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 교수의 대구대학교 특수교육 회상
이 글은 몇년 전에 쓴 것인데 여기 약간의 수정을 하여 게재한다. 지난날의 역사를 아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 확립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
플로로그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는 1961년 대구대학교(당시 한국사회사업대학)가 문교부로부터 4년제 대학으로 인가받았을 때 설치된 유일한 학과이었다. 1개과로 대학 인가를 받은 것이며 이것이 그 뒤에 대구대학교와 사범대학의 연원(淵源)이 된 것이다. 따라서 특수교육과와 사범대학은 대구대학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사범대학의 대부분 과(科)는 특수교육과 에서 뿌리내리고 성장했다. 현재 사범대학 14개 학과 중 ‘유아교육과’, ‘유아특수교육과’, ‘환경교육과’ 만 특수교육과의 전공을 거치지 아니하였다.
사범대학의 과(科)증설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내가 관여한 사범대학과 특수교육과에 관련된 회고를 기술하고자 한다.
사범대학의 학과 증설은 내게 큰 관심사였다. 나는 대구대학교에 부임한 이래 1967년부터 1982년까지 학과장을 역임했고, 1972년부터 1982년까지 교육학부장 그리고 1982년부터 1983년까지 초대 사범대학장을 역임하였는데 이 경력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때 사범대학의 각과를 만들어 오늘의 사범대학 기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기본과목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를 설치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내가 보직을 맡고 있는 기간에 사범대학에 14개 학과를 설치했는데 이중 체육교육과는 인문대로 갔으며, 전자교육과와 상업교육과는 폐과 되었고, 치료특수교육과는 2000년대 들어와서 교육인적자원부의 정책에 따라 폐과되었기 때문에 현재 사범대학 14개 학과 중 10개 학과를 내가 계획해서 만든 것이다.
I. 나와 사범대학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의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 대학은 산업화와 그 이후에 도래할 새 시대를 내다보면서 1961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4년제 대학과정으로 특수교육과를 설치하고 과내에 전공으로 과학교육전공과 사생교육전공을 두었다. 이로써 우리 대학은 출발 단계부터 미래를 지향하는 대학 특성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심신의 손상으로 사회생활과 교육현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을 위한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이는 정보사회와 복지사회를 내다보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 대학인가와 초급대학으로 격하 그리고 복귀
대구대학교(당시는 한국사회사업대학)는 고귀한 건학 정신을 가지고 4년제 대학으로 출범하였으나, 1961년 말 군사정부는 “대학정비 령”을 발표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당시 사회에 회자된 “대학 망국론(亡國論)”은 고등유민(高等遊民)의 발상지로 대학이 치부되고 부모들이 힘들여 마련한 돈으로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켜도 졸업 후 직장이 없다는 등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후 우리나라 산업화의 원동력이 된 것은 이런 고등유민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 당시 교육받은 인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은 무척 더디었을 것이다. 현실과 비전 사이에 괴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게하고 이때 지도자들이 현상을 잘 못 읽으면 그 사회는 물론 나아가 국가가 침몰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우리 대학의 이상은 21세기를 여는 선구자의 비전이었다.
정부는 실제 사회에 적용 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위해 초급대학을 확장하는 정책을 세웠다. 그래서 4년제 대학은 대폭 정비하는 반면에 2년제 초급대학은 12개교에서 27개교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우리 대학도 4년제 대학에서 2년제 대학으로 격하(格下)됨에 따라 1962년에는 2년제 초급대학 과정으로 특수교육과(40명)와 사회복지과(40명)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이 때 2년제 과정이기는 하나 사회복지과를 신설하게 된 것은 이후 우리 대학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단법인 대구맹아학원 이사회에서는 특수교육과 복지 전문가는 초급대학과정으로는 제격에 맞는 인재를 양성 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고 적어도 4년제 정규대학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 재단 법인 대구맹아학원 이사회는 한국사회사업초급대학을 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켜야 할 당위성을 심도 있게 논의한 끝에 1963년 9월 12일자로 문교부 장관에게 초̇・중・고등과정을 포괄하는 특수교육 분야 교사양성은 4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4년제 대학 승격 사유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당시 문교부는 우리 대학 이사회 결의안의 타당성을 인정하여 1963년 12월 16일에 다시 4년제 대학 설립인가를 결정하여 통보하였으며, 이에 따라 1964학년도부터 4년제 대학과정으로 특수교육과, 사회복지과, 산업복지과 등 3과를 인가 받았고, 각과에 정원 20명씩 대학 입학정원이 60명으로 정해졌다. 한 해 입학정원 60명은 대학을 기본적으로 운영할 만한 수가 아니다. 그러나 첫째, 4년제 대학으로 다시 승격 되었다는 것, 둘째, 3개과가 인가되었다는 것, 셋째, 1961년에 비해 입학정원이 증가 했다는 것 등으로 대학은 자축 분위기였다.
