 교회는 섬기는 자세로 존재해야 한다. 주께서 선생으로 종의 자세를 취하셨는데 우리가 그의 제자로서 주인의 자세를 갖는다면 얼마나 송구스러운 일인가. 주님의 교훈은 종의 자세로 일하는 사람이 가장 큰 자임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바로 종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훌륭한 큰 자의 집단이 될 것이다. 종의 자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갖는 힘 있는 자세일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서 우리는 섬김을 실현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삶 그 자체가 일이요, 그 일은 믿음의 일이기 때문에 자율적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은 즐거움이요 더 나아가 주안에서 자유를 얻은 자의 환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그곳에 생명운동이 일어나서 삶의 역사가 전개될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한국사회에 변화가 없다면 또 생명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교회는 본연의 기능을 찾아 초대교회의 모이기를 힘쓰는 일과 기도와 성령의 역사하심과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과 지체의 어려움을 돌보아주는 일에 열심을 다해야겠다.
침산제일교회의 교회지표를 “나눔과 섬김”으로 하고 이웃과 지역사회와 농어촌 교회와 해외 복음화를 위해 교회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우리 교회는 살펴 보아야한다.
우리의 구원에서 나오는 생명의 역사라면 우리는 계속해서 주의 뜻에 따라야한다. 그러나 인간적 계획과 성과위주의 일이라면 지금의 일을 그만 중지하고 우리의 영성부터 다시 점검해야한다. 먼저 우리가 살아서, 살아있는 표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에필로그
나의 글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리 삶의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며 우리 교회 성도 모든 분들이 이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리라 믿는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는 삶 속에 내포되어있다. 그래서 삶에 관한 이야기는 그 속에 지혜가 담겨져 있다.
우리 교회에 수많은 숨은 봉사자와 사역자들의 수고가 오늘 우리 교회를 이루었다. 1950년대 어려웠던 시절의 사역자들은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했고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우리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해 왔다. 그들은 이름도 없었고 그들의 빛은 모두에게 가리 워서 공동체의 빛과 구분되지 아니했다. 정보시대에 접어들면서 교회도 질적 추구를 하게 되었다. 교회 건물도 좋아지고 사람들 삶도 풍요로워 졌다.
교인들의 직업도 고급스러워 졌으며 삶의 질도 좋아졌다. 우리 국민의 소득은 2만 불이 넘게 되었고 모든 시설과 설비며 생활양식이 변했다. 그래서 과거는 기억하기 싫은 것들이 되었으며 그 옛날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아픔은 가능한 기억하지 아니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 국민은 지난 삶을 기록하고 정리하여 후세대에 전수하려는 생각이 부족하다.
우리의 지나온 세월 가운데 기억하기 싫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기억하기 싫다하여 그 것이 우리의 과거에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픈 과거는 더 반추해야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어쩌면 우리의 아픈 과거를 더 많이 썼는지 모른다. 우리의 과거사 중 실수나 실패는 앞으로 역사에서 반복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내가 실명을 거론하면서 사실을 기록한 것은 어떤 분의 공을 기리 찬양 한다 던지, 어떤 분을 낮추고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며 후세대에 주는 의미와 교훈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사실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 살았다고 하여 모두를 동일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입장이 다르며 사고의 틀이 다르기 때문에 잘 못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가장가까이에서 경험 할 수 있었기에 회고록을 집필하기로 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그 분의 섭리에 따라서 57년을 경영하셨다. 그리고 오늘 우리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게 인도 하셨다. 우리는 오늘 우리 교회의 사역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우리 교회가 옹달샘에서 시작하여 실개천을 이루고 나아가 강을 이루면서 도도하게 흐르는 힘을 갖게 하시고, 용솟음치는 도약을 허락 하시며, 새로운 물길을 여는 파괴력을 갖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데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 사람들은 이런 힘이 적은 옹달샘에서 시작 되었다고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그 연원을 소중한 것으로 간주 하지 아니한다. 바다와 큰 강(大 江)은 그 연원으로부터 이해 할 때에만 정체성을 갖게 된다. 우리 교회는 오늘을 지혜롭게 경영하기 위해서 지난날을 기억하며 그 역사적 자료를 미래로 가는 자원으로 삼아야 한다.
일본인 들은 그들의 기록을 아주 적은 것이라도 보관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옛 문서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 일본 도서관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기록 자료를 결코 소홀이 다루지 아니한다. 그래서 지난 일들이 기록으로 보존되고 후세대에 전해진다. 문화의 선진성이란 이런 것이다. 선진국이란 경제적으로 부요한 나라가 아니다. 정신문화가 정립되어 있는 사회가 선진국이 된다.
이제 우리나라 교회가운데 역사가 100년을 가늠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 교회가 100년이 되었다는 것과 그 교회가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것은 다르다. 과거경험을 보존하지 못한 교회는 연수가 아무리 많이 되었어도 역사가 있는 교회라 하지 아니한다. 그들에게는 그긴 역사를 자랑 할 만 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 사도행전 중 바나바의 기록을 보라. 그는 성경에 사도 바울과 같이 동행한 제1차 전도여행 까지만 그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제2차, 제3차전도 여행에 바나바의 기록은 없다. 말하자면 바나바의 기록은 제1차전도 여행으로 끝이 난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 후의 바나바의 사역을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 분명 그는 계속 전도여행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후세대에 아무런 지혜가 될 수 없다. 만일 누가가 바나바를 따라 다녔다면 사도행전이 "바울행전"이 아니라 "바나바행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하나는 삶의 도정 그자체가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그 것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이나 집단만이 역사를 갖는다. 지난날을 소중이 다루지 아니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결코 고급사회로 나아가지 못한다.
둘째는 우리의 삶은 기록으로 보존해야 한다. 우선 기록을 남겨야하고 다음 그 기록을 보존하는 방안이 있어야한다.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자료가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고구려 구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며, 조선조에서 독도와 같은 영토문제에 대해 확실한 기록을 보존 했다면 오늘과 같은 일본과의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침산제일교회가 과거의 지혜를 잘 활용하는 교회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기록으로 잘 남기고 보존하고 검토하여 새로운 지혜로 재창출해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너무 바쁘게 살다보면 현실주의자가 되어서 후세대에게 전달해 주어야할 자산을 소홀히 다루게 된다.
또 중요한 자료는 우리 삶에 대한 구성원의 가치평가, 느낌, 절정경험(絶頂經驗; 神秘的 體驗; peak experience), 구체적 관계 등을 기술한 회고의 글이다. 이런 글은 미시사 특히 역사의 질적 접근을 가능 하게한다.
침산제일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도되는 교회로서 매일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바란다. 온성도의 강건함과 가정의 화평과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로 영광스런 승리의 삶을 이루어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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