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교육

2. 김정권 교수의 특수교육 산책

profkim 2020. 4. 6. 14:45



                          김정권 교수의 특수교육 산책

 

 

 


 

    플로로그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면서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개인이나 사회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 서민에게 겨울은 더한층 힘 드는 계절이었다. 1963년도 저물어가고 아직 우리 국가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백성들은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고 미래가 어떠할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의 삶이라고 나을 것이 없었다. 힘들게 대학원을 마치고 보장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막연한 겨울을 맞는다. 새해에는 좋은 곳에서 일 할 수 있고 다소간의 수입이 생겨서 가계를 유지하기를 마라고 있었다. 이런 소망을 이어준 곳이 대구대학교이다.

 

  나는 한참 젊은 나이에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교수로 부임했다. 19641월 이태영 총장의 선비(先妣)께서 소천 하시었을 때 문상객으로 이태영 총장을 처음 뵈었다. 미남에 전형적인 신사이셨다. 그리고 31일자로 대구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하여 20028월에 퇴임 했으니 386개월을 근무한 셈이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위하여 정부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발버둥 치던 시기이다.


         사진 1 대구대학교 19643월 이태영 학장 취임기념 사진: 당시 전 교직원 

사진설명: <전열> 좌로부터 황성환 교무과장, 장기주 교수, 이영환 부학장, 이태영 학장, 안태윤 교수, 서석잘 교수, <중열> 문 선생(서무과), 도효석 서무과장, 김정권 교수, 강성호 선생(도서관 책임자), 박병각 교수, 박정환 선생(학생 담당), * , <후열> 신 선생, 이원배 선생(학생), 배기태 교수, 김정배 선생      * 는 이름 확인을 못함

 

 

  오늘 우리가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구가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루는 주역들은 정치적 지도자, 경제계 리더들, 12시간씩 노동을 한 근로자와 근검절약하며 자녀교육에 전력을 기울인 어머니들이 있었다.

 

  나의 첫 봉급으로 쌀 2가마를 살 수 있었다. 한마디로 살기 어려운 때이었다. 이런 어려운 때 우리사회는 심신의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1960년대 우리 정부는 장애인에 대해 무대책이었고 특수교육을 위한 시설도, 교사도, 학습 자료도 없었다. 국가의 대책이란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제생원의 후신인 서울 맹 농학교가 국립으로, 부산맹아학교가 공립으로 존재하는 외에는 국가의 장애학생 대책은 전무하였고 따라서 사립학교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특수학교의 사립학교 비율이 높은 것은 초기 이런 상황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구미각국과 일본도 같은 추세였다. 이런 때 교사 양성이 활발하게 전개될 리가 없다. 그래서 특수교육교사 문제나 장애학생의 교육권보장은 사회발전과 경제개발을 기다려야했다.

 

  사회 발전에 따라서 특수교육은 발전하였으며 경제적 발전은 재분배 과정에서 특수교육에 많은 투자를 이끌어 냈다. 여기 그들 부모의 역할이 크다. 그들은 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또 당사자들의 사회활동 역시 점차 활발하여져 그들이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서 특수교육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와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 선진국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우리나라 특수교육 역사에서 보면 원시시대부터 탈현대까지를 경험한 샘이 된다.

 

  내가 특수교육과 교수로 부임 할 때 이 사회는 특수교육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1960년대 초 전국에 특수학교 12개교, 특수교육을 학문으로 연구하고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도 세고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그 호대함이란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특수교육이 꽤나 인기 있는 학문으로 부상하였다.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는 1961년 개설되어 ‘60년대 전국의 유일한 특수교육과로서 우리나라 근대 특수교육의 개척자이고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항상 전국을 이끌어가는 지도적 위치에서 그 역량을 발휘했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은가!

 

  나는 이런 어려운 시절에 대구대학교 교수로 부임해서 우리 특수교육과와 사범대학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전념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 아니고 이미 발전된 사회였다면 내가 이룰 수 있었던 그 많은 일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초창기의 우리가 일구어온 일들을 기술하려한다. 더 나아가 형식적 역사 기술에서는 할 수 없는 우리의 내면 삶에서 겪었던 느낌을 기술하려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고 그 느낌과 가치화가 다르기 때문에 이 기술은 나의 삶과 가치와 패러다임에 따르게 됨으로 객관적 사실에 나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음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I. 대구대학교와 나

 

내가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교수로 부임한 것은 19643월이었다. 대구대학교가 있던 대명동은 당시로서는 대구의 변두리여서 인적이 드물었는데 대명동 캠퍼스는 대구시 옛 공동묘지 위에 세워진 곳이었다. 이 당시 내당동에서 화원으로 연결되는 옛날 국도는 현 대명동 캠퍼스 재활원과 대구대학교 서쪽 담 사이의 길이었다. 대중교통수단도 거의 없었고 대신동 큰 시장이 모든 버스나 합승의 종착지였으며 내당 주차장(현 내당사거리 서북 코너)까지 연결되는 것도 그 몇 년 뒤의 일이었다.

 

  1. 초기의 대학 사정과 사회적 배경

 

우리 대학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건물도 시설도 빈약했고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미약하였다. 1962년 군사정권에 의해 초급대학으로 격하된 일 등으로 항상 대학 정체성에 대해 안정성이 없었다. 1964년에 4년제 대학으로 부활이 되었어도 학교 전체분위기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대학이 각종학교로 5년간(1956-1961)의 세월을 보내고 19611개과 즉 특수교육과 한과로 정규 대학으로 개교를 했는데 그 해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군사정부는 대학을 정비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는 초급대학으로 격하되었다. 그래서 4년제로 1회 입학생 한번 뽑고 1962년과 1963년에는 초급 대학으로 신입생을 모집했다. 내가 대구대학교에 부임하던 1964년은 4년제 대학으로 복귀하여 처음 신입생을 뽑는 해 이었는데 1961년 입학한 학생이 4학년 이였고, 초급대학 1회는 그해 졸업을 하였고 초급대학 2회가 2학년이었다. 그러니까 3학년은 없었다.

 

 1962년에 초급대학에 특수교육과, 사회복지과가 개설되어 신입생 80명을 뽑게 되었으니 1961년도에 특수교육과 20명의 입학정원에 비하면 신입생 수는 상당히 증가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1964년에는 4년제로 부활되어 특수교육과, 사회복지과, 산업복지과 등 3개 과가 생기고 각 과 20명씩 신입생 60명이 입학했다. 특수교육과는 4년제 4학년 학생이 우리 대학교 정식 인가 후 첫 졸업생이 된다. 그러나 1961년 정식 인가를 받기 전 1956년에 각종학교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친다면 1961년 입학생이 6회가 된다.

 

  4년제 제1회 졸업생으로는 황용수 교수, 김경달 사장, 문미자 선생, 이준연 선생 조병수 교장 등이 생각나며, 초급대학 2회 졸업생으로는 유상덕 교장, 권정순 교장 손규철 교장(작고), 초급 대학 1회 졸업생으로는 배연창 교장, 임문기 교장, 김태욱 교수 등이 머리에 그려진다.

