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 장로의 교회생활 회고 II : 따뜻한 영혼들과의 대화(2)
따뜻한 영혼들과의 대화(2) 차 례
9. 부흥사 박경남 목사
10. 박경남 목사 시절의 장로
11. 초대 우리교회 여성도 들
12. 초대 우리교회 장립집사
13. 50, 60년대 주일학교 교육
14. 사소한 일에서 생긴 갈등
15. 당회의 현명한 판단
16. 교회의 정체와 갈등
17. 편견과 오해
18. 지켜져야 할 일
19. 장로의 고민
<일 러 두 기>
1. 이 내용은 반드시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적 흐름은 연대순으로 이루어 졌다.
2. 인명 뒤에 ( )내에는 (출생연도- 소천연도)가 기록 되었으나 없는 경우는 조사가 불가능 했던 경우이다.
소천연 도가 없는 경우는 생존해 계신 분이다.
3. 우리교회 명칭은 4번 다르게 사용 되었다.
첫째, 북부교회(1951년 9월-1952년 3월)
둘째, 천우교회(1952년 4월-1958년 3월)
셋째, 천일교회(1958년 3월-1965년 3월)
넷째, 침산제일교회(1965년 3월- 현재)
4. 우리교회 교회당은 대구광역시 북구에 세 번 건축 되었다.
제1교회당 1952년-1955년 침산동 222-4
제2교회당 1955년-1979년 침산동 266-1
제3교회당 1979년-현 재 침산동 22-100
5. 이 글에 나오는 연도는 2008년을 기점으로 한 것임
따뜻한 영혼들과의 대화(2)
9. 부흥사 박경남 목사
박경남(朴京南; 1922-2009) 목사가 우리 교회 부임 하실 때는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아이들(박헌명, 헌욱, 헌승)도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이었고 왕성하게 활동하실 수 있는 연령대였다. 박경남 목사는 황해도 은율군이 고향이시고 광복 이후에 남쪽으로 오신 분이다. 의성에서 목회하실 때 결혼하여 우리 교회에 부임하실 때에 장자가 5, 6세이었으니 젊은 나이였다. 본인도 자주 언급했지만 “나의 정력은 침산제일교회에서 다 쏟았다”고 할 정도로 우리 교회에서 정열적으로 목회를 하신 분이다.
박 목사께서 우리 교회 부임 하실 때는 아직 우리의 형편이 낳아진 때가 아니다. 제2교회당은 미완(未完)이었고 교인 수도 적었고, 교회재정 역시 어려웠다. 교회 천정을 하는 일, 마루를 놓는 일, 벽을 바르는 일, 종각을 세우는 일 그 모두가 목사의 일이었고 일을 마치고 공사 대금을 받으러 오는 것도 목사에게 오고, 박 목사는 궂은 일 모두를 맡아 하셔야했다. 그는 미장이도 되고, 목수도 되고, 소소한 모든 일을 돌 보아야했다.
성품이 온유하신 분이어서 남과 다툰다든지 언쟁을 하지 않으셨다. 당회에서도 잘 조정하고 한 번에 아니 되면 두 번 세 번 설득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 나아갔다. 1959년 제2교회당 헌당식까지 박 목사의 지도력으로 점차 교회 안정이 이루어 저 갔다.
교회 안정은 감성적 반응이나 단순한 기분으로 일을 처리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고, 믿고, 사랑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바라볼 때에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신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고, 감정이 앞서면 사과(謝過)해야 한다. 선(善)을 이루어 가는 과정은 조금씩 늦게 말하고 반응하는 것이라 본다. 그 것은 더 큰 선이 무엇인가를 생각 할 여유를 갖게 한다.
남의 앞에서 말하는 것을 삼가해야한다. 말을 하고자 하면 덕스러운 것을 말하고, 남의 허물을 말하면 실수하게 된다. 믿음의 형제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땅을 기업으로 얻어야 한다. 박 목사는 온유한 분이었고 말의 실수가 없었던 분이다.
박경남 목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60년대 한국의 부흥사로 스타가 되셨다. 많은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셨고 따라서 우리 교회도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60년 초 이재흥 장로, 김성분 권사, 심정희 집사 등은 박 목사 목회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분들은 박 목사의 든든한 기도의 후원자이며 경제면에서도 도움이 되었다. 이런 여건의 조성으로 1960년대에 와서 교회는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박경남 목사는 60년대 전국을 누비는 부흥사가 되어 한 달에 한 두 번씩 부흥 사경회를 다니시게 되었다. 이 시절 부흥회는 월요일 저녁 집회부터 토요일 새벽 집회까지 계속되니 토요일 오후에나 교회에 돌아오시게 된다. 그래도 건강을 잘 유지하고 집회도 항상 성공적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어 박 목사를 크게 쓰셨다고 믿는다. 그는 항상 집회에서 책망과 회개를 촉구했다고 한다. 우리 교회에서 온유하신 모습과는 달라서 나는 의아해 하곤 했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은 회개운동의 사자로 쓰셨던 것 같다. 집회에 내가 참여해 보지는 않았지만 후문에 의하면 질타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다는 분들이 많았다.
당시 부흥회를 하고나면 그 교회에서 부흥사가 돌아 갈 때 과일이며 떡 같은 것을 만들어 보내곤 하였다. 우리 몇 사람은 매 토요일 교회에서 주보 준비나 주일학교 준비 등으로 바쁜 오후를 보내었다. 이 때 박 목사가 가지고 오신 음식은 우리들의 좋은 간식이 되곤 하였다. 배고픈 청년들에게 이런 음식은 반가운 것이었다. 그래서 토요일만 되면 으fp 기다리곤 하였다.
1964년 이재흥 장로가 서울로 전근이 되시고 이사하게 되니 장로 장립 후 장로로 일도 별로 못하시고 떠나시게 되었다. 이재흥 장로는 1965년 이명(移名)해 가시고, 1966년 김성분 권사가 또 서울로 이사하시게 되었다. 교회에 큰 몫을 하시던 두 가정이 떠나니 무척 허전하였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은 박경남 목사도 서울로 가신다는 것이다. 1966년은 이런 저런 일로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용은 김성분 권사 가정에서 서울 서교동에 교회 부지를 마련하고 이재흥 장로 가정과 같이 새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서울에 세워지는 제2침산제일교회인 셈이다. 박 목사는 떠나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이다. 박 목사는 새로 시작하는 교회이니 교회 명칭을 큰 교회 명칭을 따와야겠다고 생각하여 대구에서는 큰 교회인 서현교회 명칭을 쓰기로 하였다. 현재 서울 서교동에 있는 서현교회 이다. 1967년 서울 서현교회는 설립되고 장족의 발전을 하여 현재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박 목사의 사의 표명(辭意 表明)이 있었고 당시 장로는 정 순 장로 한 분 뿐이니 후임 결정에 내가 자연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후임 목사 결정을 위해 성주와 상주에 다녀왔다. 성주에서는 별 문제 없이 다녀왔는데 상주에 간 날은 겨울날씨가 너무 추웠다. 버스에서 내리니 예배 시간까지 40분이상의 여유가 있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도무지 밖에 서있을 수가 없었다. 길가 한 집으로 들어가 좀 쉬어가기를 청했다. 인심 좋은 주인은 어서 들어오라고 허락하고 따뜻한 자리를 내어 주어 쉬어 가게 하였다. 교통사정이 좋지 아니한 시절 상주 길은 결코 편한 것이 아니었다. 후임 목사 결정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후보로 추천이 된 분은 모두 방문하여 설교를 청취하고 교회에 보고하였다.
우리 교회 역사에서 목사 시무 기간이 최명순 목사 2년5개월, 김길순 목사 11개월, 이의호 목사 5개월로 단명하였는데 박경남 목사는 10년 11개월로 최장수(最長壽) 목사 이셨다. 우리 교회는 목사가 단명(短命)하였다. 나는 항상 이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평생 목회자를 원한다.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는 시류(時流)에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믿음 이라는 패러다임(paradigm)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하는 곳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 송재영 목사가 12년을 넘겼고 10년을 넘긴 분은 박 목사 뿐이셨다.
그런데 박경남 목사 퇴임을 위한 준비가 전연 없었다. 퇴직금을 준비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퇴직금으로 드릴 재정적 여력도 없었다. 11년 봉직에 1개월 은사금을 드리는 것으로 양해를 구하였다. 이때 나는 교회 회계여서 내가 돈을 마련하여 전달하고 매우 송구한 마음을 어찌해야 할는지 몰라 했다. 그 후 교회는 매월 은사금의 1할을 교직원의 퇴직금으로 적립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박경남 목사 후임이신 정계종 목사부터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박경남 목사는 캐나다 벤쿠버(Surry, Vancouver, Canada)에 거주하시며 노년을 주님 앞에서 아름답게 보내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장자 헌명은 한의사로 벤쿠버에서 개업하고 있으며, 둘째 아들 헌욱과 셋째 아들 헌승은 목회자로 주안에서 복을 얻었고, 딸 헌영은 장로 가정의 현숙한 주부로 성공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 박 목사 내외의 평생 기도생활은 그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할렐루야로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린다.
박경남 목사의 흔적으로 우리 교회에 처남인 김치환 집사와 부인 추애자 권사 그리고 딸 김예경 선생이 주 앞에 헌신하고 있으며, 김 집사의 장녀 김재경(최경근) 집사 내외와 그 가족이 주께 영광을 돌리고 있음을 감사 한다.
10. 박경남 목사 시절의 장로
우리 교회는 장로 농사가 잘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잘 있던 사람도 장로가 되면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정 순 장로 혼자서 교회를 섬겨야하는 때가 많았다. 박경남 목사 부임 후 타 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하시고 시무하시다 이명해 오신 황약슬 장로가 우리 교회에서 취임하신 일이 있었고,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신 이재흥 장로 장립이 있어서 두 분의 장로를 보충했다. 그러나 이 분들도 취임과 장립 후 아주 단시간 교회 봉사를 하시고 떠나시게 된다. 박경남 목사 11년 시무에 장로 2인을 세웠으니 농사로 치면 흉작이라 하겠다.
가. 황약슬(黃約瑟) 장로
황약슬(일명 황요셉) 장로는 다른 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하신 분이다. 우리 교회 역사상 유일하게 다른 교회에서 장립하시고 우리 교회에서 취임하신 분이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에서 장로 장립하신 분이 황 장로 뿐이셨다.
황 장로는 1957년 2월 박경남 목사 위임식 때 같이 장로 취임을 하신 분이다. 우리 교회 초창기의 수고하신 장로이시다. 가족이 침산동에 거주 하면서 따님들과 조카 등 온 가족이 교회를 잘 섬기셨다. 황 장로는 서문시장에서 상업을 하셨다. 황 장로의 가정사를 내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대가족이었던 것 같다.
황약슬 장로를 위시한 따님인 황혜순 선생과 황정순 선생 그리고 족하 등 황 장로 가정의 봉사는 교회에 여러 가지로 기여한바가 많다.
성품이 온화하시고 교회 일에 혼신을 쏟곤 하셨다. 어려웠던 시절 교회를 섬기는 일이 쉽지만은 아니했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항상 자상하시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시는 일을 잘 하신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정 순 장로 혼자서 교회를 섬기셨는데 황 장로의 취임은 정 장로에게 힘을 보태는데 부족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황 장로 역시 2년여라는 짧은 기간 시무하시고 교회를 떠나셨으니 우리 교회 장로는 단명이었다.
황 장로 역시 대구분이 아니셨다. 사업 관계인지 1959년 강원도 춘천으로 이사하시어 우리 교회를 떠나시게 되었다. 이때 나는 군에 입대하여 있었기 때문에 떠나시는 것을 뵙지 못했으나 그 후 춘천에서 몇 차례 뵌 일이 있었다.
