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시(嫉視)
사람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사고의 틀과 자기의 사유범위 안에서 언행을 하게 된다. 자기의 생각과 다른 타자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서 타자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명철(明哲 understand)한 사람일 것이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큰 오류를 범하면서도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여기 빨간색 장미 한 송이가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이 장미의 색을 빨간색이라 한다. 누구나 이 장미의 색은 빨간색이라 믿을 것이다. 이 장미는 정말 빨간색일까? 사실 우리가 본 빨간색은 허상(虛像)이다. 실재(實在)하는 장미의 색이 아니고 우리의 눈을 통해서 인지된 현상에 불과하다. 눈이 레이저를 볼 수 있다면 이 장미는 빨간색이 아니겠지, 또 눈이 흑백을 볼 수 있는 경우라면 물론 빨간색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눈은 이 장미를 빨간색으로 본다. 어떤 이가 빨간색이 아닌 다른 색이라 말한다면 그는 오답을 한 것이다. 아니면 색맹(色盲)일 것이다. 이 장미를 빨간색이라고 믿는 것은 천연색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공유개념(共有槪念)이다. 그러나 눈이 다를 경우 이것은 정답이 될 수 없다.
두 개의 다른 눈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공유개념(共有槪念)이 없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토론이 전개된다면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사람이 오래도록 자기사고에 졌어있으면 거의 타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하는 규율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율법의 본래의 정신은 사라지고 오래 내려오면서 형식화된 율법을 행위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본래 율법이 지니고 있는 사랑이나 긍휼 같은 것은 없고 단지 지키는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형식주의자들 앞에 본질적 인생의 문제를 던져주신 예수님이 나타났다. 형식주의자와 본질적 문제의 충돌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 공생애 거의 일 년이 될 즈음에는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적과 강화에 감시자가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결점을 잡아서 제거하기 위해 계속 따라다녔다. 그들은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형식적 율법을 지키는 일에 천착(穿鑿)했다. 예수님이 전하는 본질적 생명의 진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지만 항상 예수님의 질책을 받아왔다.
그들이 예수님을 질시한 이유는 자기들의 기득권에 반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예수님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등으로 매도하였다.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려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헌 옷”, “헌 가죽부대”에 비유하셨고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새 천”, “새 포도주”에 비유하셨다. 그래서 헌옷을 수선하려고 새 천을 사용할 수 없으며,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을 수 없다고 하셨다. 두 개의 가치는 융합 할 수 없다는 의미 일 것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공생애 첫 유월절에 성전을 청결하실 때부터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질시의 눈으로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예수님 공생애 1년쯤 지났을 때부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유다지방과 예루살렘에서 따라오고 또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지역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감시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흠집을 내려한 무리들이다.
이들이 주로 제기한 문제는 죄인 문제, 안식일 문제, 권위에 관한 문제, 로마와 관련된 문제 등으로 철저히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어 그를 죽이려는 음모였다.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이용하여 백성의 삶을 얽매고 착취하는 자들이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지키는 자들이다. 백성을 괴롭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서 율법이 있으며, 믿음으로 삶속에 생명력이 넘치게 되고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는 복음을 전하신다. 율법보다 사람이 우선한다는 생각과 율법의 노예로 인간을 보는 두 눈은 결코 융화될 수 없었다. 이들 종교지도자들의 질시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끝났지만 질시란 암 세포와 같아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소멸시킨다.
율법주의자들은 항상 사람을 얽매는 일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해방(解放)을 위해서 이다. 사람의 행복과 가장 정의롭게 살아가는 메시아 왕국을 이루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위해 순종의 삶을 요구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산다느니,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받치겠다는 생각은 허구이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 다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으로 아름답고 빛나는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과 그 권위와 능력에 대해 대항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해진 헌 옷이요 헌 부대이다. 새 것을 담을 수 없었고 이들은 부분적으로 뜯어고쳐서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새 옷과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완전갱신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그럴 의사가 없었고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질시(嫉視)는 곧 그들의 멸망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2020년 12월 10일
Ⓒ 2020 by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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