 

        사진 2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1회 졸업 기념사진  1964년 11월(전열 좌5 이영식 목사, 좌6 이태영 총장)

        사진 설명: 전열 좌로부터 안태윤 교수, 배기태 교수, * , 장기주 교수, 이영식 목사, 이태영 총장, 서석달 교수, 박병각 교수, 유창우 교수,

                       김정권 교수, * , 이영열 교수,     * 표는 강사



  특수교육과에는 교과전공으로 과학(특히 화학중심)과 사생(일반사회 중심)전공이 있 어서 이를 교사자격증 표시 교과목으로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특수학교는 12개 학교가 있었으며, 교사도 전국 전체학교를 합하여도 100여 명에 불과하였고 정식으로 특수교육교사 자격증을 가진 교사는 몇 안 되었으며 무자격 교사가 많았다.

 

   당시 사립학교는 봉급을 제대로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정부에서도 누가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립학교 설립자들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학교에 와서 학생을 지도할 의사만 있으면 교사로 채용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특수학교 대부분이 무자격교사로 채워지고 이들을 대우하는 수준에서 특수교육과 졸업생도 대우를 받았다.

 

  이때 생긴 무자격 교사는 1970년대 검정고시를 통해서 많이 해결하였고 훨씬 뒤에는 교육대학원을 통하여 그들의 자격요건을 해결 하였다. 그러나 교사 대우문제는 정부가 특수학교를 정식으로 보조하기까지 상당한 기간을 기다려야했다.

 

  우리나라는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아무 것도 없는 사회 즉 기술도, 지식도 자원도, 사회인프라도 없는 사회였다. 이를 상상해 보라. 불과 50년 전의 우리의 모습이다. 현재 우리의 상황을 보면 한국은 아무도 상상 할 수 없는 기적을 낳은 나라이다. 지금 우리가 특수교육을 당위의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50년 전에 이사회에서 특수교육은 시세를 모르는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암울한 시절인 50년 전 미래를 조망하고 꿈을 꾼 사람이 이태영 총장이다.

 

  대구대학교는 특수교육지도자 양성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이태영 총장의 이상을 실현해가는 초기단계에 있었다. ‘60년대 우리나라 국민이나 정부 어느 누구도 장애아 특수교육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수교육 대상자의 교육문제는 엄연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이면서도 이질적인 문제로 이방인의 취급을 받아왔다. 이태영 총장의 이상을 우리 땅에 심어 나가려는 노력은 당시 정부나 사회의 경제개발 위주의 정책에 밀려 이 땅에 정착하기 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때 특수교육을 이야기하면 많은 관료들이 멀쩡한 아이들 교육도 못 시키는데 병신 까지라는 말을 별 거리낌 없이 내뱉곤 하였다. 말하자면 내가 부임한 특수교육과의 교수직은 영광스럽거나 찬란한 자리가 아니었다. 우리 과는 사회에서 천시 여기고, 이방인시하는 장애인에 대한 교육을 위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과였고 그 일은 꼭 필요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냉담한 태도를 가진 우리 사회 지도자나 일반인들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었다.

 

  사회전체가 그러하니 특수교육과 운영인들 오죽했겠는가! 특수교육과 라는 것은 사회적 이해도, 인정도 못 받는 정말 버려진 영역이었다.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가 가난을 벗어나고자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나 노래를 불러가면서 경제개발에 온 국민의 힘을 모으고 있을 때 우리의 현실을 도외시한 사람들이나 급박한 한국의 현실을 외면 한 체 장애인 교육이라는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마주 앉아 서로 이야기할 때는 불쌍한 아이들 위해 수고 하십니다.” 라고 인사치레를 해도 뒤에서는 쓸데없는 짓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관료들 속에서 우리는 특수교육 교사 양성에 정열을 쏟고 있었다.

 

  그러니 ‘60년대에 특수교육과를 졸업한 초기 졸업생들은 취업은 되었어도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공립학교는 몇 학교 되지도 않았고 사립은 학생의 공납금으로 학교를 운영해 갔으니 교사의 급료가 제대로 책정돼 있을 리가 없었다. 참으로 이 시절 특수교육 교사들은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니 특수교육과는 인기가 있을 리 없었고 대학은 늘 학생모집에 신경을 써야 할 형편이었다.

 

 

    2. 초창기 대구대학교 교수 회상

 

  내가 초창기 교수라고 하는 범주는 1960년대를 말하며 이 시절 우리대학 교수 모두를 합쳐도 10명을 넘지 못했으니 이과 저과 가를 것도 없고 통틀어 교수이고 행동도 같이하고 출근시간은 달라도 퇴근 시간은 대체로 같이하였다. 좋은 일 나쁜 일을 모든 교수가 같이해서 한 식구와 같았다.

 

  내가 대구대학교 교수로 부임할 당시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사람은 이태영 학장, 이영환 부학장, 장기주 교무과장, 박병각 교수, 안태윤 교수, 배기태 교수, 서석달 교수였고 내가 부임하는 해 유창우 교수가 나와 같이 부임하였다. 다음 해 장훈 교수(사회복지과 19653월에 부임)와 김인환 교수(산업복지과 19659월에 부임)가 부임하였고 몇 해 뒤 한남제 교수와 이규식 교수가 부임하여 거의 ‘60년대는 이들 교수에 의해 학교가 운영되었다. 특수교육과 교수는 나와 안태윤 교수, 서석달 교수와 이규식 교수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태영 총장은 일본에 유학한 공학도였으나 대학 졸업 후 이영식 목사 대리로 일본에서 개최된 재활회의에 참여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장애인 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총장은 이 회의에 참석함으로 특수교육과 복지 분야의 지도자 양성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그 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포부를 키우게 되었다.

 

                                                   사진 3. 이태영 총장




  맹 농아 교육은 이영식 목사가 시작하였지만 대학 특히 특수교육과 사회복지에 대한 이상은 이태영 총장의 생각이었다. 일본 유학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고 선진국의 장애자 대책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이영식 목사가 하고 있는 맹 농아 교육에 연계해서 지도자 양성이라는 비전을 우리나라에서 실현하고자 대구대학 설립의 꿈을 이루었다.

 

  이 총장의 장애인 사랑은 그가 맹. 농아 학생들과 거의 평생을(같은 건물에서) 같이 살면서 그들과 애환(哀歡)을 같이 나누었던 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특수교육 도서가 전혀 없던 초기에 특수교육 개론을 출판하여 학문적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70년대 초까지도 매 학기 한 강좌씩을 강의하는 열성과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면서 특강과 강연을 하는 매우 달변의 정력가였다. 우리나라 특수교육 발전에 이 총장의 기여는 크고 넓은 것이어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태영 총장은 50대 후반에 병환을 얻어서 사회활동을 접게 되었는데 한국 특수교육과 복지 분야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큰 이상이 20년 아니 10년 만이라도 더 계속되었다면 대구대학은 물론이고 한국 특수교육의 지평을 더 넓혔을 것이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길이 남을 것이며 그의 사상은 대구대학교가 존재해야하는 기본 정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안태윤 교수는 1962년 대구대학교에 부임하여 맹교육을 개척하고 자료가 없던 시절에 프린트 교재로 맹교육론 ”, “ 농교육론 ”, “ 중등교육론 등 많은 자료를 제작하여 후학의 학문 탐구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성실하여 매사에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능력 있는 분이었다. 안교수가 1972년 대구대학교를 떠날 때까지 약 10년 간 우리나라 특수교육에 대한 그의 기여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안태윤 교수는 강직하고 열정적이었다. 학교에서 바른 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고 학교 발전에 헌신적이었다. 특수교육에 대한 열정은 그로 하여금 수없는 많은 일을 하게 하였다. 초기의 학생중심의 학회지 특수교육과학을 간행 하도록 하였고 이 잡지는 후에 간적으로 발행이 되다가 중단되었다.

