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북촌(北村)의 문화
서울 북촌은 두 대궐(경복궁과 창덕궁)사이에 위치하고 조선조 시대에 반가(班家)가 많았던 서울 백성의 삶의 터전이었다. 자연히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생활양식이 전래(傳來)되어 문화를 형성하여 살아왔다. 물론 그때 생활양식과 지금과는 동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북촌을 중심으로 하여 19세기, 20세기 초의 문화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왕성히 일어나고 있다.
문화는 삶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에서 발전해 왔고 다른 면에서는 삶을 지배하는 정신세계에서 사상, 종교, 정치, 문학, 회화, 음악 등에서 발전해 왔다. 문화는 북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한 생활양식(生活樣式)일 것이고, 그 내용은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왔고, 세월이 흐를수록 많은 내용이 축적되어서 풍부해 졌을 것이다.
문화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계속 변형되어왔다. 그래서 100년 전의 문화를 오늘 사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100년 전의 문화의 연속 선상에서 오늘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100년 전의 문물을 오늘의 사람이 보면 낯선 것이겠지, 그래서 그 시절의 것들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문화는 총체성을 지닌다. 그 시대의 모든 요소가 종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서울 북촌에는 헌법재판소 건너편에 한식문화 공간(서울 종로구 북촌로 18, 02-6320-8488)이 있고 이곳에 한식진흥원, 식품명인체험홍보관, 전통주 갤러리, 농림축산 식품부 등이 있어서 전시(展示)도 하고 교육(敎育)도 하고 체험(體驗)도 하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일 층에는 cafe도 있어서 차도 한잔 들면서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어서 편안했다.
북촌 한옥 관광의 출발점에 북촌문화센터(이 건물은 등록문화재 229호, 민재 무관(武官) 댁, 또는 계동 마님 댁으로 불렸던 한옥, 계동길 37, 02-2133-1371)가 있어서 문화관광을 안내하지만, 이 건물 자체가 서울 중구 계동 근대한옥으로 문화재이다.
북촌문화센터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우측에 북촌 한옥역사관(서울 종로구 계동4길 3, 02-747-8630)을 만난다. 이 한옥은 작은 집이다. 1920~1930녀대 정세권이 지은 소형 한옥을 조명한다. 이 건물은 이때 지은 서민형 한옥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중앙고등학교가 나오고 여기서 서쪽으로 접어들면서 바로 남서방 골목길로 들어서서 조금 올라가면 북촌 한옥청(韓屋聽, Bukchon Hanok Hall, 서울 종로구 북촌로12길 29-1)을 만난다. 이 건물도 1920년대 서민주택으로 지어진 한옥인데 좀 규모가 큰 편이다. 언덕 위에 있어서 낮은 쪽으로 지어진 한옥의 지붕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이 건물에는 조선조 말기 즉 개화기의 의상과 모자, 뽈기, 처네, 장옷 같은 것이 전시되어 있어서 옛것의 재현 현장으로도 의미가 있다. 여기 전시된 조상의 지혜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 전시된 것은 오늘 거의 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 당시 상황에서 이런 옷이나 방한용품을 만들어 썼기 때문에 그때 상황과 오늘의 상황을 대비해서 이해한다면 그 맥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이 보기로 한다.
처네는 조선 후기 서민층 부녀자들이 방한(防寒)을 겸하여 쓰던 쓰개이다. 작은 치마와 같이 생겼고 위에 동정을 달아서 이를 이마 위에 쓰고 끈을 뒤로 매어 늘이고 속에서 손으로 앞을 여미게 된다. 겉감은 밝은 자주나 다홍색을 주로 쓰고 안감은 연두색이나 초록색을 주로 썼다고한다.
휘항과 조바위
휘황 큰 것은 어깨와 등도 덮을 수 있고 작은 것은 뒤통수와 목을 감싸는 것으로 겉은 비단으로 안은 털로 만든다. 주로 군인과 노인이 썼다고 한다.
조바위는 여성과 여아의 쓰개로 귀와 뺨을 가려주는 것이다. 정수리 부분은 열려있다. 여러 가지 문자나 꽃문양으로 장식하여 멋을 낸다.
