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의 시간, 따뜻한 영혼들의 만남
한국초창기 특수교육 회상
김 정 권
김정권(金正權)교수는 대구대학교 특수교육학과 교수(1964-2002), 동 교육학부장(1977-1982), 동 사범대학장(1982-1983), 한국정신지체아교육학회 회장(1974-1995), 대한특수교육학회 회장(1976-1981), 교육부 위탁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 위원장(1982-1983),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연구소장(1983-1994), 동 교육대학원장(1984-1989), 교육부 위탁 제5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위원장(1987-1988), 아시아지적장애연맹 회장(Asian Federation on Intellectual Disabilities, 1991-1993),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장(1991-1994), 교육부 중앙교육심의위원(1994-1998), 교육부 위탁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위원장(1996-1999),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재활테크노파크사업단장(1997-1999), 동 특수교육대학원장(1998-2000), 사단법인 한국발달지체아교육 복지회장(1987-2015), 발달지체인 자기 권리주장운동추진위원장 (1998-2005), 을 역임하고 현재는 대구대학교 명예교수(2002- ), 아시아정신지체연맹 평생이사(2003- ; Honorary member of Asian Federation on Intellectual Disabilities)이다.
이 글은 196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의 한국특수교육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 자신이 직 간접으로 경험 했던 일들을 중심으로 후세대에는 잊어질 수도 있는 내용을 주로 기술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1960, 70년대 이야기를 많이 기술하였다.
I. 1960년대 한국의 특수교육
1. 일반적 상황
암울하고, 가난하고, 무엇이고 다 불확실한 회색빛과 같은 사회상황은 심신의 손상으로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돌아볼 여지가 없었다. 장애인은 소외되고, 방치 되였다. 이들을 위한 정책은 없었다. 독지가에 의한 보호와 교육이 다소 있었을 뿐이다. 60년대 초 우리나라 특수학교 수는 인가와 미인가를 합하여 12개교에 불과했고, 교사는 100명을 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특수교육 초창기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국공립 3개교를 제외하고는 학생이 납입하는 공납금에 의해 학교가 유지 되였으니 학교가 제대로 운영 되였겠는가? 거기다 학부모는 가난하여 공납금을 납입 할 능력을 가진 분이 몇 분되지 않았다. 학교 수가 적고 여러 지역에서 학생이 모이니 자연 기숙제학교로 운영되는 것이 보통이였다. 자녀를 학교 기숙사에 입사 시킨 후로 부모의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자녀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잘 보살피는 부모도 있었으나 그들 역시 가난하니 쌀이나 보리 쌀 등을 공납금으로 가져오는 분들도 많았다. 60년대 초 특수학교는 학교이기 보다는 일종의 수용시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열약한 상황에서 교사인들 유자격자가 있었겠는가? 대부분 학교의 교사는 무자격 교사였다. 1954년 서울맹아학교에 1년제 보통사범과가 개설된 후 특수교사 자격증이 부여하게 되었고 1961년 대구대학교(구 한국사회사업대학)에 특수교육과가 개설되어 특수교육교사를 양성하였으나 60년대 초의 특수교사 양성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특수교육은 무자격교사에 의해 운영되고 학교환경은 열약하여 그 참담함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나는 1965년 대전맹하교(현 대전대명학교) 엄병희 교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학교를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 상황이 너무 참담했었다. 이 학교가 공립으로 전환되고 엄병희 교장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을 때 제자들로부터 받은 회갑 선물을 자랑하는 엄교장의 뿌듯함을 넘치는 감사로 받아 드렸다.
한국특수교육협회(현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가 1962년 만들어 지고 1963년부터 교사 연수회가 시작 되였다. 1963년은 부산맹아학교에서, 1964년에는 대구대학교에서 개최 되었다. 마른 대지가 빗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교사들은 흡인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원체 열약한 상태이니 이들에게 주어 진 것은 보잘 것이 없었을 것이다. 많은 강좌가 일반교육 이었으니 특수교육에 관련된 강의는 부족 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서 모인 연수회이니 교사들의 숙소문제도 적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연수를 받는 모든 교사는 학교 교실에서 잠을 자고, 화장실과 세면 등의 불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의가 끝나고 저녁식사를 마치면 싸구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댄스를 하는 광경은 일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때 교사에게 막걸리 몇 잔과 소박한 안주라도 오히려 과한 것 이였다.
2. 정신지체아 문제의 심각성
1960년대 초 정신지체학생과 지체부자유학생은 갈 곳이 없었다. 정신지체학교는 없었고 중앙각심학원(현 국립 재활원)이 중증 정신지체 인을 수용하여 교육을 병행하고 있었다. 지체부자유학생은 1964년 연세대 재활원국민학교가 설립 되였으나 병원학교였다. 특히 정신지체학생은 어디고 설 땅이 없었다. 그래서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1968년 한국정신박약아부모회(초대회장 최효섭 목사)가 창립 되었으나 서울중심의 소수의 어머니가 모여서 신세타령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그 때 어머니들의 표정을 보면
첫째, 화장은 하지 않는다.
둘째, 얼굴은 표정이 없다. 그리고 납덩어리였다.
셋째, 웃지 않는다.
이들 어머니의 언어는 한정되어 있었다.
“저 녀석은 나보다 하루 먼저 죽어야 되”,
“나는 전생(前生)에 큰 죄가 있었나보아”
자식에 대한 중압감, 자식 미래에 대한 걱정, 끝없이 일어나는 울분 감, 자책감 그런 것이 부모의 심정이었다. 부모를 상대한 농담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이때 부모교육과 부모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1992년 발달지체부모대학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60년대 부모운동은 아주 미약하였다. 한마디로 힘이 없었다. 그러나 1968년 한국정신박약아부모회의 창립은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성을 갖는다고 본다. 초대회장을 역임한 최효섭 목사 내외는 박정희대통령부인의 도움을 받아 조그마한 계몽용 팸플릿을 발간하였다. 이 책자는 10권이 나오고 접었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중요한 자료였다. 인본 것을 번역한 것도 있고, 외국소개도 있었다. 이일을 위해 이춘섭 교장, 김동극 교장, 최효섭 목사 그리고 필자도 동참하였다. 이 때 발행한 책을 소개하면 책의 크기는 4.6판이고, 매 책은 32-38쪽 이였다.
최효섭 목사의 글 중 잊을 수 없는 글이 있었다.
“너하고 나하고 죽자 죽어 !”
하고 울부짖으며 기홍 이의 어깨와 종아리를 정신없이 내려치던 아내의 처참한 모습이 지금도 가끔 눈앞에 떠온다. 아내는 기홍 이를 때리며, 울며, 끌어안으며, 그러면서도 흙투성이가 된 아이의 몸을 정성스럽게 물로 씻고 있었다. 소리는 안냈지만 나도 방에서 울었다. 남자는 울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어서 더욱 고독하다. 기홍 이를 또 잃었다가 파출소에 붙잡아 놓은 것을 막 찾아온 길이었다. 온 식구를 고통에 몰아넣고서도 뭐가 좋은지 기홍 이는 벌써 싱글 벙글하고 있다(정신박약아 부모수기; ‘아 내 아들 기홍 이’ 에서).
열약한 사회상황 그 것은 곧 모든 짐이 부모에게 돌아가는 즉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모가 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사회인식의 개선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60년대 사회인식은 정말 낮았다. 장애인은 인간으로서 대우되지 못 하였다. 이상한 사람, 낙오자, 실패자, 싹수가 노란사람 등으로 치부되고 가족은 죄의식, 수치심 등으로 장애인을 숨기거나, 경재의 여력이 있는 가정에서는 수용시설에 수용시키는 것으로 그 짐을 덜었다.
이 때 모 정신지체학교 자모회장을 한 어머니 한분은 이런 것을 전연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다윈증후군인 따님과 어디든 동행하고 떳떳하게 친구모임에도 다리고 다녔다. 하루는 서울의 명동거리를 활보하는 중인데 상당한 인텔리 여성 4명이 지나가면서 회장 모녀를 계속 뒤 돌아보고 있었다. 이 회장도 돌아서서 이들에게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회장; “무엇을 보고 있어--” 하고 고함을 첬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런 아이 셋씩만 낳아라-” 고 고함을 질렀다.
길가는 여성들; “아-이-쿠” 하고 내 뺏다.
이 이야기는 모 회장으로부터 내가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당시 우리사회의 의식수준이 얼마나 낮았는가? 를 가늠하게 한다. 심신의 손상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잘 못된 편견에서 사회대책이 잘 못 수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사회 경제적 조건이야 말 할 수 없이 열약하여 대책을 논의하기도 어려운 때이기는 했지만 인간존엄이나 평등사상 역시 무척 낮은 편이였다. 당시 문교부 직원에게 장애아동의 교육문제를 제기하면 “멀쩡한 아이도 교육을 못시키는데 무슨 병신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대놓고 면박을 주는 때 이였다. 오로지 국가 경재건설 이라는 지상 명령을 이루려는 사회에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일들이다.
3. 특수교육교원 양성
우리나라 특수교육이 시작되고 교사양성은 큰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1900년대 초에 외국에서 온 선교사나 단기간에 외국 견학을 통해서 교육을 담당하게 하는 경우와 일본동경맹학교 사범과에 유학(오봉래, 조배녀 등)을 시켜 교사를 양성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교원 양성은 제도가 없었다.
동경맹학교 사범과에 유학생 앞열 좌 조배녀, 앞열 우 오봉내(1900년대 초)
광복 후 1950년 국립맹아학교(현 서울맹학교, 서울선희학교)에 3년제 맹사범과와 농사범과가 개설되고, 같은 형식으로 1954년에는 1년제 보통사범과가 개설되어 맹교육 교사와 농교육 교사를 양성하였다. 초기 교원양성은 고등학교수준에서 이루어 젓다. 보통사범과는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과정이 엇다. 1950년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해이고 사회적 혼란이 극심하던 때에 교사 양성이란 쉽지 않았다.
대학 수준에서 교사양성은 1961년 대구대학교(당시는 한국사회사업대학)에 4년제 특수교육과가 개설됨으로 시작되었다. 1962년 대구대학교에 2년제 특수교육과가 개설되어 1년에 40명씩 1964년과 1965년 두해에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지되었다. 초기 교사양성은 무척 어려웠는데 이는 특수학교가 영세한 면과 사회인식의 부족으로 소위 인기가 없는 학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졸업생 취업의 문제가 큰 문제이기도 했지만 신입생을 모집하는데도 큰 애로를 겪게 되었다. 취업의 기회가 부족하니 특수교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흔 할리 없었다. 특수교사가 삼류교사로 치부되던 시절 특수교사들의 열등의식과 좌절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오늘의 특수교육 위상은 60년대 그 것과 비교 할 수없는 것이다.