 

 서석달 교수는 특수교육과에서 언어치료 강의를 담당하였다. 일본 오차노미쯔 여자대학(水女子大學)에서 언어치료 연구를 하고 우리 특수교육과에서 언어치료 과목을 처음 개설할 때, 그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서 교수는 약주를 즐기고 소설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를 가졌던 분이다. 그의 소설은 금붕어”, “ 엽사전 등이 있으며 대구 문인 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이다.

 

  이규식 교수는 1968년 교수로 보임되어서 특수교육과 화학전공을 주로 지도해왔다. 한마디로 집념의 사나이라 할까? 화학 외에 언어장애 치료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이 분야에 자기세계를 개척했다. 학교 재활센터 소장으로, 사범대학장으로, 재활과학대학장으로 학교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특수교육과 교수 외에 타과 교수로 이영환 부학장은 내가 19643월에 부임 하고 그해 8월에 서거함으로 깊은 인연을 갖지 못했고, 박병각 교수는 몇 년 같이 지냈으나 타 대학으로 이동하였고, 배기태 교수는 내가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유학을 떠났다. 한남제 교수 역시 잠시 근무하고 타 대학으로 이동하였다.

 

  장기주 교수는 경제학을 전공한 분으로 산업복지과 교수 이었다. 김인환 교수와 팀이 되어서 학과를 잘 이끌어 간 분이다. 초기에 우리대학에 부임하여 많은 수고를 했다. 그러나 항상 약골이었으나 병은 많이 한 편이 아니다. 약주를 좋아하고 자리에 앉으면 담화를 잘 한 분이다. 초기 학교 발전에 기여한 분인데 아쉽게도 퇴임한 해 일찍이 서거하셨다.

 

  장 훈 교수는 19653월에 부임하여 오랜 세월을 같이 보냈다. 법학을 전공하고 사회복지과에서 과를 세워 나아가는 일을 하였다. 사회복지과 2회 입학생과 같이 부임하여 초기 사회복지과의 증인이다. 강직함과 부드러움을 고루 갖춘 학자로 기억된다. 나는 어제(201278) 김병하 교수의 메일을 통해서 장 훈 교수의 서거를 알게 되었다. 이제 대구대학교 1세대는 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김인환 교수는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로 산업복지과에 19659월에 부임하였다. 젊고 미남인 그가 활발한 활동으로 학생과 항상 호흡을 맞추고 사회 활동역시 다양하게 하여 학교 발전에 기여가 컸다. 나와는 좋은 벗으로 인연을 맺고 교류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년 전에 서거함으로 아쉬움이 많았다.

 

  초창기 교수로 윤 욱 교수, 김득봉 교수 등이 시간제로 학교를 도운 분들이 있었다. 이 두 분은 모두 사회복지과 교수로 봉직하였고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어서 우리 학생들의 현장 이해나 실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후 ‘70년대에 윤 욱 교수는 정식 교수로 부임하여 우리대학 학생처장 등 보직을 맡았다.

 

  초기 교수의 면면은 그 당시 우리대학 교수들의 상황과 활동을 엿 볼 수 있게 한다. 교수 이동이 많았던 점, 교수간의 유대가 항상 돈독했던 점, 정체성이 불확실 했던 점,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헌신적인 학교 사랑은 어려운 학교를 이끌어 가는 힘이었다.

 

 

    3. 사범대학 학과 개설에 대한 이상

 

  초기의 특수교육과는 특수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과이며 이에 따라서 특수학교교육과정에 명시된 교과목을 교과 전공으로 개설하고 있었다. 내가 부임할 때 이 교과전공은 사회(일반사회)와 과학(화학) 두 개 전공이 있었다. ‘60년대를 이들 전공으로 과를 운영해 왔다. 그러니까 특수학교 교사 중 화학과 일반사회 교사만 양성하고 있었든 샘이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오면서 입학정원이 늘게 되고 학과에 주야간을 개설하게 되는 등 산업사회 발전과 맥을 같이하여 몸집이 커져갔다. 내 생각으로 특수학교 교육과정에 설정되어있는 모든 과목을 우리 대학에서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1973년 겨울이다. 이때 문교부로부터 증원이 많이 되어 특수교육과 주야간 120명이 된 것이다.

 

  나는 이태영 총장과 수차례 협의를 거쳐서 전공을 늘리기로 합의 하였다. 그해 국어교육전공, 영어교육전공, 수학교육전공, 특수교육전공 등 4개 전공을 특수교육과에 추가 설치하여 모두 6개 전공으로 늘렸다. 지금 생각하면 무리수였다. 그러나 만일 이때 전공을 증설 할 수 없었다면 계속 전공을 늘릴 수 없었을 것이다. 즉 두 개 전공으로 만족했다면 오늘과 같은 거대 사범대학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 설치한 특수교육전공이 특수교육과의 교과전공들이 일반학교 교과교육과로 독립하여 사범대학의 학과가 된 후에 특수교육교사 양성을 떠맡게 되고 1990년에 특수교육과, 초등특수교육과, 치료특수교육과로 발전하여 명색이 특수교육교원 양성 체제를 갖추게 된다.

 

  내가 보직을 맡고 있는 동안에 사범대학의 과 대부분을 설치했다. 이때 14개 전공을 설치하고 거의 모두 독립된 과로 승격시킨 후에 내 보직이 끝났다. 내가 보직을 맡고 있을 때 설치한 전공은 국어, 수학, 영어, 역사, 지리, 생물, 물리, 전자, 상업 체육, 특수교육계열에서 특수교육, 초등특수교육, 치료특수교육 등 13개 전공이었고 독립된 교육과로 유아교육과를 설치하였다.

 

  전공으로 설치했던 것을 독립된 과로 승격시킨 과정을 보면 1981년 교육부에 신청해서 1982년 종합대학 승격과 더불어 독립된 과로 승격한 과는 국어, 수학, 영어, 일반사회, 물리, 화학 등 6개 과이고, 1982년 신청해서 19833월부터 과로 승격된 것은 역사, 지리, 생물 등 3개 과이다. 특수교육관련과는 1990년 과로 독립하였다.

