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20. 영광학원의 건학이념 2: 건학이념과 교훈
<이 원고는 “이영식 목사의 생애와 건학이념”(김정권, 황용수, 이근민, 이근용, 2023. 굿에드북)에 실은 내용 중 영광학원 건학이념 부분의 내용이다. 책의 제2부가 영광학원 건학이념인데 특히 이영식 목사의 사상과 건학이념을 다루었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이영식 목사의 사상에서 연유했기에 건학이념을 다루기 전에 이영식 목사의 사상을 다루고 이어서 영광학원 건학이념을 다루어서 영광학원 산하의 모든 교육기관에서 학원 건학이념에 충실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안내를 하고자 한다. 기독교 정신에 의해 설립된 학교이고 이 학원에서 교육받는 사람은 만인 평등의 복지사회를 이루는 역군이 되기를 바란다. 이 원고는 두 번에 나누어 게재하는데 첫째, “이영식 목사의 사상” 둘째는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으로 하겠다.>
가. 영광학원(榮光學園)의 건학이념
1, 건학이념의 개관
1) 건학이념의 뜻
영광학원(榮光學園)은 1946년 이영식 목사가 설립한 학교법인이다. 영광학원의 건학(建學)이념(理念)은 “사랑, 빛, 자유”다. 이런 건학이념을 기반으로 설립된 대구대학교와 대구사이버대학교 그리고 7곳의 특수학교가 학원 산하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946년 대구광명학교와 대구영화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56년 대구대학교, 1967년 대구보명학교와 대구보건학교, 1982년 대구덕희학교와 영천 영광학교, 1987년 포항 명도학교, 2002년 대구사이버대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르는 정신세계의 기본 틀에 근거하는 것이다. 영광학원의 건학(建學)이념(理念) “사랑, 빛, 자유”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도식(圖式)으로 먼저 설명하려 한다.
* 우측 끝이 추구하려는 이상(理想)
건학이념을 “사랑, 빛, 자유”라 하면 사랑의 뿌리가 믿음이 됨을 가정(假定)해야 한다. 또, 자유가 이루려는 사회적 가치를 환희 또는 기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도식은 이를 바탕으로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을 확장한 구조(믿음→사랑→빛→자유→환희)를 제시한 것이다.
건학이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초와 촛불을 예시(例示) 현상(現象)으로 삼아 기술하였다. 사랑을 촛불에 비유하면, 그 촛불은 ‘초’의 존재를 전제(前提)한다. 사랑에 해당하는 ‘촛불’은 빛을 발산하니 그다음은 ‘빛’이다. 빛이 있는 곳에 ‘자유’ 함이 있다. 이 넷은 하나의 현상이 서로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또, 이 현상들은 동시에 발생한다. 자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일까. 자유는 개인이 누리는 것이기도 하고, 이 자유를 통해 환희의 세상을 이룬다. 결국, 환희는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다.
건학이념이란 사람을 기르는 궁극의 목적이다. 건학이념의 구현으로 영광학원이 기르려는 인간상을 “자기실현인(自己實現人)”으로 본다면, 개인의 자기(self) 형성을 “자신(自信)→자애(自愛)→자존(自尊)→자유(自由)→환희(歡喜)”로 볼 수 있다. 자기실현인의 특성을 (자신→독창성)→(자애→열정)→(자존→창의성)→(해방→포부)→(지성→봉사)로 보았다.
건학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통해 이루려는 이상(理想)은 이지(理智)적 인재를 길러내고, 궁극에는 행복한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홍익인간의 이상과 같이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복지사회의 건설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2) 건학이념에서 기르려는 인간상
초를 예시(例示)자료로 건학이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 우측 끝이 추구하려는 이상(理想)
여기 초 한 자루가 있다. 누가 이 초에 불을 붙일 수 있을까. 그 사람에게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 초에 불을 댕길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심지에 불을 댕기면 초가 탄다.”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초에 불을 붙일 수 없다. 믿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아야 한다.
초에 불을 붙이면 초는 타며 발광(發光)한다. 이때 비로소 초의 존재가 나타나고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불꽃은 믿음에서 오는 사랑과 같은 것이다. 그 속에는 열정, 뜨거움, 자기실현의 힘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명제(命題)를 해결해야 한다. 이 초는 누구를 위하여 타는가. 사람을 위해 탄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초는 다만 자신을 위하여 불탄다. 왜 그럴까. 초는 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초가 타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자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는 사람도 보았다. 이는 허구다. 사람은 자기 삶의 실존적 목적을 깨닫고 충실히 행할 때, 비로소 가장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정신적 가치에서 믿음이란 기반시설(infra-structure)이고 사랑은 그 기반시설의 기능(infra-function)이다. 그래서 사랑 안에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다만, 사랑이 믿음의 기능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 믿음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은 허상(虛像)일 뿐이다. 사랑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공허(空虛)에 불과하다. 이 둘의 관계는 고속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다. 길이 없는데 자동차가 달린다면 이는 허상(虛像)이고, 길은 있는데 달리는 자동차가 없으면 이는 공허(空虛)라 할 수 있다.