II. 한국특수교육과정 이야기
나는 1982년 문교부가 위탁한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개정 위원장을 맡은 이래 1987 년에 제5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위원장, 1996년에 제7차 특수학교 교유과정 개정위원장의 소임을 맡아 세 차례 우리나라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 작업을 주도했다. 이 때 있었던 일들의 일부를 기술하고자한다.
1. 제4차 교육과정기의 특수교육과정
이 교육과정 개정과 제5차 개정 작업은 유사성이 많아서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언급하고 제5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에 관련된 것을 첨언하겠다.
1) 시작과 더불어 있었던 일
1982년 2월 말경 어느 날 오후에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정권 교수님이세요? 저는 문교부 교육과정담당관실의 임대영 연구관입니다.”
임대영 연구관의 전화내용의 요지는 제4차 (일반학교)교육과정개정 작업이 완료되고 이어서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개정하려 하는데 도와 줄 수 있느냐 라고 하는 반가운 전화이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까지 특수교육교육과정을 정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1967년에 정신지체학교와 지체부자유학교가 설립되었지만 정신지체학교 초등부 교육과정만 1974년 대구남양학교 중심으로 만든 시안을 문교부가 고시하여 사용했으나 정신지체 중등부와 고등부 교육과정 그리고 지체부자유학교 초, 중, 고등부 교육과정은 교육부 고시된 것이 없이 교사 자작교육과정을 운영해왔었다.
시각장애학교 및 청각장애학교 교육과정은 광복 후 2차에 걸 처 개정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나 전국적 합의에 의한 교육과정 개정 절차를 거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현상은 일반학교 교육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는 제4차 교육과정에서부터 전국적 합의 절차를 거치게 되었기 때문에 특수교육과정 역시 이때에 부응해서 전문가 참여에 의한 시안의 작성, 공청회, 현장검토 그리고 후속조치 즉 교육과정 해설서, 교사용지도서 등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여건이 열약한 상황에서 문교부의 뜻이 정해지고 교육과정 개정에 관한 협의를 하자고 하니 나로서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2, 3일 후 나는 문교부 교육과정 담당관실을 방문하였다. 이때 문교부 교육과정 담당관실에는 담당관 김상대 장학관을 위시하여 임대영 교육연구관(독일주재 대사관 장학관 역임, 윤중초등학교장 재임시 작고), 함수곤 연구관(교육부 교육과정담당관, 편수국장,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역임), 이상룡 연구사 등을 만나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에 관한 협의를 하고 대구대학에서 교육과정 개발을 책임지기로 하고 그날 밤 11시 새마을열차로 대구로 돌아왔다.
제4차 교육과정개정 수임 기관은 대구대학교 사범대학이었고 당시 사범대학장인 내가 총괄 개정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시각장애학교는 김승국 교수(단국대학교), 청각장애학교는 이규식 교수(대구대학교), 정신지체학교는 이상춘 교수(대구대학교), 지체부자유학교는 안병즙 교수(대구대학교)가 교육과정 개발 책임자로 수고하였으며 당시 대구보명학교장이신 원명욱 교장과 조 선생이 개정본부의 일을 관장했고 전국에서 선발된 연구위원 80여명, 시안개발위원 80여명이 그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작업은 1982년 4월부터 그해 12월까지 9개월 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무척 방대한 작업(방향 설정, 시안작성, 공청회 개최, 시안 확정, 그리고 답신보고서 작성)을 한 것이다. 단기간에 작업을 모두 마쳐야 하기 때문에 밤낮이 없이 작업이 계속되었고 거의 쉬는 날 없이 진행되었다.
요사이처럼 컴퓨터가 보편화 되어있는 시대 같으면 일이 편안했을 것이다. 당시 사정은 원고는 원고지에 손으로 써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인쇄 역시 공판인쇄나 활판인쇄가 주였기 때문에 교정의 번거로움이나 제약이 많았다. 모든 것이 시간을 많이 요하는 작업이고 주어진 시간은 짧아 교육과정 개발팀의 고초는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집중작업으로 100여명의 시안개발팀들은 학교의 일은 제처 놓고 시안 작성에 몰두하게 되었고 집중 작업하는 방의 벽면은 교육과정 내용을 담은 쪽지로 장식되었다. 요사이처럼 편리한 시대에 비교하면 노동량이 다섯 배는 넘게 들었을 것이다.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방향 설정을 위한 세미나가 1982년 4월 대구대학교 경산캠퍼스에서 열렸다. 당시 교육과정편수관리관(편수국장)이신 정태범 박사(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역임)와 관계관이 참석하고 최종 시안관련 세미나에는 교육부 차관 정태수 선생 등이 참석하였고 이들 세미나에서 우리나라 특수교육과정의 중요한 틀을 결정하게 되었다.
2)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의 구조
교육과정의 개정은 국가 교육과정의 설계를 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의 설계는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패러다임과 직결되어 있다. 사회 상황과 소비자의 욕구를 감안하여 사회 지배 패러다임을 어떤 형식으로 적용하는가의 문제이다.
제4차 교육과정 기는 인류사회가 산업사회를 벗어나 정보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이다. 산업사회 지배 패러다임은 “기능주의”가 오래도록 지배해 왔으나 산업사회 후반부에 해석주의 그리고 인간주의로 패러다임이동이 있었다. 우리가 제4차 교육과정을 개정하기 시작한 80년대는 ‘인간주의’ 패러다임이 인류의 문제 해결 방안으로 싹트기 시작한 때이다. 그래서 제4차 교육과정을 인간중심 교육과정이라 하였다.
제4차 교육과정 기에 와서 처음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세계교육사조와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교육지도자나 교육부 교육과정 개정 팀의 인식 수준이고 현장의 의식이나 교육과정개정 작업에서 거의 헛구호에 불과 하였다. 우리는 세계 흐름에 민감하지 못하였고 그 것이 앞으로 우리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하였다. 교육전문가 집단은 항상 보수적 이고 변화를 싫어하였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인간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실제 그 내용은 기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제4차, 5차 교육과정은 이런 범주에서 그 큰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특수학교교육과정 역시 기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인습적 교육과정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전국 규모의 합의 과정과 교육과정의 큰 틀을 만들고 모든 학교의 초, 중, 고등부 교육과정을 현장에 공급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아야겠다.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의 구조는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의 방향” 설정을 위한 세미나에서 확정되었다(대구대학교 사범대학, 1982). 사실 우리나라에서 교육과정을 논의하기 위해서 전국 규모로 세미나를 개최한 것은 처음 있었던 일이다. 특수교육도 일반교육과 마찬가지로 정식 절차에 의해 교육과정을 개정한다는 점에서 우리 특수교육계는 흥분되어 있었고 전국적 관심은 크게 고조되어 있었다. 이 세미나에서 결정된 구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장애별 교육과정을 구성 한다는데 합의를 하였다. 그래서 시각장애학교, 청각장애학교, 정신지체학교 그리고 지체부자유학교 교육과정을 구성하기로 했다. 아직 80년대는 산업사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세계적 특수교육의 사조도 장애 종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때여서 개인의 교육문제 보다는 장애별 교육문제를 교육에 더 많이 부각시키고 있던 때이었다. 이런 장애별 교육과정의 구성은 제5차 교육과정 기 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현상은 양적 교육의 표본이라 생각된다. 교육의 문제를 양적으로 보기보다는 질적 문제로 의식하게된 것은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에서 비로서 시작 되었다.
둘째, 다음의 문제는 교육과정의 영역의 문제이다. 보편적으로 교육과정의 영역은 지적 영역 즉 교과 영역과 사회생활 영역 즉 특별교육활동 으로 구성되는데 이 두 영역을 특수교육과정에 원용하는 문제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으나 심심의 손상에서 오는 능력의 상실(disability)에 관한 영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가는 상당한 논의를 거처야 했다.
그래서 “장애극복능력”을 다루는 제3의 영역이 필요함을 공유하게 되었고 이에는 장애극복 의지와 장애극복 기능이 필요함을 강조하게 되었다. 중요한 문제는 장애학생이 “장애”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함양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장애학생이 자아정체감, 자아존중, 자아실현, 자기결정 등과 같은 내적 자아를 형성함으로 스스로 장애를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반면 교과나 생활능력이 아니면서 심신의 손상으로 인해 발생한 기능이나 학습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훈련 즉 시각장애인의 보행훈련이나, 청각장애학생의 청능훈련, 정신지체학생의 심리치료나 작업치료, 지체부자유학생의 재활훈련 등과 같은 교과교육과 관련이 없는 영역의 훈련을 제3의 영역으로 설정한 것이다. 제4차 교육과정에서 이 부분의 표기를 시각장애 학교는 "생활적응", 청각장애와 정신지체학교는 "요육', 그리고 지체부자유학교는 "재활훈련"으로 하였다.
이 3영역으로 구성한 교육과정 형식은 제7차 교육과정 기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특수교육과정의 큰 틀로 존속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애
학생의 문제를 학생개인의 문제로 보는 기능주의적 견해로 "인간병리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제3영역의 내용이 "학생 치료에 초점이 있느냐?" 또는 "사회구조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있느냐?" 에 대한 논의는 우리의 중요 관심사이다.
셋째, 각 학교별 초등부, 중학부, 고등부 교육과정을 개발하도록 하였다. 제4차 및 제5차 교육과정 개발하는 때는 우리나라 특수교육기관에 유치부 설치가 아주 빈약한 상태여서 유치부 교육과정 개발은 자연 제외되었다. 정신지체학생 중 일반초등학교 특수학급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을 위하여 초등학교 특수학급 교육과정을 개발하기로 하였다.
이런 형태의 교육과정은 표준교육과정(standard base curriculum)의 성격이 농후하다. 말하자면 어떤 교육집단을 상정하고 그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을 구안하는 것이다. 집단 규준에 맞지 않는 학생은 언제나 교육과정 운영에서 소외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4차 교육과정은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우선 정신지체학교와 지체부자유학교는 무학년제로 운영하게 하였고, 개인학생의 독특한 교육적 욕구에 부응해서 교과 내용을 재구성하게 하였다. 교육의 대상을 개인(individual)으로 하여 교육과정을 하나의 참조자료(reference)로 간주하도록 하였다. 시각장애학교와 청각장애학교는 일반학교 교과서를 준용하도록 하였고 시각장애학교 직업교과(이료 관계)는 새로 개발하도록 하였다.
특수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학습 집단의 특성 보다는 개인의 교육적 욕구에 부응한 지원(support)을 어떻게 하는가? 또 개인의 교육욕구에 대응한 학습 환경을 어떻게 지원해 주는가에 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학교장과 교사에게 최대의 재량을 부여하는 것이다.
