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읍성 성터길 걷기 III은 동성로와 남성로 걷기 기록이다. 아래 지도의 ④→⑤→①의 순서로 걸었다. 지도의 ④↔⑤가 동성로이고 ⓹↔①이 남성로인데 ①은 걷기 출발지점으로 남성로의 중간에 있다. 성문은 Ⓐ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남대문), Ⓔ 진동문(鎭東門, 동대문), Ⓕ 동소문(東小門) 세 곳에 있었다. 망루(望樓)는 ⓸ 동장대(정해루) ⓹ 남장대(선온루) 두 곳이다.
동 성 로(東城路)
젊은이의 광장 동성로(東城路)는 대구역네거리(지도의 ⓸)와 구 중앙치안센터(중앙로와 동성로가 만나는 곳 지도의 ⓹) 사이 구간 900m의 길로서 대구의 대표적인 중심번화가 이다. 본래 대구읍성 동쪽의 성곽(城廓)지(址)였으나 1907년 성곽이 헐리고 도로가 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동성로는 대구백화점 앞 야외무대를 중심으로 옛 성곽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장대석 띠 포장의 보행자전용거리를 따라 교동 귀금속거리, 떡볶이골목, 가방골목, 야시골목, 구제골목 등 이 있다.
나는 동성로 북쪽 끝 대구역과 롯데백화점이 보이는 곳에서 출발하였다. 이곳은 대구읍성의 망루 ⓸ 동장루(정해루)가 있던 곳이다. 여기서 동성로 진동문(동대문)이 있었던 SC제일은행(지도의 Ⓔ)까지는 귀금속특구로 설정되어 있어서 과거 중앙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있었던 귀금속상들이 모두 이곳에 모이게 되어 전국적으로도 귀금속 중심 상가로 발돋움하려하고 있다. 특히 과거 양키시장으로 통하던 교동시장을 중심으로 귀금속상들은 군집되어있었다.
이곳은 2005년 12월 주얼이 특구로 지정 160여개 점포가 들어서 있다. 이들은 대구 패션주얼이 위크(Daegu Jewelry Week)를 매년 5월 개최하여 축제와 더불어서 전국의 귀금속 도매상으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수십 미터 남쪽으로 이동하니 교동길을 만난다. 여기서 동쪽으로 난 길은 1950, 1960년대 양키시장으로 명성을 날렸고 이곳에 오면 미제, 일제 상품을 살 수 있었다. 요사이처럼 물자가 흔한 시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귀한 때이고 물건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 시절 양키시장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이때 시장은 인산인해였다. 좁다란 통로에 비좁게 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성로에서 만난 교동길 서쪽은 우리가 젊었을 때는 아주 번화가였다. 여기엔 자유극장, 송죽극장, 그리고 골목안쪽에 대구극장이 있었던 곳이다. 좁은 골목길에 극장이 세 곳이나 있었으니 저녁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한 거리였었다. 젊은 시절의 이곳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 교동길을 서쪽으로 조금만 나아가면 중앙로를 만나고 길 건너 그 서쪽으로 나아가면 지난날에는 향촌동(지금은 서성로 14길)인데 한국전쟁과 그 후 오래도록 주점과 식당 등이 많아서 유흥가로 이름을 날렸다. 정말 번화가였다. 지금은 한산한 수제화(手製靴) 골목이 되어 있다. 귀금속 특구가 생긴 것같이 수제화 전문 골목이 된 것이다. 교동길과 향촌동길은 대구 상권의 중심이었는데 대구백화점이 동성로 사옥으로 옮긴 후 대구의 상권이 동성로로 옮겨갔고 지금은 한산한 거리에 불과하다.
동성로를 남쪽으로 수십 미터 걸으면 대구읍성의 동대문 진동문 터를 만난다. 지금은 SC제일은행이 있고 이 입구 북쪽에 진동문 표지석이 서있어서 이곳이 진동문 자리임을 알려준다. 이곳에서 동서로 열린 길이 경상감영길이고 여기서 서쪽으로 나아가면 서성로를 만나고 그 곳에 서대문인 달서문터를 만나게 된다. 그 나아가는 길에 대구우체국, 대구근대역사관과 경상감영, 대구중부경찰서, 옛 무영당 건물을 만나게 된다.
