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대구읍성(大邱邑城) 성터길 걷기 II

profkim 2021. 1. 14. 14:14

                        대구읍성(大邱邑城) 성터길 걷기 II

 

 

대구약령시 서문(남성로와 서성로가 만나는 곳)

  대구읍성 성터길 걷기 II는 서성로와 북성로 걷기 기록이다. 지도의 ②→③→④가 된다. 지도에서 ②↔③이 서성로, ③↔④가 북성로 이며, 서성로 남쪽 끝과 서성로가 만나는 지점의 약령서문(藥令西門)이 있는 곳에서 걷기 시작하였다. 서성로에는 대구읍성의 서대문인 달서문(達西門)서소문(西小門)이 있었고 망루로는 서장대(주숭루, 실제 존재하는 곳은 남성로 서쪽 끝자락에 있었다.)가 있었던 곳이다. 북성로에는 읍성의 북대문인 공북문(拱北門)이 있었고 망루로는 북장대(만경루)가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대구읍성 지도

  나는 서성로로 접어들었다. 바로 국채보상로를 만났다. 국채보상로 동쪽으로 나아가면 동성로를 만나고 이를 지나서 국채보상공원을 만나게 된다. 개화기에 일제의 대항하여 국채를 변제하겠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19072월 서상돈, 김광제, 박해령 등 16명이 대구에서 조직한 국채보상기성회는 곧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언론기관이 자금모집에 적극 참여했으며 큰 운동이 전개되었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서 이에 호응했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말까지 보상금을 낸 사람은 4만여 명이고, 5월말까지 230만 원 이상이 거두어졌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운동이 중단되었다.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아 IMF 금융위기 때 금모으기운동을 하였다. 이런 역사적 민족운동을 회상하면서 대로를 건넜다.

 

  서성로만 4차선 도로이고 남성로, 북성로, 동성로는 도로 폭이 좁다. 서성로는 중앙분리대를 옛 성벽의 모형으로 재현했다. 서성로는 그리 길지 않다. 북성로로 가는 길에 경상감영길을 만난다. 이곳이 대구읍성의 서대문인 달서문(達西門)이 있던 자리이다. 현재는 이 자리가 재개발아파트를 건축하고 있어서 지표석(地表石) 마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대구읍성의 서대문인 달서문 지표석

 

  달서문과 진동문을 연결하는 길이 경상감영길이고 이는 지도에서 ⓑ↔ⓔ를 연결한길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경상감영길을 따라가면 대구중부경찰서, 대구우체국, 대구근대역사관(일제강점기에는 식산은행, 광복 후에는 산업은행 건물로 쓰였다.), 이 역사관 북쪽에 경상감영이 있고, 중앙로를 지나 조금 더 가면 대구읍성의 동대문인 진동문(鎭東門)이 있던 자리를 만나게 된다.

 

  경상감영길 북쪽 대구우체국 건너편으로 경상감영이 앉아있다. 옛 모습을 재현하였고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아주 훌륭하다. 달서문 자리에서 동쪽으로 경상감영길을 바라보면 길 남편(南便)으로 옛 무영당 건물이 보인다.

 

 

무영당 건물(1937년 건립, 중앙 4층 건물)

 

  무영당 창업주 이근무(李根茂)1902년 생으로 무영당서점을 세운 건 21세 때인 1923년의 일이고 14년 뒤 1937년에 화려한 4층 사옥으로 증축된 백화점으로 변신했었다. 대구는 물론 경상도 일대에서 최초이고 유일한 백화점이었다고 본다. 당시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의 자본이 속속 유입되는 상황에서 이근무 사장은 한국 자본으로 백화점을 설립 경영했으니 우리가 이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근무 사장은 미국의 백화점 왕인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의 경영 방법을 도입해서 백화점 경영에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무영당 건물은 84년 전에 지어져서 지금은 많이 퇴락했지만 서성로를 걸으면서 이 건물을 볼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 이 건물은 지금 사용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많이 위험한 건물로 판단이 된 모양이다. 가능하다면 잘 수리해서 오래 보전이 되기를 바란다. 대구 근대역사에서 특히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백화점으로 성공한 경우이니 대구시가 잘 보전해야 된다고 본다.

 

  서성로를 북쪽으로 조금 걸어 내려와서 길 우편에 서문로교회를 만났다. 이 교회 서편이 대구의 서소문(西小門)이 있던 자리이다. 백성들은 대문(大門) 보다는 소문을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대문은 출입이 까다로웠는데 비해 소문은 좀 쉬웠던 것 같다.

 

서문로교회 안내판 밑에 초라하게 서있는 대구읍성 서소문 지표석

 

  서성로 길은 사실 별로 길지가 않다. 국체보상로에서 경상감영길을 지나 북성로에 이르면 끝이다. 서성로는 1950, 60년대 깡통골목으로 통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에 미제 깡통이나 드럼통을 이용한 제품들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이런 별칭을 듣기도 했고 1978년경부터는 보일러 상(), 철물상, 함석상 등 다양한 상가가 형성되었다. 서성로 주변으로는 돼지 골목이 유명했다. 순대, 족발, 돼지국밥 등 푸짐하게 식사할 수 있었던 골목이기도 하다. 오래전 이곳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북성로로 접어들었다.

 

 

일제 강점기 번화했던 북성로의 모습(자료출처: 대구광역시 길거리 홍보자료)

 

  서성로와 북성로가 만나는 지점에 대구읍성 망루 북장대(망경루)가 있던 곳이다.