촛불은 빛을 발한다. 이 발광이 초의 존재를 확인하게 한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빛을 수반한다. 초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고, 어둠을 밝히고, 흑암의 세계를 광명의 세계로 전환시킨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선교사로 이 땅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은 목숨 걸고 이 오지(奧地) 한국에 왔다. 감리교 선교사였던 홀 부부의 사랑은 어둠 속에서 살던 한국 사람들에게 빛을 주었다.
홀(Dr. 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여사는 이 땅에 여자의학교(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세웠다. 박 에스더를 미국에 유학시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료인을 길러냈다. 평양에서는 맹인과 농아인을 위한 특수교육을 시작했다. 오복래(내)와 조배녀를 일본 동경맹학교 사범과에 유학을 보내 우리나라 최초의 맹(盲) 교사가 되게 하였다.
홀 여사와 그의 아들 셔우드 홀 박사(Dr. Sherwood Hall)는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 발매 등 결핵 퇴치 운동을 벌여 이 땅에 밝은 빛을 비추었다. 이들을 통해 한국인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 특수교육의 연원도 홀 여사의 평양맹학교 설립에서 찾는다. 이런 빛이 인도하는 활동과 신교육을 통해 한국인이 새로운 세계로 나가게 되었다.
이영식 목사의 사람 사랑은 어떠하였는가. 그는 맹아와 농아를 교육하여 어엿한 사회인으로 길러냈다. 위축된 삶에서 벗어나 자존하며 살아가게 했다. 열린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빛은 맹인과 농인을 자유롭게 했다. 한센병 환자의 형제로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그들에게도 빛을 비추었으니, 이들이 자유하게 되지 않았는가. 또, 교도소 수감자의 친구로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빛으로 인도했다.
빛에 거하는 사람은 자유롭다. 빛은 사람에게서 행위의 부자유를 없애고 행동을 자유롭게 한다. 빛에 거하면, 어떠한 두려움도, 좌절도, 근심·걱정도 없다. 몸이 밝음에 거하면 행동의 자유가 있을 것이고, 마음이 빛에 거하면 사고(思考)의 막힘이나 심적 갈등(葛藤)은 사라질 것이다.
믿음에서 불꽃 같은 열정, 곧 사랑이 생긴다. 사랑이 발산하는 빛은 밝음을 준다. 밝음 속에는 자유가 있다. 오랫동안 어둠에 거한 사람에게 빛을 준다는 것은 행동을 자유롭게도 하지만, 정신세계에 환희를 주는 것이 더 크다. “믿음→사랑→빛→자유→환희”는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니 따로 떼어서 볼 수는 없다.
초를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을 정리한다. 초가 탈 수 있다는 믿음이 초에 불을 붙이게 하고, 초에 붙은 불이 빛을 발하여 밝음이 있게 되고, 그 밝음은 사람에게 행동의 자유로움과 마음의 편안함과 기쁨을 준다. 물리적 현상을 예로 들었지만, 이는 인간의 정신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물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은 겉보기에 그 모습은 다를지라도, 그 이면의 원리는 물리(物理)와 심리(心理)가 상통한다.
3) 건학이념이 기르려는 인간상과 행동 특성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이 이루려는 교육을 통해 기르려는 인간상과 그의 행동 특성을 아래의 그림에서 살펴보자.
* 우측 끝이 추구하려는 이상(理想)
한 사람이 존재한다. 이 사람은 인류 역사에 단 한 번 왔다가는 유일(unique)한 존재이고 개별존재(individual)다. 유일성은 자연현상에서 유일한 시공간적 존재이고 그만의 능력과 역할이 있음을 말한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존재다. 그래서 개인은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 사회와 교육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지지하고 지원(support)해야 한다.
