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교육

창파 이 태 영 총장 21주기 추모사

profkim 2020. 8. 1. 15:15

                          창파 이 태 영 총장 21주기 추모사

 

 

대구대학교 설립자이며 초대 총장 이태영

  무척 추운 날이었습니다. 동토(凍土)에 하늘은 얼어붙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종종걸음이었지요, 1월 어느 날 대명동 라이트하우스 나지막한 지붕 아래서 총장님을 처음 만난 날입니다. 그때 제 뇌리에 남아있는 인상은 보기 드문 미남이다. 귀골이고 귀공자의 모습이 이미지화 되었지요 그해 총장님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사회사업대학 학장에 재 취임하셨고 저는 교수로 부임하던 해입니다.

 

  대학은 모든 것이 빈약하였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이모든 일을 처리해 나아가야하는 것이 학장님의 소임이었지요. 겨우 대학 인가를 받아서 1년여 운영하고 초급대학으로 강등되는 수모도 겪어야했고 이제 4년제 정규대학으로 다시 복귀하여 막 시작하려던 때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학장님을 위시하여 모든 구성원들은 불안한 시간을 보내던 때입니다.

 

  총장님은 항상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꿈이 무엇입니까? 꿈속에는 비전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까? 미래에 다가올 세상, 복지사회에 대한 이상은 한 번도 접어본 일이 없으셨지요,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지도자를 길러야 미래사회에 부응한다는 꿈은 곧 비전이었습니다. 이 비전이 대구대학을 설립하게 되는 원동력이었고 그 당시 이런 꿈을 꾼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세를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되고 사회적으로 백안시당하였지요, 그러나 총장님의 확신을 꺾을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확신의 소산이 대구대학교입니다. 대구대학교는 오로지 이태영 총장님의 작품입니다. 어려울 때 같이한 사람들이 증인입니다.

 

  아직 초기인 1960년대부터 교직원의 국제적 안목을 기르기 위해 일본으로 미국으로 교직원을 파견하여 연수를 하게하신 비전은 남다른 안목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교직원은 타 대학에서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에 소위 외국물을 먹게 되었고 그 안목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지도자 양성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외국으로 연수를 떠난 교직원과 영화 감상을 즐기시고 교직원과 같이 할 때는 항상 선두에 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때문에 따라가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교직원이 항상 독립해서 행동하기를 바라셨습니다.

 

  1969년 대학입학예비고사가 실시되고 우리대학은 무척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이 총장님은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교직원들의 불만도 해소해야하고 학생은 없고 몇 명 입학한 학생들은 모두 장학생이니 학교재정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잘 견디어내셨습니다. 학교를 일으켜 세우려는 의지는 누구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지도자의 고독이라 해야 갰습니다.

 

  그 후 70년대 들어와서 대명동 캠퍼스 서쪽에 벽돌로 5층 건물을 짓고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허술한 집이지요, 그러나 그곳에 학장실과 행정 실을 두는 시대였습니다. 집을 너무 허술하게 지었다고 이야기 했더니, “내일 헐고 다시 지어도 오늘은 이렇게 지어야 합니다.” 라는 말씀 듣고 숙연했던 생각, 얼마나 고뇌가 크셨겠습니까?

 

  종합대학이 되고 학교가 활기차게 발전 할 때 기뻐하시던 모습 보기 좋았습니다. 단과대학이 늘어나고 학과가 증설되어 대형대학으로 발전해 갈 즈음 격무에 시달린 총장님은 서서히 몸의 이상을 느끼셨습니다. 50년대부터 누적되어온 피로와 신체의 이상이었겠지요, 아쉽습니다. 총장님이 건강 하셨으면, 오늘의 대구대학은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대구대학교 모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습이라 사려 됩니다.

 

  오늘 총장님 21주기를 맞아서 다음 몇 가지를 회상합니다.

 

  첫째, 총장님의 삶은 장애자와 같이하신 삶이었습니다. 평생 주택을 가져보신 일도 없고 라이트하우스에서 맹인, 농아인 들과 같이 사셨으니 페스탈로치의 교육애라 하여 이보다 더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둘째, 총장님은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서울 출장이라고 가시면 항상 종합청사근처의 한옥인 황금여관에 숙소를 하셨고 학교의 형편이 나아진 후에도 이는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무더위에도 총장실에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고 지내시던 일, 학교행정에서도 최소한의 경비를 들여 운영하신 점, 이런 총장님의 자세는 미래 대구대학교의 건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증언합니다.

 

  셋째, 교직원을 보살피시는 정성이 남달랐습니다. 개인의 삶, 길흉사, 신상의 문제, 직장생활에서 오는 문제에 대해 세심한 배려와 가족과 같이 더불어 해 주신 점 기억합니다.

 

 친애하는 이 태영 총장님, 그의 분신인 대구대학교, 가족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같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20161129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김정권이 삼가 추모의 글을 올려드립니다.

 

 

 

<창파 이 태 영 총장 21주기 추모 시>

 

                               꿈을 이룬 사람

 

 

창조의 힘을 널리 갈파하며

파안대소하던 큰 나무

이 세상의 모든 꿈을 혼자 꾸던 그

태평양 오가며 세계에 널리 펴고

영혼이 촉촉하여 이웃을 풍요롭게 하였다.

 

큰 밝음의 터에서 그의 꿈은 이루어졌고

사해(四海)를 두를 위광은

그의 주위에 모여

큰 업적 이루었으니

꿈은 날개를 펴고 현실에 안착했다.

 

진량벌 넓은 들은 그의 꿈의 궁전

문천지가 그 기상을 더 한다.

백만 평 넓은 들에 이루어져가는 그의 꿈은 호대하여

나라가 놀라고

세상이 놀라니

그의 꿈은 위대 하여라

 

이십일 세기를 꿈꾸던 그의 이상은

진량벌에서 이루어지고

그의 실존은 그 속에 있다.

그의 육신은 우리를 떠났으나

그는 영원히 우리와 같이하니

우리의 정신이고

우리의 삶이다.

 

이태영 총장 그 이름위에

신의 축복이

신의 영광이

영원하시기를,

 

20161129

 

 

창파 이태영 총장 21주기를 맞아

명예교수 김 정 권이 드리는 추모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