2. 초기 특수교육과의 사정과 전공의 확대
초기 특수교육과의 성격은 특수교육교사 양성이라는 명제를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과내용이 교과전공(일반사회교육전공과 과학교육전공<화학>)을 위해 2개 전공을 설치하였고 특수교육교사의 자질을 함양해야하는 교직과목과 특수교육관련 교과목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특수교육 교과목은 공통과 장애영역별 교과목을 개설하였었다. 초기 우리대학이 개설한 장애영역은 맹교육과 농교육 중심으로 운영하였으며, 정신지체교육과 지체부자유교육은 1965년부터 개설하였다. 이로써 심신손상의 핵심 영역인 4개 장애영역을 개설 운영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대학관련 정부의 조치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특수교육과 발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는 ’60년대 중반 이후 대학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지속해 왔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① 1965년에 대학 학생 정원 령을 공포하여 대학졸업생의 학위등록제를 제도화하였으며,
② 1968년에는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제도화되어 대학 입시에 대한 국가 관리를 강화하였으며, 졸업생 등록제에 이어 입학생 등록제를 실시했다.
③ 1970년에는 대학시설 기준 령을 공포하는 등 계속 대학교육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의 영세대학으로서 소위 인기학과를 설치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대학은 때마다 참담한 고비를 겪어야 했다. 특히,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도입 된 첫해에는 지방의 영세대학으로서 그 당시로서는 비인기학과 뿐인 우리 대학은 신입생 선발에 엄청 난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우리 대학의 몸집이 작아서 그래도 견디어 냈다고 생각된다.
이런 어려움은 수년 계속되었고 70년대 초까지 고난의 행군이었으나 이 태영 총장의 인내와 성실성으로 이겨 나갔다.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지도자 양성에 관한 그의 비전은 한국사회를 변화 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당시 정부가 수립한 특수교육 5개년계획(1965~1969)이 추진되는데 힘입어 1968학년도에는 특수교육과 입학정원이 40명으로 증원되는 한편, 1971학년도부터는 2부(야간제) 특수교육과를 설치하게 되어 특수교육과 입학정원이 1부 30명, 2부 30명 모두 6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추세는 계속되어서 1973학년도에는 특수교육과 1부 40명, 2부 40명으로 입학정원이 80명으로 증원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대학은 지방대학 육성책에 힘입어 소위 우리 대학의 간판학과로 특수교육과를 위시하여 확장을 기하게 되었다.
3. 특수교육과 전공의 확장과 사범대학 기반의 조성
우리가 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된 계기는 1974년이다. 1974학년도에는 특수교육과 1부(주간) 60명, 2부(야간) 60명으로 특수교육과 전체 입학정원이 120명으로 늘어났다. 산술적으로 계산한다면 우리 과의 두 교과전공 즉 일반사회교육전공과 과학교육전공에 주야 30명씩을 배정하면 된다.
이때 내 생각으로는 이 기회에 학과증설을 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973년 후반부터 1974년 1월까지 이태영 총장과 계속 협의하며 적어도 6개과로 확충하자고 건의 하였고 학과가 많아야 신입생 모집에도 유리하며 학교 발전에도 기여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당한 모험이 뒤따라야했다. 전공 설치를 인가 받아야하는데 그 과정이 문제였다.
이 때 6개 전공체제를 둠으로 특수교육과 개설 이래 13년 만에 특수학교 교과별로 필요한 교사를 양성 할 수 있는 체제와 사범대학으로 발전해갈 단초(端初)를 마련했다.
1975년에는 특수교육과 내에 교과별 전공에 입학정원을 배로 증원하게 되었다. 즉 1부(주간)에 영어전공(40), 과학전공(40), 특수교육전공(40)을 두어 입학정원 120명, 2부(야간)에 국어전공(40), 사생전공(40), 수학전공(40)을 두어 특수교육과 1, 2부 입학정원이 무려 240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60년대에 우리 대학은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분야 중심으로 특성화된 대학으로 어렵게 그 명맥을 유지해 오던 중 70년대부터 특수교육 분야에 대한 전문 인력 수요가 늘어나고, ’70년대에 와서 정부의 지방대학 육성책에 힘입어 우리 대학은 특수교육과를 계속 확장하게 되었다.
우리 대학의 특수교육과는 한국의 특수교육 선구자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으며, 대학 내에서도 특성화된 중심학과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다. 특히 특수교육과는 우리 대학교가 대형 사범대학을 이루는데 그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 왔다.
II. 사범대학의 산실로서 특수교육과
우리 대학은 1977학년도부터 학부제를 도입하여 사범학부, 사회복지학부 산업복지학부의 3개 학부 8과 6개 전공으로부터 출발하였고 1979학년도에는 교육학부, 사회복지학부, 경상학부, 이공학부 등 4개학부와 13개학과 13개 전공으로 증설하였고 1980학년도에는 교육학부, 사회복지학부, 경상학부 인문학부, 사회과학부, 자연과학부, 공학부 등 7개 학부에 21개 학과 13개 전공 그리고 1981학년도에는 교육학부, 사회복지학부, 경상학부, 인문학부 사회과학부, 자연과학부, 공학부, 법학부 등 8개 학부 28개학과 13개 전공으로 확대 개편되어 종합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대학의 입학정원을 보면 1977학년도부터는 증원 폭이 커져서 1977학년도에는 전년도보다 160명이 늘어난 600명이었고, 1978학년도에는 780명 1979학년도는 1,310명으로 대폭 증원되었으며, 1980학년도는 1,710명 1981학년도는 문교부의 졸업 정원제 실시에 따라 입학정원이 2,870명으로 계속 증가되어 종합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첫째, 1979년 12월 13일에는 교명을「한국사회사업대학」에서 「한사대학」으로 변경하였고,
둘째, 1981년 7월 31일자로 드디어 대학의 숙원이던 종합대학으로 승격이 이루어졌다.