북성로는 현재 공구(工具)상들이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 대구의 번화가는 북성로 이었다, 북성로에는 북대문인 공북문(拱北門)이 있었고 일인들이 세운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이 있었다. 철도가 부설된 후에는 대구역하고 인접해 있어서 대구의 번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북성로 북쪽에 근접해서 대구역으로부터 순종황제남순행로가 열려있어서 대구시는 이를 골목투어의 한 코스로 하고 있다. 역사의 길로 의미가 있다. 이 순행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일이니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의 힘없는 순행이었을 것이다. 골목 벽면에 마지막 고종황제 가계도 같은 것이 있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적 의미를 새기게 한다.

 

  공구(工具)상들이 있는 북성로 동쪽으로 걸어서 나아가니 남북으로 열린 길 종로통을 만났다. 종로길은 남북으로 열려서 북성로에서 종로 길 남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남성로를 만나게 되는데 그 곳에서 대구의 제일 관문인 남대문 즉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을 만나게 된다. 지도에서 ⓐ↔ⓓ사이에 종로길이 열려있고 가 공북문이 있었던 곳이고 가 영남제일관이 서있었던 곳 이다. 종로길을 북성로에서 남쪽으로 향해 나아가면 대구근대역사관, 대구중부경찰서, 만경관 극장, 화교학교 등을 만나게 된다. 나는 여기서 잠시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대구근대역사관(일본강점기는 식산은행, 광복후 산업은행 건물)

 

  북성로와 종로가 만나는 곳에서 종로길 남쪽으로 1, 20m되는 곳에 경북인쇄소가 있었다. 한강 이남에서 제일 큰 인쇄소 이였다. 1950년대 활판인쇄를 하던 시절 나는 이곳을 꾀나 드나들었다. 1980년대까지도 무척 활발한 인쇄소였다. 신문도 만들고 논문집도 만들고, 책도 만들었다. 직원도 200명이 넘었고 시설도 꾀나 컸었다.

 

  경북인쇄소는 활판인쇄를 하던 시절 꾀나 유명했었다. 활자주조공, 문선공, 조판공의 손길을 거쳐서 지형을 뜨고 납을 부어 인쇄기에 걸어 인쇄를 하는 요사이 기술에 비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공이 들던 인쇄이다. 요사이 클릭한번이면 조판이 바뀌는 시절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과정이다.

 

  컴퓨터 전산인쇄에 밀려 활판인쇄는 다 사라지고 이에 변신을 못한 인쇄소는 문을 닫아야했다. 지금 옛날 경북인쇄소 자리에는 현대전산인쇄 라는 조그마한 회사가 있어서 인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종로를 바라보며 수십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자리에서 동쪽으로 20m 거리에 대구의 북대문인 공북문(拱北門) 자리에 섰다. 이문으로 서울로 보내는 공문이며, 공물들을 보내는 임금님 계신 곳으로 나가는 문이다. 지금은 상가 옆에 조그마한 지표석(地表石) 하나가 여기가 공북문 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대구읍성의 북대문인 공북문 지표석

 

  이 지표석에서 동쪽으로 5,60m 나가면 백화점 미나까이(三中井)가 있던 곳이 된다. 미나까이는 우리에게 아픈 상처로 기억되는 곳이다. 북성로는 일본 강점기에 무척이나 번화했다고 한다. 일인들의 자본으로 세운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이 북성로에 있어서 활기를 띄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나까이(三中井, 중구 북성로163번지)는 일인 4(中江五郎乎, 中村雷次郞, 中村平四郎, 奧井和平)이 합작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이름에서 글자를 모아 지은 이름이다. 1905년에 북성로에서 시작된 생활필수품의 도소매와 고리대금업까지 겸하고 대구상가를 주도했는데 그들의 상품은 모두 일본제품 이었으며 고객도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극소수의 특권층이 출입했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은 사업의 본체를 서울로 옳겨서 전국 주요 도시에 대리점을 두는 한편 만주까지 확장했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 한국 강점 후 한국 수탈의 매체역할을 한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한국전쟁 중에는 군사시설로 민사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고 건물은 5층이었으며 미나까이(三中井<삼중정> 건물은 1985년 대우건설에 넘어가 그해 건물은 철거되었다. 현재는 그 자리에 공영주차장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일인들 백화점 미나까이 자리에 세워진 대구시 공영주차장

 

  이 미나까이 자리 건너편으로는 지금 한 참 아파트 개발 중에 있다. 현대건설이 아파트를 건축하고 있어서 옛날 모습은 보기 어렵다. 상당히 넓은 땅이 개발되고 있어서 북성로는 소음이 심하고 먼지가 많다.

 

 

대구시가 건립한 대구읍성 조형물

 

  미나까이 자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중앙로를 만난다. 중앙로는 대구의 남북을 관통하는 도로이다. 대구의 중심이 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상권이 분산되어서 옛날의 영화(榮華)는 볼 수 없다. 중앙로와 북성로가 만나는 네거리 북동쪽 모서리에 대구읍성 조형물이 설치되어서 옛 모습을 가늠하게 한다.

 

대구읍성 조형물에 게시된 조선시대 대구읍성 옛날 지도(동판)

 

  이 조형물은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연구 준비하여 20179월에 조성된 것으로 옛 읍성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대구읍성의 축조연대, 시대상, 대구읍성의 성문 등을 소개하였고 영상물(19201930)도 제작하여 대구읍성을 소개하고 있다.

 

 서성로와 북성로의 옛날 모습들을 회상하며 걸었다. 성벽이 있던 곳이 길이되었고 그 길에는 수많은 사연이 싸여있었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사연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여기까지 걸으며 성문과 망루 자리를 확인하고 그 곳에 지표석이 서있음을 확인하고 사진으로 제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