 

  내가 사범대학 초대 학장을 마치는 19832월까지 현 사범대학의 골격을 거의 이루었다. 그러나 예능계열은 경비가 많이 든다고 생각하여 처음부터 설치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이런 마음가짐이 예능계열의 과를 두지 못하게 된 이유 이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가? 비전이 없으면 현실도 변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내가 일을 맡아 하는 동안 겪은 고초도 많고 힘들 때가 많았다. 그러나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다. 고난이 없다면 이루는 것도 크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한 세상 보람되게 살았다고 자부한다. 오늘의 대구대학교를 바라보면 거기서 한국의 기적을 다시 보는 것 같다.

 

  비록 우리대학에서 특수교육에 필요한 교사를 양성한다 해도 미흡한 점이 많다. 소수의 교사를 필요로 하는 직업교과 교사의 양성과 예체능교과 교사문제는 현 교사양성제도로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래를 지향한다면 교과교육은 학부에서 이수 시키고 대학원과정에서 특수교육교사 교육을 이수시키는 제도가 현행제도에 병행해야 될 것이다.

 

 

   II. 특수교육과 와 나

 

  내가 특수교육과 교수로 부임할 당시 우리 사회와 대학이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다. 빈손으로 시작한 한국 근대화의 도정은 참으로 고난의 길이었다. 당시 정부는 산업사회를 이룰만한 자금이 없었다. 정부 뿐 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가난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일협정을 서둘러서 그 보상금을 산업화에 쓰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유상무상 5억 달러를 받아왔다. 이것이 산업화의 종자돈이 된 것이다. 이 외에 종자돈이 된 것은 독일에 파견한 간호사와 광부의 임금이고, 월남전에 참전하여 피를 흘린 피 값이 우리 산업화의 종자돈이다.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학생들은 시위를 하였다. 우리 대학에서도 학생들이 한일협정반대 시위를 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1965년은 이런 와중에 어수선하게 한해를 보냈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한다. 산업사회가 부를 축적하면서 겪는 갈등양상은 패러다임 이동의 문제로 보아야한다.

 

  1960년대는 신 마르크시즘(neo marxism)이 대두되어 소위 student power가 전 세계를 휩쓸고, 강성 노동조합이 대두되는 시기이었다. 이런 세계적 흐름에 힘입어 학생운동은 크게 전개 되었지만 우리대학에서는 그런대로 안정을 찾아갔다. 교수들은 4.19 이후 다시 학생시위에 어떻게 대처 할까를 고민해야하는 때였다.

 

  1960년대는 구조주의 패러다임이 세계를 지배하고 사회문제를 사회계급간의 불균형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비판능력을 길러야하고 계급투쟁을 벌려야했다. 1960년대는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특히 한국과 같이 산업 발달을 이루지 못하였고 경제는 후진국 수준에 있어서 국민소득 100불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계층간의 갈등 역시 적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가난이었다. 국가는 공공의 복지나 교육을 위하여 투자 할 만 한 여력을 갖지 못하였다. 이런 경우 제일 취약해지는 부분이 장애인 관련 교육과 복지이며 사회적 약자로 이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한국 사회는 지식이나 기술의 기반을 갖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자본도, 기술도, 기초과학에 관한 지식도 모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특수교육에 관한 지식 역시 부족하여 학자들 간의 지식을 공유한다는 생각을 갖기 보다는 혼자서 독점하여 숨기려는 경향이 더 짙었다. 모든 것이 불모지와 같은 상황이었다.

 

  특수교육의 학문적 기반은 너무도 부족하였다. 지식 정보가 전연 없었다. 전문 잡지의 유입도 없었고 전문도서 역시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50년이 지난 오늘 그때를 생각하면 참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정보의 홍수 시대를 맞아서 50년 전 우리 현실을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1. 여 명

 

  대구대학에 부임할 당시 나는 특수교육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교육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특수교육에 대한 문헌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사회에서 특수교육이란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었다. 부임한 첫 학기에 12시간의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2학점짜리 6과목을 맡았다. 주로 일반교육과 심리학에 관한 수업이었으며 4학년 학생을 위해서 영어강독이 한 과목 있었다.

 

  정신지체교육과목이 처음 개설된 것은 1965년이었다. 자연 새로 생긴 영역이니까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향 각지의 도서관을 조사해서 참고문헌을 찾았는데 정신지체에 관련된 도서는 우리대학 도서관에 일본 통신강좌용 도서 2권과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영어책 1권이 있었다. 이 영어책이 S.A. KirkG.O. Johnson“Educating the Retarded Child”인데 이는 상당히 우수한 책이었다. 나는 1장에서 5장까지를 프린트하였다. 당시 프린트는 타자 원지에 타자해서 등사기로 인쇄하는 아주 원시적 방법이지만 많이 쓰던 방법이다. 이 책의 제1장은 개괄적 내용이지만 제 2장은 정신지체의 원인에 관한 것이었다. 거의 의학 용어이고 단어 개념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친구 의사에게 물어가면서 강의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196712월 일본 연수단의 일원으로 도교(東京), 고베(神戶), 오까야마(剛山)등지를 돌면서 대학, 도서관 코로니(수용시설)등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세계적 문헌과 전문잡지와 소위 현대화된 대학, 도서관 등을 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특수교육 학문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에게 없는 도서와 전문잡지가 일본에는 이미 충분히 들어와 있었다.

 

  이때 일본은 장애학생 시설이나 학교 그리고 복지대책이 상당한 괘도에 올라 있어서 나는 가는 곳 마다 놀라움이 컸다. 동경 서점에서는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양서 일서가 서가에 꽉차있고 50년대 나온 책부터 1960년대 최 신간까지 얼마나 책이 많은지 정신 놓고 책을 뽑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책값이 너무 비싸서(책값이 비싸기 보다는 나의 수입이 너무 적었다) 뽑은 책을 대부분 도루 꽂아 놓아야했다.

 

  내가 가서 있었던 고베대학(神戶大學) 도서관에는 전 세계전문잡지가 다 그 첫 권부터 들어와서 잘 정리되어 있었다. ‘60년대는 정보수집 통로가 잡지와 서적이었다. 이 대학에 45일간 머물면서 주로 한 일이 논문과 책을 복사하는 일이었다.

 

  일본 연수를 계기로 하여 ‘60년대부터 나는 미국에서 간행되는 특수교육 전문잡지 몇 가지(Exceptional Children, & American Journal of Mental Retardation )를 구독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도서 이외에는 정보를 입수할 경로가 없었고 도서가 없으면 아무 소식도, 정보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전문잡지는 나에게 세계의 흐름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잡지 1년분으로 미화 15불을 송금하기 위해 외환은행에 가면 지점장까지 결제가 되어야 송금이 되었고 그 후로 첫 번째 잡지가 내 손에 들어오는 데는 6개월이 걸려야 되었으니 ’60년대에 교수나 학생이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짐작하게 할 것이다.

 

  요즈음 인터넷에서 출판사에 카드결제를 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15일 이내에 책이 집에 도착한다.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출판사와도 책 주문이 가능할 뿐 아니라 사이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량 역시 상당하다. 학문세계의 발전을 중심으로 나의 특수교육 산책의 시간을 돌아본다면 원시시대로부터 탈현대를 겪어 온 셈이다.