사람은 타자와의 비교를 일절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독특한 개별존재임을 이해하여야 한다. 역사적 존재로서 자신(自身)에 대한 믿음(자신, 自信)]도 있어야 한다. 가정, 사회 그리고 교육환경 또한 그의 독특성과 그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부모, 교사, 친구들이 믿어줄 때, 그 사람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만의 세계, 독창(獨創)적 세계가 열린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스스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애(自愛)로 발전한다. 사랑하면 그 속에 불이 나고 열정(熱情)이 용솟음친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이때 우리의 눈빛도 달라지고, 걸음걸이도 달라지고, 말도 달라진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동은 생명력이 넘친다. 바로 이것이 불타는 열정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존경한다. 이를 자존(自尊, self esteem)이라 한다. 오늘날의 심리학은 자존을 건강한 품성과 창의성의 중요한 요소로 본다. 창의성에 영향을 미치는 제1의 요소는 사랑이다. 불타는 열정과 자존하는 품성은 미지의 신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애플(Apple)사의 창립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는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그는 우선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좌절했을 것이다. 그래서 실리콘 벨리를 떠나려 했지만, 떠날 수 없었다
잡스는 2005년 6월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저는 무언가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했던 일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플에서 겪은 좌절은 그런 제 열정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회사에서 쫓겨나기는 했어도, 저는 여전히 제 일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를 일으켜 세운 힘은 사랑이다. 사랑 안에 발산하는 빛이 있어 미래를 보게 한다. 잡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들어왔다. “보는 눈”과 비전, 이것이 오늘의 애플을 있게 한 힘이다.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간다.
자유, 해방, 포부(비전)는 하나로 보아도 좋다. 자유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자유로워야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다. 자존하는 사람은 자신을 구속하는 일체의 조건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종속변인(從屬變因)에서 독립변인(獨立變因)으로 바뀐 사람이다.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자신과 그 세계를 사랑하며,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자기 삶을 영위하고 학문을 한다. 참된 지성은 자유로움에서 온다. 어떠한 것이든, 형식이나, 율법이나, 규제나, 틀에 얽매이면, 참된 지성은 길러지지 않는다. 참된 지성은 순수한 자기실현이 가능할 때 길러질 것이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참된 지성의 소유자를 길러 행복한 세상을 만들려는 의도에서 제안되었을 것이다. 행복한 세상은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관조(觀照)하며 즐기는 삶에서 온다. 앞에서 이 사회 구성원 한 분을 초로 비유하여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을 설명했다.
자신이 자기를 믿고, 부모와 교사와 이웃이 그를 믿어 줄 때, 그는 불타는 촛불이 되고 그 촛불이 빛을 발하여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자유를 주어 편안함과 즐거움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것은 연쇄적일 수도 있고 동시적일 수도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초탈한 자기(독립변인으로서 자기)를 실현하는 이지적(理智的) 지성인(知性人)을 길러야 한다. 이렇게 길러진 품성을 통해 인류사회의 복지를 구현하는 행동능력을 갖추게 된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고 본다.
2. 믿음
믿음(信, faith)과 사랑(愛, love)은 추상명사다. 믿음과 사랑에 대한 관념의 세계에서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가 제각각 다를 것이다. 정의도 모두 다를 것이다. 그래서 해석도 모두 다르고 적용 역시 다를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의 관계다. 성경의 원리에서 보면 사랑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 했다(갈5:6). 그렇다면 믿음은 어떤 구체적인 행위인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원초적으로 믿음이 사랑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사랑이 없는 믿음은 무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네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전 13:2하)고 했다. 그러니까 믿음은 사랑으로 완성된다. 이것을 나무와 비교해보면,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는 나무, 즉 둥치, 가지, 잎, 꽃, 열매 등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나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뿌리는 믿음에, 눈에 보이는 나무는 사랑에 가늠해도 좋을 것이다. 이 둘이 합해져야 비로소 완전한 나무가 된다.
바울은 이어서 “네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네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13:3)고 하였다. 자신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내어준다면, 그보다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네게 “아무 유익이 없다.”라고 한 바울의 말씀은 모순이 아닐까. 사랑이 없더라도 자기 몸을 희생할 수 있다는 논리다. 사람의 어떤 행위는 사랑이 없어도 행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해득실을 따져 이득을 얻기 위해, 체면을 세우기 위해 등을 비롯한 많은 이유로 사랑이 없이도 어떤 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나무에 비유하면, 이것은 뿌리 없는 나무다. 이런 나무는 생명력이 없다. 곧 시들어 죽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일시적일 뿐 생명력이 없기에 곧 사라지고 만다. 사랑이 없는 행위란 곧 믿음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참사랑이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영속적이고 생명력이 있어 날이 더해질수록 점점 더 왕성해진다. 누룩과 같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나 겨자씨같이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에 큰 나무로 생장(生長)하는 것과 같다.
