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profkim 2020. 8. 30. 15:44

어둠뒤에 여명이 밝아온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는다.

 

  물론 베드로는 어렴푸시라도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목숨을 걸 것을 다짐 하게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의 영적 상태를 잘 알고 계신다.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하였고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바 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30 AD)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다. “죽을 각오와 부인(否認)” 사이에는 어떤 영적 상태가 존재했을까? 베드로는 분명 주님이 죽으러 가신다면 나도 따라갈 수 있다고 다짐한다. 그의 진심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왜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까? 오순절 후에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행동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도망가던 모습과는 전연 다르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제자들을 완전히 갱신(更新) 시켰. 이 갱신은 주님이 떠나야 오신다는 보혜사 성령(helper)의 역사이시다.

 

  오늘은 주님을 부인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회복하고 형제들을 아울러서 교회를 세워야한다. 오순절의 제자들의 변화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때(30 AD) 초대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질 것을 아셨고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베드로가 더 확고히 서게 하셨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한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이 짧은 대화는 고난주간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있었던 일이다. 예수님의 베드로의 부인(否認) 예언은 불과 몇 시간 뒤에 현실이 되었다. 요한은 내러티브상의 한 장르에서 베드로의 이야기를 끌어오고 있다. 그래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로 시작한다.

 

  폴란드의 소설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의 소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여” 영화화되어 1951년 개봉되었는데 이는 픽션 이지만 배경은 로마이며 베드로가 네로의 박해를 피해 도피하는 중 로마 교외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어디로 가십니까?”를 묻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순교를 했다는 줄거리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베드로의 순교 직전의 일을 다룬 영화이다. 예수님이 예언으로 말씀하신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때(68 AD) 일 것이다.

 

  마지막 만찬장에서 있었던 상황을 공관복음에 전개된 내러티브를 종합해 보면 먼저 예수님이 이런 장르로 유도하신 것 같다. 마지막 만찬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라 하셨고 베드로는 수제자이고 항상 적극적이고 믿음위에 굳게 서있는 제자였다. 그래서 어느 제자보다 먼저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곤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즉각적으로 아닙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습니다.” 라고 다짐을 피력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언을 하신다. 단 몇 시간 뒤에 일어날 일이다. 좀 격동된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재차 다짐을 한다. 그러나 조금 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잡혀 가시는데 제자들은 모두 도피했다.

 

  그래도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던 모양이다. 그리고 가야바의 뜰에 들어 갈 수 가있었는가 보다. 아주 멀리 도망갔더라면 부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수제자답게 예수님을 따라간 것이다.

 

  요한복음은 베드로가 첫 번째 부인하는 것(18:15-18)과 두 번째와 세 번째 부인(18:25-27)하는 그 사이(18:19-24)에 안나스의 집에서 예수님이 심문 당하시는 내용을 삽입한다. 이는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하는 일이 시간적으로 좀 간격이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을 하고 나니 곧 닭이 울었다고 기술한다.

 

  이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돌아다 보셨다(22:61). 베드로가 있었던 곳은 예수님이 심문 받으신 곳과 눈을 맞출 수 있는 정도의 거리(距離) 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한다. 자신의 나약함을 절규했겠지, 그리고 통탄하며 자신의 잘 못을 회개했겠지, 자신의 무력에 대해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과 제자들을 보존하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가게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눈여겨 보아야한다. 겟세마네에서 도피했던 11제자와 문도들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완전히 변화가 되어 초대 교회가 세워지고 세계 열방을 향한 복음 전파가 이루어지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지 불과 50여일 뒤에 담대한 용사가 되어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하루 3천명을 회개 시키고 유대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담대히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주의 종이 되었다. 무슨 힘일까? 이 모든 과정을 주님은 아시고 계셨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갈 것도 다 아시고 계셨다. 베드로의 부인은 역전 드라마를 써 내려가도록 하는 한 게기가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평생 이 일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2020830()

코로나로 인해 온 나라가, 나아가 세계가 힘들어 하고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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