 

  그 당시 대학 강의는 교과서가 거의 없었고 교수 강의 내용을 자유기술형식으로 노트에 쓰는 방식이었으니 한 학기 학습의 양은 극히 제안되었고 학생은 노트 정리에 시간을 다 보냈다. 그래서 이때 교수의 게으름을 탓하는 용어로 매년 같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는 교수라는 말도 있었다. 오늘의 학생은 50년 전 학생에 비하면 몇 십 배의 양을 학습하고 있다.

 

  1960년대 우리대학교는 논문집 발간에 박차를 가하였다. 내가 소장을 맡고 있던 특수교육연구소에서 특수교육 연구창간호를 발행하고 대학에서 한국사회사업대학 논문집창간호를 발간했다.

논문이 없어도 교수 승진이 되던 시절은 지나가고 교수 승진에 논문이 필요하게 되면서 논문집 간행은 필히 해야 할 일이었다. 아직 논문이란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나는 연구소 논문집 창간호를 내면서 현장과 연계하고자 하였다. 특수교육이란 현장이 없으면 죽은 것이기에 현장의 교사와 공동연구를 많이 게제하기로 하고 그렇게 추진했다.

 

  논문집이 간행 되었을 때의 기쁨은 컸었다. 지금처럼 인쇄가 쉽고 정보가 많다면 그렇게 기쁠 것도 없겠지만 활판인쇄를 하는 때 논문집을 낸다는 것은 원고 수집 외에도 인쇄소에 발품을 꾀나 팔아야했다. 오늘 정보사회에서는 상상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2. 확장기 대구대학의 특수교육

 

  ‘70년대 말부터는 매년 2, 3회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 방문기간에 많은 시간을 대학도서관과 대학 서점에서 보냈다. 이런 기회는 나의 학문세계를 새롭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학문이란 커다란 흐름을 알고 구체적 전략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넓이와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미국 도서관은 나에게 이런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아직 1970년대는 우리 사회에 자료가 많이 공급되지 못하던 때이다.

 

  1970년대에 특수교육과는 상당히 확장 일로에 있었다. 새로 교수 부임도 있어서 이때 김병하 교수, 이상춘 교수, 안병집 교수, 원영조 교수, 송화섭 교수, 여광응 교수, 임안수 교수 등이 부임하여 특수교육과가 활성화되고 전국 단위의 연수회도 시작되어 대구대학교는 전국 특수교육의 본산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전국에서 특수교육을 하려면 대구대학교로 가야한다고 생각 할 정도로 그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더욱이 1970년대 대학원에 특수교육과를 설치함으로 석 박사학위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이에 따라서 학문적 발전도 급속히 이루어져서 학회활동 역시 활발하게 되었다.

 

  대학원 설치는 특수교육이 학문으로 발전하는데 그 틀이 되었다. 1973년에 석사 과정이 설치되고 1975년에 박사과정이 설치되어서 특수교육인력을 필요로 하는 우리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1975년 박사과정의 설치와 더불어서 일본의 자민당 간사장을 역임하고 문부성 장관을 역임한 사꾸라우찌 요시오(櫻內 義雄) 선생에게 명예문학박사학위를 수여함으로 국제유대를 돈독히 하였고, 그 후 영친왕 비(英親王 妃)되시는 이방자(李方子) 회장에게도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게 되었다.


      사 진 4 대구남양학교를 방문하신 이방자 회장님(중앙)과 시요찌 사부로 교수(좌), 김동극 교장(우)

 

  이방자 회장님은 한국 특수교육을 위하여 참으로 헌신하신 분이다. 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시면서 명휘학교와 자혜학교를 설립하셨고, 그 분이 그린 그림이나, 글씨, 칠보 등 작품을 통하여 수입이 생긴 모든 기금은 장애인을 위해 쓰셨다. 그 뒤 서거하시기 전에 명휘학교는 가톨릭에 운영권을 넘겨주셨고 자혜학교는 자행회에서 계속 운영 하도록 하셨다. 자혜학교 운영권을 대구대학교에 넘겨주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 하셨던 것 같다.

  

  특수교육 인재양성이 미흡했던 시기에 우리대학교에 대학원이 설치됨으로 전국에서 석 박사 과정에 인재가 모이어 1970년대 대구대학교에 꽃이 피는 시기였다. 이 때 한국특수교육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나와 이상춘, 여광응 교수 등이 주축이 되었던 한국정신지체아교육연구회는 일반학교 특수학급 교사를 지원하기 위해 시작한 연구회이었으나 그 지평이 넓어져서 뉴스레터 발간과 전국 규모의 연수를 12회 여름, 겨울 방학에 실시하여 그 파급효과가 전국에 미쳤고 전국 일반학교 교사들이 대거 참여함으로 일반학교 교사에게 특수교육을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이 한국 교육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급속히 특수교육에 대한 이해와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연수회를 통해서 대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으로 하나의 전국 네트워크가 형성됨으로 대구대학교 판도는 전국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런 학회 활동이 얼마나 파급 효과가 크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아니 된다.


  그 뒤 이런 유형의 연수활동은 우리 대학에서도 여러 학회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구대학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국정신지체아교육연구회가 주최한 연수회는 하나의 모델이 된 샘이다.

 

  안병집 교수를 중심한 한국지체부자유아연구회역시 지체부자유교육 영역에서 논문집 발간과 연수를 하게 되었고 안병집 교수의 헌신적이고 자상한 성격으로 연구회가 활성화 되고 한국 특수교육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뿐 아니라 안 교수는 착실히 제자를 길러서 한 학파를 이루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안병집 교수는 신앙인으로, 학자로, 교육자로서 그 진실성과 열성은 후학들에게 많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의 성실한 삶은 대구대학교에 대한 사랑과 특수교육에 대한 애착에서 발현 되었을 것이다. 일찍이 서거하여서 아쉬움을 더한다.

 

  당시 문교부로부터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발을 위탁받는 일은 우리 대학이 전국 특수교육을 주도하게 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1982년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개발은 우리대학으로서는 전국의 교수, 교사, 연구전문 인력과 깊은 유대를 갖게 하였다. 이 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교육과정 개발이 끝나면 후속 작업으로 교육현장에 투입하는 교수용 자료로 교사용지도서와 교과서를 개발하게 되어 수년을 계속 전국 규모의 인력과 유대를 갖게 된다.

 

  나는 제4, 5, 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발 책임자로 이 일을 수행하는 동안에 수많은 인사와 교류하고 특수학교 현장의 사정도 소상히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이 우리 삶의 자산이다. 더 나아가 우리 대학의 자산이 되었다.

 

  내가 교육부와 인연을 맺어가는 동안에 문교부, 교육부, 교육인적자원부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이 과정에서 교육부와 인연을 맺은 것이 20년이나 된다. 교육부 전문직으로 우리대학을 끔찍이 생각해 주신 분들은 김상대 선생, 함수곤 선생, 임대영 선생, 이범주 선생, 한상진 선생, 김철연 선생, 유천근 선생, 이경환 선생, 김만곤 선생, 이현목 선생, 양순렬 선생 등 셀 수 없이 많은 분들이 있다. 나의 삶을 통해 항상 감사하고 이 분들을 기억하고 있다.