셋째, 종합대학 승경과 때를 맞추어서 교명을 「대구대학교」로 개명하고 1982년 3월 1일부터 이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우리 대학은 새로운 체제와 면모를 갖추고 특수교육과 역시 선구자적 위치에서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초대총장으로 1982년 3월 이태영 총장이 취임을 하였고, 종합대학으로써의 본격적인 발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1977학년도에 새로 도입된 학부제에 의해 특수교육과는 사범학부에 소속되었고, 특수교육과 내에 6개의 전공을 두면서 훗날 사범대학의 여러 학과로 독립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나는 사범대학의 기틀로서 음악과 미술을 제외한 모든 학과의 개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계속 추진하였다. 그래서 내가 일을 맡았던 1967년부터 1983년까지 모두 14과를 증설하게 되었다. 현재 사범대학 14개과 중 나의 계획으로 개설한 학과가 10개이며, 3개 과는 폐과 되었고, 1개과 즉 체육교육과는 인문대학으로 옮겨갔다.
현 사범대학의 학과 중 특수교육과의 전공을 거치지 않고 과(科)로 인가받은 것은 1981년 개설한 유아교육과, 1997년에 유아특수교육과, 환경교육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특수교육과는 현 사범대학 14개 학과 중 11개과를 만들어 낸 산실(産室)이었다. 나는 대구대학교에서 특수교육과장과 교육학부장 그리고 사범대학장으로 일하는 동안(1967년-1983년) 현존하는 사범대학 10개 학과를 개설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일을 맡은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일이 추진된다. 만일 내가그때 음악교육과와 미술교육과를 개설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이들과도 개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개설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음으로써 이들과는 개설되지 못했다.
1982학년도에는 특수교육과에 치료특수교육전공이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특수교육과 에는 특수교육전공, 초등특수교육전공, 치료교육전공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다른 전공들은 사범대학내의 독립된 과로 분리되었다. 특수교육과의 3개 전공이 특수교육과, 초등특수교육과, 치료특수교육과로 분리 개편되어 독립학과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990학년도 부터였다.
1977년 학부제가 도입된 이후 교육학부는 특수교육과 한과로 구성되었으나 특수교육과 에는 여러 개의 전공들을 두었었다. 1982학년도부터 우리 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출발하게 되어서 교육학부는 사범대학으로 발전하게 되고, 특수교육과의 전공들은 이때부터 사범대학의 독립된 학과로써 분리되었는데 1983학년도까지 특수교육, 초등특수교육치료교육 전공을 제외한 모든 전공들이 사범대학의 일반 학과로 독립되었다. 특수교육과는 특수교육전공, 초등특수교육전공, 치료교육전공 체제가 이뤄지고 1990년부터 특수교육과의 3개전공은 독립된 특수교육과, 초등특수교육과, 치료특수교육과로 개편되었다.
나는 학과의 수를 늘려야한다는 생각을 항상 해 왔다. 교육소비자에게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것과 학교운영자로서 구색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그래서 내가 직무를 맞고 있는 동안(1967년-1983년)에 14개 전공을 증설했고 이 중 9개 전공을 독립과로 승격시켰으며 유아교육과를 개설했고 특수교육과에 3개 전공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나의 직무가 끝난 뒤에 환경교육과와 유아특수교육과가 설치되었다. 이로서 내가 일을 맡기 전 2개 과가 있었고 현재 사범대학에 설치되어있는 10개 과를 내가 설치하였고 그 후에 2개 과가 설치되어 현재 사범대학 14개 과를 구성하게 되었다.
III. 대학의 위기와 발전
앞에서 언급한 사범대학 탄생과 특수교육과의 산실 역할에 앞서 초기 대구대학교가 겪은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를 뒤에 배치한 것은 사범대학에 관한 기록은 사실위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일어난 일이고 이항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초기 대구대학교가 겪은 고난에 대한 나의 회상이기 때문에 글의 배치와 시간의 흐름은 다름을 이해하기 바란다.
우리나라 문교부(당시)가 최초로 대학졸업생 등록 제도를 실시한 것이 1967년이었고 1969년부터 대학입학예비고사를 실시함으로 1학년부터 문교부에 등록이 되었다. 이 두 조치는 대학이 문교부에 의해 통제되기 시작하는 시점일 것이다.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대학의 무질서가 정리되어가는 과정이라고도 생각 할 수 있다.
