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만 남

profkim 2020. 8. 21. 14:34

 

 

  일생을 통해 만나는 사람이 참 많다.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이웃을 만나고, 직장에서 동료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교회에서 성도들을 만나고, 길가는 행인과 옷깃을 스치고, 알 수 없는 다양한 상황에서 수없는 만남이 있다. 한 사람이 평생에 어떤 만남들이 있었는가는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게 된다.

 

  우리의 만남은 주어진 경우와 자신의 의도에 의한 경우가 있다. 또 좋은 만남이 있는가하면 불행한 만남도 있다. 이런 만남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만남을 이끌어 갔는가! 아니면 타자에 의해 내가 종속 되었는가! 는 우리 삶을 가늠하는 중요한 가름길이 될 것이다. 나의 삶을 내가 주도해 나가는 경우라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내 삶이 결정될 것이다. 물론 타자에 종속되어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만남의 특정한 자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힘들 것이다.

 

  나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은 부모와 형제자매이겠지, 내 의사와 관계없이 결정되어 있는 만남이니 이를 천륜(天倫)이라하겠지, 그러나 부부의 만남은 선택적이고 그 결정은 본인이 하니 이를 인륜(人倫)이라한다. 사람마다 그 만남이 다를 것이니 사람 수 만큼 다른 경우(境遇)가 있을 것이다.

 

  가난하고 무능력한 부모를 만날 수도 있고 부하고 유능한 부모를 만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가난한 부모를 만났어도 세계적 명성을 얻은 분들이 있는가하면 유능한 부모를 만났는데도 인생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까?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함수관계(函數關係)로 설명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한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라 하면 될 것이다.

 

  정보사회에서 다중지능이론이 받아드려지고 그 중 가장 중요한 지능은 개인 내() 지능(intra individual intelligence)인데 이것이 바로 환경을 받아드리는 자세라 하면 될 것이다. 자세, 이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이다. 이 눈이 지속적으로 삶에 적용된다면 평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자기가 주도하는 삶이지 !, 그래서 평생을 신념을 갖고 살겠지, 그러나 자기 주도적 삶을 살아가더라도 어떤 눈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긍정적 자세와 부정적 자세를 가진 사람을 보자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긍정적 자세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은 그 관계가 촉촉하고, 풍요로우며, 무슨 일이나 해결이 되고, 두 사람사이에 기쁨이 있을 것이나 부정적 자세를 가진 사람의 만남은 그 반대가 될 것이다. 긍정적 자세를 가진 사람은 처해있는 상황 그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가치(價値)체계(體系)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성경에서는 부부는 한 몸이라 한다. 일체라는 말이지, 남자와 여자,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고, 학력도 처해있는 상황도 모두 다른데서 살던 사람이 어떤 시간에 만나서 갑자기 하나가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을 창조의 섭리에서 이해하면 졸을 것 같다. 사회적 만남의 대표적인 것이 부부의 만남일 것이다. 부부의 만남을 이해함으로 사회적 만남의 대강을 이해하면 좋겠다.

 

  결혼은 무엇인가? 부부가 하나 되는 것이 결혼이다. 다음 결혼을 왜 하는가? 생육하고 번성하며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한다. 이 원리는 창조의 원리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과 우리가 하나이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 유기적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둘이 하나 되는 원리나 행복해지는 원리는 하나이다. 두 사람의 속성이 각기 살아있으면서 만났다면 이는 물리적 변화를 한 샘이지만, 둘의 속성은 없어지고 제삼의 속성으로 하나가 되었다면 이는 화학변화를 한 것이다. 이 때 두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가된다. 이래서 두 사람은 행복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힘이 있고, 다른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두 사람사이에 화학변화를 이루게 하는 정신작용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정신적 가치는 믿음이다. 믿음은 긍정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사회를 바라보고, 자연을 바라 본 다면 그 자체가 능력이 될 것이다. 부부가 믿음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면 그 안에 무한(無限)의 기쁨과 감사가 있을 것이다. 이 것은 둘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다. 평생을 믿음으로 살면 그 사람의 지적능력이 어떠하던 그는 성공할 것이다. 정보사회의 가장 중요한 지능은 개인 내 지능(태도 즉 믿음) 이다. 여기서 종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라!

 

  불신의 삶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분열하고 소멸시킨다.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 수 없고 불행하게 한다. 이런 삶은 이웃과 나눌 수 없고 항상 자기 방어를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결과는 실패자가 되게 한다. 오늘 교육과 기독교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 역할에 소홀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믿음의 기능이 사랑이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로 표출된다. 뜨거움, 활력, 적극적 자세, 나눔과 섬김, 살아서 역사하는 힘과 같은 것들은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하나로 묶는 힘을 갖는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묶어 유기체로서 하나가되어 가도록 한다.

 

 

 

  나는 사랑을 정의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랑의 행위를 알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정의는 다양하겠지만 사랑 안에 행하는 행위는 다음 15가지 행위로 보면 될 것 같다. 이런 행위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면 사랑이 없는 것이며 이런 행위가 삶이되었다면 이는 믿음에서 나온 사랑의 삶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사랑의 행위는 오래 참고(patient), 온유하며(kind), 시기하지 아니하며(not envy), 자랑하지 아니하며(not boast), 교만하지 아니하며( not proud),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not rude),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not self-seeking), 성내지 아니하며(not easily angered),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no record of wrongs),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not delight in evil),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rejoices with the truth), 모든 것을 참으며(always protects), 모든 것을 믿으며(always trusts), 모든 것을 바라며(always hopes), 모든 것을 견디어냄(always perseveres) 등이다.

 

  사랑가운데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행하는 일이 힘들지 않다. 즐겁고, 쉽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지, 이런 사람은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겠지,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아주 쉽고 즐거운 계명이고 이는 사람이 잘되고, 건강해지고, 행복해 지는 길을 이르신 계명이다.

 

  예수님은 다락방 강화에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믿어라를 주시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 새 계명은 사랑일까? 사랑 안에 믿음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기에 새 계명은 사랑하라고 하셨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허구(虛構) 일 것이다. 고속도로가 없는데 자동차가 달린다면 그 것이 허구일 것이다. 자동차는 도로를 달려야한다. 자동차가 주행해야 그것이 도로이다. 이 현상이 믿음과 사랑의 관계이다.

 

  우리 가정이, 교회가, 사회가 유기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힘은 믿음과 사랑이라 할 것이다. 이 때 비로소 하나 되고 행복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힘을 갖게 된다. 우리는 많은 만남 속에서 산다. 부모형제, 처자, 성도들, 이웃, 동료 등등 수 없는 만남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의 만남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어야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로 엮어지는 유기체로서 우리가 존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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