동성로에서 경상감영길 동쪽으로 나가면 지금은 폐점을 했지만 동아백화점 본점을 만나게 된다. 대구의 자본으로 세워진 두 백화점 대구백화점과 동아백화점은 향토민의 사랑을 받고 성장한 기업들이다. 그러나 서울 자본에 밀리고 시대에 맞는 경영을 하지 못하여 하나씩 사라지고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다.
여기서 남쪽으로 백여 미터 이동을 하면 국체보상로를 만나게 된다. 국체보상로는 대로이다. 이곳 네거리 남서모서리에 한일 빌딩을 만난다. 이 자리에는 한일극장이 있었던 곳이다. 한일극장은 1900년대 중반 후 무척 큰 극장이었다. 젊었던 시절 영화며, 오페라를 관람한 기억이 나고 대구문화의 많은 영향을 미친 곳이다. 지금은 CGV 대구한일(multiplex cinema, 대구 중구 동성로 39 씨네시티한일 7층)이 영화 상영관으로 남아있다. 내가 젊었을 때 향수가 깃든 영화관이었다.
한일빌딩 남쪽으로 나아가면 대구백화점 본점을 만난다. 대구백화점은 창업주인 고 구본흥 명예회장이 1944년 1월10일 대구 삼덕동에 20여 평 남짓한 “대구상회”를 연 것이 연원이다. 1962년에는 교동 일대에 100여 평의 2층 목조건물에 제법 백화점다운 외형을 갖춘 합자회사 대구백화점으로 성장했다. 현 동성로에 있는 대구백화점 본점은 1969년 12월 26일 지하 1층 지상 10층의 지역 최고층 건물로 확장하여 이전하면서 주식회사 대구백화점이 되었다. 당시 대구 상권은 향촌동과 교동 중심이었는데 대구백화점이 이전하면서 대구상권의 중심이 동성로로 옮겨왔다.
그리고 배구백화점은 1993년 9월 15일에는 신천대로와 대봉교가 만나는 북서코너에 지하 5층 지상 11층의 건물로 대백프라자를 건축하여 개점을 함으로 대백은 전성기를 맞는다. 이 건물은 당시 대구의 상황으로서는 최신 최첨단 건물로 대지 9천233㎡(2천798평), 연건평 8만3천㎡(2만5천152평)이나 되었고 한강 이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화점이었다.
향토자본으로 성장하여 대구시민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성장한 백화점이다. 당시 구영모 사장은 특수교육을 전공하는 학부학생 2명에게 전액장학금과 생활비 일부를 보조해 주는 일을 10년 이상 계속했었다. 향토 기업이 향토대학의 학생들에게 되돌려준 일이니 아름다운 일이다. 대구백화점이 동성로로 이전함으로 오늘 동성로가 대구의 가장 번화가가 되었고 또 젊은이들의 축제의 길과 광장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요즘 서울 자본의 대구 유입으로 특히 신세계백화점 동대구 개점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소식은 무척 마음을 무겁게 한다.
대구백화점 앞에 있는 동성로 중앙무대는 대구 젊은이들의 광장이다. 이곳에서 매년 동성로 축제가 열리고 최근에는 “언택트(untact=noncontact) 동성로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 축제에는 매년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로 9만여 명 이상이 찾던 대구 중구의 대표 축제인데 2020년 ”동성로 축제”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온라인상에서 시민들을 만났다고 한다. 동성로의 특징을 살린 5GO 프로그램 즉 ”부르GO, 춤추GO, 먹GO, 입GO, 투표하GO“는 온라인을 통해 누구나 참가해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대구백화점에서 1시 방향으로 열린 동성로를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구읍성의 동소문 자리를 만난다. 현재는 이곳에 동소문이 있었다는 지표석이 한 귀퉁이에 서 있을 뿐이다. 지표석도 조그마해서 마음먹고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고 이 지표석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다(지도의 Ⓕ). 나도 이 지표석을 찾는데 무척 애를 썼다. 대구광역시 문화관광과에 협조를 얻어서 찾았고 찾은 후 수차례 방문하여 확인과 촬영을 한 일이 있었다. 대구읍성의 동소문, 서소문은 백성들이 많이 드나들던 문이다. 조선조 시대 대문보다는 출입이 헐 씬 쉬웠던 모양이다.