사랑은 믿음을 내포하고 있기에, 우리가 사랑이라 하면 믿음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믿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어떤 나무를 식물도감에서 설명한 것을 보면, 나무의 분류, 크기, 가지와 잎, 개화기 등은 소개한다. 그러나 뿌리에 관한 소개는 찾기 어렵다. 뿌리는 눈에 보이는 부분이 아니다. 이같이 사랑의 행위는 설명할 수 있지만 믿음은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뿌리 없는 나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믿음이 없는 행위는 설사 화려한 것이라 해도 죽은 것이다. 그것을 통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다. 믿음의 길을 세례 요한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잘 설명한다. 마태가 말하기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3:3; 사40:3). 주의 길은 예수님이 세상에 주실 “믿음의 길”이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사40:4)이라고 설명한다.
믿음의 길을 보면,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과 높은 언덕이 낮아져서 험한 곳이 평지가 된 길 즉 요새 말로 하면, 믿음의 길이란 산을 깎아내고 골짜기를 메워 낸 평탄한 길 즉 고속도로일 것이다. 믿음은 우리 삶의 고속도로라 할 수 있다. 산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고, 골짜기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쉬운 길인가. 고속도로는 기반시설(infra structure)이며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infra function)는 고속도로 있음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사랑이라는 자동차가 믿음이라는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자동차가 달리지 않는 고속도로, 고속도로가 없는데 달리는 자동차가 있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리라. 도로는 있는데 운행하는 차량이 없다면 이는 공허(空虛)한 것이다. 믿음은 있는데 사랑의 행위가 없는 것도 공허하다. 도로가 없는데 차량이 달리고 있다면 분명 허상(虛像)일 것이다. 이런 허상이 주변에 너무 많다. 생명력 없는 삶이니, 경계해야 마땅하다.
공허한 삶, 허상을 추구하는 삶은 인생의 실패작이다. 믿음과 사랑은 하나다. 나무뿌리와 눈에 보이는 둥치가 하나다. 평탄한 길 있음과 달리는 자동차 있음도 하나다. 사랑의 행위는 믿음에 터 해야 하고, 사랑의 실체(實體)는 믿음에서 찾아야 한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사랑, 빛 자유”다. “사랑”은 이미 그 안에 들어있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믿음은 나무의 뿌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도로와 같은 것이어서 차량이 달릴 때 비로소 길이 있음을 알게 된다.
3. 사랑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말씀하셨다. 성경의 기본이다. 길이 있으면 차나 사람이 통행해야 하고, 초가 있으면 불타야 하고, 나무뿌리에는 나무 둥치가 있어야 한다. 사랑은 행위로 나타난다. 다만. 그 근저의 정신 또는 영혼이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 있기에, 그 ‘마음의 산물’로 나타난 행위여야 한다.
고난주간 화요일 저녁때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어 재림을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간곡(懇曲)히 이르셨다. 이어 세 가지 알레고리(allegory)를 주셨다. 열 처녀 비유를 통해서 매일 성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매일 충성스럽게 자기를 개발하라는 메시지, 그리고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통하여 주님을 섬기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이 세 가지 가르침은 매일 성공하고 승리하는 삶, 매일 충실한 자기 개발, 사람을 통한 주님 섬김을 오늘 우리의 삶으로 이루라 하신 메시지다.
예수님이 주신 메시지는 우리에게 현재의 삶을 통해서 성화(聖化)된 삶을 이루라 하신 알레고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알레고리는 최후의 심판 비유다(마25:31-46). 이는 어마어마한 최후의 심판이 바로 오늘 하루 생활에서 결판난다는 은유(隱喩)의 말씀이다. 우리의 하루 삶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은 결정적이다. 이 알레고리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강화하신 걸까.
최후의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삶이 심판의 대상임을 이르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심판 주께서 오른편에 선 자들에게 이르신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 36).
오른편에 선 사람들은 도무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임금을 만난 일도 없고 그에게 대접한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한 일이 없다고 아뢰니, 임금은 그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하시며 영생에 들라 하셨다.
이 일은 오늘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이 곧 예수님이고, 임금이고, 심판 주이시다. 어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나에게 VVIP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 생애 최고의 귀빈 대접을 받으면, 그 사람이 곧 예수님이시고 임금이 될 것이다.
성배(聖杯, Holy Grail)라는 제목의 영화를 1960년대에 본 적이 있다. 기억에 남은 것은 별로 없지만, 마지막 장면만큼은 지금껏 기억이 생생하다. 유럽의 한 기사(騎士)가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쓰셨던 포도주잔, 곧 성배를 찾으려고 전 재산을 정리하여 떠났다. 성배는 찾지 못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돈도 다 떨어졌고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그런데 한 거지가 그의 앞에서 간절한 모습으로 구걸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단 한 끼 식사비밖에 없었던 그 기사가 생각하기를, 한 끼 먹고 죽으나 그냥 죽으나 매 한 가지니 너나 먹으라 하며 거지의 통(桶)속에 동전을 넣었다. 그 순간 그 거지의 통이 성배(聖杯)로, 거지는 예수님으로 바뀌었다는 픽션이다.