넷째,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에서부터 소위 특수학교용 1종 도서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을 공고하고 1984년부터 교사용 지도서를 개발하게 되었다. 교사용 지도서 개발 책임을 내가 맡았는데 교과별로 초, 중, 고 세권씩을 개발하여 교육과정의 계열에 맞추어 내용을 구성하였다.
1984년에 12책(교사용 지도서: 맹학교생활적응, 농학교 요육, 정신지체학교 생활 3권과 요육, 지체부자유학교 요육, 교과서: 맹학교 생활적응 3책), 1985년에 10책(교사용 지도서: 정신지체 생활 1책, 언어 4책, 작업, 직업, 학습준비기능, 감각운동기능), 그리고 1986년에 18책(교사용 지도서: 언어 3책, 사회 1책, 인지 3책, 수량 2책, 자연 2책, 건강 4책, 예능 4책) 등을 개발하여 현장 학습을 돕게 되었다. 이들 도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사용 지도서였으며 정신지체학교 교사에게 특히 많은 참조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제5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에서는 교사용 지도서와 학생용 교과서를 개발하게 되어 발전적 이었다고 생각된다.
3) 교육과정 개발 뒷이야기
우리나라 특수교육계는 교육과정을 개발한 경험이 없었다. 교육과정 개발은 국가교육의 설계이기에 다분히 철학적 배경과 사회상황, 그리고 특수교육계의 상황이 고려되어야하는데 이런 문제를 제대로 풀어 본 경험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나는 80여개 국가와 지역 교육청에 자료 요청을 하였고, 미국, 가나다, 일본, 독일, 영국 등에서 자료를 보내왔었다. 그러나 구체적 학습 자료가 많았고 국가교육과정 설계의 도움이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가 지역이나 학교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국가는 교육과정 구성과 운영 지침을 제시하는 경우가 인상적 이었다.
교육과정 개발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시대적 요청을 어떻게 반영하는가? 이었다. 사실 인간주의 사회의 요구를 교육과정에 어떻게 녹여 넣느냐의 문제는 설사 그것이 각론 구성 자와 공유 개념을 형성 했다고 하여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제4차 교육과정은 상당한 시행착오를 거처 이루어 진 것이지만 우리나라 특수교육 전문가에게는 교육과정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확신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총론 및 각론 구성 작업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오늘날 인쇄매체가 발달한 상황이었으면 일은 다소 쉬웠을 것이다. 1980년대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렇지가 아니했다. 모든 것을 손으로 써야 되는데 우리가 작업하는 것은 많은 내용을 수압해서 재구성해야하는 것이어서 뽑은 자료를 적당히 보관 할 수가 없었다. 쪽지에 내용을 쓰고 그 것이 다른 자료와 섞이지 않도록 작업장 벽면에 붙여 놓아야 했는데 이렇게 만들어 놓은 자료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두세 번씩 만드는 것도 있어서 낭비가 많았다. 더욱 인쇄 기술이 아주 열약하였다. 공판인쇄나 활판인쇄를 사용 했는데 이것은 교정이 매우 어려워 글을 고치는 경우 글자 수나 행의 수를 간음하여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제4차 교육과정개정 작업(1982년) 후 14년 뒤에 제7차 교육과정 개정(1996년)을 하였는데 컴퓨터의 보급으로 작업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제7차 교육과정 개정작업에서 원고 작성이나 인쇄는 제4차 교육과정의 십분의 일의 노력으로 가능하였다.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개발하면서 인연을 맺은 분으로는 서두에 언급한 문교부 인사 외에 새로 교육과정 담당관실에서 우리를 도운 한상진 교육연구관(교육부 교육과정담당관, 서울 동작교육구청장 역임), 조길준 교육연구관, 이범주 교육연구관(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발 시 문교부 교육과정정책과장 역임), 그리고 이경환 교육연구사(교육부 장학관, 교육과정정책과장 역임)와의 교유는 나에게 많은 힘이 되었다. 이 분들이 특수교육에 관한 많은 관심과 정책입안에서 특수교육 지원정책을 입안했음도 깊이 감사한다.
제5차 특수교육과정개정위원회의 일을 주도한 대구대학교 유아교육과 김춘일 교수와 이유훈 박사(현 교육인적자원부 특수교육정책과장)의 노고가 많았음을 밝혀둔다.
2.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발 이야기
1) 교육과정 개정 업무를 맡으며
나는 제4차 및 제5차 특수학교교유과정 개정위원장을 맡아서 두 번 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제7차 개정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으려 하였다. 제7차 교육과정이 개정작업을 한다는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친구가 와서 경주로 이틀간 여행 떠나있는 중에 연구실 조교로부터 교육부에서 급한 연락이 있다고 유천근 교육과정정책과장에게 연락해 달라는 전갈이 왔다.
유천근 과장과 전화 연결이 되어 내용을 들어보니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발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이미 교육부에서는 모든 결재를 끝내고 나에게 통보하는 것이었다. 세 번이나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개정하는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럽기도 하지만 정신적 부담과 개정작업과정에서 격어야 하는 많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유천근 과장의 간곡한 부탁도 있어서 개정작업을 맡기로 하였다.
유천근 담당관은 제7차 교육과정 개정작업 진행 중 편수관리관(편수국장)이 되었고 이범주 장학관이 교육과정정책과장이 되었다. 이범주 장학관은 제5차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같이 일한 분으로 사리가 밝고 무척 온화하고 자상한 분이었다. 항상 그러했지만 교육과정정책과 의 모든 분들이 친절하고, 협조적이고, 우리를 많이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일반학교 교육과정은 특수학교 교육과정 보다 2년 먼저 개정되어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그 틀을 준용해 왔다. 이런 시차 때문에 제6차 교육과정 기에 특수교육과정은 개정하지 않았고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일반학교 교육과정과 동시에 개정하게 되었다. 일반학교 교육과정과 연계하여 그 틀을 만들었고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탈산업사화가 추구하는 질적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사진 대전 혜광학교에서 열린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 총론 공청회 유천근 국장의 인사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1996년에 총론을 개발하여 확정하고 1997년에 각론을 개발하여 총론과 각론을 합하여 1998년 6월 30일 교육부고시(제 1998-11호)하였다.
2) 정보사회와 교육과정
정보사회는 질적 사회이고 이에 부응하는 교육은 학생의 창의력과 협동심을 요구한다. 교육은 개인의 문제이고 다른 사람의 진보와 관계가 없다. 다만 협동해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역할 분담과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개념의 공유가 필요하다. 21세기 이 땅에 살아가야하는 우리아이들은 “지식, 기술, 기능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머리에서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피어 올라야한다.” 따라서 교육은 개인의 소질, 형성된 능력, 그들의 관심 사, 그들이 하고 싶은 것 등이 충분히 고려되어야한다.
육은 개인에게 맞춤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한다. 최근 특수교육계에 유니버살 디자인(universal design)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하다. 이는 세계교육 개혁이 이루고자하는 목표인 "school for all" 의 이상을 실현하는 하나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특수교육이 추구하는 완전통합교육(inclusive education)을 실현하는 모델이기도하다. 그래서 universal design을 inclusive design이라고도 한다. 또 "모든 사람을 위한 설계" (design for all)와도 같은 맥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교육소비자 즉 교사와 학생이 원하는 교육을 설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학생의 연령, 능력, 성에 다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꼭 필요로 하는 것, 학생이 하고 싶은 것, 학생의 독특한 교육적 욕구에 부응해서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도록 허용하는 열린 교육과정이다.
미국 등 2000년대에 와서 유니바살 디자인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1996년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총론 개발 시 이 원리는 우리 교육과정의 기초이었다. 이는 질적 교육을 추구하는데 있어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 원리의 이론적 기초는 인간주의 패러다임과 생태이론에 의한다. 모든 존재를 자연현상으로 보고 그들이 생존 할 수 있는 서식환경을 조성(supports) 함으로 모든 존재는 쾌적한 환경에서 살아 갈 수 있다고 본다. 교육은 서식환경 조성을 위한 설계를 함으로 학생은 쾌적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행복하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게 된다.
개인학생이 도전 할 수 있는 학습 환경의 구성은 교육과정을 위시한 학교건물, 시설, 설비, 도로, 사회제도 등 모든 면에서 고려되어야한다. 학생의 학습 문제를 "학생의 문제"로 보지 않고 "학교, 사회, 제도"의 문제로 의식한다. 따라서 교육과정은 누구를 위한 설계가 아니라 누구나 이용 할 수 있는 설계이다. 제7차 특수교육과정은 이런 점에서 열려있고 질적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이다.
3)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의 특성
첫째,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열린 교육과정이다.
1. 장애종별에 따른 교육과정이 아니다. 장애특성의 고려보다는 개인특성을 더 고려한 교육과정이다.
2. 학년개념을 불식한 무학년제이다. 학습내용의 계열은 있지만 그 것은 개인 학생의 능력, 흥미, 관심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활용된다.
3. 배치장소가 열려있다. 특수학교, 특수학급, 일반학급, 가정학습, 병원 방문교육, 시설 설치 학급, 장애아 어린이 집 어디서나 활용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교육과정을 "특수교육 교육과정"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학교제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한다는 교육부 입장에 따라 "특수학교 교육과정" 으로 하였지만 이 교육과정은 배치 교육기관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사용하도록 허용되어있다.
둘째,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지원중심 교육과정이다.
이 교육과정에 의한 학습은 학생에 따른 교사의 자료 재편집권이 부여되어있다. 이런 재편집이 가능하기 위해서 전자도서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교육부는 거의 전자도서 개발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특수교육 도서 역시 교과서 발행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종이 책과 이 내용을 CD에 담아서 교사가 자유로이 재구성하도록 할 필요가 있어서 나는 교육부 교과서발행과와 수차 협의하고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설명하였다. 교과서발행과장을 위시한 직원들이 나의 이런 요청을 가상히 여겨서 당시 이현우 과장과 담당 서기관의 긍정적 결정으로 나에게 제안하기를 학생용 교과서는 종이 책으로 발행하고, 교사용 지도서는 CD로 발행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 제안을 받아 드렸다.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에 의한 교사용 지도서와 교과서 집필자회의(1999년 4월 4-5일 경주코오롱호텔)
이 제안을 받아 드린 이유는 일단 전자도서 개발이 허용된다면 교과서까지 전자도서로 개발하고자하는 내 복안이 있어서이다. CD 한 장에 수록할 수 있는 용량은 650mb인데 기본교육과정 7개 교과 28책의 용량은 750mb에 불과하고, 치료영역의 8개 교과 21책의 용량은 600mb 으로 CD 한 장이면 충분하였다. 이것을 기본교육과정의 7개 교과와 치료 8개 교과를 교과별로 CD 한 장으로 제작하도록 하였으니 교과목 별로 교사용 지도서와 교과서 내용을 다 넣어도 용량이 많이 남는다.
