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로 나무를 안다.
나는 The-K 서드에이지라고 하는 노인아파트에 거주한다. 한국교원공제회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노인주거시설이다. 제법 캠퍼스도 크고 여러 가지 시설도 잘 갖추어져있고 프로그램도 잘 짜인 편이다. 캠퍼스에는 조경수(造景樹)로 여러 가지 나무가 심겨져있어서 사철 경관이 좋은 편이다. 조경수 가운데는 여러 가지 과실수(果實樹)가 심겨져있고 철따라 과실이 맺어서 주민들의 볼거리 먹거리를 제공한다. 회사 방침에 따라서 과실수에서 주민이 과실을 채취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안목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그 많은 나무들이 어떤 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지금과 같은 겨울에는 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봄이 오고 나무에 싹이 돋고 꽃이 피고지고나면 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다. 그때 비로소 나는 그것이 살구나무, 사과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감나무임을 알게 된다.
매년 살구나무에는 살구가 열린다. 그것이 살구나무이기 때문이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열매로 그를 알 것이라 하시며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물으신다. 이는 비유로 가르치신 것이다.
첫째, 좋은 나무여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사람의 행위로 보면 될 것이다. 그 행위가 나오는 정신적 가치(심령)는 나무에 비유될 것이다. 변화된 심령 “새 것”이 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강화이시다. 믿음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가치가 전도(顚倒)된 사람은 악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전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후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심령의 문제이다. 사람의 행위는 그 심령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니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나눔과 섬김은 변화된 심령에서 나오는 행위로 보아야한다. 낮아져서 겸손한 사람으로 섬기는 자세야 말로 그 심령의 표출이라 할 것이다. 그 사람의 행하는 바를 보면 그의 심령이 어떠한지를 알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게 될 것이다.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동영상을 하나 받아서 본 일이 있다. 그 내용은 “목사가 노숙 인으로 변장하고 새로 교회에 부임 했다”는 꾸며진 이야기이다. 교회 첫 부임하는 목사가 노숙 인으로 가장하여 예배시간 전에 그 교회에 가서 30여분을 돌아다녔지만 그를 보고 인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구걸을 했으나 아무도 그에게 무엇이고 준 사람이 없었다. 예배당에 들어가니 안내인은 뒷자리에 앉아있으라 하여 뒷자리에 앉아있었다고 한다. 그때 사회자가 새로 부임한 목사가 나온다고 소개를 하였다. 교인들은 모두 열렬한 박수를 하였으나 나오는 사람이 그 노숙인 것을 보고는 조용해졌다고 한다.
새로 부임한 목사는 단상에서 잠시 침묵한 다음 교인들에게 자신이 오늘 겪었던 일을 설명했고 교인들에게 오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시고 자신의 심령을 돌아보시라고 하며 다음 주일 뵙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교인들은 부끄럽고 회한(悔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행위는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것이기 보다는 상대방에 따라서 내 행위가 변하는 종속변인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으니 내가 독립변인으로서 변화되어서 누구에게나, 어떤 경우라도, 어떤 시간에서라도 똑 같은 심정으로 선한 일을 한다면 그는 좋은 나무일 것이고 그의 행위는 좋은 열매일 것이다.
둘째, 다음은 사람 행위의 진정성의 문제이다. 자신의 행동을 포장해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행위는 결코 좋은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보이는 경우나, 번듯한 직함을 가진 자나,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자 들이나. 자기의 선행을 널리 알리는 행위나. 교회가 헌금자를 널리 알리는 일 등을 하는 것과 그들의 삶과는 관계가 없다. 자기를 알리는 과장된 행위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하늘에 들어갈자는 오로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자, 그가 좋은 열매를 맺는 자이다. 외형으로 나타난 교권주의자나 직분 자나 능력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열매를 맺는 자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그 심령이 변화된 사람이니 그에게서 나오는 행위는 선한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사랑 안에는 기쁨이, 감사가 넘치게 된다.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이고, 영적예배가 될 것이다. 진정한 사랑에서 나오는 행위가 좋은 열매이고 사랑의 사람이 좋은 나무이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은 자기를 포장하려는 행위는 과장된 것이고 공허한 썩은 과실일 것이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심령이 새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번 문제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틀이 열매라 하겠다. 한 집이 견고히 서있는가 아닌가는 그 기초에 달려있다. 예수님은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위에 지은 집에 관한 비유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역시 열매를 설명하시는 또 다른 비유이다. 기초가 든든하고 집을 잘 지으면 바람이 불고, 홍수가 닥치고, 지진이 나도 잘 견디어 낼 것이다. 이런 집은 기초가 튼튼한 집이다. 진리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고난이 닥쳐와도 굴하지 않으며 일이 잘되어 크게 성공해도 교만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 좋고 즐거운 일들도 겪게 된다. 튼튼한 기초위에 선 사람들은 이 두 상황에서 요동하지 않는다. 그의 삶이 의연하다면 그 삶은 좋은 열매일 것이고 그 심령은 좋은 나무일 것이다. 일이 잘되어서 성공을 걷고 그 위엄과 존귀가 더해지고, 모든 사람이 성공한 사람으로 치부할 때 그가 겸손하다면 그의 심령은 좋은 나무에 견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왜 중도에 좌절하는가? 교만이다. 교만은 자신을 와해시키는 암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생이 마칠 때까지 우리는 겸손히 내 갈 길을 가야한다. 그러면 내 인생의 정점(頂點)은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이 참되고 아름다운 사람인가 아니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인가를 가늠한다. 열매는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좋은 나무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보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도록 해야 한다.
2021년 1월 23일
Ⓒ 2021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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