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읍성(大邱읍邑城) 성터길 걷기 I
대구에 오래 살았다. 젊었을 때 바쁘게 사느라 내 주변에 관해 관심을 많이 가지지 못하였다. 어느 날 대구(大邱) 구(舊) 읍성(邑城)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성터 길을 한 번 걸어 보고 싶어져서 마음먹고 걸었다. 더 나이 들면 걸을 수 없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내가 걸어도 곳곳에 서려있는 그 역사야 어찌 다 알겠는가마는 성터 길을 밟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구읍성 걷기는 세 번에 나누어 게재하고자한다. 첫째(I)는 지도의 ⓵에서 ⓶까지 제일교회 역사관에서 남성로와 서성로가 만나는 곳까지, 둘째(II)는 서성로와 북성로 길(⓶→⓷→⓸)을 소개하기로 한다. 셋째(III)는 동성로에서 남성로의 출발지점까지(⓸→⓹→⓵)로 한다.
* 위 지도는 옛날지도이고 아래지도는 오늘날 관광지도이다.
* 걷기 출발은 ①에서 출발하여 →②→③→④→⑤→①의 순서로 걸었고, 거리 이름은 ⓶↔⓹ 남성로(약전골목), ②↔③이 서성로, ③↔④가 북성로, ④↔⑤가 동성로이다.
* 대구읍성의 문은 대문(大門) 4개, 소문(小門) 2개가 있었다. 지도에서 위치를 보면 ⓐ 영남제일관 ⓑ 달서문 ⓒ 서소문 ⓓ 공북문 ⓔ 진동문 ⓕ 동소문 등이다.
* 성곽 4 모퉁이에 장대(將臺, 망루)가 있었다. ② 서장대(주숭루) ③ 북장대(만경루) ④ 동장대(정해루) ⑤ 남장대(선온루) 등이 있었다.
대구읍성(大邱邑城)은 대구부성이라고도하나 나는 읍성이 더 정감이 가서 이 원고에서는 읍성으로 기술하기로 한다.
먼저 대구읍성(大邱邑城)의 축성(築城) 역사를 보아두도록 한다. 최초로 대구읍성이 수축된 것은 임진왜란 2년 전인 선조 23년(1590년)에 일인데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서 전국에 교통 요지에 읍성을 쌓게 하는 정책에 따라서 대구에도 성을 쌓았다. 대구부사 윤 방(尹 昉)에 의해 토성(土城)으로 축성(築城)되었던 읍성(邑城)은 왜군(倭軍)에게 함락되면서 파괴되었다.
그 뒤 대구에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설치되고, 경상감사 겸 대구부사 민응수(閔應洙)는 조정에 대구에 성을 쌓는 것을 허락받아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영조(英祖) 12년(1736년) 4월부터 돌을 이용한 석성의 형태로 다시 축성 공사에 착수했다. 이듬해 6월 읍성은 완공되어 11월에 준공식을 열었다. 흙으로 쌓았던 최초의 읍성이 파괴된 후 약 140년만의 일이었다.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대구 시가지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잇는 구간에 서 있었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따르면 대구읍성의 전체 둘레는 2,700m, 높이는 5m에 달했다. 읍성의 동서남북으로 진동문(鎭東門), 달서문(達西門), 영남제일문(嶺南第一門), 공북문(拱北門) 등 4대문(大門)이 있고 그보다 조금 작은 소문(小門)인 동소문(東小門)과 서소문(西小門)이 있어서 모두 여섯 개의 성문이 있었다. 성의 모퉁이에는 동장대(東將臺; 정해루), 남장대(南將臺; 선은루), 북장대(北將臺; 망경루), 서장대(西將臺; 주승루) 등 4개의 망루(望樓)가 있었다. 백성들은 출입이 까다롭고 엄격한 4대문 대신 동 · 서의 두 소문을 주로 이용하였다.
대구읍성은 일본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문에 성을 쌓게 되었고 1907년 일제와 영합한 박중량에 의해 해체되었다니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졌고 일인들의 이익을 위해 해체되었다고 보인다. 대구읍성은 국가의 안위와 국권이라는 힘에 의해 운명을 같이 했다.
나는 대구읍성 걷기를 대구제일교회와 교남YMCA가 자리 잡고 약령시 한의학박물관이 있는 남성로 즉 약전골목에서 출발 하였다. 여기서 서쪽을 향해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출발점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걸으려한 것이다. 읍성 일주라야 3km 남짓한 거리에 보통 걸음으로 걸으면 일주에 40분 정도면 가능하다.