나. 이재흥(李在興; 1921-1975) 장로
이재흥 장로는 1950년대 대한방직에 과장과 차장으로 근무 하시면서 우리 교회를 섬기신 분이다. 부인 심정희 권사는 전통 있는 믿음의 가정 출신으로 안나와 요한나와 같은 여성도 이셨다. 심 권사는 우리 교회 1957년부터 서리 집사로 봉사하기 시작하였으나 이재흥 장로는 회사일 등으로 바쁜 생활을 하다 좀 늦게 1962년에 서리집사로 선임되었고 이때는 벌써 모든 삶이 교회 중심으로 바뀐 후였다.
이 당시 이 장로의 교회생활은 참으로 전심전력을 다하는 모습이셨다. 내외분의 아름다운 교회 생활은 우리 교회 귀감이 되었고 박경남 목사 목회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 믿음과 순종의 종이었다고 생각된다.
바쁜 직장 생활에서도 교회일이라면 항상 선두에서 솔선수행 하시었고, 당시 대한방직공장 직장 구역의 선교는 이 장로의 후원으로 활기 차 있었다. 우리 교회 여 청년의 대부분은 직장여성 이었다. 대한방직, 제일모직, 내외방직, 삼호방직 등에서 많은 청년들이 나아오고 이들의 활동 역시 활발하였다. 이런 일을 수행하는데 이 장로의 노력과 힘은 크게 역사하였다.
이 장로 내외의 섬기는 삶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1960년대 초 정 순 장로, 이재흥 장로 내외 분, 김성분 권사 등의 섬김으로 교회는 활성화되고 재미있는 교회로 변모해 갔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1960년 1월 돌아오니 군에 입대하기 전보다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마치 새봄을 맞이하는 들녘과 같았다. 새싹이 움돋고, 생명력이 넘치고, 봄기운이 아지랑이가 되어 있었다.
이재흥 장로는 김성분 권사와 더불어 박경남 목사 목회의 전환점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나는 생각 한다. 이 분은 기도에 힘쓰고,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시고, 무엇이나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충성스러운 종을 우리 교회에 오래 머물게 하시지 아니했다. 1964년 장로 장립하는 해에 서울 본사로 전근이 되셨다.
사실 장로 장립 후에는 제대로 교회를 섬길 시간도 없이 서울로 가신 것이다. 당회록에는 1965년 12월 장로 사임으로 되어 있으나 1964년 서울 근무를 하셨으니 우리 교회 시무는 사실상 어려웠다. 우리 교회 장로 단명은 이렇게 세습되어 왔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재흥 장로 내외분의 교회 섬김은 오래도록 기억이 된다. 이분들이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아름다운 기억은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이재흥 장로의 맏 따님인 이경신(서울승동교회) 권사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재흥 장로와 심정희 권사(서울 서현교회 권사)에 관한 자료를 부탁하고, 옛날 기억을 더듬는 아름다운 시간을 가졌다.
이경신 권사도 우리 교회에서 초 중학을 다녔으니 우리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그런데 벌써 환갑을 넘겼다니 세월의 빠름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많은 분들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고 오늘 그 옛날을 회상하는 회고록을 쓰고 있는 내가 그 분들의 증인이라 자부 한다. 나의 생애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구자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나의 복이라 생각 한다. 이재흥 장로 내외분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더하시기 기원하는 바이다.
11. 초대 우리 교회 여 성도들
교회가 설립된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주의 신실한 일꾼으로서 안나, 요한나와 수산나 같은 분들이 수없이 많았다. 나는 여기서 초대를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로 한정하고 장기간에 걸쳐 교회활동을 하신 분만 다루고자한다.
이명도(李明道; 1892-1975)권사는 우리 교회 제1호로 권사 취임(1959. 10. 29)하신 분이시다. 이명도 권사는 서울에서 피난오신 분인데 아들 이영수 집사(후에 서울 문화교회에서 장로 장립)와 같이 피난 오셔서 교회에 열심 으로 봉사하신 분이다. 당시 교회 성도 역시 많지 않았고 일할 분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권사 모자의 교회 봉사는 남다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명도 권사는 기도 많이 하시고 교회 일을 친히 감당하시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명도 권사는 교회 질서 지키는 일에서도 남다르셨다. 당회 치리에 대해 항상 존중하고 그 권위에 순종하시는 분이셨다. 당회의 권위는 당회 스스로도 세워 나아가야 하지만 교인들이 존중할 줄 알 때 더 아름다워진다.
교회는 교인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교인의 영적 성장과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천국을 성취하도록 프로그램을 잘 구성해야 한다. 이런 계획을 수립하고 지도하고 실천하는 기관이 당회이다. 교인은 이런 당회의 권위를 존중해야한다. 그래야 개인의 영적 성장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당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개인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이명도 권사는 교회 봉사에서도 남다른 바 있으셨지만 권사로 당회의 치리를 잘 순종하신 분이다. 요사이 세태는 지도층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많다. 이것은 결코 본인에게 도움이 아니 되는 일이다. 이명도 권사는 우리 교회 1953년 첫 제직회 구성 시 서리집사로 1955년 명예권사로 시무하시다가 1959년 권사취임을 하셨는데 이는 우리 교회 권사 제1호가 된다, 1960년 서울로 귀향하시기까지 기도의 어머니로 수고하신 분이다.
서울로 귀향하신 후 아드님이신 이영수 장로와 자부되시는 김관옥 권사는 서울 문화교회에서 평생 충성하여 교회를 섬기고 지금은 교회 원로로 교회를 지키고 계신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김성분(金聖粉; 1917-2006) 권사는 우리 교회에 1960년부터 나오셨다. 비교적 늦게 오신 분이다. 경상북도 의성 분으로 대구에 나오셔서 칠성교회를 다니시다가 우리 교회로 이전해 오셨다. 김 권사는 전 생애가 기도의 삶이었다. 당시 우리 교회는 가난한 교인이 많았다. 1961년이라 생각되는데 그 해 너무 흉년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먹고사는 것이 어려운 교인이 많으니 교회인들 어찌하겠는가? 김성분 권사는 가지고 있던 패물(貝物)을 모두 팔아서 쌀을 사서 굶주리는 교인들에게 비밀리에 나누었다.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동안 이런 일을 수없이 하시었다.
박경남 목사 사모이신 김순희 사모, 심정희 집사 등과 어울려 저녁마다 교회에서 기도하시고 새벽이고 낮이고 모이면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심방하시고, 봉사하시는 일로, 나누고 섬기는 일을 하신 분이다.
김 권사 가정에서 서울 서교동에 땅을 구입하고 박경남 목사, 이재흥 장로 등과 같이 서울 서현교회를 개척하셨다. 이런 연유로 박경남 목사가 우리 교회를 떠나시게 된다. 박경남 목사가 캐나다로 목회지를 옮기시고 난 다음에는 김성분 권사의 셋째 사위 김경원 목사가 서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지금까지 시무하고 있다.
김성분 권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하신 분이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세상의 학문이 어찌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하겠는가? 김 권사는 하나님의 지혜를 선물로 받은 분이다.
교회에서 봉사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하여야할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면 마귀가 기뻐 할 것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봉사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복을 얻은 사람일 것이다. 김 권사는 그런 분이었다. 우리 교회에 잠시나마 이런 분이 권사로 계셨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기쁨이다.
오신복(吳信福; 1923- )권사는 정 순 장로 부인으로 우리 교회 초기부터 28년간을 교회 제1선에서 봉사하시고 기도하신 대표적 여성도이시다. 장로 부인으로서 교회의 모든 일을 도맡아해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여전도회장은 맡아 놓고 해야 했고 교회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항상 진두지휘하시는 입장이셨다.
오신복 권사는 음식 솜씨도 대단하여 교회 음식 장만에는 항상 리더로서 역할을 하셨다. 그리고 당시 먹 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젊은 청년들에게는 정 순 장로 댁에 초청 받아 시원한 평양식 국밥을 대접 받으면 최고의 날이 되었다. 50년대 정 순 장로 댁은 칠성시장 근처에 거주하셨고 교회는 침산 로터리에 접하여 있었기 때문에 청년들은 교회에 모여 서 정 장로 댁까지 걸어서 갔다.
교회에서 칠성시장까지는 모두 논밭이기 때문에 요사이와 같은 대로를 생각하면 아니 된다. 칠흑 같은 어둠을 걷노라면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일어나곤 하였다. 평지라도 앞사람이 건너뛰면 뒤 사람도 따라서 뛰게 된다. 이런 장난은 그 시절 조그만 낭만이 아니었을까?
1950년대 당시 사정은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국밥에 맛있는 김치와 반찬 몇 가지는 우리의 허기를 면하는 영양소이었다. 젊은이들은 국이며 밥을 몇 그릇씩 먹어치우고 오 권사께서는 계속 공급해야하는 입장이다. 그 분은 그 것을 즐거움으로 하시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간에는 의례 유머가 나돌게 된다. 평양의 어느 교회 장로가 청년들을 초청하여 소위 한턱이라는 것을 쏘게 되었는데 장로는 말 주변이 별로 없어서 “이거 차린 것도 없이 돈만 들었수다(들었습니다).” 라고 인사하니 청년 중 한사람이 “장로님 이거 먹은 것도 없이 신세만 젓수다(졌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깔깔대고 시간가는 줄 몰랐다.
정순 장로 내외분은 평소에도 청년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신세대(新世代)이셨다. 그래서 그 댁에는 청년들이 많이 오갔고 오 권사께서는 늘 손치는 일이 많았다.
우리 교회는 실속도 없이 박태선 부흥회를 주관한 일이 있었다. 주최는 자기네들이고 헌금이고 모든 이익이 되는 일은 자신들이 챙기고 우리 교회는 일만 한 해프닝이 있었다. 이 때 정 순 장로 댁이 박 장로 일행의 숙소로 정해졌다. 오 권사는 그 많은 손님을 모두 접대해야 했다. 박태선 씨 손 씻은 물이 약이라 하여 그 물을 마시고 바르고 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제2교회당 건축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자애(鄭子愛; 1899-1987)권사는 제직회가 구성된 두 번째 해인 1955년 서리 집사로 피택되어 초기부터 우리 교회 터를 잡으신 분이다. 우리 교회 초기 어려운 시절에 교회를 관리하시고 돕는 일을 하셨다. 여성 중 연장자로 기도 많이 하시고 조용하신 분이다. 하얀 머리에 조용하신 성품과 기도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아니한다.
정 권사의 손부(孫婦)인 전금자 권사가 우리 교회에서 맥을 이어 교회 봉사를 하고 있어서 감사를 드린다.
이정선(李正善; 1919-2002)권사는 50년대 남편을 여이고 혼자서 세 딸을 기르면서 오로지 믿음으로 살아간 여성도이시다. 남편은 결찰로 순직 하셨고 국가적 보장이 전연 없던 시절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이 권사의 딸 중 두 명이 우리 교회 권사(최순자, 최순복)로 교회를 잘 받들고 있음은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일이다.
이정선 권사는 조용한 성품을 지니시고 온유하신 분이다. 늘 조용히 교회 봉사하시고 항상 기도하시고 교육자들 잘 돌보시는 분이다. 50년대부터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으실 때까지 한 결 같이 우리 교회 집사로, 권사로 봉사하시고 기도 많이 하신 분이었다. 이 권사의 자녀 손(子女 孫)이 우리 교회에 많이 남아서 권사로, 집사로, 교사로 이 권사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가고 있다. 하나님 앞에 할렐루야로 찬양하고 영광을 돌린다.
