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사진첩
어제는 우체국엘 다녀왔다. 내가 70년간 가지고 있던 “서울종암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모교에 보내주었다. 무척 가벼운 기분이었다. 무엇을 주인에게 돌려준 기분 말이다. 내가 “서울종암공립국민하교”에 입학 할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다. 시험을 치루고 합격통지서를 받고 취학했다. 교장이며 선생님들이 군복을 입고 있을 때이다. 어린마음에 무척 겁에 질려있었다는 생각이 난다.
학교 남쪽 언덕 위로는 광복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자리 잡았고 학교 서쪽으로는 한옥 촌이 주로였으며 안암동 쪽으로는 일제 식산은행 사택이 일본가옥형태로 지어져 한 마을을 이루었다. 학교 동쪽은 거의 포도원이었다. 빨간 벽돌로 지은 제기동성당이 유일하게 눈에 들어왔고 학교와 성당사이는 포도원이고 포도원 샛길로 성당으로 내려가게 된다. 길 주변에는 돼지감자가 많이 심겨져있었다. 그래서 학교 동쪽으로는 목가적 분위기였다.
서울의 흙은 화강석이 부셔진 사질이어서 물이 무척 좋았고 시냇물은 옥수가 흘렀다. 지금은 상상을 못한다. 청정한 공기며 공해가 없는 곳이니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 하겠다.
광복 후 서울종암초등학교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학교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 광복 후 의무교육이 이루어지고 학교는 많이 증설되지 못하였고 교육비는 열약한 상태였으니 학급당 70명 이상을 수용했고 학교는 대형학교 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학교라는 것이 좋은 줄 알았다. 열악한 학교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종암공립국민학교 제23회(1950년) 졸업을 하였다. 꼭 70년 전이다. 그 때 받아온 졸업사진첩을 어제 모교로 돌려보냈다. 사진첩을 내가 가지고 있다가 내가 사라지면 이 사진첩은 쓰레기에 불과 할 것이다. 우리 삶속에 충분히 역사적 자료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제 서울종암초등학교는 3년 뒤가 개교 100주년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 역사를 정리하려면 원 자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제주도에는 학생박물관이 있다. 1995년 제주도교육청으로부터 특강 부탁이 있었다. 제주도에 학생박물관 개관 특강이었다. 당시 교육감이신 강정은 선생이 제주도에도 아파트가 늘어나니 모두 이사를 하게 되고 이사를 할 때 많은 것을 버리고 가게 될 것이라는 것 그때 소중한 교육 자료들이 버려질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교육관련 자료 즉 교과서, 통신표, 교복, 교표, 교모, 공책 등등 교육관련 자료는 모두 수집을 하였다. 2, 3만점이 모여서 한 번에 수 천점씩 전시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얼마나 미래를 바라보는 착상이었는가?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민족 국가가 중흥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오늘 나는 역사 위에서 정체성(正體性)을 갖으며 미래를 향하는 비전을 갖기 때문이다. 역사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한 사람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과 같다.
오래전 한 30년 전쯤이라고 생각한다. 내 연구실로 독일에서 특수교육을 한다는 여성분이 찾아왔다. 한국의 특수교육상황과 독일과 스위스의 특수교육 상황 등 교육 정보를 나누는 시간을 갖았다. 그 날 퇴근을 하고 집에 있는데 그 여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것이어서 오시라고 하고 저녁에 우리 내외와 같이 차를 한 잔하게 되었다. 이야기 중에 자기는 서울 출신이고 제기동에 살았다고 하여 초등학교를 어디 다녔느냐는 질문을 하게 되고 종암학교를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종암초등학교 제23회이며 6학년7반이라 하여 내 앨범을 가져다가 찾아보니 6학년 7반 박희용(朴喜容)이란 이름이 있어서 동문임을 확인하고 반가워한 일이 있었다. 이 분은 독일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특수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었고 그 후에도 연락이 계속 있었는데 10여 년 전 내가 미국에 오래 가있는 동안 연락이 끊어졌다. 한국전쟁으로 나는 대구로 피난을 갔고 잠시 서울에 올라와서 거주 한 일이 있지만 대부분 대구를 근거로 살았기 때문에 초등학교 동문과 연락 되는 분은 거의 없었다. 박희용 선생은 앨범이 확인해 준 유일한 동문이었다.
졸업앨범을 모교로 돌려보내면서 70년 전을 회상하며 한 장씩을 넘겨보았다. 1학년 입학당시 담임교사 이셨던 한덕영 성생님과 졸업 당시 담임교사 이셨던 유병만 선생님은 분명하게 기억되고 6학년 다른 7개 반의 담임 선생님들이 아련히 뇌리에 떠올라 지난날을 회상했다. 기억에 많이 남아있음을 알았다. 어렸을 때 일이니 좀 더 기억 흔적이 있었던 같다. 급우 가운데서도 한두 사람은 기억에 남아 있다. 김영철, 원성훈 등 어렴풋이 남아있는 얼굴 윤곽을 다시 확인했다.
퇴색한 앨범은 이제 인생의 만년(晩年)을 살고 있는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게하고 옛날의 어렴풋한 모습을 다시 그려보게 하니 더 없이 고맙다. 이 앨범에 등장한 많은 사람들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고 살아있다고 해도 나와 같은 노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이름위에 신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2020년 5월 12일 창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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