1968년 실시한 대학예비고사제도는 당시 대학정원의 120%를 합격시켰는데 이중 진학하지 않을 사람도 많아서 실제로는 합격자 수가 대학 입학 정원보다도 훨씬 적은 상황이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대학망국론(大學亡國論 : 대학이 나라 망치는 일을 한다는 뜻)이 대두되고 대학은 고등유민(高等遊民)을 기르는 곳으로 치부되었다. 군사정부는 가차 없이 대학을 정비하고 일방적 정책을 펴나갔다. 이 해 전국 모든 대학이 정원 미달되었고 대학에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우리 대학도 1969년 신입생을 모집하는데 120명 모집에 단 8명이 지원하여 동아일보 톱기사로 보도가 되고, 학생이 없으니 이 8명은 모두 4년 장학생으로 뽑고 학기 중에도 계속 학생을 모집해도 정원의 반도 채우지 못하였다. 대구대학이 제 2의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첫 번째 위기는 1962년 군사정부에 의해 초급대학으로 격하된 것이었으나 대학입학예비고사제가 더 큰 타격을 주었다. 특수교육과 역시 학생이 절대 부족하였고 계속 조금씩 완화되었지만 72년까지는 이런 현상이 계속되었다.
이런 현상은 대학의 발전을 저해했을 뿐 아니라.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고통 역시 적지 않았다. 급료를 제때 받지 못하는 것과 구성원들의 심리적 불안정은 대학 자체의 정체성 위기를 불러왔다. 대구대학교가 근무하고 싶고, 몸담아 평생을 살아갈 곳으로 여기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초창기 대구대학교의 교수진 구성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1964년에 부임할 때 교수로는 학장 이태영, 부학장 이영환, 교무처장에 장기주, 그리고 교수로는 박병각, 안태윤, 배기태, 서석달 교수가 있었고 내가 부임하는 해에 유창우 교수가 부임했으니 1964년 대구대학교 교수는 학장 포함 모두 9명이었다. 당시 대구시내 모든 대학 교수를 합하여도 200명이 되지 않았고 각 대학 마다 교수 수는 기십 명에 불과했으나 우리 대학이 가장 미약했다.
대학입학예비고사제도의 시행으로 우리 대학이 극에 달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이때 이태영 총장이 당한 고생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 교직원 수가 많았다면 견디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어려운 때였으며 우리 교직원들은 학교를 잘 지켜냈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조금씩 풀려서 회복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 당시 야간 학과가 인기가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은 2년제 초급대학이었다. 이들이 현장에 배치된 후에 정규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일종의 흐름이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대학으로 보아서 이들의 편입학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야간 강의는 무척 활성화되었고 이때 대구대학교를 거쳐 간 분들이 상당수가 된다. 이 분들이 학교교육의 지도자로 등장하고 특히 특수교육관련 기관에서 근무하면 가산점이 주어져서 특수교육과는 인기가 높았고 이들의 승진도 빠르게 이루어져서 전문직 진출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들은 음양으로 대구대학교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고 우리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입학예비고사제도로 인한 위기는 3년 정도 지속되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대학입학예비고사제도 역시 조금씩 바뀌어 그 정원이 좀 더 확대되었고 우리 대학 입학 정원도 급속히 늘어서 70년대에 종합대학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범대학의 발전 과정은 대구대학교의 위기 극복과정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IV. 우리나라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발
한국 특수학교교육과정의 틀을 만드는데 대구대학교와 함께 내가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된다. 내가 위원장을 맡아 개정한 특수학교교육과정은 제4차(1982년), 제5차(1987년), 제7차 교육과정 기(1996년)의 특수학교 교육과정이며 제6차 개정 기에는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개정하지 아니하였다. 대구대학교가 배경이 되어서 내가 세 차례에 걸쳐 개정위원장을 맡았고 또 내가 없었으면 대구대학교가 3차에 걸쳐 특수학교교육과정을 개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1980년대에서 2000년대에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은 것이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과 그에 부수되는 교사용 지도서, 교과서, 전자도서와 멀티미디어 자료개발이었다. 이 일은 대구대학교의 영광이었고 나 자신에게도 개인적인 영광이었다. 그 중요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제4차 및 제5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
내가 대구대학교와 더불어 우리 사회에 기여한 일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은 세 차례에 걸쳐 국가 교육과정을 개정한 것이다. 1982년 문교부는 나에게 우리나라 특수학교교육과정개정 작업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교육과정 강의를 하고는 있었지만 국가교육과정 개정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했었다.
교육부 교육과정 담당관실에서 관계 직원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첫 대면은 무척 유익했다. 대구대학은 현장을 갖고 있으며 교육과정 개발에 대한 열의를 갖고 있다고 그분들이 판단을 한 모양이다. 대화는 무척 진진하게 이루어졌고 교육과정에 관한 많은 의견을 교환했다. 이날 나와 면담을 한 분들은 담당관 김상대 장학관, 함수곤, 임대영 연구관, 이상룡 연구사 등이었다. 이분들은 후에 교육부 중요 멤버로 국장과 대사관 장학관 등으로 기여했다.