김순조(金順祚; 1906-1986)권사는 임번남 장로와 임번식 집사의 어머니 되신다. 침산동에 거주하시면서 교회 잘 봉사하고 항상 기도하시는 분이었다. 교회 일이라면 경쟁적으로 잘 해보고자 하시는 분이다.
박경남 목사 시무하실 때부터 교회 여러 가지 일을 맡아하시고 어려웠던 시절 우리 교회 발전에 힘을 보탠 분이다. 더욱 자녀를 잘 양육하여 장로와 집사로 교회 충실한 일꾼으로 기르셨고, 따님(임금자)은 목사 사모로 교역자를 내조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일깨우는 분이다. 김순조 권사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으실 때까지 변함없이 우리 교회를 섬기셨으며 항상 믿음의 기도로 교회를 돕고, 교역자와 성도를 위한 간구로 일관하셨다.
심정희(沈貞嬉; 1925-1995) 권사는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에 우리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는데 일역을 담당하셨다. 이재흥 장로 부인으로 김성분 권사, 김순희 사모와 더불어 기도의 바람과 교회 사역에 바람을 불어 넣은 분이다. 심 권사는 열정적이신 분이다.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시었고 박경남 목사의 목회를 돕는 일에 열심히셨다.
1960년 김성분 권사께서 우리 교회로 옮겨오시는 것을 계기로 교회 활동에 더 열심 하시게 되었다. 심 권사는 활달한 성품과 여성적 품성을 같이 갖고 계신분이다. 그래서 교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었다. 1960년대 이분들의 활동으로 교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자연 박경남 목사의 사역에도 큰 보탬이 되어 60년대 우리 교회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박경남 목사가 부흥사로 크게 활약하는 계기도 된다.
유노미(柳老味; 1915-2003)권사는 박병옥 장로 어머니 되시는 분이다. 유노미 권사는 일찍이 혼자되시어 박 장로 남매를 어렵게 기르셨다.
1950년대 어려운 시절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데 교회 청소며 교회 일이 있으면 언제고 나오셔서 교회를 도우셨다.유 권사는 우리 교회 전도 왕이기도 하시다. 수시로 교인가정을 방문하시고 새 신자가 있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다니시며 그를 교회로 인도하시는 열성을 보이셨다. 어떤 가정은 문제가 있으면 유노미 권사께서 방문하신다고 기이(奇異)한 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노미 권사는 믿음의 어머니이시다. 쉬지 않고 기도하고 전도하시고, 어려운 가정을 심방하시었다. 그의 믿음은 박병옥 장로로 유전되어 지금도 잘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유노미 권사께 복을 주시어 그 자녀손이 번창하리라 믿는다. 유 권사의 손녀 박지혜 선생을 보면 주일학교 교사로 얼마나 열심인지 나는 옆에서 보기만 해도 감동이 된다. 이런 것이 조모의 유산이 아릴는지? 우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강행자(姜幸子; 1923-2003) 권사는 60년대 우리 교회 오셔서 여전도회와 교회사역에 많은 힘을 기울이신 분이다. 처음 남편이 교회 출석치 않아 이것이 강 권사의 기도 제목이었을 것이다. 후에 남편이신 조 선생도 교회 출석하게 되고 아들과 딸이 모두 교회 충성스런 일꾼들이었다. 강행자 권사의 기도의 힘이었다고 생각된다. 강행자 권사는 여전도회에서 상당한 지도력을 발휘하셨다고 생각된다. 제3교회당 건축 당시 이를 돕기 위해 여성들의 힘을 결집하여 도우셨다.
이상의 몇 분의 초대 교회 여 성도를 소개 했으나 이외에도 수많은 성도가 우리 교회 초기에 수고와 기도와 전도를 아끼지 않으셨음을 기억해야한다. 장복달 전도사, 조방녀 권사, 이범금 권사, 최순우 집사, 오명숙 집사, 박사열 집사, 이영자 전도사, 이금희 전도사, 주선보 집사, 허선도 집사, 김국보 집사, 전분순 집사, 김금홍 권사, 김남임 권사, 김선우 권사, 안봉순 권사, 장귀남 권사 등 여러분을 기억한다. 이 모든 복된 이름위에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시기 기원한다.
12. 초대 우리 교회 장립집사
우리 교회 최초의 장립집사 장립식은 1957년 2월 8일 박경남 목사 위임식, 황약슬 장로 취임식과 더불어 윤병련, 이춘하, 권영식 집사 장립을 한 것이다. 첫 장로 장립식이 1954년 1월에 있었던 것에 비해서 장립집사 장립식은 많이 늦은 편이다. 장립집사로 장립한 세분은 우리 교회 초기 교회를 위해 수고를 많이 하신 분들이다. 그러나 이 분들이 교회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으셨기 때문에 남아있는 자료들이 별로 없고 그 후에 행적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자료가 무척 부족한 상황이다.
윤병련(전열우 1), 이춘하(전열우에서 3째), 권영식 집사(전열우에서 2째) 장립
윤병련(尹炳鍊) 집사는 서울에서 피난오신 분으로 우리 교회 첫 제직회(1953) 서리집사로, 교회 초창기부터 교회를 섬겨 오신 분이다. 50년대 후반부터 주일학교 유년부 부장(1957-1959), 제직회 회계(1955, 1956, 1960) 등을 맡아 교회 일을 열심히 하신 분이다.
당시 교회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계 일을 담당 할 때에는 직임 수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하고 내성적 성격에 오래된 신앙인으로 차분한 분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급하지 않은 그런 성격이시다.
윤병련 집사도 칠성시장에서 상업을 하신 분이다. 피난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대체로 상업이나 가내공업이었다고 본다면 윤 집사도 그런 류의 일을 하시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정 순 장로와 이웃에 살았다고 기억에 남는다.
비교적 피난오신 분으로는 오래 대구에 남아 있었던 편이다. 1960년 경 서울로 귀향하시게 되어 교회를 사임하신 분이다. 초기 우리 교회의 기초를 구축하는데 기여하신 분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춘하(李春夏) 집사는 정 순 장로 와이셔츠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벧엘와이셔츠) 을 판매하는 일을 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정 순 장로와의 관계 때문에 우리 교회 출석하시고 교회를 섬겼을 것이라 사려 된다. 이춘하 집사는 1950년대 후반 서리집사와 장립집사로 교회에 봉사하신 분이다. 1957년 집사 장립 후에는 시무하시는 동안 제직회 회계(1957-1959)를 주로 보신 분이다. 1950년대 말 사업상 대구를 떠나게 되시고 교회도 이동하시게 되었다.
권영식(權永植) 집사는 키가 작고 가냘픈 체구에다 조용하신 분이었다. 침산동 변전소 뒤편에 거주하셨고 초대교회 집사(1955-1957)로 수고하셨다. 1957년에 집사 장립하여 교회 중견 인사가 되었으나 장립하고 그 이듬해 수도권 지역으로 이사하여 이명 하시게 되었다. 권 집사는 피난 나온 분이 아니다. 그 는 경상도 본토박이이시다. 그러나 사업관계로 이사하시게 된 것 같다. 무척 짧은 기간 교회에 계셨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장립 집사를 세우는 일도 어렵지만 그 분들이 교회를 지키기도 어려웠다. 초대 장로들이 그러하듯 집사도 무척 단명이었다. 두 분은 피난 나온 분이니 빨리 떠날 수밖에 없었고 권 집사는 사업 관계로 일찍이 교회를 떠났다. 교회 설립 시기 장로가 그러하듯 집사 역시 안착해서 교회를 받들지 못하였다. 피난민이 주축이 된 교회가 겪어야하는 어려움일 것이다.
교회 설립 초기 빈번한 직분자의 이동은 교회 안정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이를 대치할 만한 인재가 준비되어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50년대 우리 교회는 어려웠다. 교회가 자립은 하였지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신 주님의 명령은 우리 교회 소재 지역 전도에 한정되었고, 나눔과 섬김은 아주 미미하여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복 주셔서 오늘과 같은 수많은 인재를 보내주시고 세계 복음의 오지(奧地)까지 선교 할 수 있게 하시며, 우리 지역사회에서도 사회복지 사역을 통하여 독거노인, 소년 소녀가장을 돕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을 상담하며, 부부 직장인을 위하여 어린이 집을 운영 하고, 노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게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13. 50, 60년대 주일학교 교육
나는 1954년부터 주일학교 유년부 교사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 유년부 교사와 찬양대원을 겸하는 것은 보편적 이었다.
50년대 우리 교회는 정규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어린이를 위해 개설된 성경구락부(일종의 공민학교, 주로 선교사에 의해 운영되었음)가 있었고 주변 주택가에 수많은 어린이가 교회학교에 참석하여 유년부는 항상 학생이 많았다.
추수 감사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교회서 준비한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받을 양으로 수백 명의 학생이 몰려오곤 하였다. 이때 교회당 구조는 신발을 벗고 들어오도록 되어 있어서 더러 신발을 잃어버리는 어린이가 있었다. 이런 때 교사는 정말 난감(難堪) 하였다. 신발이 귀한 때이고 교회는 신발을 하나 사 줄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년부 교사를 알아주는 사람도 대접하는 사람도 없었다. 의례히 교인이면 그런 것을 봉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기성경학교(夏期聖經學校)를 하여도 점심을 대접하는 일이 없었다. 교사들이 얼마씩을 갹출하여 국수를 삶아 간장을 처서 먹고 또 오후 집회를 하는 정도였으니 얼마나 열약한 상태이었는가! 50년대 유녀부 교육은 이런 수준에서 그리 많이 탈피하지 못 하였다.
1950년대 주일학교 교사로는 유년부장을 지내신 박영훈 장로(목사), 김준도 집사, 남자 교사로는 임종헌 목사(당시 신학생), 임승원 목사(당시 대학생), 이영수 장로, 안병즙 장로, 전주석 장로, 정부섭 선생, 윤원식 선생, 김경희 선생, 김정태 집사, 박병준 선생, 여자 교사로는 이금희 전도사, 이영자 전도사, 최순우 집사, 박윤숙 선생, 배태향 선생, 박보옥 선생, 최순금 선생, 이영자 선생 등이 기억에 남아있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분이 있다. 나는 기억 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책에 그 분들의 이름을 기록하셨을 것이다. 그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나는 1958년 군에 입대하였다. 나는 최전방 경기도 연천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60년 1월 제대 하였다. 제대하고 교회에 돌아오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주일하교 일이었다. 많은 분들이 거처가고 주일학교를 지도 할 만 한 분이 없어서 나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유년부장은 정 순 장로이신데 내가 전담을 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62년 유년부장을 맡게 되었다. 주일학교 유년부장은 교회에 매우 중요한 직분이다. 미래 교인을 양성하는 기관이니 그 중요성을 말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유년부장 직을 맡으면서 우리 교회 주일학교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를 생각하고 이에 대처해 몇 가지 일을 추진해 나아갔다.
첫째, 주일학교는 당시 만국통일공과라는 교사용 지도서를 사용했는데 이외에 학생용 교과서가 없었다. 그래서 너무 열약한 상태이지만 “교과서를 공급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이를 추진했는데 우선 하기성경학교와 겨울성경학교에 적용했다. 이때 교과서를 공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원지를 긁어서 등사기에서 등사를 하고 책을 엮는 과정을 거처야 하는데 요사이 같이 디지털시대 인쇄 방법으로는 설명을 할 수 없다. 모두가 노동집약적이어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야했다. 뿐만 아니라 문방구의 질이 좋지 않아 좋은 책을 만든다는 것이 오히려 환상일 수 있다.