이 기사(騎士)는 성배를 찾아다녔다. 시간과 돈과 정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모든 것을 허비하고 돌아온 자기 집 동리에서다. 오늘 우리는 매일 만나는 사람이 예수님이고 임금이다. 내 이웃이, 내 직장 동료가, 나와 지하철을 같이 타고 가는 그 사람이, 내가 다니는 교회의 성도들이, 모임의 회원들이, 시장의 상인들이, 식당에서 봉사하는 직원이 곧 예수님이다. 그들이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우리의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그들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심령의 문제니, 심령이 바뀌면 행동은 뒤따라온다.
요즘 미국식당에 가면 팁을 20%나 지급해야 한다. 그전에는 10%로 충분했다. 물가도 오르고 팁도 오르니 식당 이용객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미국에 사는 지인(知人)이 아들과 같이 식당에 갔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팁을 15% 주려 하니 아들은 20% 주어야 한다고 이의제기했다. 아버지가 재차 이 정도도 된다 하였으나, 아들은 이렇게 할 거면 식당에 왜 왔느냐 라고 반문하여 어쩔 수 없이 아들 뜻을 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대 간 관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식당에 갔을 때 식당 종업원에 대한 자세다.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을 내가 최대한 정중하게 대한다면, 물질의 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자세가 우선 중요한 것이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이 왕이고 주님이라면, 존중과 사랑으로 그와 만남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런 자세로 공직을 수행하고, 장사하고, 가르치고, 기업 운영하고, 일하고, 소비한다면, 그가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심판이 무서워 이리해야겠다. 생각한다면, 그는 율법주의자일 뿐이다. 그러나 심령의 변화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산다면, 그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서 이루는 삶이다. 우리가 매일 암송하는 주기도문의 말씀, “나라가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짐” 을 실현하는 길은 바로 내가 만나는 사람을 VVIP로 맞이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은 타자를 위해 그리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삶이 즐겁고 행복할 것이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복되다. 이들은 천국 생활을 이미 세상에서 하는 것이다. 심령에 천국이 이루어진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 오는 세대 역시 가장 추구하는 것은 행복일 것이다. 물리적 환경을 통해 이를 이루려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이런 행복은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심령의 변화에서 오는 삶이다. 타자를 섬기고 나눔으로써 추구하는 행복은 그들의 심령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행복일 것이다.
오늘이 섬기고 나누어야 하는 날이다. 내일로 미루면 늦다. 매일 그렇게 살면 최후의 심판 날이 그 선상(線上)에 나타난다. 매일 나누고 섬기는 사람은 매일 행복하고 매일 즐겁게 살 것이다. 이런 사람의 심령에는 하늘나라가 이미 임하여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위한 일이다.
4. 빛
빛은 사랑의 불꽃에서 비추는 것이다. 사랑에는 빛이 있으니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2:10, 11).
요한은 말년에 빛에 관한 설교를 한다. 그 가르침은 빛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과 미워하는 자는 진리에 어둡고 방향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이 비추는 빛은 자신을 밝게 하고 타자를 밝음에 거하게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빛이라 하셨다(약1:7). 요한 사도 역시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1:5; 요9:5)라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이 큰 빛을 보고 사람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라 하였다. 이 빛은 흑암에 거하는 자들에게, 그늘진 곳에 거하는 자들에게 비추는 빛이다. 요한 사도가 이르기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한1서1:5).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이 땅에 오셨고 사람으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셨다(요12:46). 자신을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이라 말씀하셨다(요1:9). 이 빛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어 그들이 밝음에 거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라”(시27:1). 시편의 이 말씀은 이 빛을 받은 자는 빛의 사람이고 빛을 발하게 됨을 뜻한다. 빛 되신 예수님 안에서 빛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요12:36). 빛의 사람은 빛을 발해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하였다. 빛의 사람은 빛을 발하여 모든 사람이 그 빛 안에 거하게 할 책무가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4),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하셨다. 빛의 사명을 주신 것이다. 빛은 착한 행실(行實)에서 발산되는 것이니, 이 행실이 곧 사랑의 행위다.