일반학교 교육과정은 1980년에 시작하여 이미 공포한 상태에서 이를 기초하여 1982년부터 특수학교교육과정을 개정하는 작업이다. 교육과정 작업을 내용 중심의 구성이라고 보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과제는 교육과정 개정 작업에 어떤 패러다임(paradigm)을 적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교육과정을 개정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을 개정할 당시 우리 사회는 이제 막 정보사회로 접어들고 있었으나 학교 교육은 산업사회 기능주의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하였다. 나에게 하나의 확신이 있었다. 적어도 나는 교육과정을 설계 할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의 그 틀을 정하며 그 틀이 열려서 잘 흐르도록 한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정보사회 교육의 지배 패러다임을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산업사회 기능주의에 젖어있는 교육지도자들과 현장교사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교육부는 현장 교사에게 새로운 교육과정의 구조나 내용을 활용하는 방안을 교육을 할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고작 전국에서 선발된 대표자를 대상으로 1회 연수교육을 하고 이들이 각 시도에서 전달 강습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매번 반복되었고 교육과정 운영이 헛도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우리나라 특수학교 교육과정이 비로소 국가 차원의 종합 계획으로 이루어진 첫 사례이다. 이제까지 맹 농 교육과정이 개발되어 있었으나 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이 정식 절차에 의한 첫 사례이다. 이 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에서 교과와 특별교육활동 외에 장애극복을 위한 제3의 영역인 재활(지체), 치료(청각장애와 정신지체) 그리고 시각장애 학교의 적응훈련을 도입하여 교육과정의 구조를 정하였다. 교육내용의 수준을 타파하는 조치와 정신지체를 위한 기본교육과정을 설치해서 0세-5세까지의 프로그램을 첨가하는 구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에서 시각장애, 청각장애, 정신지체와 지체부자유 학교의 초 ‧ 중 ‧ 고등부 교육과정의 기본 틀을 확정하고 치료교육에 대한 내용을 확정한 것이다. 제4차 교육과정에 이르러 비로소 전국전문인사의 합의에 의한 국가교육과정을 만들었다. 현재 특수학교교육과정의 기본 틀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1982년 4월에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연구를 위탁(문교부 : 교육 1012-204)받은 내가(연구조정 책임자 : 사범대학장 김정권) 개정 작업을 완료하여 교육부 심의 과정을 거쳐서 1983년 12월 31일 문교부가 개정 공포(문교부고시 제 83-13호)하게 되었다.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이 현장에 투입되던 1987년 제5차 교육과정의 개정 작업을 문교부가 나에게 부탁하였다.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개정한 경험도 있기에 이를 수락하고 교육과정 개정작업에 임하게 되었다.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이 마련되고 또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의 구조나 내용면에서 많은 개정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음으로 제5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에는 제4차 교육과정의 틀을 대부분 유지하면서 수준을 조정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제5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에 비해 개정 폭이 적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4차 및 제5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장애별, 학교 급별(유 ‧ 초 중등) 그리고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에서는 특수학급교육과정(초등)을 만들었다. 이는 사실상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교육부 인사들의 인식 부족도 있었고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다보니 이런 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에서 대부분 해소 될 수 있었다.
그 후 제5차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을 위해 역시 우리 대학 특수교육연구소(소장: 김정권)에서 위탁받아 1987년 2월에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이듬해 12월에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시안을 교육부에 보고하여, 이 시안의 심의과정을 거쳐 1989년 12월 29일(문교부 제89-10호) 고시되었다. 제5차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고시의 후속조치로 장애영역별 특수학교용 교과서가 따로 개발되고, 특수학교 단위의 학교수준 교육과정 개발과 운영을 강조하였으나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교육과정을 내용중심의 표준 교육과정(예를 들어 정신연령 6세는 1학년 /교과서)으로 본다면 이 교육과정은 현실에 맞지 않는 교육과정이다. 개인차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학생의 요구에는 충족되지만 많은 학생에게는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내용은 재구성자료에 불과하고 교육과정은 이 개인의 교육적 욕구에 따른 내용 재구성을 효율화하는 전략이 중심이 되어야한다.
교육과정은 교육을 운영하는 설계도인 샘이다. 이 설계도는 패러다임에 의한 것 이어야하기 때문에 이에 정통하지 못하면 교육과정을 구성 또는 개정 할 수 없다. 제4차, 제5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내용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산업사회 패러다임에서 크게 벗어 날 수 없었다. 정보사회 교육과정은 지식 내용의 문제이기 보다는 교수 학습 운영체제에 초점이 있다. 그래서 흐름을 원활이 하는 디자인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제4차 특수학교교육과정과 제5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산업사회 교육과정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2.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의 개정
미국에서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어서 경주를 여행하는 중에 연구실 조교가 교육부로 부터 급한 전화가 있었다고 하여 교육과정담당관실 유 천근 담당관과 통화를 했다. 유 담당관은 제7차 교육과정을 개발하는데 위원장으로 개정 작업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두 번에 걸쳐 개정위원장을 했고 심리적으로도 포화가 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어렵다고 했더니 유 담당관은 그럴 처지가 못된다하며 이미 모든 결제가 끝난 상황이라고 재차 권하여 다음 주에 가겠노라 약속을 하였다.