둘째, 학습방법의 개선이 무엇 보다 요구 되었다.
우리나라 신교육은 기독교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50년대 교회교육은 일반교육 보다 많이 뒤 저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나는 협동학습과 생활을 통한 학습방법 같은 것을 도입했다.
아이들은 너무 좋아했다. 하기성경학교나 겨울성경학교 같은 시간에는 학생들이 하루 종일 교회에서 살았다. 교사들도 하루 종일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셋째, 주일학교 교육은 재미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찬송가, 성경공부, 주일학교 활동 모두가 재미있어야했다. 하기성경학교 오후 집회는 내가 모두 맡아서 수행했다. 특히 천로역전을 동화로 전환해서 들려주는 시간에는 어린이들은 너무 재미있어 했다. 요사이도 그 시절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더러 천로역전 이야기를 하곤 한다.
넷째, 학생 관리를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이 유년부에 등록하면 계속 그의 학적부가 수료 할 때까지 누가기록(累加記錄)이 되도록 하였고, 기타 필요한 서류를 항구적으로 사용하도록 정비하였다.
나는 1962년 경북노회 주일학교 연합회 교육부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963년에는 동 부회장을 맡게 되었고 여러 해를 하기학교지도자 강습회 강사로 활동을 하였다. 자연 우리 교회 주일학교 교육을 소개하게 되었고 많은 교회에서 관심을 갖고 우리 주일학교를 견학하고 모방해 갔다.
경북노회 주일학교 연합회 주최로 선진 주일하교 견학 프로그램에 우리 주일학교를 선정하여 노회 안에 여러 교회에서 우리 주일학교에 참석하여 예배 운영, 공과공부 운영, 학생활동, 주일학교 비치 서류, 조직 등 많은 것을 배워갔다.
교회에서 가장 힘 써야 할 부분은 첫째 “땅 끝까지 주의 증인이 되는 일이다.” 이일을 위해서는 사람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에 둘째는 “주일학교 교육이 된다.”
여기서 교회가 많은 경비를 지변(支辨)하라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교육비 투자가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육 지도자와 교사의 소명의식”과 “미래를 바라 볼 수 있는 식견(vision)”이다. 이런 근본적 문제가 해결된 다음 교육기술이 필요하다. 모르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은 아는 만큼 행동한다.
그래서 교회는 교육 지도자를 위한 워크숍 같은 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도록 하고 새로 개발된 지식과 기술을 습득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지도자 양성에 힘을 많이 기우려야한다. 이런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1990년 4월15일에는 교사대학을 개교 하여 30시간 과정으로 교사를 양성하는 등 노력을 경주 하였다.
일반학교 교사는 기본적으로 자격증을 소지해야 교사가 된다. 그러나 교회학교는 자격증과 아무 관계가 없다. 검증되지 않은 교사에게 교회 교육을 맡긴다는 뜻이다. 일은 중요한데 그 수행은 보증되지 않는 방법으로 한다는 것이다. 현 교회 실정으로 이 이상의 다른 방법을 찾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면 대안적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학교 교사는 정기적으로 재교육을 받도록 되어있으며 그것은 의무이다. 그래도 교육의 질을 제고(提高)하는데 문제가 있어서 계속 교육개혁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정보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교육개혁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교사이다. 사람이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다. 의식이 전환되지 않으니 행동이 수정될 수 없다.
교회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지도자들이 영적으로 각성 하였는가? 그리고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랑의 사람인가? 이다. 나는 교회 교육의 개혁을 위해 영적 부흥이 요구된다고 보며 이를 위해서 지도자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본다. 교회 지도부는 교회교육의 개혁을 위해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수행 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비 투자가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비용을 적절히 사용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효율적 투자를 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을 때 교육의 질이 향상된다. 그래서 교육의 효율성은 훈련된 인력과 교육전략 그리고 적절한 투자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무조건 돈이 있으면 교육의 질이 향상된다는 생각은 아니 된다.
내가 주일학교 교육을 운영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교사확보이다. 60년대 교사는 고등학교 졸업생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우리 교회 청년들은 대한방직, 제일모직, 내외방직, 고려견직, 삼호방직, 대구견직 등 공장 직공이 많았다. 이들은 고된 12시간 노동을 하는 분들로 주일학교 교사를 맡으면 주일도 일찍이 나와서 하루 종일 수고를 해야 했다.
교사 확보가 어려운 것이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 이때 교사는 지적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으나 무엇인지 모르나 열정 같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열심이었다. 이때 교사는 무엇이고 손수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서류함이나 괘도 걸이 같은 것은 솜씨 좋은 박영재 집사가 다 만들었고, 60년대 초 남자교사로 김생한 장로, 배상호 장로, 정달원 집사, 박병옥 장로, 김정태 목사, 박병준 선생과 그의 여동생(박낭자 캐나다 거주), 여자교사로는 김점례, 배태분, 박정자, 손혜선, 김부희 선생 등이 머리에 남아있고 여기 그 이름을 쓸 수 없는 수많은 교사들의 수고가 오늘의 침산제일교회 주일학교 교육을 이루었다고 나는 믿는다.
이제 모두 나이 들어 노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뿌린 씨앗은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고, 열매 맺고, 또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 새싹을 틔우고 있을 것이다. 주마등(走馬燈)같이 스쳐가는 그들의 이름이 주안에서 복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14. 사소한 일에서 생긴 갈등
담임목사의 이동은 교회로 많은 일을 하게 한다. 박경남 목사의 경우처럼 잘되어 좋은 곳으로 가시는 경우는 단순히 새로 모셔올 목사를 어떻게 선임하는 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사실 담임목사의 이동은 여러 가지 부수적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담임목사를 위시하여 모든 교육자 선임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교회는 특수사회이다. 그 목적이 생산이나 어떤 이익에 있지 아니하다. 다만 “믿음” 때문에 모이고 “믿음의 확산”을 위해 존재 하는 것이 교회이다. 교역자가 이런 교회의 존재이유에 부합한 활동을 성실히 수행한다면 다행이다. 당회는 이런 교회 사역에 부합한 교역자를 선임할 책임이 있고 교리가 바르게 전파되도록 수호해야 한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교회만큼 다양하게 구성된 사회는 없을 것이다.
다양성은 조화의 원리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문제를 분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역자와 교인 사이에 많은 문제를 야기할 때도 있다. 만일 지도자들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크고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문제는 적어질 것이다. 교회 문제가 아주 큰 것에서 시작하지 아니한다. 조금만 배려한다면 교회의 평화는 항상 유지될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교역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를 잘 처리할 수 있어야한다. 모든 조건을 겸비한 분을 담임목사로 초빙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담임목사 이동은 장로에게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좋은 분을 청빙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나는 장로생활 38년 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담임목사가 이동하는 시기였다. 내가 장로 장립하기 전에 장로가 정 순 장로 한 분 뿐이어서 정계종 목사청빙에 관여를 하게 되었고, 장로 장립 후 황해영 목사, 한종희 목사, 김현득 목사, 석윤 목사, 정규채 목사, 송재영 목사 청빙에 직접 관여함으로 그 고충을 가장 잘 알게 되었다.
성주읍교회 시무 하시는 정계종 목사를 정 순 장로께서 후보로 정하시고 나에게 성주읍교회에 가서 소위 선이라는 것을 보고 오라는 것이다. 이때 담임목사 후보는 두 분으로 압축되었는데 또 한분은 상주교회를 시무하고 계셨다. 성주읍교회는 언덕위로 좀 올라가서 아름답게 건축된 교회였다.
나는 정계종 목사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정 순 장로께서는 나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하시면서 정계종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정 순 장로는 상주 쪽에 더 무게를 두고 계셨던 것이나 젊은 집사의 판단력을 존중하시어 정 목사로 결정을 내리신 것이다. 정 순 장로의 됨됨이가 날카로운 판단을 하시는 반면 포용하고 양보도 할 줄 아시는 도량이 넓으신 분이었다.
그러나 정계종 목사로 담임목사를 정한 후 나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책임이 있었다. 정계종 목사는 키가 헌칠하게 크시고 미남형의 신사이셨다. 상당히 학구적이시고 우리 교회 계시는 동안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에 등록하여 교육학과 상담학에 대해 연구하는 일도 게으르지 않으셨다. 때로는 한복을 즐겨 입으시고 자전거를 타고 멋있게 달리시는 분이었다. 설교도 깔끔하게 하시고 대인관계도 무난하셨다. 그러나 성품이 온화한 반면 결단력 같은 것은 좀 부족 하셨다고 보여 진다.
정계종 목사는 1967년 1월 우리 교회 부임하시고 많은 수고를 하셨다. 박경남 목사 시절 수고하시던 박계련 전도사가 1968년 2월에 사임을 하고 그 후임으로 이금희 전도사를 청빙하기로 하였다. 이금희 전도사는 우리 교회 출신이고 나와는 대구성서학원에서 같이 수학하신 분으로 이미 우리 교회에서 1957년 3월부터 1960년 3월까지 여전도사로 3년간 시무하셨던 분이다.
이 전도사는 성품이 너무 훌륭하신 분이고 청년들과는 교감이 아주 잘되는 분으로 그의 주변에는 청년들이 많이 모였다. 소위 인기가 많은 분이셨다. 요사이 세상이야기로 한다면 스타(star)이셨다. 정계종 목사 부임 1년 만에 이금희 전도사가 우리 교회로 오셔서 정 목사와 팀을 이루신 것이다. 나는 환상의 팀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금씩 세월이 지나면서 정계종 목사와 이금희 전도사 사이에 갈등이 보였다. 갈등의 원인은 아주 간단한 문제에서 발단이 되곤 하였다. 정말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이 된 문제들이다. 알 수 없는 것은 교인 특히 청년들에게는 따사로운 어머니 같은 정을 가지신 분인데 목사와는 자주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두 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잦은 갈등이 두 분을 불편하게 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금희 전도사와 나는 말이 통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서로 대화의 시간이 있었고 1969년 12월 어느 날 이금희 전도사와 긴 시간을 이야기했다. 오는 한해(1970년)는 전도사께서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 지내십시다. 나의 제안에 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무척 고마워했고 사실 목사와 전도사가 화목하게 지내시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가 1969년 3월에 공동의회에서 장로로 피택 되었고 1970년 4월 3일 장립식을 갖기로 되어있어서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나와의 약속은 며칠 가지 않아 깨어졌다. 2월에 이금희 전도사와 정계종 목사 사이에 또 사소한 문제로 갈등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거처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전도사께서 사라지신 것이다. 자연히 교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되었고 정 목사에게 책임의 화살이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이런 문제에서 정계종 목사나 이금희 전도사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두 분의 갈등은 본래 소지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가 일어날 만큼의 문제적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만 서로 배려를 했으면 문제 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부에서도 두 분에게 관심을 조금만 가지고 대처해 나아갔으면 문제 될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큰 문제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일을 쉽게 넘겨버렸을 때 그런 것이 나중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글을 쓰면서 두 분의 인격에 손상을 드릴까 무척 염려하여 쓰지 않을 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우리 교회에 교훈으로 삼고자 함이다. 두 분은 모두 훌륭하신 분이고 내가 존경하는 분이다. 인간사에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교역자만이 아니라 교우 사이에서도 일어 날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을 높은 수준으로 올리기 위한 교훈을 얻어야한다.