“착한 행실”은 사랑의 행위이다. 이 행위에서 빛이 발산됨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에베소 5:8)고 강론한다. 이 강론의 요지는 빛의 자녀들에게 행함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빛은 사랑의 빛이고 사랑의 행위는 빛을 발산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고 강론한다. 빛의 자녀에게는 어떤 열매가 있게 되는바, 그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다. 빛에 거하는 사람은 이미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의 사람이니 사랑의 행위를 하라는 뜻이다. 빛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빛을 비추는 사람’을 기르는데 초점이 있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에서 빛의 사상은 그 산하 기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빛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빛을 비추려면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먼저 있어야 하고 빛은 사랑의 빛을 비추는 것이다. 빛을 왜 비추어야 하는가. 세상을 밝히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5. 자유
“참 빛”(요일2:8)이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빛의 아들이 되어(요12:36) 어둠에 있지 않는다(요12:46)고 하셨다. 어둠은 부자유고, 속박이고, 혼돈이고, 공허함이다. 어두움에 빛이 비추면 자유롭고, 해방되고, 질서가 세워지고, 충만하게 된다. 성경의 구원 사상은 어둠에 거하는 자들에게 밝음을 주고, 자유인이 되게 하고, 생명의 활력이 넘치게 하는 것이다. 빛과 자유와 생명은 동시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창조 전의 모습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면, 빛이 옴으로써 정연한 질서가 세워지고, 충만해지고, 어둠이 물러간다. 이때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 곧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열린다. 진정한 자유란 빛으로부터 온 자유다.
그래서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라고 한다. 주의 영은 사랑의 빛이기에 그곳에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영식 목사의 사상에서 자유는 이런 사랑의 빛에서 찾아야 한다.
자유인(自由人)이란 율법이나 세상의 어떠한 제도나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를 초탈한 사람이다. 이런 규율이 정하는 기준보다 더 상위의 가치관으로 율법을 실현하는 사람일 것이다. 자유는 율법을 초탈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freedom)는 자기 의지대로 행동(power to do)하는 자유를 말한다. 이런 자유는 모자람도 없고, 잘못됨도 없고, 지나침도 없는 행위로 연결된다. 이 자유는 믿음-사랑-빛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 안에 생명력이 있다. 그래서 사회적 규범이나 성경의 율법을 초탈한 행위이고, 이를 통해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런 자유로운 사람을 통해 사회의 생명력도 높아진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복지사회를 건설할 지성적 인재를 양성하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이영식 목사의 기독교 사상은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지성은 자유에서 나온다. 속박되지 않은 상황에서 참 지성이 길러지는 것이다.
6. 환희
자유의 열매는 환희다. 속박되었던 사람이 자유를 되찾았을 때, 그 환희는 형언(形言)하기 어려운 것이다. 정신적 흑암, 신체적 구속,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오는 기쁨은 어떤 것일까. 일제로부터 광복(光復)한 그 때에 우리 겨레는 어떤 환희를 느꼈을까.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환희, 기쁨과 같은 천국 생활을 이루는 것에 귀착(歸着)된다.
우리는 매일 주기도문을 외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다. 기도문 가운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살전5:16-18)이 이루어져서 편만(遍滿)하게 되어있다는 뜻이고 그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기도일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세상에서 기뻐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성경에서나 말하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었다는 뜻은 무엇일까? 우리 인생들로 새로운 피조물로 지어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완전 갱신(更新)을 설파한다. 구원받아 새로운 사람이 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람일 것이다.
세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불안, 좌절, 포기, 자기 비하(卑下)로 얼룩진 삶을 산다. 새 생명을 받으면, 이런 삶이 평안, 성취, 확신, 자존이 넘치는 긍정과 역동의 삶으로 바뀐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다. 나의 내면세계가 변하면 모든 것이 따라 변한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삶은 기쁨이다.
기뻐하는데 항상(be joyful always)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영원히 기뻐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성도라면 항상 기뻐해야 한다. 이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아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기쁨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장난이다. 마귀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고, 믿음을 방해한다. 그러나 성령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게 한다.
하박국 선지자는 암울한 때 유다의 선지자였다. 므낫세 왕의 패역(悖逆)으로 유다의 멸망이 선포된 뒤요 요시야 왕 후반기에 선지자로 나섰다. 그는 메시아의 도래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그 백성에게 선포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 18). 이런 상황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면 보통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즐겁고 기쁘다고 선포한다.