 

  교육부 전문직에서는 항상 우리 대학 특수교육에 대해 호평을 해 주시고 도와주셨다. 나는 인덕이 많았던 것 같다. 만나는 분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셔서 3번이나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 책임자가 된 것이다. 교육부 인사와 교류는 시도교육청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하였고 20년이 넘는 세월을 한 결 같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일들이 대구대학교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3차에 걸친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 작업에 교내외 특수교육전문 인사들의 적극적 참여는 큰 힘이 되었다. 대학 내(개발 당시 소속)에서는 김병하 교수, 여광응 교수, 이규식 교수, 이상춘 교수, 임안수 교수, 안병집 교수, 김춘일 교수, 조인수 교수, 정재권 교수, 원명욱 교장, 이유훈 교장, 강창욱 교수, 오세웅 교수 등 특수교육관련 인사와 사범대학 교과 교육과 교수로서는 이재돈 교수, 장의식 교수 등의 참여로 교육과정 개발은 활력을 유지 할 수 있었다.

 

  교외의 전문 인사로는 김승국 교수, 곽준기 교장, 박승명 교장, 양종의 장학관, 이인경 교수, 최경식 교장 등 수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우리 대학에 19843월에 교육대학원이 설치되어 첫 신입생을 받게 되었다. 이 인가신청 서류를 내가 주도적으로 작성하였으며 사범대학에 있는 모든 과를 포함해서 18개 전공을 신청하였는데 교육부에서 신청한대로 18개 전공이 모두 인가되었고 정원은 100명을 받았다.

 

  내가 초대원장을 맡아서 5년간을 운영했는데 그간에 전공을 더 증설할 필요가 없어서 대학원 운영을 중심으로 관리하였다. 이때 특수교육에 관심들이 많은 때여서 지원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원 비율로 신입생을 모집하니 자연 특수교육과에 사람이 많이 입학하게 되고 어떤 전공에는 신입생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교육대학원 정원의 반 정도가 특수교육전공 학생으로 채워졌다. 교육대학원이 우리대학 특수교육을 활성화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교육대학원은 현장 교사가 중심이 되니까 자연 우리대학과 현장의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학문적 발전이 현장에 기반을 둔 것이어서 더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이런 배경이 특수학교교육과정 개발에도 영향을 미쳐서 시너지효과를 발휘하였다.

 

   3. 개화기(開花期)

 

  한국특수교육이 개화기를 맞이하는 시기는 1990년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모든 것이 풍족해졌다. 학문적 성취도 왕성하였고 졸업생 현장배치도 활발하여서 전국에 고루 퍼지고 각 대학에 학부 특수교육과가 속속 설립되고 전국적으로 인기 과가 되어갔다. 특수교육과는 초중등과 유아 특수교육과가 생겨서 나름대로 교사 양성의 틀을 갖추어 가게 된다. 물론 이런 제도가 특수교육교사를 양성하는 완벽한 틀은 아니다. 더 보완해야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합리성을 갖게 되었다고 본다.

 

  1990년대에 한국특수교육 100주년을 맞는 시기이고 우리대학 특수교육과는 40주년 준비를 해야 하는 때였다. 이제 시간의 여로(旅路)에서 연륜을 헤아리고 그에 버금가는 역사정리를 할 때가 된 것이다.

 

  로제타 셔우드 홀(R. S. Hall)1894년 평양에 3개월 머물면서 오석형 씨를 만나고 오복내(래)를 만나 교육에 대한 의지를 세우고 이를 시도한 시기를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연원(淵源)으로 보느냐? 그가 1897년 미국에서 돌아와서 1898년 뉴욕 점자를 활용하여 오복래를 가르친 시기를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연원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사 진 5 1894년 홀 선교사가 진료소로 사용한 첫 건물 여기서 오봉내를 가르쳤다.


  샘()이 강의 발상지가 되기도 한다. 이때 샘은 보이지 않는 지하수로를 통해서 좀 더 먼 곳에서 지상으로 그 물줄기를 나타낼 수 있다. 그래도 이 샘은 이 강의 발상지가 되며 다만 의지만을 세웠다고 하여도 그때를 연원으로 보아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사진 6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평양맹학교를 1894년 오복내를 가르치기 시작함으로 열었다.)


 

  1994년을 한국특수교육100주년 기념의 해로 정하고 이를 추진하는데 상당한 저항요인이 있었다. 그 저항하는 분들이 1998년이 100주년이 되어야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1998년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교육부를 통해서 다소간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서 한국특수교육100년사를 편찬(편찬위원장 김정권)하기 시작하였다. 2년여의 작업을 하여 1994년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의 기반이 되며 미래로 나아가는 비전을 갖게 하는 자산이다. 우리가 만든 한국특수교육100년사가 완벽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특수교육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특히 후세대에게 우리는 선배로서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최소한의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일을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진 한국특수교육100년사(대한특수교육학회 편)  


 

  나는 후배 학자들이 앞으로 어느 정도로 역사정리를 할 수 있는지 가늠 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 기대하고 또 나아가 더 충실한 역사정리를 해 주기를 바란다. 역사를 소홀히 다루는 민족이나 사회는 발전해 가지 못한다. 아주 간단한 진리이다. 우리 특수교육 캠프 역시 이를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은 이제 50년의 반세기 역사를 가늠하게 되었다. 이에 즈음하여 대구대학교 특수교육 50년사”(편찬위원장 박화문)를 간행하였고, 다시 미시사(微視史) 정리를 위하여 이 책을 간행하고자 지금 집필을 한다. 후학들의 노고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2001년에 간행한 대구대학교 특수교육40년사”(편찬위원장 김병하)가 없었다면 이번 간행된 대구대학교 특수교육50년사간행이 가능했을까? 가능했다 해도 얼마나 수고로웠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질문에 대해 진솔한 답을 해보아야한다.

 

  40년사 간행 때도 모두 엄두를 내지 못하여 한참 망설였다. 그리고 많은 교수가 참여하지 않았고 방관자로 남아 있었다. 분명한 것은 남이 역사를 기록하면 자기는 역사의 소외 자(outsider)로 전락하게 된다.

 

  “대구대학교 특수교육40년사를 구상하고 집필할 때 왜 많은 분들이 참여하지 못했는가? 자료나 경험 부족 등 자신감의 문제가 컸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긍정적이고 도전적 접근정신이 부족했다. 우리 대학이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하자 그것이 전통이 되고 권위가 되고 문화유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진 8  대구대학교 특수교육 40년사와 50년사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이 정립(正立) 되려면 일을 사랑하여야하고, 전통을 소중히 여겨야하고, 그 정신을 잘 정리하여 빛나게 할 때에만 가치화가 될 것이다. 전통이란 요란한 것이 아니다. 호대(浩大)한 것도 아니다. 외형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이고 문화이다. 조용하지만 내면의 세계에서 도도히 흐르는 한 줄기 정신이다. 우리가 후세대에게 물려주어야할 전통은 이런 정신세계이다.