누가 문제를 제기할 때 정확히 그 내용을 이해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문제가 해소되도록 노력해야한다. 그 방법은 담론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정서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서로의 믿음의 구축이라 할까 서로 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문제가 있다하여도 서로의 믿음이 돈독하면 그것이 문제로 인식되지 아니한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더 큰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온전한 믿음에 거하는 자라면 아주 쉽게 문제를 해결 할 것이다. 인생사에서 많은 것은 문제의 해결방안을 알고 그 방안 데로 실천 할 때 풀려갈 것이다.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는 것도 중요하고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易地思之)하면 좋을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교회의 평안과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도자들은 협동하여 주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항상 협동하여 주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5. 당회의 현명한 판단
이런 저런 이유로 이금희 전도사는 마음고생이 많으셨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지고 계셨다. 그 문제가 객관적으로 큰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전도사께는 무거운 짐이었다. 같은 짐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그 무개는 달라진다. 우리는 이점을 항상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는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해야 한다.
1970년 3월 중순경 교회로 돌아 오셔서 사의(辭意)를 표명하시어 이를 수리하고 4월 3일 교회는 장로, 집사 장립식과 권사취임식을 끝냈다. 이금희 전도사께서 떠나시는 것을 서운해 하는 많은 성도가 있었고 나 역시 많이 아쉬웠다. 조금만 이해하고 한발 물러서서 보면 간단한 문제인데 우리는 이금희 전도사의 사임을 수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이금희 전도사가 떠나시고 약 1년쯤 뒤에 정계종 목사께서도 좋은 교회에서 간절한 청빙이 있어서 서울 원남교회로 옮기시게 되었다. 이금희 전도사가 떠나신 후 몇 명의 이 전도사를 좋아하는 팬인 집사들이 정 목사도 떠나야하지 않겠는가? 를 제의한 바가 있다. 나는 교역자의 이동은 하나님의 섭리로 하시는 것이라 믿기에 기다리라 하였다. 이 전도사 이임 후 불과 1년 만에 정 목사 역시 좋은 임지가 생겨 떠나시게 되니 그때 이의(異意)를 제기한 분들이 뒤에 후회 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회일은 성급히 판단하고 나서면 아니 된다. 조금만 기다리면 하나님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성급하면 후회하고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온다. 오로지 판단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분뿐임을 기억해야한다(약 4: 11).
하나님의 교회에 그리스도파, 게바파, 바울파, 아볼로파가 있을 수 없다(고전1:12). 누구를 지지 한다 던지 누구와 한패라는 생각은 있어서 아니 된다. 오로지 교회에 덕이 무엇이고, 하나님께 돌려야하는 영광이 어떠해야하는가 만을 생각해야 한다. 분쟁은 마귀의 역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을 인간이 하면 모든 것이 잘못된다.
교회 안에 임의 조직을 만들어 끼리끼리 모이는 일은 아주 잘 못된 일이다. 80년대 우리 교회에도 임의 조직이 있었다. 여기 참석한 분들의 변은 모두 교회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라 한다. 그러나 당회가 교회 공조직으로 인정하지 않은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파당의 여지를 갖게 된다. 나는 이 모임의 지도 인사에게 해체 하도록 권유했다. 모두 인격자들이어서 강제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자진 해체하였다.
교회 안에 학연이나, 지연이나, 혈연관계가 있겠지만 그 조건으로 집단화하는 것은 잘 못된 일이다. 우리는 믿음 아니면 여기 모일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공조직 이외에 어떤 것이라도 만들고 참석해서는 아니 된다. 특히 교회 지도층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었다(고전 4: 4, 5). 사람이 분별없이 판단하면 실수 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주 앞에서 겸손해야한다.
정계종 목사는 내가 만난 목사 중 가장 신사이시고 학구적이셨다. 고향이 황해도 분으로 당시 대구 교계는 황해도 목사 분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계신 때라 우리 교회 시무하시는 동안 대외적으로 어려움은 없으셨다. 더욱 정 순 장로께서 노회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셨기 때문에 더욱 튼튼한 지반위에서 목회 하실 수 있었다.
정계종 목사께서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분은 아니셨지만 항상 단정하고 온화하시며 탐구적이신 분이었다. 교인 사이에 신망도 높으시고 인격적으로 고매한 분이었다. 박경남 목사가 이루어 놓은 지반 위에 큰 변동 없이 4년간의 목회를 무난히 하셨다고 나는 평가한다.
정계종 목사가 1971년 4월 서울 원남교회로 떠나신 후 우리 교회는 후임 목사를 물색해야했다. 자연 교계에서 널리 활동하고 계신 정 순 장로께서 그 임무를 맡으셨고 여러 가지로 고심한 끝에 대구성덕교회에 시무하고 계신 황해영 목사를 후보로 천거하시었다. 황해영 목사 청빙 절차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비교적 목사 청빙이 쉽게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김정권, 김생한, 안병즙 장로 장립으로 정 순 장로 혼자서 수고 하시던 당회가 활성화 되었지만 김생한 장로가 장립 직후 교회를 떠나게 되어 이때 장로는 나와 정 순 장로, 안병즙 장로 세 사람 이었다. 세 장로가 대구시내에서 황해영 목사를 만나 담소를 하고 우리 교회에 오실 것을 요청하였다. 황 목사는 쾌히 승낙 하시고 교회는 절차를 밟게 되었다. 그래서 정 목사 이임 후 2개월 만에 담임목사로 황해영 목사를 위임 목사로 청빙 하게 되었다. 이번 목사 이동은 비교적 빨리 수습이 된 샘이다.
황해영 목사는 경상도 분으로 이 지역에 대해 많은 것을 아시고 계신 분이다. 또 우리 교회 교인들과도 연관도 있으신 분이다. 우리 교회가 지역 출신의 목사는 처음으로 모신 것이다. 황해영 목사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신 분이다. 그래서 활동이 왕성하시고 교계에서도 인정받으시는 분이었다.
우리 교회 처음 부임하신 1971년에 우리 교회 주일예배 출석교인이 300명을 넘지 못한 실정이었는데 황해영 목사 시무 기간에 주일 출석교인이 400명을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발전하고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교회는 항상 작고 큰 문제에 직면 하게 마련이다.
장로와 목사 간의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런 문제를 그때그때 해소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니 문제가 축적되어갔다. 나는 당회원 간의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흔히 사람 사는데 있을 수 있는 일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해영 목사는 상당히 심각하게 느끼신 것 같다.
하루는 황 목사께서 당회에 제안을 하시기를 “본인과 성지교회 한종희 목사와 교환해주세요” 라는 것이다. 당시 성지 교회는 우리 교회 보다 교세도 약하고 모든 조건이 우리 교회 보다 나쁜 상황이었다. 그런데 목사를 바꾸어 달라는 것이다. 황해영 목사 부임 후 강영목 장로를 세워서 장로가 4인이었다. 당회원들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사를 교회 간에 바꾼다는 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교회에 이런 일은 있어서 아니 된다. 자동차 부품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물물교환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히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교역자는 사역을 잘하고 좋은 소문이 많이 나면 자연 더 좋은 곳에서 청빙 받아 가게 되어 있다. 황해영 목사는 조건이 더 나쁜 교회로 가시고자 한 것이다. 그 후 성지교회는 크게 부흥했지만 우리 교회가 목사 교환을 거론 할 당시에는 약한 교회였다.
나는 왜? 황해영 목사께서 성지교회로 가시고자 했을까? 우리 교회에서 목회 포부를 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어찌되었던 우리 교회를 떠나고 싶으셨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황 목사의 제안은 장로로 무슨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 한 것이다.
우리 교회 당회는 거의 전원합의 결정을 해온 터였으나 이 문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네 사람이 각각 의견을 진술하도록 하였다. 나는 2대 2가 되지 않을 까 생각 했으나 결과는 찬성 2, 기권 1, 반대 1 이었다. 그래서 황해영 목사는 성지교회로 가시게 되었고, 한종희 목사는 우리 교회 임시목사로 오시게 되었다.
정계종 목사 시무 기간 4년 2개월, 황해영 목사 시무 기간 4년 2개월은 너무 짧은 기간이다. 우리 교회 목사 시무기간은 너무 단기(短期)였다. 1975년 교회 설립 24년에 담임목사 여섯 분이 시무하셨으니 평균 4년인 샘인데 박경남 목사 11년간 시무를 제외하고 나면 정말 얼마나 단명(短命) 이었는가?
나는 교역자와 교인의 관계가 같은 생활인으로 서로 집안 사정도 잘 알고 서로 삶의 한 부분이 되어 어울 어 저 살아가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진리의 오도(誤導)가 아니라면 평생 성경을 서로 삼고(三考)하고 생활에 접목시키는 아름다운 관계여야 한다고 본다. 교역자는 가능한 오래 시무해야하고 평생을 같이 지낼 수 있다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교육자나 교회 지도층이 상호 견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 그래서 교회는 세운 목회자로 왕성한 목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비록 마른 막대기와 같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일단 세운 사람이면 그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경영하시고 자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전쟁에서 승리는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것이지만 그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루는 과정에서 아론과 홀이 모세를 도와 그의 팔을 부축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출 17:12).
인간의 교만은 항상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해 내려는 것이다.” 만일 세우신 교역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우시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리를 하신다. 더러 인간을 사용하시겠지만 성령의 사람은 끝까지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령이 인도하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지원하고 항상 긍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복을 얻은 자요, 그의 길이 형통함을 얻은 자이다.
내가 무엇이고 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그 것이 바로 실패이다. 우리 자신을 사람 앞에서 나타내기를 좋아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과 같이 하시지 아니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중(心中)을 보시는 분이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이미 아시고 계신 분이다.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람을 나타내고자 하는 욕망이다.
교역자는 장로나 집사, 권사 등 교회 직분 자를 항상 격려하고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도록 지도하여 신실한 일꾼이 되도록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기회만 생기면 항상 칭찬하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누구나 칭찬 받기는 좋아하지만 남을 칭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칭찬과 격려는 힘도 들지 않고 돈도 드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가장 좋은 전략을 알고는 있지만 사용하지 아니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지도층 뿐 아니라 모든 교우가 같이 실천해야 할 일이다.
담임목사의 이동은 교회에 많은 손실을 가져다준다.
첫째, 교회는 장기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둘째, 담임목사 부임 후 적응기간이 필요하고,
셋째, 담임목사 이동으로 이미 진행해 오던 일들이 중단 되 고 거의 소실(消失)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넷째, 교인들은 새 목회자에 부응해서 새로운 신앙생활 패 턴을 다시 만들어야하는 어려움도 갖게 된다.
특히 담임목사의 시무기간이 짧으면 교회는 무척 혼란스럽다. 우리 교회가 이런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단순한 담임목사 이동이 아니다. 담임목사 교환(交換)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우리 교회 역사상 당회가 처리한 가장 잘못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결과가 좋았다고 해도 이런 방법은 사용해서 아니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아니하기를 나는 기원한다.
16. 교회의 정체(停滯)와 갈등
황해영 목사는 1975년 7월 본 교회를 사임하시고 대구성지교회로 떠나시었다. 그 해 8월 21일 우리 교회 공동의회에서 한종희 목사를 임시목사로 청빙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한 목사는 9월 부임하시었다.
한종희 목사 부임 후 교회는 침체되어 갔다. 한 목사께서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감 같은 것이 부족하시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한다. 성지교회에서 목회는 어떻게 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 교회에 부임하신 후에 목회생활은 상당히 위축된 모습이셨다.
