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영친왕비(英親王妃) 이방자 회장 회상
내가 일본 대학에 자료를 구하려고 잠시 가서 있을 때의 일이다. 1967년 12월 일본 고오베(神戶)에서 이방자 회장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그때 대구대학교와 교분이 있으신 교포댁에 숙식하고 있었는데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 집주인 되시는 분이 내 손을 덥석 잡더니 “김 선생님이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갑자기 주인이 손을 잡고 이런 말을 하니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었다.
“김 선생님! 이방자 비 전하(妃 殿下)에게서 김 선생께 편지가 왔어요.” “이방자가 누굽니까?” “아! 이거 한국 사람도 아니고만” 하고 영친왕 비를 소개해 주었다. 주인의 말을 듣고 나니 영친왕, 이방자 비전하 등 어렴풋이 회상되는 동시 무척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 주인이 정갈스러운 차상(茶床)을 내오더니 그 위에 편지를 올려 놓고 큰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편지내용은 네가 특수교육을 연구하고 있다는데 열심히 해서 한국 특수교육을 빛내라는 격려의 말씀이었고, 귀국하면 한번 계시는 곳에 들러 달라는 당부이셨다. 이 편지로 인해서 이방자 회장과 나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방자(李方子; 1901-1989) 회장은 일본 황실의 일원이시고 또 조선조 말기의 불행했던 시절 정략적으로 영친왕(英親王)의 비가 되셔서 어떻게 보면 매우 불행한 한평생이셨는지 모른다. 또 우리나라에서도 그 누가 달갑게 생각했겠는가! 광복 즉시 영친왕께서 귀국하시지도 못하고 5․16 이후 군사정권 하에서 귀국하셨으나 그때 영친왕께서는 거의 병원 신세를 지시게 된 때이니 얼마나 세상이 원망스러웠겠는가. 이때 이방자 회장은 지극한 정성으로 영친왕을 간호하시고 또 자기 일도 하셔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본다.
이방자 회장은 금지옥엽(金枝玉葉)과 같은 분이셨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서민적이고 또 농담도 잘하시고 아주 근검절약(勤儉節約)하시는 분이셨다. 자신의 생활은 최소로 하시면서, 지적장애인(정신지체)과 지체부자유인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고 수입금 대부분을 이들을 위해 쓰셨다.
이방자 회장은 일본의 황족으로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1897-1970, 고종황제와 엄 황귀비 사이에 태어난 왕자)과 1920년 결혼하여 한국 황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 귀국하시게 되었고 국적을 회복하셨다. 귀국 후 그의 삶은 넉넉하고 호화로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극히 검소하시고 자신을 위해서는 별로 하신 것이 없으신 것 같다. 이방자 회장은 한국의 장애인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귀국과 동시에 자행회(慈行會)를 조직하셨고 1965년 이를 사단법인으로 만드시고 초대회장이 되셔서 일을 시작하셨다. 1968년 재단법인으로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하시고 초대 이사장이 되셨다.
자행회는 1973년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게 되고, 명휘원은 1981년 명혜학교(明惠學校)를 설립하였다. 이 두 학교가 설립되기 전 이미 수년 전부터 아동센터 또는 기술교육센터로 장애아 교육기관을 운영하셨고, 이를 바탕으로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이들 학교의 설립은 요사이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가 아니다. 이 당시 학부모는 그들의 자녀를 보낼 학교가 절대 부족하던 때이기에 이방자 회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자행회는 계몽 서적 발간, 연구논문 발행, 연수회 및 논문 발표회 개최 등 갖가지 사업을 하였고 그런 활동이 우리나라 정신지체인 교육과 지위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나는 7, 80년대 이런 자행회 일에 많이 참여하여 자행회와 깊은 유대를 갖고 지내왔었다. 그때 내가 저작한 책 "지능발달이 늦은 아동"(1977년)은 계몽 서적으로 또 자료가 부족하던 시절 우리나라의 지적장애 교육의 정보를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혜학교가 학교로 인가받기 전에 동교동 학습센터를 운영하셨는데 이때 이춘섭 선생이 많이 도왔고 그 뒤에 이춘섭 선생은 자혜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분이 얼굴이 까만 편이어서 회장님께 자주 필리핀인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방자 회장님 엄지손톱이 길이보다 넓이가 더 넓은 ‘누에 손톱’인데 이춘섭 교장도 그렇고 나도 그래서 세 사람이 공통점이 있다고 삼총사라고 농담하실 정도로 여유가 있고 서민적이셨다.