      사진 9  대구대학교 특수교육 50년사 후속 작업으로 특수교육반세기 회고(미시사에 속함) 발간

 

  1990년대 우리 특수교육과가 교내외적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 아마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의 전성기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특수교육대학원 설립(초대원장 김정권), 7차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 특수교육과에 컴퓨터실 개설(김용욱 교수 주도), 11차 아시아정신지체복지대회(Asian Conference on Mentel Retardation; 1993년 서울 롯데호텔 개최, 아시아연맹 회장 김정권), 발달지체인 자기권리주장운동(1998년 결성, 19991,900여명이 국회의원회관에서 권리 주장대회 개최; 위원장 김정권) 등은 1990년대 대구대학을 빛낸 일들이다.

 

  특수교육대학원 설립은 박윤흔 총장 시절에 이루어 졌다. 1997년도에 인가서류를 만들어서 19983월에 개원하게 되었다. 이때 서울의 단국대학과 공주대학에 동시에 설치되었으나 특수교육대학원은 그 대상을 현직교사교육으로 한정하여 100명의 정원을 확보하였다.

 

  교육대학원과 달리 현직교사를 대상으로 하고 신규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 어서 교육대학원 보다 인기가 떨어졌다. 그러나 특수교육계의 뜨거운 호응으로 많은 교사들이 우리대학원을 통해 석사학위와 상위교사자격을 획득하고 한국 특수교육 현장에 중견 교사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 작업 중에서 우리만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은 첫째 기본교육과정에서 교과 간에 통합 단원을 구축한 일이다. 정보사회 교육이 지향하는 점이 창의성 개발과 협동성 신장에 있다면 교과는 통합 되어야한다. 그래서 교과통합을 시도한 것이다.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운영중심의 교육과정인데 지원중심 교육과정이고 이는 보편적 설계(universal design)가 가능하도록 만든 교육과정이다. 학생 개개인을 위한 교육과정이다.

  이 설계에 맞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IEP구성과 운영에서 중요한 문제로 교육내용을 교사가 편집 할 수 있어야한다. 종이 교과서로는 교사가 내용을 편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전자교과서(e-book)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7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을 공포하고 19991월부터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 개발 팀 첫 모임에서 나는 전자도서 개발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발표하였다. 물론 교육부와 합의를 본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설득할 예정이었으나 이 해 전자 교과서는 반드시 만들려 하였다. 집필자 가운데서도 이것이 왜 필요한가를 의문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 현장에 전자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였는데 너무 앞서 간다는 논지였다.

 

  교육부 교과서발행과와 나는 많은 협의를 했고 당시 이형목 과장(초기 우리대학 국어교육전공에 이현규 교수의 제씨임을 뒤에 알게 되었다.)께서 깊은 관심을 갖고 나를 도와 주셨다. 그래서 교사용지도서는 전자로, 교과서는 종이 책으로 발행하기로 합의하였으나 나는 이것을 계기로 하여 교사용 지도서와 교과서를 모두 e-book 으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교과서주식회사와 협의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 결과 교사용 지도서는 종이 책 없이 이-북만으로 발행되고 기본교육과정의 7교과 21책의 교과서는 이-북과 종이 교과서를 같이 개발하여 현장에 보급하였다. 말하자면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사의 편집권을 교육과정에서 허용했다 해도 종이 교과서만으로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팀이 교과서와 교사용지도서 개발을 완료하고 20003월 이를 현장에 투입 할 때는 학교 현장에 모두 컴퓨터가 비치되어 전자 교과서를 활용할 환경이 다 조성 되었다. 집필자 중 한 교수는 나에게 작년에 이-북을 만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번하였다고 고백하는 말을 들었다.

 

  제8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이 개발되고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가 개발되었는데 나는 아직 이-북을 제작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앞으로 학습용 자료는 이-북과 종이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시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김용욱 교수가 1995년 특수교육과에 부임하면서 특수교육과 학생을 위한 특수교육공학실을 운영하게 되었다. 김 교수는 특수교육공학을 전공하고 우리대학에 부임하였기 때문에 공학센터의 운영자로 적임이었다. 1995년은 아직 우리나라 전자 환경이 좋은 때가 아니었지만 앞을 내다본다면 반드시 공학적 접근을 시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대명동 사범대학 1층에 공간을 확보하여 컴퓨터와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 문을 열었다. 공학센터는 우리 대학에서 유일하게 운영한 사례이며 특수교육과 학생들에게는 정보사회로 한 발 먼저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특수교육현장에 전자 환경이 갖추어진 것은 2000년대 들어 와서 이다.

 

  나는 대구대학에서 지적장애(정신지체) 교육을 담당해 왔다. 물론 내가 강의한 부분은 특수교육기초, 교육과정 영역, 그리고 장애 영역으로는 정신지체(2009년 이후로는 지적장애 intellectual disabilities로 용어가 바뀌었다) 영역을 담당하였다. 이런 관계로 사단법인 한국정신지체인복지협회(현 한국지적장애인복지협회) 회장을 맡고 이에 따라서 아시아정신지체연맹(현 아시아지적장애인연맹) 회장을 동시에 맡게 되었다. 이 직책은 사실 교수가 맡기에는 벅찬 직임이었다.

 

    사진 10  AFID 창립기념 필리핀 대회 사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추국희 이대 교수와 김학수 경대 교수가 참여했다.

 

  더욱이 이 아시아연맹에서는 격년으로 대회를 개최하는데 회원국을 순회 하면서 열린다. 1993년은 우리나라가 주최하는 해였다. 나는 1991년에 회장직을 맡고 그 해 11월에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열리는 제10차 아시아정신지체대회(10th ACMR)에 참여하여 아시아연맹 회장직을 수임하고 2년간을 한국대회를 위하여 준비하였다. 1993년 대회가 열리는 해에는 대학에서 연구 년을 허락 받아 1년간을 이 일에 모두 바쳤다. 내가 대구대학교에서 연구 년 제도를 활용한 것은 이 것 뿐 이였다.

 

사진 11  파키스탄 카라치 대회, 좌3 김학수 교수, 좌7 김정권 연맹 회장, 좌9 장영순 부회장, 좌10 배연창 부회장, 좌11 김영환 국립 특수교육원장 등 한국 대표가 외국 참석회원과 같이


  제11차 아시아정신지체복지대회(Asian Conference on Mentel Retardation; 1993년 서울 롯데호텔 개최)에는 20여개 국가에서 참여하고 외국회원이 680여명 국내 회원이 600여명이 참석하여 이 대회 역사상 최대 회원이 참석하게 되었고 손님 접대와 프로그램 준비를 빠짐이 없이 잘 하여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쳤다. 이 후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의 위상이 부상되고 한국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국제대회 이었다.