우리 교회로 오실 때 한 목사는 미국으로 이주를 준비 중에 계셔서 교회에 열중하시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던 목회자의 위축은 교회의 침체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한종희 목사는 심성이 부드럽고 무척 조용한 분이다. 한 목사 재임 시 여전도사는 유위정 전도사와 김남향 전도사 두 분이 계셨는데 유위정 전도사는 오래 계시지 못하셨고 그 성품이 무척 조용한 분이었다. 김남향 전도사는 활동적이고 상당히 총명하신 분이었다. 그런데 한 목사와의 관계에서는 작은 갈등이 항상 있어왔다. 언제나 교역자 간의 문제는 있을 수 있지만 교회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정계종 목사와 이금희 전도사와의 갈등이 교인들 사이에도 상당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교회에도 걱정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는 항상 이런 문제가 확대되지 아니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 목사의 경우 주위의 적극적 지원이 있어도 상당히 노력을 기울이셔야 할 터인데 교역자나 장로의 지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이겠는가? 자신감 상실이 주위의 협력을 더 어렵게 한 것 같다.
사람은 성공적 경험을 계속 할 때 다음에 더 큰 성공을 보장 받는다. 그러나 사소한 실패는 또 다른 실패로 연결되는 악순환을 하게 된다. 교회는 공동체이고 목사를 위시하여 모든 성도가 계속되는 성공을 경험하도록 운영되어야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한종희 목사 부임 후 교인 회집 수는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1976년 이백 명 초반 대까지 떨어 젓다. 자연 장로들에게는 걱정 이었다. 따라서 임시목사 청빙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고민 끝에 당회는 1년을 더 연장하여 청빙하기로 결정하고 1976년 8월 공동의회에서 이를 결의 하였다.
우리 교회가 이후 목사 청빙 시 위임목사로 바로 청빙해왔는데 이는 목사 청빙 전에 충분히 검토해서 합당한 분을 청빙해야 한다는 뜻이 있고, 다음은 임시목사 청빙 시 그 기간이 일 년 이어서 재청빙시 청빙과 관련한 잡음이 많아 이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의도이다.
장로에게 가장 곤란한 일은 담임목사의 거취(去就)문제이다. 담임목사와 교인 사이에서 조정이 필요한데 모두 상대가 있는 일이니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가 요구된다. 1976년이 지나고 1977년으로 접어들면서 정 순 장로는 한종희 목사를 또 임시목사로 청빙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정 순 장로도 1978년 미국으로 이주하실 계획을 진행 중에 계셨기 때문에 두고 갈 침산제일교회의 앞날을 걱정하신 것이다.
1977년 이른 봄 정 장로께서 나를 보자고 하시더니 “김 장로는 한종희 목사를 보내기 어려울 것이니 내가 있을 때 보내야 겠소.” 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실 목사를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임지가 있어서 자진해서 떠나는 분이야 쉽게 가지만 임지가 없는 분을 가라하면 결코 쉽지 아니한 일이다.
나는 정 순 장로에게 집사들에게 한 번 의사를 타진 해보시라고 건의를 드렸다. 여러분에게 의견을 물었고 대부분은 한 목사로는 교회가 어렵겠다는 반응이었고, 한분은 그래도 갈 곳이 없는 목사를 어찌 보내겠는가? 라는 반응을 얻었다.
이때 당회원은 정 순 장로, 김정권 장로, 안병즙 장로, 강영목 장로 4인이었는데 안병즙 장로가 외국 출타 중이어서 3인만 당회에 참석 할 수 있었다. 당회를 소집하여 한종희 목사에게 오는 8월에 임시목사 청빙은 아니 할 것이니 임지를 찾아 가시라는 통보를 하였다.
장로가 목사로 하여금 이동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대신동 경북노회 장로회 사무실에서 수차에 걸쳐 모였고 계속 반복되는 대화를 나누어야만 했다. “임지가 생겼는가? 찾아보는 중이다.” 내용은 간단한데 반복적 이야기를 나누며 3시간, 4시간이 흘러가는 것이다. 좋은 말을 하며 3, 4시간을 보내도 짧은 시간이 아닌데 거북한 이야기를 하며 3, 4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당회는 몇 달을 한 목사 거취로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활력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중 한 제안이 들어왔다. 비산제일교회(대구시 서구 비산동 80-3)를 인수하여 한 목사를 시무하도록 하자는 안이었다.
장로와 집사 간에 많은 대화가 있었고 어느 정도 뜻이 모아진 후 한종회 목사와도 합의를 보았다. 기성회 기금 중 350만원을 차용해서 비산제일교회를 인수하게 되었다.
비산제일교회 출신인 우리 교회 여재규 집사를 한 목사와 같이 비산제일교회로 가도록 하고 내가 여재규 집사를 포함한 비산제일교회 집사 몇 분을 만나 비산제일교회에서 은사금을 얼마나 드릴 수 있느냐? 를 물으니 비산제일교회 형편으로는 월 6만원을 드릴 수 있다고 하여 우리 교회에서는 월12만원의 은사금을 드리고 있어서 우리 교회 은사금의 절반 밖에 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당회와 제직회의 협의로 9월부터 1978년 2월까지 6개월 간 6만원을 보조하여 우리 교회 은사금에 맞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산제일교회가 1978년 3월부터는 12만원의 은사금을 드리도록 약속 받았다.
황해영 목사와 한종희 목사의 교환은 우리 교회에 2년여의 많은 문제를 가져왔고 교회의 정체기(停滯期)를 맞게 했다. 마지막 처리도 교회로서는 많은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이다. 경제적인 면을 제외하고도 교회를 인수하여 목사를 이동시켰다는 부담도 크고, 교인들의 상처를 치유해야하는 문제도 적은 것이 아니었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함일 것이다.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다.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이 중요하다. 그 위에 박식한 성경 지식과 효율적 전달방법이 요구된다. 설교자는 성도들이 진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하고 진리가 우리 삶의 현장으로 녹아들 수 있는 감동적 접근이 요구된다. 살아있는 말씀 사역이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한 목사에게 가장 부족했던 부분이 자신감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장로들은 한 목사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보다는 교회 정체에 대한 책임을 먼저 묻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은 악순환을 하게 하였다. 사실 목사는 이미 훈련이 끝난 분이니 그를 돕고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앞으로 교회가 침체될 때 교회 지도층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첫째, 교회 정체기가 오도록 해서는 아니 된다. 미리 정체될 수 있는 요소는 제거해야 한다. 교회 인사는 철저히 검증해야한다. 담임목사는 당회가 검증해야 하고 협력 목회자는 담임목사가 검증해야 한다. 사람을 잘못 선택하면 순식간에 정체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둘째, 교회 정체(停滯)의 책임은 당회, 제직회 등 교인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원망하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어려울수록 천천히 가야한다. 서두르면 더 어려워진다. 하나님은 어떤 시점에서 우리 교회에 필요한 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구해야한다. 그리고 어려울수록 누구를 부끄럽게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셋째, 상처 부위를 수술하여 도려내기 보다는 자연히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연치유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번 교회 처사는 정 순 장로의 지극한 교회 사랑을 나타낸 것이며 정 장로가 우리 교회를 떠나신 후에 교회에 대해 일종에 안전장치를 한 샘이다. 그 동안 정 순 장로의 노심초사가 어떠하였겠는가? 정 장로의 전 생활은 교회를 전제로 하여 이루어졌다. 나는 정 순 장로의 이런 삶의 모습을 높게 평가 한다. 보통장로는 흉내를 낼 수 없는 일이다.
정 순 장로는 부인 오신복 권사, 차녀 정선영 선생, 3녀 정순영 선생, 3남 정호영 선생 등 가족과 같이 1978년 3월 미국으로 이주 하시게 되었다. 장남 정근영 장로가 의사로 뉴욕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고 자부 박대선 장로도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어서 이 분들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주하시게 되었다. 그 뒤 차남 정수영(일명 정달원) 집사 가정, 장녀 정 선 집사 가정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정 순 장로 가족이 남아있지 아니하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한종희 목사 가정도 같은 해 3월에 미국으로 이주 하시게 되었다. 한 목사가 비산제일교회로 옮기신지 6개월 만이다. 결국 우리 교회가 비산제일교회에 보조해준 기간 6개월을 채우고 이주하시게 된 것이다. 결과에 비추어 본다면 당회원의 수고가 너무 큰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교회는 한 목사가 떠나시게 되니 교회 대표로 강영목 장로를 비산제일교회에 파송하여 임시 시무하도록 하였다.
한종희 목사는 목회에 대한 자신감과는 달리 학문적 탁월성을 갖고 계셨다. 그리고 의협심도 무척 강하신 분이어서 이단(異端)을 비판한 일이 있었다. 한종희 목사는 몇 개의 이단을 비판하셨는데 그 중 고려파의 골수인 백파(白波)를 비판하신 일로 내 연구실에서 장시간의 논쟁을 한 일이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이다. 백파의 중요간부가 내연구실에 모여 한종희 목사에게 신문에 사과문을 게제하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한 목사께서는 이들에게 이미 구두 사과를 한 뒤였고, 그 분들의 면전에서도 사과를 하였다. 그 분들도 처음에는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한 목사가 다른 건에 대해서는 신문에 사과문을 게제 하였기 때문에 이에 버금가는 조치로 재차 사과문을 신문에 게제 하라는 것이었으나 이는 무리였다. 한 목사는 흔들리지 아니하시고 그들과 맞서서 본인의 정당성을 주장하셨다.
그날 밤 12시가 다 되어서 결론 없이 그분들과 해어 졌지만 그 후로 다시 연락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일이 종결되었다고 나는 보았다. 한 목사는 진리오도에 대한 의협심 같은 것이 많으신 분이라 생각 한다. 그래서 당시 교계에서 논의 되어온 신앙 노선에 대해 비판하신 것이다.
17. 편견과 오해
우리 당회에서는 새로 청빙할 담임목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분을 청빙하기로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진학한 분이 많지 아니하던 시절이다. 요사이 총신대학교에는 명문대학 출신이 줄을 서서 입학하고자 하지만 70년대만 해도 그리 흔하지 않은 일 이었다.
정 순 장로는 미국으로 이사하시기 전에 좋은 후임을 정해 놓고 떠나시려고 많이 노력을 기우리셨다. 교계활동이 많으신 분이니 정보도 많고 추천하는 사람도 많았다. 정 장로는 두 분의 후보를 추천하셨다. 집사들이 후보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오도록 하여 평가도 하고 여러 통로를 통해서 후보 목사에 관한 정보를 입수 하였다.
두 분 중 김현득(金賢得) 목사는 부산대학을 거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분이다. 당회는 이 분을 담임 목사로 청빙하기로 하였다. 나는 김 목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였다. 참신한 목회자로 새로운 기풍을 진작 시킬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기대가 컸던 것이다.
김현득 목사는 장로 자제 분으로 어려움 없이 자라난 티 없는 분이었고 내외분이 모두 지성인 이셨다. 기대도 크고 또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김현득 목사는 신세대답게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시고 늘 맑은 표정과 긍정적 사고를 하신 분이다.
운동을 즐기고 옷차림도 시대에 뒤 떨어지지 않는 감각이 있었다. 오히려 교인들이 이에 부응 하지 못하는 경향이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하고 일류 고등 교육을 받은 수재이었다. 4년 5개월간 우리 교회 시무 하시는 동안 교회 발전을 위해 무척 헌신 하신 목회자이다. 특히 제3교회당(현재 교회당)을 건축 할 때 시무하시었기 때문에 그가 겪은 어려움은 무척 컸다고 사려 된다.
우리 교회는 부자가 없었다. 보통의 중산층으로 교회가 구성되어 있어서 오래 전부터 제2교회당 재건축을 위한 준비를 해온 터였다. 소액의 헌금을 모으는 방법이었고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엽전 두 닢을 가상이 보시리라 생각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소액의 “벽돌 헌금”이 우리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교회가 가장 합리적 방법으로 성전건축을 계획해 놓았는데 중간에 지도층의 판단 착오로 일이 어렵게 되었다. 이때 김 목사는 그 어려운 일을 몸으로 막아야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이 내용은 다음 항에서 조금 상세히 기술하고자 한다.