종이 교과서를 전자화 하는 경비가 더 들어가기 때문에 그 경비조달에 어려움이었다. 이렇게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전자화함으로 기본교육과정 7개 교과를 통합 검색 할 수 있게 되었다. 통합 검색이 가능해 짐으로 한 교과의 주제를 다른 교과의 내용과 연계하여 교사가 내용을 재구성하도록 할 수 있게 되었다.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동시에 검색함으로 교사의 시간 절약을 가능하게 하였다.
더욱 이런 교사의 교과내용 재구성의 용이성을 제고하기 위한 조치는 이뿐 아니라 기본교육과정의 2,30%를 지원하는 멀티미디어 자료의 공급이다. 2000년부터 2001년에 한국교육정보원의 위탁을 받아 멀티미디어를 제작했는데 100여명의 교수와 교사가 1년여를 수고하여 이 작업을 마칠 수 있었으며 특히 이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김만곤 교육과정정책과장의 적극적 노력과 지원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한국교육정보원(KERIS) 직원 여러분의 긍정적 이고 적극적인 지원의 힘이 있었고 특히 한태명 부장과 특수교육을 전공한 김지영 선생의 세심하고 정성어린 노력을 기억하고 있다.
현장 교사가 어느 정도 이런 자료를 활용하여 학생의 능력과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을 수행하느냐는 문제는 교사교육과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하지만 일단 교사가 지원중심의 교육을 수행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두었다는 점에서 만족하고 있다.
제7차 특수학교교유과정 개발에 교육부 직원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다. 교육과정심의관(구 편수국장)으로 개정작업 시작 시 심광한 국장, 중간에 유천근 국장, 교육과정정책과장이신 이범주 선생, 4차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하신 이경환 장학관(1종도서 개발 시에는 교육과정정책과장), 양순열 박사, 김영일 선생, 남기수 선생, 그리고 특수교육정책과장인 김원경 박사의 협력을 잊을 수 없다. 특히 이경환 선생과 양순열 선생의 애정 어린 지원은 늘 감사하고 있다.
4) 질적 사회의 교육과제
탈현대(post modern), 탈산업사회(post industrial society)는 모든 정해진 틀을 부정하며 모든 개념은 재 개념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리 정해진 정답이 없는 사회이다. 객관적으로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은 개념형성이 개인의 내적 문제이며,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공유개념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최선을 추구해야하기 때문에 교육내용과 매체는 다양해야하고 개인에 따라 모든 것이 달러야 한다. 교사는 창조자이어야 하며, 개개 학생에 따라 교육계획이 다르도록 조성해야한다. 이 시대는 개성시대이다. 교사가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고 이를 보장하는 교육을 입안 하도록 열려있는 교육과정 이어야한다.
학생의 결정, 선택, 자기도전, 자율성, 자아실현과 같은 덕목이 매우 높이 평가되는 시대이다. 모든 학생은 모두가 성공자이며, 자기만족을 경험하며,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한다. 질적 사회의 교육은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있다.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교사의 이런 활동을 지원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III. 아시아정신지체연맹
정신지체교육과 복지를 연구하는 전문가와 현장의 지도자에게는 1991년 하나의 걱정거리가 있었다. 1993년 여름 우리나라에서 개최해야하는 제11차 아시아정신지체복지대회(11th Asian Conference on Mental Retardation: ACMR)의 준비가 불실하여 이대로 가면 대회를 치루기 어렵다는 것이 공통적 견해이었다.
아시아정신지체연맹(Asian Federation for the Mentally Retarded: AFMR)은 ACMR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위해 개최국에서 제3, 2, 1부회장을 각 2년씩 역임하고 7년째 회장에 취임하여 2년간 대회 개최를 준비하여 대회가 끝나는 것으로 회장임기를 종료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만 대북에서 제8차 대회가 열릴 때 한국이 제3부회장을 맡기로 하고 그 대표로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 회장인 구임회 박사(산부인과의사, 유정회국회의원 역임)가 제3부회장에 피선되었고, 2년 뒤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 회장이 대구대학교 이태영 총장이 선임됨으로 AFMR 제2부회장은 이태영 총장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태영 총장의 건강 악화로 그 직무를 수행 할 수 없게 되어 2년 뒤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 회장에 황 희(신아원)원장이 피선됨으로 황 회장이 AFMR 제1부회장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준비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가 보건복지부, 전문가 집단, 현장과의 연계가 쉽지 않았고 신뢰도 역시 낮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으로 정신지체 관련 전문가 집단에서 크게 걱정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 하는 과정에서 1991년 10월 있을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 정기 총회에서 제11차 ACMR에 대응 할 적당한 인물로 회장을 교체해야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 때 여러분께서 나에게 어려운 일이지만 회장직을 맡아 이 일을 수행해 주어야겠다는 말을 주었다. 준비되지 않은 일을 맡을 만한 자신이 나에게는 없어서 매우 고사하고 현 체제를 도와서 대회를 치루 자는 제언도 했으나 당시 집행부에 대한 불신의 벽이 너무 커서 수용되지 않았다. 사정하는 분도 있었고, 협박하는 분도 있었으나 일의 중대성을 볼 때 또 평생 특수교육교사 양성과 정신지체 문제를 해결과제로 생각하고 살아온 나에게 관망만하고 회피 할 문제만은 아니어서 오랜 고심 끝에 이를 수락하기로 하였다.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직을 수락하고 ACMR체제의 임원 단을 구성하였다. 수석부회장에 배연창(현 안동영명학교장,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장 역임), 부회장에 강홍조(현 초정노인병원장), 장영순(인천 핸인핸 이사장), 윤진순(사회복지법인 천성원 이사장, 대전정신지체인애호협회장)을 모시기로하고 제11차 ACMR 대회장에 추국희(이화여자대학교 특수교육과) 교수, 대회 사무총장에 전익준(서울정신지체복지관) 관장을 모시어 대회의 효율적 운영을 다짐하였다.
우리는 인적 구성을 마치고 곧 11월 4일 파키스탄 카라치(Karachi)에서 개최되는 제10차 ACMR에 참석하기 위해 참가 단을 급조하게 되었다. 제10차 대회에 참석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맡게 되니 모든 것이 급했다. 우선 회장단(김정권, 배연창, 강홍조, 장영순), 대회장(추국희), 사무총장(전익준), 협회국장(박해철)외에 김영환 교수(공주대학 교수, 한국선진학교장,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장 역임), 김학수 교수(경북대학교 교수, 안동대학교 총장, 대구가톨릭대학 부총장 역임), 안예도 신부(청주 갈릴리집 설립자, 원장 역임), 김신웅(전남정신지체애호협회장), 고창준 박사(연세의료원 소아과장 역임) 등 12명으로 ACMR참가팀을 구성하고 긴급히 필요한 준비를 해가지고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카라치로 떠났다. 나는 이때 참여해 주신 분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다. 이 분들이 나를 도운 면도 있지만 우리나라 정신지체 교육과 복지를 걱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이 여행에 참여했다고 믿고 있다.
Pakistan Karachi에서 열린 제10차 ACMR(현 AFID Conference) 대회를 마치고 아시아의 지도자들 좌로부터 AFID회장
김정권 교수, 일본의 山口 壎 교수, 인도네시아의 Dr. T. Sajono 전회장, Malaysia의 D. R. Daniel 전회장,
태국의 Dr. V. Komkris 전회장, 한국의 제11차 ACMR 대회장 추국희 교수(1991년 11월 3일)
제10차 ACMR은 1991년 11월 4일-9일에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열렸다. 우리 일행은 제11차 대회의 주제를 “평등과 조화”(Global Harmony for Human Equality)로 정하고 이를 알리고, 급히 만든 제11차 ACMR 안내책자를 나누고, 김학수 교수 등은 회장인 나에 대한 소개도 개인적으로 하고, 우리 참가자 전원은 서울에서 열리는 제11차 ACMR에 많이 참석하도록 홍보에 혼신을 다 하였다.
나는 이 대회가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4개 부분에서 준비가 되어야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회장 네 분을 각 영역의 책임자로 하였다. 성공적인 회의 개최는 첫째, 기금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둘째, 참가자를 우리는 1,000명으로 예정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500명, 국내에서 500명이 참여하도록 하는 전략이 있어야 했고, 셋째, 프로그램 내용이 질적으로 우수해야 한다는 것, 넷째, 효율적 대회 운영이 이루어 저야 대회가 성공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나는 어떤 세미나, 워크숍, 심포지엄이라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고 본다.
기금확보를 위해서 정부 지원금의 확보와 년 회비 1만원을 부담하는 후원회원 모집, 이 운동은 단순히 기금을 확보한다는 의미 외에 우리의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얻는다는데 더 큰 뜻을 갖고 있다. 기업체 후원금, 대구대학교, 대구보건대학교 등 다양한 방법으로 기금을 조성하였다. 막대한 경비를 지급하고 내가 임기를 마칠 때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에 약 8천만원을 넘겨주었으니 기금확보는 성공적 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음 참가자는 외국회원 680명과 국내회원 550명(자원 봉사자 포함)이 참석하여 1,200명이상의 회원이 참석했으니 당초 1,000명 예정을 초과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에 유치 팀을 보내 홍보도 했고, 동남아 빈국에서 오시는 회원을 위해 무료민박제도를 도입하는 등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3부분으로 나누었다. 첫째, 본 회의(8월 22일-27일 을지로 입구, 롯데호텔), 둘째, 사전교사훈련(pre-conference workshop; 8월 19일-21일, 서울, Hotel Sofitel Ambassador), 셋째, 정신지체아 특별프로그램(special program; 8월 22일-27일, 롯데호텔)으로 구성하였다.
사전교사훈련(Pre Conference Program)의 강사는 네바다대학 특수교육과 교수인 William C. Healey교수였으며 내용은 “I.E.P.: 사용과 남용”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위해 가톨릭대학교 박희찬 교수와 공주대학의 백은희 교수가 많이 협조하였다. 특별프로그램(Special Program)은 대구대학교 이상복 교수가 책임자로 많은 수고를 하였다.
본 회의 개회식은 김영삼 대통령부인 손명순 여사, 오병문 교육부장관, 손정숙 보건복지부장관이 참석하였고, 국제적 지도자가 다수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열렸다. 주제 발표자로는 미국 Arc 회장인 D. Dunn 박사, Los Angeles 특수교육국장 M. Armstrong박사, 세계정신지체연맹(ILSMH)회장이신 V. Wahlstrom 박사, 한국의 주갑순 박사 등이 수고하였다. 100여 편의 논문이 4개 분과로 나뉘어 발표되었다.
