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모라비안의 삶

profkim 2020. 5. 29. 17:34

                                        

 

1741년 미국 베들레헴에 자리잡은 모라비안의 교회와 정착촌

 

 

  교회는 무엇이고 신학은 무엇인가?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오늘 거대한 기독교회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구사하고 있는가? 사이비 기독교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왜 그들의 유혹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많은가?

 

  존 웨슬리(John Wesley) 형제(동생 찰스 웨슬리)17351014일 영국 그레이브센드(Gravesend) 항에서 시몬즈(Simmonds) 호를 타고 미국 조지아(Georgia)로 향하게 되었다. 이 배에는 독일(모라비아 지방, 현재는 체코)에서 온 26명의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신도들도 있었다. 웨슬리는 이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독일어를 배웠다고 한다.

 

  대서양 횡단은 지금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악천후를 만나면 배도 적은 데다가 지금처럼 항해 설비를 갖춘 것도 아니고 무척 고생을 하게 되고 생사를 가름할 때도 있다. 웨슬리가 항해한 배도 수 없이 폭풍을 만나고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온 80여명은 아우성을 지르고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는데 독일에서 온 사람들은 아주 차분하게 찬송 시를 암송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웨슬리는 독일에서 온 사람들을 상종하면서 그들의 삶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들을 시험해 볼 절호의 기회가 왔다. 1736125일은 주일이었다. 배가 파선할 위기에 처할 정도의 폭풍이 불었다. 웨슬리의 일기에서는 정오쯤 되어서 우리가 세 번째 맞는 폭풍이 시작되었고, 4시가 되자 폭풍은 전보다 더 맹렬하였다. 7시에 나는 독일 사람들을 찾아갔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의 행동이 매우 신중함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여객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을 계속하여 그들의 침착함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어떤 영국 사람도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 고 기술한다.

 

  이들 독일에서 온 사람들은 배가 흔들리어 넘어지면서 부딪치면서 또 다시 일어나서 봉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는 보상을 기대하거나 자만심을 갖거나 불평은 없었다. 그냥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여객들을 도왔다.

 

  웨슬리의 일기에서는 주일 예배가 시작되면서 시편을 낭송하고 있는데 큰 파도가 덮쳐서 큰 돛대가 산산조각이 나고 배를 뒤덮어서 갑판 위로 쏟아져 내려, 배를 삼켜버릴 것과 같았다고 한다. 영국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아우성이 일어났는데 독일서 온 사람들은 조용히 시편암송을 계속하였다고 기술한다.

 

  폭풍이 지나간 후에 웨슬리는 이들 지도자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은 두렵지 않았습니까?” 그 지도자는 아니요,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웨슬리는 또 물었다. “당신네들 부인들과 어린아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지도자의 대답은 아니요, 우리 부인들과 어린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구원 받은 백성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근심이나 걱정 두려움 같은 것은 이미 초탈했다.

 

  웨슬리는 부끄러웠다. 자신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웨슬리는 커다란 깨달음이 있었고 계속해서 이들과 교유가 있게 된다. 웨슬리는 173626일 미국 조지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27일 그는 모라비안의 지도자인 슈팡갠베르그(Spangenberg) 목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잠간 모라비안과 슈팡 겐베 르그 목사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모라비안은 얀 후스(Jan Hus, 1372~1415.7.6.)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체코의 신학자인 얀 휴스는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이고 신학자이며 교회 개혁운동의 선구자인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영향을 받아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오직 구원은 성서에 의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며 경건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여 교황에게 반기를 들고 교회 개혁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얀 휴스의 개혁주의는 루터(Luther), 칼빈(Calvin)과 츠빙글리(Zwingli)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얀 후스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 1415년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가톨릭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고 이들을 자기 영지에 거주하게 한 이가 진젠돌프(N. Zinzendorf, 1700~1760) 백작이다. 이들 중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 미국으로 가는 독일 사람들이 웨슬리와 만난 사람들이 엇다.

 

  웨슬리와 동승했던 사람들보다 먼저 미국에 도착한 모라비안들이 있었고 스팡 겐베 르그 목사는 그중 대표 격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스팡겐베르그 목사는 얀 후스의 신앙 노선을 따라 이미 영적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조지아에서 얼마 후 펜실베이니아로 옮겨서 1741년 베들레헴에 그들의 터전을 마련했다. 지금도 초기 모라비안의 교회와 그 시설들이 베들레헴에 있다.

 

 

미국 베들레헴 모라비안 정착촌의 게마인하우스 소개, 진젠돌프와 스팡겐베르그도 보인다.

  진젠돌프는 자신들의 신앙생활은 물론이고 세계선교의 역군으로 놀라운 활동을 전개하였다. 망명 후에 그도 베들레헴에서 활동을 하였다.

 

  진젠돌프의 경건주의는 자연스럽게 모라비안과 연결이 되었는데, 그들은 진젠돌프가 제공한 거주지를 헤른후트(Herrnhut - 주님의 보호)라고 불렀다. 이는 초대교회적 공동체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1727년에 진젠도르프는 헤른후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복음주의적이고 선교 지향적인 강력한 공동체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사반나에서 웨슬리가 만난 사람은 스팡겐베르그 목사였다. 웨슬리의 일기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73627일 토요일: 오글소프(Oglethorpe)씨가 슈팡겐베르크 씨와 함께 사반나로부터 돌아왔다. 그는 모라비아교도들의 대표적 목사이었다. 나는 곧 그가 어떤 영의 사람인가를 알아봤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떻게 행해야 좋을지 그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나의 형제여, 내가 먼저 한 두 가지 질문을 하겠소. 당신은 당신 자신 안에 증거(witness)를 갖고 있소?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영과 더불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 하십니까?”

 

  나는 당황하였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나의 이런 모습을 관찰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그는 세상의 구세주라고 나는 알고 있소.” 그는 대답했다: “옳소.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다고 그렇게 당신은 알고 있소?” 나는 대답했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기를 나는 희망(hope)하오.” 그는 다음 한 마디를 더 하였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아시오?” 나는 대답했다: “알고 있소.” 그러나 이 말은 공허한 말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웨슬리는 1738년 영국으로 돌아와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모라비안과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었고 그들 집회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하나님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떻게 구원사역을 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체코의 모라비안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진정한 구원과 하나님 백성으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일과 믿음에서 오는 평안함과 사랑에서 오는 기쁨과 감사 그런 삶의 모습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모라비안은 감리교 창설자 웨슬리에게 깨달음을 주었고 성령의 체험을 하게 했고 세계 열방을 향한 선교의 이상을 심어주었다.

 

  이들의 선교는 자비량(自備糧) 선교였으며 그들의 삶을 통한 전도였다. 그들의 삶이 곧 증거이다. 이들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였을 것이다. 1732년부터 1760년까지 226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그린랜드, 버진 아일랜드, 수리남, 골드 코스트, 사우스 아프리카, 노스 아메리칸 네이티브, 자마이카, 안티구아 등으로 파송을 받았다. 노예 선교를 위해서 노예로 팔려가면서 선교를 한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는 이들 믿음의 삶을 본받아서 우리의 삶을 통해 선교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들은 그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있었던 사람들이고 기쁨과 감사가 생활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믿음을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게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