당회는 1979년 2월 서울에 계신 최인찬 목사를 초빙하여 부흥사경회를 갖게 되었다. 당회가 부흥사경회를 갖기로 하고 강사를 찾는 중 당회에서 나에게 찾아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나는 박경남 목사와 의논을 하였다. 박 목사는 최인찬 목사를 천거하였고 나는 당회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최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사경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부흥사경회는 월요일 저녁 집회를 시작으로 토요일 새벽 기도회로 마치는 것이 상례이었다. 새벽 기도회, 낮 성경공부, 저녁 집회의 형식이다. 낮 공부 시간에 최 목사는 목사의 역할, 장로의 역할, 집사의 역할 등을 강의 했다. 여기서 오해가 생긴 것 같다. 김현득 목사는 자기를 질책하기 위해서 최인찬 목사를 초청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금요일 새벽 기도회를 마쳤는데 김 목사가 당회를 소집하였다. 강사 처우 문제를 의논하고자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 목사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보내려면 곱게 가라할 것이지 우회적으로 사람 골탕 먹이지 말라”, “당회가 의논해서 알려 달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리고 “내(김 목사)가 강사를 초청해서 사경회를 다시 한 번 해야겠노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했다. 당시 장로는 김정권, 안병즙, 강영목 세 사람이었다.
나를 포함한 장로들은 무슨 말을 목사가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부흥사경회는 은혜 중에 진행이 되었고 교인들도 무척 좋아했다. 우리 장로들도 좋은 강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부흥사경회를 마치는 마당에 담임목사의 이런 발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현득 목사의 이런 발언은 사경회 강사를 이용하여 자신을 사임시키려 한다는 오해에서 연유된 것이다. 장로들은 김현득 목사를 신뢰하고 있었고 교인들 역시 대부분이 좋은 목회자로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김 목사가 우리 교회에서 떠나야한다고 생각한 바가 없었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무슨 뜻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김현득 목사의 오해는 그 분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에서 야기 된 것이다. 침산제일교회는 목회자를 잘 보내는 교회이고 장로들은 목회자를 어렵게 만드는 존재라는 편견을 가지고 우리 교회 부임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이런 일은 김현득 목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목사 분이 김현득 목사를 만나면 “그 사람들(장로) 요사이는 좀 나아 젓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구 교계에 우리 교회는 목회자를 자주 보내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었던 터 이였으니 김 목사의 편견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이다.
목사가 부임해서 1년여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장로를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면서 목회를 했다면 그것이 누구의 불행이겠는가? 나는 헐 씬 뒤에 김 목사에게서 이런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부덕함을 마음 깊이 부끄러워했다.
나는 정 순 장로가 미국으로 이주 하신 후 교회 선임 장로(先任 長老)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선임 장로로 교회를 대표해야 했다. 선임 장로는 교회 중대사에 대해서 판단도 바르게 하여야하고 교회 어려움이 오지 않도록 미리 조치해야 하는 직무가 있다.
나는 남 앞에 나서는 성격이 못된다. 가능한 다른 분을 내 세우고 만 부득이 할 때 나선다. 나의 전 생애가 그러했다. 교회에서도 나서는 일은 부득이 할 때에만 하였다. 담임목사와는 1년에 2-4회 정도 교회 문제와 목회 방향 그리고 설교에 관해 이야기 하곤 하였다. 그러나 목회자를 돕기 위한 조언이었지 힐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장로의 역할이 목회자가 바르게 목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서로의 담론에서 유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김현득 목사에 대한 기대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김 목사의 목회 성공 그런 것을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김 목사 부임 초기에 담론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김 목사께서 우리 교회 부임 전에 갖고 계신 편견 때문에 이런 담론은 오히려 편견을 키울 뿐이었다.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라도 수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우리 교회 전통처럼 김 목사는 4년 5개월 시무하고 대봉제일교회로 목회지(牧會地)를 옮기셨다. 김 목사가 대봉제일교회로 옮기신 후에도 나와는 연락이 계속 있었다. 그 분의 오해가 풀렸다고 보아야 할 까?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편견이나 오해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편견 즉 믿음 생활 외에 어떤 편견도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김현득 목사는 대봉제일교회로 옮기신 후 과로로 인하여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나는 김 목사의 순수함과 열정 그런 것을 기억한다. 김 목사와 같은 좋은 목회자를 잃은 것은 우리 교계의 큰 손실이다.
우리는 결코 남을 실족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귀는 우리로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한다. 또 이간(離間)을 붙여 사람 사이를 멀어지도록 한다. 우리는 마귀의 술수를 믿음으로 이겨야한다.
좋은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다. 문제를 믿음으로 해결하는 교회이다. 우리에게 무거운 짐은 항상 있다. 그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을 안식으로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때 평화를 갖는다(마 11:28-30). 교회 문제는 아무리 어렵고 무거워도 그 것 때문에 환란을 당하지 아니한다. 환란은 마귀의 장난 즉 서로를 못 믿게 하는 술수에 넘어 갈 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혜의 영이 항상 임하여 계시기를 간구 한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와 마귀의 장난(作亂)을 구분하여 승리하여 이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분란은 큰 문제에서 야기하지 아니한다. 아주 작은 문제에서 일어난다. 마귀는 큰 문제로 분란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작은 일로부터 차츰 분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작전을 구가한다. 우리가 결코 마귀의 작전에 넘어가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세심하게 살펴보라 마귀의 작전이 얼마나 섬세한가! 우리는 자주 그의 작전에 넘어 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어렵거든 천천히 생각하라 !
어려운 문제는 존재하지 아니한다.
어렵다는 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한다.
18. 지켜져야 할 일
우리 교회는 큰 헌금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장로는 교회 재건축을 위해 장기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제2교회당 건립 시 교회가 당한 어려움은 물론 경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계획적으로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 한다.
제3교회당 건축은 그래서 오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회의 결의를 통해 기성회는 소위 “벽돌 헌금” 말하자면 매달 벽돌 몇 장씩을 헌금하는 형태로 진행해 나아갔다. 1960년대 말부터 기성회는 꾸준히 준비해왔다.
기성회 회장이시던 정 순 장로는 1975년 12월 나에게 기성회장직을 넘기셨다. 나는 1976년부터 제3교회당을 준공하기까지 4년간을 기성회 회장직을 수행했다.
정 순 장로께서 회장으로 계시던 1974년 5월 제3교회당 건축 부지(현 교회당 침산동 22-100, 101)를 매입하였다. 이 대금이 지금까지 모아 놓은 건축 헌금이었다. 168평을 평당 65,000원씩 1,092만원에 매입한 것이다. 당시 신흥 개발지는 부지 대금이 평당 기 천원 했으니 이 금액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이미 기술한 바 있지만 지도부의 판단이 너무 미숙하였다. 168평 부지에서 어떻게 우리의 이상을 펴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침산에 우리의 촛대를 세우시고자 한 것이다.
우리 교회는 제3교회당 부지로 옮길 생각이 없었다. 본래 계획은 제2교회당 부지에 흙벽돌 건물을 헐고 그 곳에 새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이 준 공업단지(準 工業團地)여서 교회를 건축 할 수 없었다.
여러 방면에서 교회당 건축을 모색했으나 방안이 없었다. 어떤 분이 조언하기를 당시 정계의 실력자인 이만섭 의원을 만나 건의 하면 좋은 방안이 있을 것이라 해서 우리 당회원이 새벽에 이 의원 댁으로 방문을 하였다. 한 시간도 더 기다렸는데 먼저 온 손님과 긴 이야기를 끝내고 우리와는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나가면서 “선거나 잘하라”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교회가 정치에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 하려했으니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나는 앞으로 교회 문제로 이 세상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기로 작정 하였다. 교회 당면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이해하고 그 분이 해결하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제3의 부지를 물색해야만 했다. 현 교회당 부지는 그래서 정해진 것이다. 이 부지는 상업지구이기 때문에 건축 율이 90퍼센트 이어서 땅의 넓이에 비해 넓게 건축할 수 있었다. 또 이 부지는 대구시 미관지구(美觀地區)여서 시의 높은 수준의 건축 관계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내가 기성회 회장을 맡고 2년 이상을 준비하여 1978년 교회당 건축을 위한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치게 되었다. 1978년 말 기성회는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교회당 건축은 1차공사와 2차 공사로 나누어 한다.
1차 공사는 골조와 지붕까지 완성하는 것이고, 2차 공사는 벽 쌓기와 내장 공사로 교회당을 완공하는 것이다.
둘째, 건축 공사는 건설회사로 등록된 회사에 도급으로 맡기고, 우리 교인은 개입하지 아니한다.
셋째, 1차 공사는 이미 모아진 헌금으로 시공하고, 2차 공사는 제2교회당 매각 대금으로 충당한다.
이 원칙은 잘 정리된 것이다. 또 이 방법으로 공사를 진행하면 결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교회는 1979년 3월 26일 제3교회당 부지에서 기공예배를 드리고 1차 골조공사에 들어갔다. 기성회가 정한 원칙 데로 기성회 결의를 거처 건설회사인 신진건설에 419평 본당 골조공사를 6,600만원에 맡겼다. 이 자금은 우리 교회가 헌금으로 적립한 것이어서 대금지불에 문제가 없었다. 이 골조공사는 8월 15일까지 완공하는 것으로 하였다. 전 교인의 관심은 무척 높았다. 교회 부지를 옮겨서 건축하는 것이니 예배에도 지장이 없었다. 1차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는 이 해 7월 초순 미국을 방문할 일이 있어서 출국하고 8월 20일경 귀국했다. 약 1개월 반을 비웠다. 1차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있고 2차 공사는 제2교회당이 매각되어야하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내가 귀국해 보니 2차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차 공사가 끝나고 며칠 되지 아니했는데 벽돌을 쌓고 있는 것이다. 시공회사를 정한 것도 아니고, 완전한 직영도 아니다. 그렇다고 제2교회당이 매각된 것도 아니다. 이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공사의 주체와 책임자가 없이 2차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2차 공사는 책임을 질 사람이 없는 것이다. 도급을 맡은 회사도 없고 교회 직영도 아니다. 그러니 공사가 불실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계획이 차질이 생기게 된 것이다.
제3(현)교회당 1차공사 골조공사가 끝나고 2차 공사에 성도님들이 자원 봉사자로 벽돌을 날랐다.
나는 기성회 회장으로 결재 할 일이 없었다. 또 결재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연 재정에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돈을 차용해야하고 물품 대금의 독촉을 받게 되는 어려움이 생겼다. 김현득 목사는 여기 저기 돈 빌리러 다니고 이자도 갚아야했다. 이때 김현득 목사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내가 귀국한 날이 1차 공사 끝나는 며칠 뒤인데 누구의 결정으로 이렇게 공사가 진행되었는지, 기성회가 정한 원칙이 깨어졌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2차 공사를 제2교회당 매각 후에 진행 했으면 공사비도 저렴하게 시공사에 의해 견고한 건물을 지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니 아무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었다. 실로 난감한 일이었다.
나는 2001년 본당 리모델 할 때까지 불실한 본당 공사가 늘 마음에 걸리곤 하였다. 교회 설립 50주년을 맞아 교회를 리모델 한 것이 얼마나 잘한 것인지 모른다. 나는 2001년 리모델 공사로 마음의 짐을 조금 벗었다.