제11차 아시아지적장애복지대회(ACID 1993년 서울 롯데호텔)에서 환영사를 하는 손정숙 보건복지부장관
회의진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전체 논문(full paper)을 회의자료(Proceedings 1; 882면)로 간행하여 참석자가 전체 논문을 참조하게 하였고, 논문 요약(Program & Abstracts, 217면)을 영문과 한글로 간행하여 우리나라 참석자에게도 편의를 제공하였다. 대회가 끝나고 회의자료 1에 게제하지 못한 논문과 대회 결과를 실은 회의자료 2(Proceedings 2; 400면)를 간행하여 참석회원들에게 우송하였다.
대회일정 중 하루는 현장견학을 하였다. 10개 학교에 대형버스 한 대씩 약 400명을 보냈다. 90년대 한국 특수교육 현장은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시기로 많은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서 참여자에게 도움이 되었다. 점심도 학교별로 준비하기도 하고 도시락을 준비해 가지고간 학교도 있었다.
8월 22일 저녁에는 환영연이 있었으며, 24일 저녁에는 문화행사로 정신지체인 공연과 우리나라 국악원 무희의 전통 춤 등으로 각국대표의 넘치는 찬사를 받았다. 26일에는 환송연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각국대표들의 자국소개와 여러 가지 발표들이 있었다.
환송연에서 세계정신지체연맹 Wahlstrom 회장은 나를 강단에 오르기를 청하고, 이번 대회가 모든 면에서 대성공, 대만족 이라는 찬사와 선물과 페넌트를 전달했고, Nepal의 Prasada회장도 너무 잘했다는 찬사와 Nepal 전통 모자를 나에게 씨워 주고 선물과 페넌트를 건네면서 고마움의 표시를 아끼지 않았다.
환송연(Farewell Party)에서 미국 회원인 W.C. Healey 교수내외분(좌)과 마국The Arc(부모회) 회장인 Dr. Dunn 부부(우)의 중창
환송연(Farewell Party)에서 지적장애학생들이 special program에서 배운 무용을 선 보였다.
운영 면에서 계획된 시간을 진행자들이 잘 조정 할 수 있도록 학술분과 주도로 좌장, 협동좌장, 발표자가 사전 협의를 갖도록 하였으며, 회의 사용어도 한국어, 영어, 일본어를 동시통역하여 편의를 제공하였다. 집행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모든 회의 일정이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이 일은 특히 전익준 사무총장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가능 했다고 본다.
1993년 제11차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결과 아시아정신지체연맹에서 한국의 위상이 크게 향상되었고 또 다시 2011년에 제20차 대회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현재 배연창 회장이 제2부회장이고 내가 평생직인 명예이사(honorary member)로 두 명의 이사를 파송하여 발언권이 크게 향상되었다.
제11차 ACMR의 대회장을 맡았던 추국희 교수는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기여하셨다. 유창한 영어 구사로 국제 사회를 적절이 요리하고 사교에도 능하셨다. 이화여자대학교 특수교육과 교수를 위시한 많은 교수가 대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대회의 효율적 운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수교육과가 설치되어 있는 여러 대학 교수의 지원으로 화기 충만한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III. 발달지체 부모 교육과 부모 운동
어느 나라이든 장애인 권리 주장의 선두주자는 부모이었다. 아직 장애인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 할 수 없었던 시절 부모가 당하는 고통과 문제의식은 누구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대하는 풀뿌리 운동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전계하였다. 특히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정신지체 부모운동은 가장 먼저 일어났고, 다음 뇌선마비 부모, 발달지체부모 운동 순으로 부모운동은 시작되었다.
오늘 서구 사회의 장애인 복지 대책의 대부분은 부모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다. 1940년대 미국에서 정신지체부모운동이 시작되던 때, 미국 역시 정신지체에 대한 대책이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 사회대책이 잘 수립되어 있었다면 부모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복지 선진국에서는 양적 보장이 아니라 질적 복지대책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부모운동이 전이 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양적 복지대책도 이루어 지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운동은 양과 질 모두를 추구해야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왜? “우리가 운동을 전계해야 하는가?” 를 알아야한다. 이유를 알았으면 접근 전략도 알아야한다. 부모운동의 당위성과 전략습득, 지식의 습득을 위해 부모 교육은 필수 요소이다.
나는 1992년 내가 한국정신지체애호협회장으로 제11차 ACMR을 준비하면서 이 회의의 성공적 개최도 중요하지만 그 후 우리사회는 무엇이 남는가? 이 계기는 우리사회에서 부모운동의 원년으로 삼아야한다고 믿었다. 협회 회장단과 이사회에 이 문제를 제안하고 동의를 구하고 1992년 봄 발달지체아보모대학을 서울과 대구 두 곳에 개설하게 되었다. 1년 16주 과정으로 전반기 8주, 후반기 8주로 하고 3단계를 두어 모두 마치려면 3년이 소요되도록 하였다.
청주 부모대학 수료(1993) 기념사진
부모대학은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발달지체아보모대학이 날로 번창하여 서울에서는 매년 4개 대학이 운영되었고, 전국 15개시(서울 4곳, 대구, 부산, 광주, 순천, 대전, 청주, 춘천, 울산, 제주, 안동, 창원)에서 운영하였다. 2002년 까지 이 졸업생이 연 5,000명을 넘었고 이들은 부모운동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오늘은 다양한 형태로 전환되고, 다소 쇠퇴한 것 같지만 부모교육의 중요성이나 그 가치를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1999년 4월 9일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에서 개최한 제1회 발달지체인 자기 권리주장대회
부모운동은 단순한 권리 주장운동이 아니다. 사회 문제를 풀어가는 정당한 과정이다. 따라서 부모운동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고 전계하는 합리적 절차를 갖게 된다. 정당한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것에 대해 그 것을 가장 민감히 느끼는 사람이 누구인가? 전문가는 아니다. 전문가는 장애아 부모가 느끼는 고통의 십분의 일도 못 느끼고 있다.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운동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부모교육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장애인 자신의 문제를 부모가 얼마나 느끼겠는가? 그래서 부모운동 만으로는 장애인 문제는 완전히 해결 할 수 없다.
나는 부모교육을 위해 많은 교수 분들께 자원봉사자로서 임해 줄 것을 요구했고, 많은 교수 분들이 기꺼이 이에 응해서 부모대학운영 팀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대구대학교의 여광응 교수, 조인수 교수, 이상복 교수, 김성애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의 박현숙 교수 등의 노고를 깊이 감사한다. 서울시정신지체인복지관의 이종희 부장은 발달지체부모교육에 각별한 관심과 열정을 보인분이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부모교육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V. 정신지체 교육과 맺은 인연
내가 대구대학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인 1965년에 정신지체(현재의 명칭은 지적장애)교육과목이 처음 개설되었다. 자연 새로 생긴 영역이니까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향 각지의 도서관을 조사해서 참고문헌을 찾았는데 정신지체에 관련된 도서는 대구대학교 도서관에 일본 통신강좌용 도서 2권과 경북대학교 도 서관에 영어책 1권이 있었다. 이 영어책이 S.A. Kirk와 G.O. Johnson의 “Educating the Retarded Child”인데 이는 상당히 우수한 책이었다. 나는 1장에서 5장까지를 프린트하였다. 당시 프린트는 타자 원지에 타자해서 등사기로 인쇄하는 아주 원시적 방법이지만 많이 쓰던 방법이다. 이 책의 제1장은 개괄적 내용이지만 제 2장은 정신지체의 원인에 관한 것이었다. 거의 의학 용어이고 단어 개념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친구 의사에게 물어가면서 강의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1967년 12월 일본 연수단의 일원으로 도교(東京) 고베(神戶), 오까야마(剛山)등 지를 돌면서 대학, 도서관 코로니(수용시설)등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세계적 문헌과 전문잡지와 소위 현대화된 대학, 도서관 등을 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특수교육 학문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에게 없는 도서와 전문잡지가 일본에는 이미 충분히 들어와 있었다.
1960년대부터 나는 특수교육 전문잡지 몇 가지를 구독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도서 이외 에는 정보를 입수할 경로가 없었고 도서가 없으면 아무 소식도, 정보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전문잡지는 나에게 세계의 흐름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잡지 1년분으로 미화 15불을 붙이기 위해 외환은행에 가면 지점장까지 결제가 되어야 송금이 되었고 그 후로 첫 번째 잡지가 내 손에 들어오는 데는 6개월이 걸려야 되었으니 60년대에 교수나 학생이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짐작하게 할 것이다. 요즈음 사이버에서 출판사에 카드결제를 하면 15일 이내에 책이 집에 도착한다.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출판사와도 책 주문이 가능할 뿐 아니라 사이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은 상당하다. 학문세계의 발전을 중심으로 나의 특수교육 교수생활 39년의 시간을 돌아본다면 원시시대로부터 초현대를 겪어 온 셈이다.
1970년대 말부터는 매년 2, 3회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 방문기간에 많은 시간을 대학도서관과 대학 서점에서 보냈다. 이런 기회는 나의 학문세계를 새롭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학문이란 커다란 흐름을 알고 구체적 전략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넓이와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미국 도서관은 나에게 이런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정신지체 교육은 시대적 흐름에 부응해서 많은 발전을 했고 특히 1968년에 전국에서 20명(장애별 각 20명 총 80명)의 교사를 선발하여 240시간 단기강습을 교육부 위탁으로 실시하였는데 일반학교교사가 특수교육을 이수하는 첫 사례가 되었다. 이때 특수교육에 입문하여 많은 활동을 한 분은 김영환 교수, 장창록 교장, 광주 박추자 교장(광주시 초등교육과장 역임), 전남 김정원 소림학교장, 광주MBC 임문석 PD, 조오덕 교장 등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분들과 나의 만남은 한국 특수교육을 든든히 하는 초석이 되었다.