뽈기는 볼과 턱을 감싸는 방한구로 주로 서민층의 어린이나 노인층에서 쓰던 것이다. 겉은 주로 남색이나 자주색 비단으로 하고 안쪽은 털을 받혀 만들었다. 뽈기는 턱 밑에서 위로 올려 끝에 달린 끈을 정수리에서 매게 된다. 노인들은 이 위에 남바위를 덧쓰기도 한다.
남바위라는 명칭은 1900년대 이후에 사용되었다. 제주도 남자들의 방한모로 사용한 기록이 있다. 뒤를 목덜미까지 길게 늘여서 만들고 술(鶐)을 달고 여러 가지 장식도 달아서 멋을 냈다고 한다.
굴레는 돌맞이 아이가 많이 써서 “돌 모자” 라고도 한다. 이 모자는 계절과 지방에 따라서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 같다.
장옷은 장의(長衣)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겉옷인데 남녀가 다 같(共)이 썼는데 후기에 여자가 주로 썼던 모양이다. 두루마기라 할 수 있겠다.
족두리는 고려조부터 사용해왔는데 몽골 귀부인의 관모(冠帽)였고 미적 부분에서 기능이 강화되어서 부녀자들의 예복용 관모로 사용되었다.
한옥청에서 언덕을 내려오면서 한옥이 즐비하게 서 있고 이 길에서 전통발효 공방, 색실 문양 누비 공방, 매듭 공방 등을 만나고 북촌로(北村路)를 건너면 북촌박물관(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39, 02-766-8402)을 만난다. 이 장소는 옛날 손병희(孫秉熙, 1861년 4월 8일~1922년 5월 19일) 선생 고택(故宅) 자리이다.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삼일운동 33인 대표 이 셨다. 이 자리에 북촌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던 가구가 전시되고 있었다. 우리에게 잊혀가고 있는 물건들이다. 그래서 몇 점을 소개하여 같이 옛것을 음미해보고자 한다.
고비(letter rack), 경상(經床)과 서안(書案)
경상은 선비들이 서책(書冊)을 올려놓고 글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는 책상이다. 초기에는 서안(書案)이라 불렸고 위가 일직선으로 간결한 모양이었는데, 발전하여 양쪽 끝을 살짝 올려서 귀가 생기고 다리를 호랑이 다리 모양으로 하고 서랍도 넣어서 문서나 물건을 보관하기도 한다. 모양과 기능은 다양해 졌고 오늘도 많이 쓰이고 있다.
고비는 편지통이다. 편지통이 이렇게 긴 것을 보면 당시의 편지의 크기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궁중에서 쓰던 경상은 자개를 넣어서 모양을 내고 좀 더 호화로웠다.
책장(冊欌)은 마치 장롱처럼 생겼다. 근래에 쓰던 캐비닛 장 비슷하다. 당시 서책은 꽂아놓는 형태가 아니고 뉘어서 쌓아 놓는 형태이기 때문에 장에 선반을 몇 개 만들어서 서책을 얹어 놓았던 가구이다.
각게수리는 금고(金庫)이다. 여닫이 문안에 서랍을 여러 칸 만들어서 화폐나 문서를 서랍에 보관하였다.
머리맡에 둔다고 하여 머릿장으로 불린 것 같다. 2층 장이나 3층 장을 만들어서 옷이나 물건을 넣어두고 쓰던 장이다. 여러 가지 장식을 하여 아름답게 만들고 자개 등을 박아서 치장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중년 이상은 이런 장을 보았을 것이다. 요사이는 보기 어렵지만 흔한 장이었다.
반닫이의 기능도 머릿장과 유사했다. 다만 반닫이 위에는 이불이나 물건을 얹어두었다.
궤(櫃)는 물건을 넣어 보관하는 궤짝이다. 이런 궤는 우리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이런 물건들을 선조(先祖)들이 쓰며 살아왔는데 우리는 이 당시에 사회상을 이해하는 자료로 이해하면 좋겠다. 오늘은 이런 역사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산물이다. 역사를 잃으면 미래가 없다고 한다. 과거는 우리의 나아갈 길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2월 28일(화)
Ⓒ 2023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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