2차 공사 진행으로 경비가 나아가야 하는데 거의 차용금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제2교회당 매각이 무척 시급했다. 그러나 당시 부동산 매매가 한산한 관계로 잘 팔리지 않았다. 12월에 구매자가 생겨서 우리는 급한 편이고 구매자는 느긋한 상황에서 거래가 시작되었다. 결국 1억500만원에 계약을 성사 시킬 수 있었다.
당시 나의 계산은 1차 공사비와 2차 공사비는 같을 것이라 예측했다. 또 당시 건축 업계의 예측도 마찬 가지였다. 결국 2차 공사비를 정산하고 나니 제2교회당 매각 대금 중 남은 것이 없었다.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
첫째,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게 된다.
둘째, 경비를 많이 써야한다.
셋째, 불실 공사가 된다.
넷째, 구성원 간에 신뢰가 무너진다.
많이 생각하고 검토하고 자료를 모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도록 하고 잘 정해진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제3교회당 건축은 우리에게 많은 배움을 주었고, 우리가 해서는 아니 될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런 관계로 제2교회당 매각 대금은 이럭저럭 남는 것이 없었다. 건축비 이외에도 이자로 지급해야하는 경비도 많았다. 남에게 차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 당시만 해도 은행권에서 대출받는 것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니 개인에게서 차용 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득 목사는 이런 일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했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건축을 진행 했으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한 샘이다.
앞으로도 교회는 교회 건축 관계 공사나 시설 설치는 가능한 일정 수준 이상의 업체에게 위탁하고, 우리 교인이 직접 하지 아니하는 것이 좋다. 자영하는 공사는 교인 간에 갈등만 남기고 관리 소홀로 불실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다.
제3교회당 건축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인간의 잘못된 욕망 때문에 생긴 경우가 허다하다. 질서를 지켰으면 평안하게 그리고 아주 효율적으로 건축을 끝내고 그 후유증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1979년 말 기성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한 안건을 제안하였다. 제3교회당 건축을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제안은 두 사람의 기성회 감사가 2차 공사 경비 지출을 감사하고 감사 결과에 모두가 승복하고 이 후로는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아니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에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두 사람의 감사가 회계 감사를 하였다. 감사 결과 하자가 없다는 보고를 하였고 이것으로 제3교회당 건축 공사에 관한 모든 것을 종결시켰다.
이런 문제가 정리되지 아니하면 교회 혼란이 가중되고 갈등이 커진다. 교회가 일을 잘못 처리하면 돈도 잃고 사람도
잃게 된다. 진행 과정에서도 합리성이 있어야하지만 마무리 역시 명료하게 처리해야 한다.
19. 장로의 고민
당회원 특히 장로는 담임목사 이동시 가장 고민스럽다. 사람이 오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가시는 분이 좋은 목회지로 떠난다 해도 교회는 그로인해 생겨난 공백을 채워야 하는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다. 거기다 신임 담임목사를 청빙해야하는데 이 또한 작은 문제가 아니다.
목사청빙이 왜 어려운가? 좋은 목회자인지를 누가 잘 알아 낼 수 있는가! 좋은 목회자는 어떤 분인가? 외모인가? 훌륭한 설교자인가? 학벌인가? 사교성이 좋은 분인가? 품성이 훌륭하신 분인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인정한 사람인가?
우리는 수많은 질문을 던져 본다. 그런 것이 객관적으로 명료히 나타나는 것이라면 양적으로 측정하고 결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적으로 측정 할 수 없는 부분은 어떻게 알아내는가? 양적으로 안다는 것은 형식적이고 껍데기에 불과하다. 질적 속성을 알아낸다는 것은 오랜 경험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양적이던 질적이던 누구를 이해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래서 장로는 목회자를 청빙 할 때 곤혹스럽다.
당회가 담임목사를 천거하여 공동의회에 제안 할 때는 많은 고려와 기도와 의논 끝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가 심사숙고 했다하여 그 결정이 만족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담임목사 부임 후 오래지 않아 장로와 목사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나는 수 없이 많이 보아왔다. 사람 사는 곳이니 그럴 수 있다고 하면 간단한 문제이지만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간과 할 수 없다.
나는 혼자서 담임목사 청빙 시 세워 놓은 기준이 있었다.
첫째, 가능한 아는 사람이 좋다. 그의 과거의 살아온 여정을 알면 제일 좋을 것이다. 그때 그분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살아온 분이라면 좋겠다.
둘째, 우리 교계의 신실한 목회자가 추천하는 분이면 좋겠다. 우리 사회는 추천문화가 토착화하지 못했다. 외국에서는 추천서가 일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추천하는 사람이 사실대로 기술하고 설명해 주는 것도 선진 문화이다. 아직 우리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한, 두 분의 추천을 받아 참고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셋째, 본인의 자기 소개서와 목회비전을 받아 참고하는 것 역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누구의 단점이나 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분의 장점 그리고 잘할 수 있는 부분을 파악하면 우리 교회의 미래 비전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가늠 할 수 있다.
나의 이런 기준은 사고의 준거 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좋은 목회자는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을 경주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 하실 것이다.
김현득 목사가 대봉제일교회로 가신 뒤 장로는 후임 담임목사 결정에 신중에 신중을 다 하였다. 장로들은 서두르지 않기로 작정하고 천천히 후임을 물색하기로 하였다. 과거 담임목사 이동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나 할까? 후임 목사는 가벼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데 장로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김현득 목사 이임 후 6개월간 공석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 6개월은 무척 어려운 시간이었다. 당시 부목사로 시무하신 서철교 목사와 외부에서 초청한 강사 목사로 예배 설교를 채워 나아갔다. 예배 사회는 장로들이 인도하였고 때로는 서철교 목사가 인도하기도 하였다.
내가 주일 낮 대예배 사회를 맡은 주일인데 설교를 맡은 목사가 갑자기 몸이 아파서 못 오신다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감리교회 목사 사이에서는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자세로 살고,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필요하면 설교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갔는데 설교 담당 목사가 참석할 수 없다니 어찌하겠는가! 평소에 깊이 생각하고 사모하는 말씀을 교인들과 같이 삼고하고 서로 위로를 받는 것으로 위기를 넘겼다.
담임목사를 찾는 일 외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곤 하였다.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 적합지 않은 분을 소개하고 계속 압력을 가해 오는 일은 마음의 짐을 더했다. 사실 장로들이 몇 달이고 계속해서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인들에게 후임 목사를 빨리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야했다. 나는 교인들에게 자주 “좋은 목회자를 찾는데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아니 할 것 이니, 우리가 협력하여 기도로 구하십시다.” 라고 부탁하였다. 우리 교회는 교인들의 이해와 협조로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었다. 우리 교회 제직회와 교인들은 항상 “당회가 하는 일이니 순종해야 하지요” 라는 자세를 견지 하였다. 우리 교회가 받은 복이 아니겠는가!
순종은 교회나 당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만이 순종한다. 당회를 존중하고, 높이고, 인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록 당회가 보잘 것 없는 존재라 해도 그를 존중하고 높일 때 당회의 권위가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져 있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복을 누리는 사람의 행위이다.
여러 교회에 후보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집사들이 파견되었고 마땅한 후보자는 없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중 서현교회 부목사로 시무하시고 있는 석 윤(石 潤) 목사가 좋은 후보자로 대두되었다. 집사들이 설교도 듣고 와서 평가가 좋은 편이었다. 석 윤 목사는 서울 서현교회 출신이다. 자당(慈堂)되시는 분이 서현교회 여전도사로 시무하고 계셨고 서현교회는 박경남 목사가 개척한 교회이니 어느 정도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장로들이 11월 말로 기억되는 어느 저녁에 석 윤 목사를 만났다. 석 윤 목사는 키도 헌칠하고 인물도 뛰어났다. 장로들은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한 장로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후임으로 결정하자고 제안하였다.
당회는 만장일치로 석 윤 목사를 후임 목회자로 결정하였다. 공동의회에서 석 윤 목사 위임목사 청빙을 결의하여 1983년 1월 부임하시게 되었다. 석 윤 목사는 성격이 급하시고 조금만 마음에 거슬려도 참기가 어려운 분이다. 한마디로 거침이 없는 분이다. 그리고 무척 솔직하여 직설적이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석 목사를 무척 좋아했다. 설교도 진리를 명쾌하게 풀어 설명하는 예지(叡智) 같은 것이 있으신 분이다.
석 윤 목사는 이런 강직함과 거침없는 성격 때문에 교회를 빨리 떠나신 것 같다. 석 목사의 재임 3년 9개월(1983년 1월-1986년 9월)은 장로들의 노력에 비추어 보면 너무 단명이었다고 생각된다.
석 윤 목사는 사모(師母)와 항상 동역자라고 생각하시었다. 그래서 심방(尋訪)도 같이 다니고 목회활동은 언제나 부부가 같이 하는 입장이었다. 석 목사는 그것이 자신의 목회에 기본이라 생각한 것이다. 장로나 교인 사이에 이에 대한 뒷말들이 없을 수 없었다. 나는 석 목사와 담론을 한 후 한 결론을 얻었다. 석 목사의 성격이나 그 활달성에 비추어보아 부부가 같이 활동하는 것이 맞겠다고 인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분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여 이해를 구하였다.
당시 주일 낮 대예배를 드리기 전에 당회가 모여 잠시 기도회를 가졌다. 이 시간은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이고 목사나 장로가 더 경건한 심정으로 예배에 임하고, 우리 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기원하는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시간에 더러 목사와 장로 간에 불협화음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대예배 전에 마음이 상한다는 것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데 큰 손상을 입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서로 조심해야하고 예배에 지장이 되도록 하면 아니 된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주일 대예배 전에 목회자나 교인사이에 덕스럽지 않은 말을 하여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거룩한 예배를 드리도록 전교우가 서로 노력해야 한다. 기쁨으로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사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다.
나는 장로와 목사가 서로 존중 할 때에 협력 체제를 갖추게 되고 선을 이루어 나아간다고 믿는다. 사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슨 큰 문제들인가? 정말 사소한 것이다. “사소한 것에 목을 매어 큰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생명의 구원역사이다. 그래서 감사, 찬송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나는 석 윤 목사가 우리 교회에서 장기간 목회자로 성공하시고 더불어 이웃하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3년 5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시무하시고 떠나시었으니 마음에 섭섭함이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석 목사도 우리 교회를 떠나 서울로 가시었는데 그 교회에서 수 십 년을 잘 목회하시고 은퇴 하셨다. 정계종 목사도 서울 원남교회에서 은퇴하셨고, 황해영 목사도 대구성지교회에서 은퇴하셨으며, 정규채 목사 역시 부산 장전교회 부임 후 지금까지 성공적인 목회 활동을 하고 계신다. 우리 교회에서는 단명이었던 목사들이 다른 교회에서는 평생 목회를 하시니 이는 우리의 부덕함이 아닌가? 반성과 송구한 심정을 갖는다. 똑같은 사람이 한곳에서는 장기간 목회를 할 수 없는데 왜, 또 다른 곳에서는 장기목회가 가능 한가?
나는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이 부족하고 잘못되어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원석(原石)과 같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기본적 문제가 아니라 방법적으로 접근법을 잘 몰라서 부드러움이 없다고 본다. 기본적 생각은 모두 옳다. 교회를 위한 생각,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는 소명의식,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리라는 생각” 등 그러나 그 접근 방법이 유연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교회일은 그 바탕에 믿음이 항상 토대를 이루어야한다. 그럴 때 모든 것을 온유한 심령으로 처리하게 된다. 서로를 감싸 줄 수 있는 사랑이 요구된다. 그런 다듬어져 있는 심령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만 앞서면 전후(前後)의 일을 생각 할 수 없게 된다. 석 윤 목사와 장로 사이에 무슨 간격이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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