자혜학교를 인가받고 수원 탑동에 학교건물을 짓는 과정에 나는 대구대 학생 30여 명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가서 학교건물 건축하는 일에 보탬이 됐던 일이 생각난다. 그 당시 학교 근처는 아직 지반 조성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자혜학교 옆에 있는 푸른 지대(green zone)에 왕래하는 작은 도로가 있을 뿐이었다. 탑동에 학교를 건축할 당시 사회 상황이 어렵고 모든 것이 힘들었을 때였다. 그 여름은 무척 더웠을 뿐 아니라 여건이 나빠서 이춘섭 교장 등 초기 교사들의 노고가 무척 컸었다.
지적장애 교육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에 수원에 이런 학교를 세웠다는 것은 우리나라 특수교육 발전에 자극제였으며, 지적장애 학생이 갈 곳 없던 시절 그들 부모의 큰 짐을 덜어 준 것이다. 이방자 회장의 선견(先見)과 일을 추진하시는 능력과 노력이 없었다면 어찌 이 일이 가능했겠는가? 당시 우리나라의 지적장애학교는 대구보명학교(1967년 설립), 대구남양학교(1968년 공립으로 설립), 서울명수학교(1968년 설립), 서울해인학교(1970년 설립), 서울인강학교(1971년 설립), 안동영명학교(1971년 설립) 등이 다였다. 그러니 학교가 절대로 부족했던 때이다.
대구대학교 이태영 총장과 내가 1978년 초여름 창덕궁(昌德宮) 낙선제(樂善齋) 가든파티에 초청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자행회 총무 일을 보고 계셨던 종친이신 이창렬 선생이 나를 따로 보자고 하더니 회장님 말씀이라면서 자혜학교 교장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사실 교장을 하고 싶은 사람도 많고 가벼이 추천할 만한 사람도 상당히 있었다. 그러나 이방자 회장의 고매한 정신이 깃든 학교에 아무나 선뜻 추천할 수가 없었다. 이방자 회장의 이상을 구현하되 적극적이고 힘차게 발전시킬 사람이어야 했다.
무척 고민하다가 당시 대구 남양학교 교장으로 계셨던 김동극 교장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김동극 교장은 대구남양학교 창설 교장이시고 11년이나 남양학교 교장을 하셨고 교육장 물망에 올라 곧 발령이 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나와 이태영 총장, 김학수 교수 등이 극구 권했으나 김동극 교장으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노이로제 증상까지 나타났으나 끝내 용단을 내어 이동하시게 되었고 그 결과는 자혜학교나 김 교장 모두에게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방자 회장은 서예, 그림, 칠보 등에 달인(達人) 이셨다. 많은 제자를 기르시고, 작품 전시회도 가지시고 아주 활발한 활동을 하신 분인데 이런 활동을 통해서 얻은 수익금은 모두 장애인을 위해 쓰셨다. 만일 이 회장께서 평생을 창경궁 낙선재(樂善齋)에서 평안히 여생을 보내셨다면 그분의 마음속은 텅 비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로는 이방자 회장께서는 자신의 삶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가신 분이라 생각된다.
이방자 회장은 자신의 노쇠와 사후의 문제를 고려하여 자혜학교 운영을 여러 가지로 고려하셨는데 계속 자행회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 하셨다.
명휘원(1968년 설립)을 통해 지체부자유 인의 직업 교육을 수행하시고 여기서 명혜학교가 설립(1981년)됨으로 지체부자유 인의 요람이 되었다. 이방자 회장은 자혜학교보다는 명혜학교에 더 많이 심혈을 기울이셨다고 보인다. 노후에 이방자 회장은 이 기관을 잘 운영할 사람을 찾던 중 1985년 가톨릭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 운영을 넘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시어 미련 없이 넘기셨으니 이방자 회장은 오로지 장애인의 복지와 재활을 생각하신 것이지 소유에 대한 개념은 없으셨다.
이방자 회장의 고매하신 인품과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적 봉사에 대하여 아무것도 우리가 보답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태영 총장님과 상의하여 대구대학교에서 1978년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 일로 나는 조그마한 위안을 받았지만, 이방자 회장이 우리나라 장애인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일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또 장애인을 사랑하신 분으로 다정다감하시고 인간미가 넘치신 분이다. 왕족으로 고대광실(高大廣室)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사교계나 누비셨다면 오늘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皇太子妃)로서 보다는 장애인의 어머니로, 사랑의 사도로, 극히 서민적 검소한 생활을 하셨던 이방자 회장을 나는 기리는 것이다. 그 복된 이름 위에 영광과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 있으시길 기원한다.
2023년 3월 3일(금)
Ⓒ 2023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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