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단상(斷想)] 짐이 가벼우면 좋지

profkim 2020. 6. 17. 15:47

 

 

 

 

바다물이 가벼워지면 구름이 되어 창공을 여유( 旅遊 ) 한다 . 얼마나 한가한가 ! 또 자유로운가 ! 막힘이 없다 .

 

 

 

  나는 평생에 많은 문제적 장면에서 살아왔다. 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왔다. 짐을 안지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사일 것이다. ()라는 짐, 가난이라는 짐, 질병이라는 짐, 실패라는 짐, 좌절이라는 짐, 때로는 가족이 짐이 되고, 재산이 짐이 될 때도 있고, 맡은 일이 짐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지치고 넘어질 때가 있다.

 

  자신의 짐을 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이런 짐을 벗어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누구도 짐을 벗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객관적 조건으로서 짐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그 짐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아주 무거운 짐을 지고도 무게를 느끼지 않는데 어떤 이는 별로 큰 짐이 아닌데도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우리에게 짐은 항상 있으나 그 짐이 가볍게 느껴진다면 좋을 것이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다. 안식으로의 초대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힘들어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일일 것이다. 이 일이 주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사역이시겠지, 이는 대강령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품성을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gentle in heart) 하고 겸손(humble in heart)하다고 하신다. 이 두 품성은 예수님의 품성이고 더 나아가 안식과 쉼으로 연계되는 덕목일 것이다. 온유와 겸손은 짐을 지고 있지만 무게는 느끼지 않게 하는 어떤 힘을 갖고 있다고 보인다. 그럼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워야할 교육과정은 온유(溫柔)와 겸손(謙遜)” 이다.

 

  온유는 산상수훈 팔복에서 세 번째로 말씀하셨다. “온유한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고하셨다. 온유한 심령이 근거가 되어 화평케 하는 행위를 낳게 된다. 팔복 중 일곱 번째 덕목은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하셨다. 온유는 하나님의 아들의 품성이고 아들이기 때문에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고난주간 제5일 목요일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만찬을 가지셨다. 만찬 시작과 더불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리고 다락방 강화 가운데 첫째로 서로 섬기라는 겸손을 강화(講和)하셨다. 이 덕목이 예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것이기에 시범을 보이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이시면서 종의 형체를 입으셨고, 순종하시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신 것이니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 일이다. 겸손이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인 것을 제자들은 몰랐다.

 

  무게는 중력(重力)에서 생기는 것이니 중력이 없으면 무게도 없겠지, 삶에서 중력을 크게 만드는 것들은 불신(不信), 교만(驕慢), 욕심(欲心), 경쟁(競爭), 지나친 성취욕 등 인간적 욕망일 것이다. 우리를 무중력상태로 이끄는 것은 믿음과 사랑이겠지, 예수님의 품성 온유와 겸손은 믿음과 사랑에서 연유한 것이니 예수님이 바로 무중력 상태가 되신다. 그 분의 품성 안에 거하면 무중력 상태가 되고 이를 우리 현상에 비추어 설명한다면 고속도로(믿음)를 승용차(사랑)로 질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계곡도 태산준령도 거침없이 달려 갈 것이다. 의인에게는 시온의 대로가 열린다고 한다. 그것이 믿음에서 오는 길이다. 산골길로 걸어서 갈 것인가? 고속도로로 승용차를 타고 질주할 것인가? 그 차이가 믿음이 없는 사람과 믿음의 사람의 차이이다.

 

  예수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 무중력 상태에서 짐을 지는 방법을 배워야하는데 이는 예수님과 멍에를 같이 메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그분의 품성을 그분과 동행하면서 배우면 된다. 세상의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학습방법이 아니다. 여기 무슨 이론(理論) 이나 가정(假定)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동행이라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직접 체득하는 일이 유일한 학습 방법이다.

 

  예수님의 품성을 배우는 멍에는 쉽다.” 고 하셨다. 배우는 방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인도하시는 아주 평안한 방법으로 배우면 된다. 마지막 결론은 짐은 가벼움이라.” 고 대 선언을 하신다.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통해서 우리가 지고있는 모든 짐의 무게를 가볍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이 어떤 것이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가벼워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사람에게는 짐을 지고 있으면서 짐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이기게 하는 비결이 있다. 세상이 나를 평안하고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나 변화된 새 생명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 원리는 오늘 복지국가(福祉國家)의 이상이 되고 있으며 복지정책의 모델이 되고있다. 마태복음 1128-30절의 말씀으로 선진사회는 모든 국민들에게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는 정책을 입안하고 있다. 장애자, 빈곤층, 환자, 노인 정책이 모두 이에서 나왔다. 개인이나 한 가정이 질수 없는 짐을 우리사회가 같이 져줌으로 그들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다.

 

  오늘 사회정책이나 교육정책은 국민이나 학생을 그들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교육받을 수 있도록 즉 생존 할 수 있도록 지원(supports)하는 정책이다. 이 것이 예수님이 2,000여 년 전에 강화하신 말씀이다. 짐을 가볍게 하는 일이야 말로 모든 사람이 평안하고 행복해 지는 길이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영적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현대국가의 사회정책은 사회적 지원을 통해서 국민의 삶의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영적 삶과 사회생활에 모두 영향을 미치셨다.

 

  부모를 부양하는 일이 쉽겠는가? 대부분 사람은 자식에게 기대지 않고 살기를 바라며, 자식들은 부모 부양하는 일을 부담으로 느끼게 된다. 우리 사회는 노인지원사업을 통해서 노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면 좋겠지, 복지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에게 부모 공경은 즐거움이고 쉽고, 편안하고 무엇이고 더 해 드리고 싶다. 이런 자녀들은 부모가 결코 짐이 될 수 없다. 믿음과 사랑은 모든 짐의 무게를 가볍게 한다. 그리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

 

  바다의 물이 가벼워졌을 때 구름이 되어 창공을 여유(旅遊)한다. 얼마나 한가한가! 또 자유로운가! 막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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