일반학교 교사 240시간의 단기특수교육강습 수료 기념(대구대학교 대명동, 1968년 10월 25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교육부 주도의 특수학급을 개설한 것은 1974년인데 1973년에 이를 위한 세미나를 한국특수교육협회(현 총연합회)가 주관하여 대구수성관광호텔에서 개최되었고, 이에 바탕을 두어 1974년 전국 177개 시군구에 정신지체 특수학급이 1학급씩 개설됨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1974년 특수학급 배치 교사를 위한 연수를 교육부가 대구대학교에 위탁 하게 되었다. 교육부 위탁으로 실시된 이 연수는 1974년 1월에 60시간을 이수하였다. 이 분들을 현장에 보내면서 황무지에 어린아이를 보내는 것 같아서 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서 “한국정신지체아 교육연구회”(현 한국정신지체교육학회)를 결성하고 뉴스레터를 통해서 현장 통신을 함으로 이 분들의 교육활동을 지원하였다.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 주최 특수학급 개설을 위한 세미나(1973년 9월 20일 대구 수성관광호테) 에서 김정권 교수의 주제강연
다음 해 1975년에도 전년도와 같은 177개 시군구에 1학급씩을 증설 하는데 배치 교사 연수는 역시 대구대학교에서 담당하였다. 나는 이 두해의 연수를 관리하면서 전국에 정신지체 교육이 확산되는 초석을 놓았다. 특수학급이 급속히 증가되고 교사의 특수교육 지식과 기술에 대한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한국정신지체아 교육연구회는 당시 교육부나 각 교육위원회에서 할 수 없었던 교사 연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연수는 자율연수로 초기 현장의 갈급한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교사가 이 연수를 받았고 현장에 기여한바가 크다. 이 연수는 1년에 2회 실시하였고 50여회 계속된 연수였다. 이 연수는 특수교육계 자율연수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 때 수고를 많이 한 분으로 대구대학교 여광응 교수, 조인수 교수를 위시하여 전주우석대학교 이영철 교수, 대진대학교 조용태 교수, 권영화 교수, 이태화 교장, 김정선 박사, 이점조 박사, 서울에 박성래 교장, 제주도에 오도삼 선생, 양성언 교육감, 부산에 류병관 교장, 충남에 유문준교장 등을 들 수 있으며 나는 이 분들과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었다.
1973년 대구대학교에 대학원이 개설되고 특수교육학과 석사과정을 시작하였고, 1975년에는 박사과정이 설치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특수교육 전문직 인력의 양성이 가능하게 되었고, 외국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인력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1984년에는 교육대학원 특수교육전공이 개설되었고, 1998년에는 특수교육대학원이 개설되어 현직교육과 전직교육을 동시에 수행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대학원을 통해서 많은 분들과 교유 할 수 있었다. 이 분들은 한국 특수교육 발전에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대학원을 통해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우리나라 특수교육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내가 정신지체 강의를 처음 시작하던 1965년은 어려운 시절이었고 특수교육에 대한 관심도 없었던 시대이다. 그러나 오늘 특수교육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였으며 앞으로 그 발전은 과거보다 더 급속 할 것이다. 나는 행운아라 생각한다. 초창기 아직 모든 것이 혼돈의 시대에 입문하여 고난도 많았지만 누린 영광도 많았다. 나는 특수교육을 통해서 나의 인생의 최대의 가치를 실현 했다고 생각한다.
VI. 내가 만난 60년대 한국의 특수교육지도자
1960년대 내가 만난 특수교육 지도자에 관해 내가 아는 데로, 느낀 바데로 소개 하고자한다. 그러나 여기의 자료나 판단은 전연 개인의 소견이며 공인된 것이 아니다. 가능한 자료에 근거하여 글을 쓰겠지만 일상적으로 내가 느낀 점 그리고 나와의 교유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경험을 주로 쓰기로 한다. 여기 소개하는 선각자들은 우리가 최대의 경의를 표해야 할 분들이다. 그러나 이글이 문어이기 때문에 모두 평어로 쓰는 것을 양해하기 바란다.
1. 이방자(李方子; 1901-1989) 회장
이방자 회장
내가 일본 고베(神戶)대학에 잠간 가서 있을 때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가 묵고 있던 집으로 온 편지인데 집주인은 재일 교포였고 내가 학교에서 오니 주인이 나를 대단히 환영하며 경이로운 눈으로 나를 보면서 “김 선생이 이런 사람인줄 몰랐다”고 하면서 이방자 비전하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를 물었다. 사실 그때 나는 이방자 회장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무슨 소리냐? 고 반문을 하였다. 그랬더니 집주인이 “이사람 한국 사람이 아니 구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소반을 내오고 그 위에 편지를 올려놓고 집 주인이 큰절을 한번 하더니 나를 보고 편지를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집 주인의 존경심에 의아한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편지를 열었다.
그 내용은 네가 정신지체 교육을 한다니 가상하다는 것, 열심히 하여 한국 특수교육의 기둥이 되라는 것, 귀국 후 자기에게 들려달라는 것 등이었다. 그 후 그 집 주인은 나를 무척 존경스러운 존재로 대접하였고 내가 그 곳에 있는 동안 편히 지냈다.
이방자 회장은 일본의 황족으로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英親王)과 1920년 결혼하여 한국 황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종전 후 1963년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하시게 되었고 귀국 후 그의 삶은 넉넉하고 호화로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극히 검소하시고 자신을 위해서는 별로 하신 것이 없으신 것 같다. 이방자 회장은 한국의 장애인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시각을 갖고 계셨다. 그래서 귀국 후 2년여가 되는 1966년 1월 사단법인 자행회(慈行會)를 만드시고, 다음해인 1967년 11월에 사단법인 명휘원(明暉園)을 만드시었다.
자행회는 1972년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게 되고, 명휘원은 1981년 명혜학교(明惠學校)를 설립하였다. 이 두 학교가 설립되기 전 이미 수년전부터 아동센터 또는 기술교육센터로 장애아 교육기관을 운영하셨고, 이를 바탕으로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이들 학교의 설립은 요사이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가 아니다. 이 당시 학부모는 그들의 자녀를 보낼 학교가 절대 부족하던 때이기에 이방자 회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방자 회장은 자신의 노쇠와 사후의 문제를 고려하여 명혜학교 운영권을 가톨릭 재단에 넘겼고, 자혜학교도 여러 가지로 고려하다 계속 자행회에서 운영하게 하셨다. 그는 1989년 서거하실 때까지 한국의 정신지체인과 지체부자유인의 교육과 삶을 위해 혼신을 다하신 분이다.
이장자 회장의 도자기 작업
이방자 회장은 서예, 그림, 칠보 등에 달인이셨다. 많은 제자를 기르시고, 작품 전시회도 가지시고 아주 활발한 활동을 하신 분인데 이런 활동을 통해서 얻은 수익금은 모두 장애인을 위해 쓰셨다. 만일 이 회장께서 평생을 창경궁 낙선재(樂善齋)에서 평안히 여생을 보내셨다면 그 분의 마음속은 텅 비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로는 이방자 회장께서는 자신의 삶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가신 분이라 사료된다.
2. 이영식(李永植; 1894-1981) 목사
이영식 목사(대구영광학원 설립자)
이영식 목사는 한국특수교육의 대부이시다. 광복 후 아직 사회가 혼미하고 극심한 가난으로 말미암아 자기 앞을 가리기도 어려운 때 맹인을 위한 교육을 교사(校舍)도 없고 선생도 없는 상황에서, 오직 의지 하나로 시작하신 분이다. 이 목사는 기독교 목사로 박애정신으로 한센 병 환자를 돌보는 목회와 교도소 목사를 자처해서 하신 평안한 길을 일찍이 버리신 분이다.
대구 계성학교 학생시절부터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을 하셨고 이로 인해서 3년간 옥고를 치루시게 된다. 고베(神戶)신학교를 졸업하시고 대구 서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셨으나 뜻이 있어 2년간의 서문교회 담임목사 직을 접으시고 대구 애락원 나환자교회를 설립하시고 섬기게 된다. 광복 후에는 1945년에는 대구 애생원 나환자 교회를 담임하시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946년 대구맹아학원을 설립하시고 생활을 위하여 대구형무소 교무과장 직을 맡으셔 특수목회자로서 사명을 다하시게 된다.
평안한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자청해서 택하신 분이다. 1956년 대구대학교(한국사회사업학교)를 설립하시고 초대학장에 부임 하시는데 이는 장애인 교육과 그 지도자 양성을 동시에 이루려는 이 목사와 아들 이태영 총장 의지의 실현이다. 1958년에는 학교법인 영광학원 이사장으로 1969년에는 5. 16민족상 교육부문 본상을 수상하신다.
이영식 목사의 활동은 학교는 아들인 이 총장에게 위임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시어 1977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티니안(Tinian, Saipan)에서 전몰한 조선인 즉 이들은 강제 징용된 사람, 군인으로 끌려간 사람, 정신대로 끌려간 사람들의 유해의 일부분을 망향의 동산에 안장시키는 일을 주도적으로 하셨다. 1980년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건립 추진위원회 조직회장으로 일하시다 1981년 소천 하셨다.
이영식 목사는 한국특수교육의 대부로서 제1대, 제2대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당시 한국특수교육연구협회; 1962-1966) 회장을 역임하시고 당시 황무지와 같은 상황에서 교사연수, 특수학교 확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신분이다. 특히 1970년대 특수교육진흥법을 처음 만들 때 대 국회활동 등을 통해서 법이 통과 되도록 하는데 기여하셨다.
학교법인 영광학원에 대구대학교와 대구구화학교, 대구광명학교, 대구보명학교, 대구보건학교, 포항명도학교 등 특수학교를 설립하시는 수많은 활동을 하셨다. 내가 처음 이영식 목사를 만났을 때 인상은 낮은 키에 당찬 모습,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너그러움 그런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한분의 장애인에 대한 연민의 정이 그들을 위한 기관을 만들고 법률과 제도를 제정하게 된다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 목사께서 갖고 계셨던 꿈은 그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실현하고자 하신 섭리였다. 광복 후 극도의 가난, 혼란, 그리고 아무 것도 생각 할 수 없었던 시절에 장애인에 대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 어찌 신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3. 이태영(李泰榮; 1929-1995) 총장
이태영 총장(대구대학교 초대 총장)
창파(滄波) 이태영 총장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63년 12월이었다. 첫 인상은 아무런 고난도 없이 귀공자로 자란 품위 있는 젊은 신사였다. 큰 키에, 맑은 피부, 그 위에 대단한 미남이었다. 언어며 행동거지가 절도 있고 처음 만나서도 존경심을 갖도록 하는 무언의 힘을 가진 분이었다.
내가 그해 3월에 대구대학교(당시 한국사회사업대학)에 부임하고 5월에 당시 이태영 학장이 내 연구실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2시간 이상을 이야기하고 돌아갔는데 그 요지는 남이 아니하는 것을 해야 성공 한다는 것, 미국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려면 50년은 공을 드려야한다는 것, 일본 같으면 30년, 그러나 한국에서는 10년만 투자하면 분명히 전문가가 된다는 것을 역설하시고 같이 일해 보자는 요지였다. 나는 감동을 받았고 학장님 맘에 듭니다. 학장님 모시고 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그해 내가 다른 대학으로 옮기려 했었는데 그 사실을 아시고 오셔서 장시간의 담화를 하신 것이다. 네가 왜 다른 대학으로 가려하느냐? 그런 유의 접근이 아니라 이 분야의 중요성, 접근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다. 그의 도량은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운 매우 큰 것이었다.