이 하박국의 마지막 찬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의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선언한 것이다. 믿음의 은혜를 받으면 이 세상의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다. 믿음은 심령에 평강(平康)과 평화(平和)를 주고 그 속에 희락(喜樂)이 넘치게 한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극심해도 믿음의 사람은 무겁거나 힘들지 않다. 그래서 하박국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 했다. 여호와로 인해 즐겁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쁘다고 했다. 이 기쁨은 구원에서 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신 대역사다. 기쁨으로 충만한 삶은 사람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책무이기도 하다. 기쁨이 없는 삶은 믿음이 아직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대자연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전한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 할 지로다. 그리할 때 삼림(森林)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96:11, 12; 97:1).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인간만이 아니라 전 우주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기뻐하는 삶은 어떤 능력을 갖는가. 기쁨 속에 즐기는 삶 은 어떠할까 생각해 보라. 직장에서 즐거이 일하는 사람은 어떠하겠는지를. 그를 바라보는 동료들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무언가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일을 즐기는 사람은 건강하고, 자유롭고, 성과가 많으며, 일을 많이 함에도 힘듦이 없고, 스트레스도 없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루어가는 존재다. 이런 삶은 빛나는 삶이다. 이런 삶은 아름다운 삶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 이것이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이요 목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빛나는 승리의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권고하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야말로 영적 예배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눈빛이 다르고, 걸음걸이가 다르고, 하는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성도(saint)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루려는 복지사회는 물적 복지를 넘어선 정신적 복지사회다. 정신적 복지사회는 사랑에서 시작하여 궁극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사회다. 오늘날 학교의 사명은 지식의 창출과 전수에서 더 나아가 고도의 정신적 가치관으로 만인의 평등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 건학이념에서 교훈(校訓)으로
1. 교훈의 배경
영광학원의 건학이념 “사랑, 빛, 자유”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 즉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의 기본품성이다. 이런 품성은 이 세상을 천국이 되게 한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라 하셨다. 그리하면 성령이 임하시어 도울 것이라 하셨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도하였다. 이때 성령이 임하셔서 제자들은 불 세례를 받는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미래를 점치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리를 향해 설교한다. 그 모습은 불붙은 심정으로 그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분출되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태였다. 베드로는 성전에 모인 무리에게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다음의 설교로 성령을 전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욜2:2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행2:17, 18; 욜2:28)
여기서 예언, 환상, 꿈은 무엇일까. 모두 미래를 향한 비전이다. 제자들은 알 수 없는 초능력을 받았다.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고, 꿈꾸고, 환상을 본다. 과거와 다른 새로운 세계의 도래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을 바탕으로 이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지표는 예언, 환상, 꿈을 묶은 “큰 뜻을 품어라” 이 한 마디다. 큰 뜻에는 꿈이 서려 있다. 꿈을 품으면 늙은이도 청춘이고, 새 생명력을 받은 젊은이는 신세계를 열 수 있는 힘이 있다.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 1840-1924)의 말처럼, 열정(꿈)이 있는 사람이 청춘(youth)이다. 나이는 상관이 없다. 사랑하며 즐기는 사람은 항상 승리하게 되어있다.
얼마 전 경산 대구대학교에 간 일이 있다. 건학이념인 “큰 뜻을 품어라”가 쓰인 현수막(懸垂幕)이 본관 건물에 걸려있었다. 써 붙여 둔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 뜻을 풀어 가르쳐야 한다.
건학이념에는 탈현대 사회의 이상이 담겨있다. 탈현대 정보사회가 추구하는 바는 질(質, quality)이요,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힘 기름이다. 지금 길러야 할 중요한 능력은 창의성이다. 문사철(文史哲)로 대표되는 인문학을 강화하여 그 바탕으로 삼고, 개인의 유일성을 강조하여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야 한다. 이른바 이 시대의 정신(zeitgeist)이 바로 이것이다. 이영식 목사는 남다른 혜안(慧眼)으로 이미 80여 년 전에 이를 보신 것이다.
교훈(校訓)이란 낡은 옛이야기가 아니다. 시대에 뒤처진 고루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큰 뜻을 품어라”는 정보사회를 품고 있다. IT, AI의 세계를 함유하고 있다. 지식보다 꿈을 기르고 키움이 더 중요한 시대다. 정보사회가 강력히 요구하는 능력은 자신감, 꿈, 비전 같은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고 나아가는 힘은 사랑 안에 서려 있는 꿈이다.
2. 교훈의 실현 가치
이 시대는 정보사회다. 창의성, 창발(創發)의 사고력이 가장 중요하다. 일상의 모든 것이 매일 새로워야 한다. 정치, 사회, 산업 모든 분야가 새로움을 요구한다. 변하지 않으면 쇠한다는 것은 보편적 진리다. 산업사회에서 중시한 인지(認知) 중심의 능력을 고집할 수 없다. 정보사회에 필요한 것은 다양성과 주관적(主觀的) 능력이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개개인의 마음에서 산출된다.
창의적 사고는 개개인의 주관적 사고에서 창출되는 것이기에, 객관적 지식보다 각자의 마음에서 생성되는 주관적 지식이 절실하다. 시, 소설, 에세이, 역사, 철학, 음악, 미술, 체육과 같은 인문학 분야에 마음을 쏟아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 이 땅에서 자라나는 세대가 이런데 시간을 쓸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산업사회를 선(線)이라면 정보사회는 원(圓)이다. 산업사회의 구성원들이 관료적, 수직적 위계에 따른 상하 관계, 명령과 복종의 관계였다면, 정보사회는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맡은 구성원들이 상호 협력하는 수평적 체제다.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여 공동의 목적 달성에 공헌하는 상보(相補)와 상생(相生)의 관계다.