제일교회는 영남지역의 최초의 교회이고 모교회이다. 영남지방의 최초의 선교사였던 배위량(裵褘良, W. M. Baird)은 제일교회 자리에 1896년 4월에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하게 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해외선교사 연차총회에서 서울 지역 교육담당 고문으로 발령되어 가고 후임으로 그의 처남 안의와(安義渦, J. Adams) 선교사가 뒤를 이어가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그 후 경상도 선교의 주역을 담당했다. 남성로에 있는 현재 제일교회 역사관자리에서 지금 청라언덕이라 불리는 동산(東山)으로 선교본부(mission station)를 옮겨서 동산병원, 계성학교, 신명학교를 설립하는 터전을 마련하였고 경상북도 지역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는 중추역할을 하였다. 제일교회는 역사의 산실이라 하겠다.
제일교회 바로 건너편에 2층 붉은 벽돌로 지어진 양옥이 대구의 YMCA가 시작된 교남YMCA 이다. 이 건물에서 1919년 기미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모의(謀議)한 곳이다. 이곳은 민족운동의 거점장소였다. 이 건물은 1914년 건립되어 오늘에는 등록문화제 제570호이며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24에 있다.
대구는 약령시로 유명하다. 360여년의 역사를 지닌 대구의 약령시는 약재를 공급하는 중요 시장 이였고 이곳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선교사들의 전도 활동을 한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약령시에 모이는 사람들은 재력과 어느 정도의 식자(識者)층이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서려있는 곳에서 대구읍성 성터길 걷기를 시작했다.
서쪽으로 걸으면 양방에 약재상들이 있으나 옛날만큼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약전골목의 면모를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서쪽으로 걸어서 서성로를 만난다. 남성로에서 서성로를 만나는 곳에 약령서문이 번듯이 서있다. 여기는 지도에서 서장대(주숭루, ② 보다 약간 동쪽에)가 서 있던 곳이다. 여기서 성 밖 서쪽으로 계산주교좌성당이 있고 남서쪽 언덕위에 “청라언덕” 또는 “여호와이래의 동산”이 있고 그 곳에 현재의 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어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지난날을 회상하게 된다.
계산동성당[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0(계산동2가); 사적 제290호(1981년 9월 25일 문화재 지정)]은 1902년 로베르 신부에 의해 건축된 건물로 성당의 평면은 라틴 십자형(Latin cross)으로 중심의 본랑(本廊; nave)과 양쪽의 측랑(側廊; transept)으로 구성되었고 그 평면 건물의 외부와 내부 공간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또한 건물 전체적으로는 무겁게 느껴지는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을 띠고 있지만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고딕(Gothic) 요소도 들어 있다. 계산동성당은 영남지방의 천주교 토착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계산동 성당 서쪽 언덕 위는 청라언덕이 있다. 청라(靑蘿) 언덕은 기독교 역사가 묻어있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박태준 선생이 작곡하고, 이은상 선생이 작시한 동무생각의 가사를 통해서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청라라는 말은 푸른 담쟁이 넝쿨을 의미한다. 황무지와 같은 땅에 선교사들이 심은 청라가 무성했던가 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대구 경북 복음화의 산실이라는 점이다. 이 언덕은 대구선교의 3인방인 미북장로교 선교사 아담스(Rev. James E. Adams), 존슨(Dr. Woodbridge Odlin Johnson), 브루언(Rev. Henry M. Bruen) 등 세분이 남문 안에 있던 선교본부(현재 대구제일교회 역사관)를 이리로 옮겼고 이 분들이 언덕에 서서 대구읍성을 바라보며 “우리가 선 땅은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이레의 땅(Jehovah-jireh)” 이라고 하였고 브루언 선교사는 대구 읍성을 바라보며 “다윗의 망대가 서있는 예루살렘 같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 분들에 의해 대구를 중심한 영남지방에 교회가 설립되고 서양식 병원과 학교가 세워지는 등 한국 개화기를 이끌어간 선구자들이라 하겠다.
대구의 개화기를 이끌어간 유적지를 다시 생각하였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한국 토착화를 위해서 토대가 된 건물과 그분들의 역사를 생각하며 오늘 근대적 병원과 학교와 건축물의 양식을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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