 

      사진 12  AFID 11th Conference(11차 아시아정신지체인 복지대회) 개회식에서 개회사를 하는 김정권 연맹 회장


  이 대회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특히 추국희 교수, 송준만 교수, 신현순 교수, 박현숙 교수 등을 위시한 모든 교수가 참여하여 도왔고, 단국대학교의 김승국 교수 역시 적극 참여하여 대회가 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진 13    AFID 11th Conference 게회식에 참석한 내빈 전열 외쪽부터 스리랑카 웨리칼라 부회장, 추국희 대회장,     김정권 연맹 회장, 송정숙 보건복지부 장관, 손명숙 대통령 영부인, 오병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1993823


  이 대회의 준비과정에서 1992년부터 발달지체아부모대학을 시작한 일은 의미가 컸었다. 장애인 대책에서 부모운동은 그 비중이 크다. 이 발달지체아부모대학은 1년에 16주 교육을 수행 하고 3단계 3년 과정을 마쳐 지도자로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이 일은 11차 아시아정신지체복지대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발달지체아 부모대학 뿐만이 아니라 장애아부모대학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가장 왕성하게 부모대학 교육이 전개 될 때는 전국 15개 시, , 구에서 동시에 개교하기도 하였다. 2000년까지 졸업생이 5,000명이 넘었다. 이 부모대학의 주요 강사는 대구대학교 교수였고 경향 각지의 특수교육과 교수가 참여하였다,

 

           사진 14  AFID(회의 당시는 명칭은 AFMR) Board Meeting 1993

  제11차 아시아정신지체복지대회 준비과정 중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계몽활동을 벌려서 모금과 계몽을 하게 되었다. 대구대학교 교수와 학생을 위시하여 전국의 교수와 교사 그리고 부모가 참여하였으며 이 운동은 우리의 갈 길을 밝히는 비전이었다. 대구대학교는 이런 일의 중심에 항상 서 있었다. 대구대학교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 손길이 미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대구대학 특수교육은 그 지평을 넓혔고 전국 어디에서나 대구대학이 빠지면 일이 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1940년대부터 정신지체(지적장애), 1950년대에 뇌성마비, 1960년대에 학습장애 부모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들에 의해서 장애인 대책이 확립되었고 1975년 미국장애아교육법(PL94-142)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부모의 욕구를 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부모들 역시 그들 자녀의 문제를 잘 알 수 없다. 쉽게 이해한다면 전문가는 전문가의 필요를 해결하고, 부모는 부모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래서 부모 운동만으로 장애인의 문제를 다 해결한 것처럼 착각을 한 것이다,

 

  물론 부모의 문제나 전문가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중요하다.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장애인의 욕구가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장애인 문제 대책은 그들의 욕구가 충분히 고려되고 그들의 실존성이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특히 발달지체 인들은 의사표현능력이 부족하고 결사(結社)의 능력이 부족하다.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 지체부자유 인에 비하여 발달지체인은 전연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운동이 전개되었고 부모에 의해서 물리적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본인들의 질적 삶에 대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 자신의 문제를 정책에 전연 반영하지 못하였다. 나는 이것이 해결되어야한다고 믿어 왔기 때문에 1998년 경주에서 발달지체인의 자기 권리주장운동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 특수교육 및 복지단체 주요인사 20명을 그 위원으로 위촉하고 일을 전개했다.

 

  자기 권리주장운동을 위한 책자(“더불어 사는 국민”, “더불어 사는 국민운동 핸드북”)를 발간하고 격년제로 권리주장대회를 열기로 하고 19994월에 국회의원회관 대강당과 소강당을 빌려서 교육과 직업 분야의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1,900여명이 참석하고 대구대학교 교수들, 국회의원들과 우리나라 장애인 관련 중요 단체장이 모두 참여하여 성황리에 마쳤고 그 후 대구대학교 등지에서 이 대회를 지속했다.


  사단법인 한국발달지체아교육복지회(회장 김정권)에서는 매년 지도자 양성을 하여서 본인과 supporters로 구성된 1530명을 매년 교육시켜 각 학교와 자립지원센터 별로 단체를 결성하도록 지도하였다.

 

  내가 정년퇴임을 하고 이일을 대구대학 중심으로 전개하기가 어려워서 사단법인 한국지적장애인복지협회(당시회장 김원경)에 일을 넘겼고 좀 변형되기는 했으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에필로그

 

  지난 역사를 돌아본다는 것은 미래로 나가기위한 것이다. 현재의 자기가 누구이며 나는 내일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가늠하는 자료가 된다. 오늘 내가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학교의 계속되어야하는 이야기 중에 한 토막이다. 역사는 끝이 없이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대구대학이라고 하는 한 실체가 이 사회에 무엇을 어떻게 기여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가를 분명히 하여 우리 행위의 당위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큰 뜻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왜 큰 뜻을 품어야했는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실현해 냈는가?

 

  역사는 도도히 흘러가는 물줄기와 같다. 때로는 급류(急流)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완류(緩流)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소()가 되기도 하여 전연 흐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뿐 아니라 역류(逆流)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시점만을 보고 그 전체를 평가 할 수 는 없다. 우리에게도 이 모든 과정들이 있었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 역사의 흐름은 과거와 전연 다른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혁명적 변화를 해야 할 때가 있고 한 면에서는 점진적 변화를 이루는 운동으로의 변화를 할 때가 있다.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은 혁명적 변화의 시기를 거쳐 왔다. 아니 우리 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이런 변화를 경험했다. 이런 변화는 패러다임 이동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산업사회를 지배하던 패러다임은 그 기능이 위축되고 정보사회에 걸 맞는 탈현대의 패러다임이 부각되고 나라의 교육, 경제, 사회, 정치 그 모두가 급류에 휘말리는 변화를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나는 대구대학이 급변하는 사회에 잘 적응해 왔다고 본다. 물론 부족한 부분이 있고 앞으로 더 수정해야 할 점들이 많다. 그래서 지난 역사의 과정을 숙고해야한다고 본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늘 이전의 모든 기억을 상실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무슨 문제에 봉착하겠는가? 첫째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 주변의 사람도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다음 이 사람은 내일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아무 대책이 없을 것이다. 역사란 우리의 과거 기억이다. 변화는 왜 일어났고 어떻게 대처했으며 거기서 얻은 지식은 무엇인가? 를 알아야 한다.

 

  역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역사의 질적 연구, 미시사의 중요성을 간과 할 수 없다. 형식적 역사의 전개는 인류의 변화의 대강을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감정이나 개인의 가치화는 알 수 없다. 구성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오늘 역사전개에서 이런 유들의 기록이 중요시되고 전체 역사를 이해하는 비타민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번 특수교육과 에서 이런 부분까지 정리하여 대구대학교 특수교육50년사를 마무리 하려한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나는 특수교육과 1회 졸업생부터 만난 초기의 교수이다. 59년 특수교육과 역사에서 지금까지 58년을 같이하였다. 나는 나 스스로가 대구대 맨이라고 자부한다. 나는 나의 젊음과 장년과 노년을 대구대학교와 같이 했으니 혼연일체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정신적으로 대구대학교 그리고 특수교육과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나의 인생의 거의 모두를 대구대학교에 바쳤고 대구대학을 통해서 지방대학 교수로서는 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하였으며 영광도 누렸다. 신의 돌봄이 없었다면 어찌 가능했겠는가? 신은 나에게 생각을 많이 주셨다. 나에게는 꿈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 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도 주셨다. 대구대학 교수가 아니 엇다면 이룰 수 없는 일들이 많았고 내가 대구대학교 교수가 아니었으면 대구대학이 이룰 수 없었던 일들도 많았다. 나와 대구대학은 상보적 역할 수행을 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