이때 교육부 교육과정 담당관실과의 협의에서 내가 설계하는 데로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수정하지 않겠다는 확인을 받고 작업을 시작했다. 교과서 개발은 비교적 쉬운 작업이다. 그러나 교육과정 구성 작업은 그리 쉽지 않다. 우선 세계적 흐름에 정통해야한다.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교육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교육과정 구성은 어렵다. 이에 대응하는 패러다임에 밝아야한다. 인류는 문제해결을 위해 계속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는 패러다임 이동으로 대변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어려움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이 시대 변화를 잘 모른 다는 점이다. 따라서 많은 담론과 교육이 필요하다. 그 다음 교육과정 구성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대구대학교 교수를 위시하여 전국 대학의 교수, 교사, 장학관과 장학사 등으로 구성된 100여명의 연구진이 특수학교교육과정 개정 방향을 모색하는 연구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첫 모임은 경주 코오롱호텔에서 교육부 교과별 담당연구관 전원과 우리 연구진이 합동으로 협의회를 갖고 대장정의 막을 열었다.
사진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 총론 공청회(대전 혜광학교 유천근 교육인적자원부 편수관리관 인사)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21세기 정보사회에 부응하는 교육과정이어야 했다. 정보사회는 탈구조주의와 기본을 부정하는 반기초주의 등에 따라서 지식의 조건부적 수용을 전제로 하게 된다. 또 학생은 수용체(收用體)가 아니라 발산(發散)의 주체(主體)로 인정되고 교육은 이를 위해서 지원체제(支援體制)로 전환 되어야하기 때문에 교육과정은 내용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개인 학생이 주변 지식을 활용하여 자기세계를 열어 가느냐? 이에 관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운영중심의 교육과정이 되어야 한다.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이런 점이 강조되었고 따라서 학생중심의 열린 교육과정으로 만들어 장애 종별을 없애고, 무학년제 그리고 특수학교뿐만 아니라 특수학급, 일반학급, 가정순회교육, 병원순회교육 등 어디서나 사용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유 ‧ 초 ‧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단순한 학교 급의 의미가 아니라 지식이나 기술의 수준으로 보고 각 학교에서 학교중심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학급 및 IEP구성에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1998년부터 2000년 2월까지는 기본교육과정과 치료교육과정에 대한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개발하였는데 기본교육과정에 의한 7개 교과 28책의 개발은 내가 맡아 했고, 치료교육 8개 교과 교사용 지도서는 김동연 교수, 그리고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 중에서 시각장애학교와 청각장애학교의 국어과의 보완교과서는 김병하 교수의 책임 하에 개발되었다. 기본교육과정의 교과용 도서는 통합교과로 구성하였고 교과간의 연계성을 유지하게 하므로 생활중심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여 창의성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전자도서(e-book)를 만든 것은 매우 큰 성과라고 하겠다. 전자도서는 교사에게 교재의 편집권을 부여하고 교과간의 통합을 가능하도록 한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며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전자도서를 지원하기 위해 멀티미디어자료를 2000년에서 2001년까지 내가 책임자가 되어 개발했다. 이 자료는 기본교육과정의 전자도서 내용의 약 30%정도를 지원할 수 있는 것으로 “www.edunet.net”에 탑재하여 현장에서 사용하게 되었었다. 이것은 혁신적 사고의 틀에서 나온 소산이다. 대구대학은 교육과정, 교사용 지도서, 교과서 제작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지도적 역할을 해왔다.
V. 임시 특수교육교사 양성 소 및 검정고시
교원 임시양성관계는 몇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1968년에 특수학교교원 단기강습소, 둘째, 1970년도에 설치 운영한 “초‧중등교원양성소”, 셋째, 1973년~1975년에 걸친 특수학급설치 세미나와 교원 양성을 위한 단기연수원, 넷째, 1976년, 1979년 1982년에 3차에 걸친 특수교원검정고시 실시 등 이며 이 모두가 대구대학교가 주관한 일들이다.
1. 특수학교교원 단기강습
1960년대 특수교육교사양성은 유일하게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만이 담당하여 왔다. 수요도 없었고 공급도 미약했다. 그러던 중 교육부에서 전국 초. 중등 교사 중에서 시각장애, 청각장애, 정신지체, 지체 부자유 각 장애 영역별로 20명씩을 선발하여 240시간(4개월 과정; 1정 승급과 특수교육교사 자격검정고시에 응시 자격을 줌)의 연수를 대구대학교(당시 한국사회사업대학)에 위탁하고 “임시 특수학교교원단기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이 연수는 ‘60년대 일반학교 현직교원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당시로서는 매우 의미가 있었다. 이 일은 일반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특수교육 장기연수이었다. 이 당시 교수나 연수생들은 매우 진지하였으며 이때 특수교육에 입문해서 특수교육에 기여를 한 분들이 많다. 김영환 교수(전 특수교육원 초대원장), 박추자 교장(전 광주교육청 초등장학과장) 김정원 교장, 장창록 교장(작고) 등을 들 수 있다.