한국특수교육과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지도자 양성이 최우선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그 것을 실현 한 것이 대구대학교의 설립이다. 대구대학을 설립하고 특수교육과 사회복지학과를 설치한 것은 우리나라 특수교육 발전과 복지사회 건설에 얼마나 크게 기여 했는가 ! 한사람의 생각은 참으로 큰 것을 이루는 힘을 갖고 있다. 이 총장의 기여는 오늘 우리사회의 특수교육과 복지사회를 이루는 초석을 놓게 했다.
이 총장은 공업입국을 꿈꾸면서 공과대학을 졸업 했으나 1955년 제1회 아시아 맹인복지대회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것을 게기로 장애인 문제의 심각성과 복지사회의 도래를 조망하면서 특수교육과 사회복지가 다가올 시대에 꼭 필요한 분야임을 예견하고 인생의 방향을 전환한 분이다. 그 결실은 실로 커서 오늘의 대구대학교를 이루었고, 우리나라 장애인 대책 강구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의 이상은 탈현대의 그것이었다. 탈현대사회가 지향하는 질적 복지사회 그리고 인간존엄과 창의성의 강조는 이태영 총장이 평소 주장해온 가치의 중심에 있다. 그는 60년대에 벌써 90년대 이후의 우리사회의 나아갈 길을 예견한 선각자이었다.
특수교육계에서 내가 만난 인사 중 가장 뛰어난 이상과 식견을 가지신 분 중의 한분이며, 장애인의 고통에 동참한 분이다. 그는 평생을 농아인 그리고 맹인들과 같이 먹고, 자고, 희노애락을 같이 한 분이다. 평생 개인의 주택을 소유해 보지 못한 분이었고, 장애인의 복지와 교육 그리고 대구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신 분이다.
신은 그의 수명을 많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기 전에 병을 얻어 여러 해를 병마와 싸워야 했으나 믿음으로 잘 극복하시고 지금은 하나님의 품에서 평안을 누리고 계신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뿌린 씨앗은 싹터서 지금도 무럭무럭 커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한국 특수교육계와 사회복지 영역에서 뿐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가 이 총장의 인류애 실현을 높이 평가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4. 최병문(崔秉文; 1922- ) 교장
최 병 문 교장
내가 대구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던 1964년 여름 대명동 캠퍼스에서는 한국특수교육협회(현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주최로 제2회 특수교사강습회가 개최되었다. 전국의 특수교사가 다모여 연수회를 갖은 것이다. 그때 최명문 교장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무척 적극적이시고, 항상 활발한 활동을 하시는 분이었다. 첫 인상에 내 뇌리에 확실히 각인이 되신 분이다.
전국에서 모인 연수이어서 연수회가 끝나면 모든 교사가 대구맹아학교 교실에서 책상을 정돈하고 그 위에서 잠을 잣는데 자기 전 저녁식사가 끝나면 싸구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댄스를 하곤 하였다. 아마 연수보다 더 재미있고 신났을 것이다. 최명문 교장님은 열정적 댄서였다. 그 후 안 일이지만 매사에 열정적이시고 긍정적이셨다.
최병문 교장은 광복 후 국립특수학교에 부임하시게 되어 특수교육계에 투신하신 분이다. 조국 광복과 한국전쟁을 치루는 동안 혼란과 가난 속에서 어려움을 겪은 분이다. 광복 후의 혼란, 제주도로 피난, 부산으로 귀환 등 난시에 장애학생과 동거 동락하면서 오늘의 영광을 얻지 않았나한다.
최 교장의 자서전 “시간의 샘”에서 저자의 소개를 다음과 같이하고 있다.
“ 특수교육계에서는 뽀뽀 할아버지로 알려진 최 이사장은 한국의 구화교육 개척자로서 맹, 농인과 정신지체인들 에게는 잊을 수 없는 큰 스승이다. 일평생을 기독교인으로 믿음의 모범을 보였고, 장애우 들을 가족보다 더 사랑하며 그들의 통합과 자활을 도왔다.” 라고 소개한다.
최병문 교장은 국립맹아학교 교사(1949-52), 성서고등공민학교장(1952-63), 한국구화학교장(1962-88), 사회복지법인 우성원장(1988-95)을 역임하신 초창기 한국특수교육의 개척자이시었고, 특히 농교육에서 구화(口話)교육을 주창하여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였다.
최병문 교장은 국립맹아학교 교사로 재직 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기숙사에 남아있던 22명의 학생을 인솔하여 제주도로 피난하게 되었고 거기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1951년 제주맹아학교를 설립하는 주역을 하였다. 더 나아가 한국 농아인 들이 구화에 의해 교육받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하여 1962년 한국구화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서 26년을 봉직하고 1988년 퇴임한 한국 구화교육의 선구자이시다.
퇴임 후에는 더 정열적으로 중국동포 장애인을 위한 선교와 특수교육을 보급하기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순회교사를 위해 녹음기를 기증하고, 연수회를 개최하여 교사의 질을 제고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중국 연변의 농아언어청력회 회장과 교사를 초청하여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등 기여가 많았다.
최병문 교장은 광복 후 한국 특수교육 제1세대로서 그만이 할 수 있었던 많은 일을 유감없이 수행하고 남은 일을 후세대에 넘겨주는 귀감을 보였다. 초창기 최 교장께서는 특수교육을 시작하시던 고난의 시대를 잘 이겨 내시고 지금 번영의 시대에 그의 남은 일들을 후대에 넘기고 자랑스럽게 안식을 취 할 수 있게 되시었다.
5. 김택용(金擇龍; 1922-2006) 교장
김 택 용 교장
김택용 교장은 호남의 신사이시다. 늘 정갈한 옷차림과 중절모를 즐겨 쓰고 다니신 분으로 60년대 멋쟁이 이셨다. 특유의 호남 사투리와 항상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시고, 웃으시는 모습이 어린아이와 같았다. 60년대 몇 안 되는 특수교육 지도자 가운데 호남을 대표하는 분이셨다.
김택용 교장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5년에 맹인 수용소인 전남 영광원을 설립하시고, 1956년에는 농아수용소인 전남 농아원을 설립하여 맹 농아를 수용 보호하는 일을 하였다.
영광원에 맹아학교를 설립(1957)하고 농아원을 중심으로 전남농아학교를 설립하시어 초대 교장(1960-91)으로 부임하여 31년간 교장자리를 지키신 분이다. 김택용 교장은 1973년에 전국사립특수학교장협의회 중앙회장을 역임하시고, 교장 퇴직 후에도 사회복지법인 영광원의 대표이사로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발전을 위해 기여하신 분이다.
특수교육연구협회 관계로 자주 만날 수 있었고, 그 당시만하여도 대구와 광주는 버스로 8사간 내지 10시간을 오가는 곳이니 다니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인데도 일만 있으면 빠지지 않고 오시는 열성을 보이셨다. 한국 특수교육 제1세대는 모두 그런 열정을 갖고 있었나보다. 이제 세월은 많이 지났지만 김택용 교장은 잊을 수 없는 한국의 특수교육 선구자이시다.
6. 정규순(鄭奎淳; 1919-2000 정 규 순 교장
정규순 교장
정규순 교장과의 만남은 정 교장께서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장(1966-68)직을 수임하시던 1966년 여름 인천에서였다. 이영식 목사께서 제1, 2대 회장을 마치시면서 제3대 회장을 정 교장께 넘기신 것이다. 그 만큼 특수교육계 신임이 두터우셨기에 제3대 협회장으로 추대되신 것이다.
정 교장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풍채 좋으신 옛날 선비풍의 신사이셨다. 언어며 행동이 반듯하셨고 일의 처리도 합리적으로 하신 이지적 이신 분이다. 당시 협회는 아무것도 없어서 협회장이 중심이 되어 몇몇 지도자가 모든 경비를 부담하는 시대였으니 당연히 정 교장께서도 많은 기여를 하실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현장 논문심사를 위해 인천에 갔었고 게기가 되어 정규순 교장과의 해우가 이루어 젓다.
아직 학교 시설이 열약한 상태였으나 정갈하고 학교전체가 무척 노력하는 흔적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현장 논문을 발표한 교사에게 상장과 상금을 주고 격려하는 것이 당시의 풍속이었으니, 당시 인천에서도 이 모든 경비는 당연 회장의 몫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정으로 특수교육교사가 교유할 수 있는 통로는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 뿐이었고, 이를 통해서 교원연수, 현장연구대회, 특수교육 교원자격검정의 주선 등이 가능 했기에 협회의 역할은 특수교육발전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정 교장께서는 이런 책무를 아주 충실히 수행하셨다.
정규순 교장이 특수교육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를 수용하는 사업을 하시는 중 한아이가 중복 청각장애였는데 이 아이만 학교에 보낼 수가 없어서 고심하는 중 인천에 이와 비슷하게 교육받지 못하고 있는 많은 청각자애아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어 이들을 모아 1956년 인천농아학원을 설립하여 이들 청각장애학생을 교육 시키시다가 1961년 이 학원을 바탕으로 인천농아학교(현 인천성동학교)를 인가 받아 경영하시게 되었다. 정 교장은 1961년에 교장에 부임하시고 1984년까지 23년간 봉직하셨고 교장 퇴직 후에도 사회복지법인 대한성결교회 사회사업유지재단 이사장직을 서거하시기 직전까지 맡아 복지사회 건설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다.
특히 정규순 교장께서는 수화(手話)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이를 인천성동학교를 중심으로 수화 진흥에 각별한 관심과 파급을 시도하시기도 하신 분이다. 언어현상은 하나의 자연 생태현상이라 생각하시고 그 순리에 따라야 한다고 본 분이다.
이제 한국특수교육 제1세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져 가고 있지만 그들이 남긴 역사 현장은 발전하고 인류의 행복과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터전을 마련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정 교장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의 이상과 그가 이루려한 꿈은 계속 실현되어 갈 것이다.