남 성 로(南城路)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중앙로를 만난다(지도의 ⓹) 이곳에 대구읍성의 망루(望樓) 남장대(선온루)가 서있던 자리이다. 중앙로를 건너면 남성로로 접어든다. 대구 사람들에게는 남성로 보다는 약전골목으로 더 잘 알려져 왔다. 대구약령시는 역사가 길다.
대구약령시는 1658년(조선 효종 9년) 당시 관찰사 임의백이 경상감영 안의 객사(客舍) 주변에 약령시를 개장(현 대구중부경찰서 일대) 한 것이 효시(嚆矢)이다. 1907년 박중량에 의해 대구읍성이 철거되고 1908년(융희 2년) 약령시를 현재 남성로로 이전하게 된다. 이에 더해서 일제는 1941년 약령시를 폐쇄하였고 약령시부활은 1978년에야 이루어진다. 오랜 시간 약령시는 폐쇄되었었다.
대구약령시에서 약재생산자와 상인들은 정해진 개시일 동안 대구읍성 사방의 관문을 통하여 출입하면서 상품을 매매하였다. 그것은 관인(官人)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면서 약재의 객주(主), 여각(旅閣; 조선 후기에, 상인들의 물품 매매를 중개하고, 숙박, 물품 보관, 운송 따위를 맡아 하던 상인) 및 거간(居間)의 중개를 받으면서 거래되었다. 방법은 먼저 정선된 희귀 약재는 관수용으로 먼저 매상되고 난 다음 의원(醫員) 및 일반 민수용이 거래되었으며, 일본 상인의 출입은 엄격히 규제되었다고 한다.
대구약령시는 일제에 의해 1941년 폐쇄 되었다가 37년이 지난 1978년에서야 다시 열리게 되고 이해에 제1회 약령시 개장행사를 열 수 있었다. 1985년에는 대구시 '명소의 거리'로 지정되었다. 2001년에는 문화관광부가 '문화의 거리'로 지정 하였고 한국기네스 위원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약령시'로 대구약령시를 인증했다고 한다.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는 2009년부터 매년 5월에 개최하고 있다. 이때는 대구시민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남성로로 접어들어서 50미터 정도 서쪽으로 이동하면 종로를 만난다. 이 곳은 대구읍성 남대문이 서있던 곳 즉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남대문, 지도의 Ⓐ) 자리이다. 여기에 지표석이 서있으며 영남지방의 제일 관문임을 알리고 있으나 초라하기 그지없다. 영남제일관은 1980년 망우공원에 복원 건립하여서 그곳에 가면 볼 수 있다(서두에 제시된 사진). 조선조시대 부산 동래에서 출발하여 서울로 가려면 이 영남제일관을 통해서 갔다. 명실상부한 영남의 제일 관문이었다.
동성로와 종로가 만나는 곳으로부터 현대백화점 사이에 염매시장이 있다. 오래된 전통시장이다. 염매시장은 떡집, 지짐, 폐백음식, 이바지 음식 등으로 유명하며 돼지고기로도 꽤나 명성을 얻었었다. 현재는 주변에 상성빌딩, 동아쇼핑, 현대백화점 등이 높게 서있고 반월당은 대구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꾀나 번잡한 곳이 되었다. 반월당 지하상가는 여러 종류의 상가가 들어서서 대구시민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되었고 특히 오갈 데 없는 노인층이 소일(消日) 하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종로길 을 북쪽으로 50미터쯤 가면 진골목 입구를 만난다. 진골목은 “긴 골목”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여 “질 다”에서 유래 했다고 한다. 대구에서는 꾀나 유명한 골목길이었다. 이 곳은 대구의 토착세력인 달성 서 씨의 집성촌이었으며 이 골목길은 경상감영까지 연결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재력가들이 이 골목에 많이 살았다고 하며 현재는 음식점과 카페가 들어서있고 대구골목투어길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 곳으로부터 내가 대구읍성걷기를 시작한 제일교회 역사관이 있는 곳까지는 대구약령시장과 대구약령시문화거리가 있고 남성로 양편으로 한약 상과 의원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서 약전골목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나는 이번 대구읍성걷기를 통해서 자세하지는 않지만 읍성을 중심한 대구의 역사를 대강 살펴볼 수 있었다. 대구에 오래 산 사람으로서 조그만 지식이라도 얻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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