사진 4개월 간의 연수를 마치고 1968년 일반학교에서 차출된 교사들(장애영역별로 20명씩)
광주에서 대구까지 버스로 8시간이 걸릴 때이다. 도로 포장도 되어있지 못한 상황에서 전국에서 일반학교 교사 80명이 차출되어 특수교육을 연수한 것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일반교사가 특수교육연수를 받은 역사적 일이었다.
2. 초중등교원단기양성소
1970년 본 대학에 “초 ‧ 중등교원 단기양성소”가 설치되었다. 양성소장은 이태영 학장이 맡았고 초등교원 양성소 부소장에 김정권 교수, 중등교원 양성소 부소장에 안태윤 교수가 임명되었다. 이 양성소는 4개월 과정으로 운영되었으며 1971년 5월에 초등 171명, 중등 100명이 졸업하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사진 1971년 초중등교원양성소 수료 기념 초등에 3반 중 제3반(대구대학교 구 본관 앞)
이 양성소는 2회 2년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많다. 양성소를 처음해보는 입장이고 문교부가 정해준 정원도 없어서 어찌 선발해야하는 지를 몰랐다. 양성소가 임의로 초등 100명, 중등 100명으로 정해서 뽑고자 했으나 부탁하는 일들도 있고 해서 초등은 차츰 그 수가 늘어서 171명을 선발하고 중등은 100명을 선발하여 교육을 시키게 되었다.
이 양성소 정원은 문교부도 우리 대학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각 시도 교육청에서 양성 요청하는 수만큼만 선발해서 양성이 끝나면 그 시도로 보내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임의로 선발해서 교육을 시키고 있는 마당에 내가 교육부에 불려가게 되었다.
교육부에서 전화가 왔다고 직원이 바꾸어 주어서 받으니 문교부 교직과장이었다. 내일(그해 음력 정월 초하루 날) 문교부로 출동하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일은 못 가겠고 그 다음날 가겠노라고 하루 연기하고 우리대학 서울 소장 한문현 선생과 중등교원양성소 총무를 맞고 있던 김정배 선생과 같이 문교부로 갔다. 그때 정부종합청사를 새로 지어 처음 사용한 때인데 그 건물의 웅장한 모습이며 엘리베이터가 몇 대나 되는지 올라가고 내려가며 사람은 인산인해라 촌사람이 놀래서 주눅이 더 들게 되었다.
교직과를 찾아가니 육군 대령 제대를 했다는 과장인데 나를 막 야단치고 어찌 할 작정이냐고 도교육청에 가서 해결하라고 해서 순진하게 도교육청에 가서 말하니 문교부에 가서 해결하라고 서로 떠넘기는 사이에 끼게 되었다.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위탁 교육을 시켜야하는 것을 임의 모집을 하고 뒤 처리를 하려니 어찌 쉬웠겠는가? 이들이 교육받는 기간이 4개월이니 이 4개월 내에 해결해야하는데 문교부와 시도교육청은 서로 미루고 당시 경북교육청은 초등교육과장이 바뀌면서 전연 모르는 분이 오셔서 더 상대하기 어려웠다. 도교육청 중등교육과에서는 상당히 융통성이 있어 보여 중등교육과와 많이 의논을 하였다. 일의 질수를 모르면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후 많은 분들이 도와주어서 문교부에서 잘 해결되어 모두 자격증을 받아 수료하게 되었다.
3. 특수교육단기연수원의 운영
대구대학교는 1974년 전국 시. 군. 구에 특수학급이 1학급씩 설치될 수 있도록 그 정책입안에도 기여했지만 배치할 교사양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책입안을 위해 1973년 9월 20일, 21일 당시 특수교육연합회(현재 특수교육 총연합회, 당시 회장 이태영 총장, 세미나 장소는 대구수성관광호텔)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대구대학교 교수를 중심으로 특수학급 설치방안을 강구하고 교육부에 제안하여 전국에 특수학급이 효율적으로 설치되도록 기여하였다.
둘째, 특수학급에 배치될 교사양성 때문에 내가 당시 문교부 행정과장인 김재규 선생과 만나 전국 시. 군. 구에서 1명씩 177명의 교사(그 당시 우리나라 전국의 시,군,구에서 1명씩)를 대구대학교에서 1974년 1월에 60시간 연수시키는 것으로 합의하여 연수시킴으로 미흡하지만 담당교사들의 특수교육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당시 우리대학 대명동 캠퍼스에 강당은 시설이 매우 열악하여 한참추운 1월에 수강생들은 추위와 싸우며 열악한 환경을 극복해야했다. 요사이 같으면 항의 시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어려운 사회상황을 이해하는 수강하신 교사들이 잘 협력을 해 주었다.