7. 유병온(兪炳溫; 1915-1974) 교장
우리나라 특수교육계가 상호 교유할 수 있게 된 계기는 한국특수교육연구협회(현 사단법인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가 1962년 만들어 지는데서 연유한다. 유병온 교장은 정규순 교장의 뒤를 이어 제4대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장(1968-70)을 역임하셨다. 내가 협회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었기 때문에 유 교장과 교유 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유병온 교장은 유길준 선생의 증손녀로서 1952년 서울맹학교 교사로 발령되는 것을 계기로 특수교육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울맹아학교는 1950년 한국전쟁 시 제주도로 피난 갔다가 부산에 이주해 있었는데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 되면서 학교가 환도하게 됨으로 부산의 맹아학생은 교육 받을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산의 학부모가 분교 설치를 간절히 호소하게 되었고 유병온 교장은 여건이나 경재상황이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 할 수 없어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유병온 교장은 일가친척의 도움을 받아 이 분교를 공립학교로 설립 할 것을 추진하여 1955년 “도립 부산맹아학교”를 설립하게 되고 교장이 되었다. 당시 말이 공립학교이지 예산이나 교원 봉급이 아주 미미하여 학교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특수교육협회는 회원의 회비로 운영되는 회인데 누구도 회비를 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협회운영은 회장을 위시한 몇몇 지도자들이 각출한 헌금으로 운영되었다. 현장연구발표를 해도 협회가 그들에게 격려금을 주어야하는 형편이니, 회비를 납부할 사람이 있겠는가?
유병온 교장은 여성이지만 호쾌하고 일을 결단력 있게 처리하는 분이셨다. 그리고 무척 온화하셔서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협회 총무로 농교육을 하신 임호익 선생이 도왔는데 늘 약주를 좋아하시고 놀기도 좋아하는 걸인(傑人)이였다. 초기 특수교육관련인사들은 낭만이 있었다고나 할까 좌우지간에 멋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은 유병온 교장의 넉넉함 이였다고 본다.
초창기의 어려운 상황에서 교사연수, 현장연구논문 발표, 해외연수 등 우리나라 초기의 특수교육의 초석을 놓는데 큰 역할을 하신 분이다.
8. 이춘섭(李春燮; 1929-1980) 교장
이춘섭 교장
이춘섭 교장은 한국특수교육계에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이 교장은 1965년 한국구화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특수교육과 인연을 가지게 된 분이다. 1968년 한국구화학교를 떠날 때 까지 농교육에 몸담고 있었으나 이시기 이방자 회장과의 만남은 정신지체교육과 인연을 맺는 게기가 되었다.
이방자 회장이 설립하신 자행회에서 심신장애아상담소를 개설 1968년에 그 소장 직을 맡게 되었다. 이를 게기로 정신지체교육에 입문하게 되었고, 자혜학교장 직을 떠날 때까지 정신지체 교육에 심혈을 기우린 분이다.
자행회에서 1971년 자혜학교 전신인 자행학원을 만들어 정신지체아 교육을 시작 할 때 그 주역을 하였으며 원장 직을 맡았다. 정신지체아동이 교육 받을 기관이 절대 부족하던 때 부모의 고통을 덜어준 소중한 일을 한 것이다. 이방자 회장을 도와 이춘섭 교장이 이룬 업적이다.
이 학원을 중심으로 1973년 수원 탑동에 정신지체학교인 자혜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교장은 실무로서 최선을 다 하였다. 그리고 자혜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초기의 어려운 여건에서 학교 건축과 교사 구성 등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역량을 보였다.
1960년대 암울하던 때 이춘섭 교장은 한국정신지체부모회(1968년 설립) 최효섭 회장을 도와 정신지체 계몽운동에 진력하셨고,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도 무척 노력한 분이다. 초기 특수교육 분야의 지식이 부족하던 때 그는 일본의 특수교육지식을 한국에 많이)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방자 회장의 후원아래 일본과 많은 교유를 할 수 있었다.
이춘섭 교장은 요절하였지만 초창기 그의 노력은 오늘 한국 특수교육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 그는 항상 쾌활하고 밝은 편이었으나 약주를 좋아하고 얼굴이 검은 편이었다. 나는 그의 건강을 늘 걱정하였다. 이춘섭 교장은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업적은 적다 할 수 없다.
9. 임경삼(林敬三: 1924-2020) 목사
임 경 삼 목사
임경삼 목사는 내가만난 1960년대 특수교육지도자 중 한분이다. 인천에서 1956년 맹인 청소년 6명을 맡아 기르는 것을 계기로 하여 특수교육과 인연을 맺게 되셨다. 당시 무척 어려운 사회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특히 장애인을 돌본다는 것 그 자체가 생각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당시 상황을 임경삼 목사 부인이시고, 기독맹아원 초대 원장이셨던 송보애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56년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의 기쁨을 누리는 때에 파주에서 이신승 씨와 기거하던 6명의 아동들이 군사작전상 전방에는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강제로 미군 트럭에 실려서 일단 이슨승씨의 매형인 이웅 목사님의 사택에 내려지긴 했으나 그들은 오갈데가 없었다.
이웅 목사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남편은 아동들을 우선 송월동 3가 3번지 적산가옥 2층인 우리집에서 양육하기로 하고 방 한칸을 비워서 함께 기거하기로 했는데 당시 나이 27세의 꽃다운 청춘시절이었던 저로서는 솔직히 처음대하는 시각장애 아동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몰라 앞이 캄캄해었습니다.(창립50주년을 회고 하면서)
이들 맹인 6인을 수요한 것이 게기가되어 오늘의 인천혜광학교(교장 면선목)와 인천광명원(원장 임남숙)이루게 된 것이다. 임경삼 목사는 한국전쟁 후전 후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1958년 8월 기독맹학원을 설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1961년 경기맹학교를 설립하시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시어 1979년 까지 18년간을 교장으로 초기 한국특수교육발전에 기여하신 분이다. 학교 설립 당시를 송보애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 후 시각장애아동들을 돌보고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쟁으로 인해 실명한 어린이들이 한두명씩 모여들어 십여 명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각장애아동들에게도 교육이 필요하기에 이메리 교수(이화여자대학교 특수교육과장 역임 ?)의 자문을 받으며 서울맹학교 졸업생인 오정근 선생(시각장애자)을 교사로 임용하여 점자교육과 함께 침술, 또 물리치료교육을 통한 직업교육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활동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서 단순 개인의 선행의 차원을 넘어 공공기관으로 탈바꿈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우선 원사로 사용하고있던 사택을 기본재산으로하여 재단법인 인천광명원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중 략> 동양선교회 소속 선교사 길보른 목사의 사모님이신 나누 부인 <중 략> 그분 더분으로 우리학교 선생님을 3명으로 증원 할 수 있게 되어 단순 수용시설에서 교육기관인 경기맹학교(혜광학교 전신)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창리150년을 회고 하면서)
임경삼 목사는 전국사립특수학교장회 회장 등 다양한 사회적 책무를 맡아 성실히 수행하시고 1979년 교장 직을 후세대에 물려주고 대중의 영적 구제를 위해 미국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된다. 그의 일생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그 것을 도와주는데서 삶의 의미를 구하신 분이다. 10여 년 전 목회생활에서 은퇴하신 임 목사는 미국 나성에서 중보 기도자로 값지고 조용한 삶을 즐기고 계신다. 그의 영혼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하시기 기원한다.
본인이 1950년대를 중반으로 시작하여 평생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사업에 헌신하게 된 동기가 형님의 시각장애와 무관하지 않음을 먼저 밝힌다.
형님이 밤거리에서 금속성의 피리를 안 불게 하는 방법은 맹인 수용소를 만들어 형님과 같은 맹인들을 일정 장소에 수용하여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는 방법밖에는 달리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장애인들이 자기 집에서도 쫓겨나고 사회와 국가에서도 버림받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고, 나아가 재활교육을 통하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일이었다.
10. 김 동 극(金東極 1926-2014) 교장
김동극 교장은 일반학교 계시던 분으로 1960년대 후반 특수교육과 인연을 맺으시고 평생을 헌신해 오신 분이다. 내가 김 교장과 처음 만나 것은 1960년대 말 경상북도에서 특수학교를 만들려고 김 교장이 나에게 자료를 얻으러 다니실 때부터이다. 당신 경상북도 교육연구소에 계셨는데 교육감으로부터 특수학교 개교준비 작업 임무를 받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준비한 학교가 1969년에 첫 지적장애 공립특수학교로 개교한 남양학교이다. 그리고 남양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셨다. 그 후 김 교장의 특수교육관계 경력을 우선 보기로 하면 경상북도 교육연구소 연구사(총무 1963~1968), 대구 남양학교 교장(1968~1979), 수원 자혜학교 교장(1979~1991), 수원 수봉재활원 원장(1991~2005),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장(1974~1983), 한국발달지체아교육복지회 이사(1989~2010), 대구대학교, 단국대학교, 강남대학교 외래 교수(1973~1982) 등 화려한 경력에 일도 많이 하셨다.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장직을 10여년을 하시면서 현장연구의 질적 향상과 특수교사의 가점제도를 성사시키시고 더 큰 일은 특수교육진흥법을 제정하는 데 앞장 서신일이다. 김 교장의 회고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특수교육진흥법 입법 추진이 무르익어 갈 때, 문교부 위탁으로 그 「제안 설명」을 썼다. 전문 3,000자 남짓한 짧은 문장이었지만, 나는 무척 조심스런 마음으로 특수교육의 필요성과 이를 중심으로 한 국내외의 정세를 들어 국가적 책임으로 추진해야 할 입법(立法)의 필연성(必然性) 등에 관해 요약정리 하는데 힘썼다. 그런데 여기에는 “GNP 1,000달러를 눈앞에 둔 현재로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라는 대목이 있다. GNP 15,000 달러를 넘어선 현재에서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있다. GNP 1,000달러인 29년 전의 일이고 보면 그래도 늦지 않은 결단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이 제안설명문이 그 당시 국무회의와 국회 등 특수교육진흥법의 추진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듣고 자부하기도 한다.“ (한국특수교육의 뒤안길에서, 김동극 교장의 회고)
김동극 교장은 달변가셨다. 많은 곳에 특강을 다니시며 특수교육의 당위성을 펴나갔고, 오늘의 특수교육이 존재하도록 큰 힘을 쓰신 분이다. 다재다능하신 분으로 항상 긍정적이시고 적극적이시고 대단한 추진력을 가지신 분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의 회고록에서 김동극 교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장애인의 교육과 재활이란 어렵고 고된 그 일에 60년이란 세월을 받쳤다고 하면 그 동안에 겪은 피가 마르는 고충이 어찌 한 두 번이었겠는가! 나는 그 때마다 「하늘이 장차 인간에게 큰일을 맡기려면 먼저 그 몸과 마음을 괴롭혀 본다.」는 명언을 되새기며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생활의 신조로 모든 것을 학습(學習)의 기회로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왔지만, 못다 한 일이 많이 남아 미련이 남는다. 누가 나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장애인을 위한 일」이라고 힘주어 말 하리라!" (한국특수교육의 뒤안길에서, 김동극 교장의 회고)
내가 만난 잊을수 없는 분이다. 그의 영혼에 신의 은총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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