이 연수는 1975년에도 계속되어 1975년 1월에 177명에게 60시간의 연수를 시켜 전국 시. 군. 구 지정 학교에 배치시켰다. 이 60시간 단기 연수는 2년에 걸쳐서 실시함으로 전국 특수학급 담당자는 모두 우리 대학을 들려가게 되었다.
첫해 연수(1974년 1월)를 끝내고 돌아가게 된 교사들은 정보도 없고, 훈련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을 맡게 되니 이들을 무인도에 보내지는 것과 같은 심정이 들어 내가 제안하여 교수와 이들을 묶어서 서로 도울 수 있도록 한국정신지체교육연구회(현 학회)를 만들게 되었다.
이 회를 통해서 특수교육소식을 전해주는 뉴스 레터를 발간하여 매월 보내주고 이들 교사의 간절한 요구가 있어서 단기 강습(30시간)을 이 연구회가 주관하여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시행하게 되고 이 연수를 마친 분들이 특수학급교사로 보임하는데 가산점이 주어지는 등 혜택이 있어서 많은 부들이 대구대학교로 모이고 이들이 대구대학교 선전에 매체가 되었다. 대구대학교에 가야 특수교육을 할 수 있다고 이들이 선전하고 이런 입소문은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이들을 통해서 수많은 대학원 지원자가 대구대학으로 모이게 되었다.
4. 특수교사검정고시
1970년대에 들어와서 특수교사의 절대부족과 기존 특수교육기관의 무자격 교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76년, 1979년, 1982년 3차에 걸쳐 특수교육교원 자격 검정고시를 실시하였다. 3차 모두 내가 출제위원장을 맡고 대구대학 중심으로 고사를 실시하였다. 이 검정고시에 ’76년과 ’79년에는 각기 1,000여명이 응시하여 응시자의 50%정도가 합격을 하였으며 1982년에는 3,000여 명이 응시하여 3, 4%의 합격률을 보였었다.
이 당시 특수학교 교사 가운데 무자격교사가 상당수 있었으며 교사 대우가 약하여 특수학교에서 임의로 무자격교사를 채용하여 활용했었다. 이 문제는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기에 검정고사를 실시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와서는 더 필요를 못 느껴서 합격률을 아주 낮추었는데 그 후 대구대학교에 기대를 할 수 없게 된 문교부가 서울시 교육청에 위탁해서 2번 검정고사를 실시한 일이 있다.
그 첫 번째는 교수들이 많이 참여하여 합격률을 낮추었으나 두 번째는 교수들을 배제하고 실시하여 합격률이 높아졌고 그 후로는 검정고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모두 대구대학교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길잡이가 된 것들이다. 우리 특수교육과는 초기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지도적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고 한국특수교육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에필로그
나는 격동기에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교수였다.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특수교육과를 통하여 사범대학에 14개 교육과를 설치한 일이다. 이 중 체육교육과가 인문대학으로 이동하였고 전자교육과, 상업교육과는 초기에 폐과 시켰으며 치료교육과는 2000년대 와서 교육부의 정책 전환으로 폐과가 되었다. 그러나 큰 사범대학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큰 보람이다.
다음 국가 교육과정을 3차에 걸쳐 개정위원장으로 제4차, 제5차,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을 개발한 일 또한 보람된 일이었고 특히 제7차 특수학교교육과정은 정보사회 패러다임에 맞추어 구성 했을 뿐 아니라 이를 쉽게 수행하도록 전자교과서를 개발 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교과서 개발사(開發史)에 처음 있었던 일이다.
이에 따라서 교사용 지도서와 교과서 개발은 우리 대학이 현장과 직접 연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전국의 수많은 교사들이 이 일을 위하여 우리 대학을 드나들며 우리와 유대를 가졌다. 이런 것은 보이지 않는 우리 대학의 힘이며 우리 졸업생에게는 자랑이었다.
우리나라 중학교 무시험 진학이라는 사회변화는 특수학급이라는 새로운 산물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특수교육 정책에 의해 특수학급을 만들고 운영한 것이 아니다. 일반 중학교의 학습지진아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특수학급이 세워졌지만 이는 특수교육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나는 이런 정책입안에 깊게 관여 할 수 있어서 그나마 정부가 잘못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을 바로 잡고 특수교육 본질에 접근 시킬 수 있었다.
초창기 특수교육이라는 소외된 영역에서 인재가 부족했을 때 새로운 과제가 나올 때 마다 나는 앞장을 서야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일에 관여하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검정고시나 교원 양성소, 연수회, 세미나, 심포지움 등에 불려 다니게 된 이유이다.
나는 우리나라 특수교육에서 원시시대부터 탈현대까지를 다 살아 온 것 같다. 어찌 보면 행운이라 해야 하겠고 이에 따라서 애환(哀歡)이 교차 할 때가 많았다. 우리 대학교 특수교육과는 한국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해왔고 나름대로 전통도 세웠다. 그러나 전국 특수교육을 주도한다든지 훌륭한 전통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그 호대함이나 양적 크기에 있지 아니하다. 특수교육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고 거기에 우리의 영혼이 같이 숨 쉴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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