정보사회에서는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팀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잘 맺고 이어가는 능력이 긴요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유기적 관계의 망(network)을 잘 이어가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런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다. 팀 내의 인간관계 능력, 조율(tuning), 지도력(leadership), 설득력 등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능력을 대인 지능(interpersonal intelligence)이라 한다.
반면 개인내지능(intrapersonal intelligence)은 개인의 가치관 또는 태도 지능이다. 사물을 보고, 사람을 보고, 사건을 보고, 일을 볼 때, 그 사람의 자세, 그 사람의 가치관 같은 것이다. 무엇을 보든 긍정과 부정 모두 있을 것이다. 부정의 사람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세상을 보든, 사람을 보든, 일을 보든, 자연을 보든 모두를 긍정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개인내 지능이 높은 사람이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새 세상이 열릴 것이다. 믿음이 사랑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을 즐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누구도 못 말리는 사람, 어떤 상황이더라도 자기 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그 일과 그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즐김은 곧 사랑이다. 사랑은 창의적 사고의 핵심 요소다. 사랑하면 생각이 무궁무진하게 솟아오른다. 공부를 즐기는 사람, 삶을 즐기는 사람, 일을 즐기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현 교육체제에서 이런 능력을 기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무리한 바람일 것이다. 아직 산업사회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학교체제는 바뀌어야 한다. 사회는 초(超) 정보사회인데 학교는 산업사회학교이고 학생은 초(超) 정보사회에 살고 있으니 학교 교육의 개혁은 필수이지만 이 일을 방해하는 많은 요인 때문에 학교 교육 개혁은 지연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대학 입학시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대학입학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더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런 욕심(欲心) 때문에 잠, 휴식, 여행 모두를 미룬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음은 심신의 지침, 흥미의 상실과 피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보사회에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공부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정보사회에서 활용될 새로운 분야, 새로운 기술을 개척하고 개발하기 위해서는 큰 꿈을 품고 잘 간직해야 한다.
대학수학능력이 지식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대학입시에도 같은 것을 요구하니, 정보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함양(涵養)할 시간적 여력이 학생들에게 있을 수 없다. 아주 불행한 일이다.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미국도 교육개혁을 온전히 다한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만하다.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SAT는 영어와 수학의 기초적인 것만 시험에 출제하되, 학생의 진로와 관련된 과목의 성취도 검사(achievement test)를 따로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의 내신성적과 같은 고등학교 학업성적, 학교생활과 활동, 지도력(leadership), 교사나 동창들의 추천서 같은 것을 참조한다.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기본능력만 확인하고 그 외는 학생의 실제적 능력을 참조하는 형태다.
인습적 제도에 얽매어 학생들의 소중한 시간(생명)을 낭비하게 한다면, 기성세대의 무책임과 죄지음이 크다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현재 상황을 정확히 알고 앞으로 다가올 사회를 밝게 보아 자라나는 세대를 잘 길러야 나라가 흥왕(興旺)할 것이다.
교훈으로 제시된 “큰 뜻을 품어라.”는 매우 함축적인 뜻을 담고 있다. 꿈을 꾸라는 것, 원대한 비전을 갖고 도전하라는 것이다. 인류의 번영과 평화를 이룰 꿈과 비전을 품을 것을 주문한다. 모든 사람의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고, “만인의 복지”를 이루는 사회를 이루려는 이상(理想)을 가지라는 권유를 포괄한다.
3. 이태영 총장의 창조 정신
이태영 총장은 선친(先親)이신 이영식 목사의 소외된 사람들에게로 향한 정신을 이어받아 건학이념의 기본 정신과 교훈의 실현 가치를 널리 펴고자 했다. 이를 위해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분야의 지도자 양성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를 실현하고자 대학 설립의 이상을 갖고 실로 실현한 분이다.
20세기에 살면서 21세기를 그림으로 그린 꿈을 꾸는 영감(靈感)의 사람이었다. 그의 눈과 마음에는 21세기에 나타날 복지사회(福祉社會)가 그려져 있었다. 20세기 중반의 우리나라 사정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꿈이요 웅장한 그림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 지도자들에게 이태영 총장은 “꿈을 꾸는 사람,” “시세를 모르는 사람,” “쓸데없는 일을 하는 사람” 등 허황한 사람으로 보였다.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이태영 총장은 대학을 설립했다. 그 과정은 파란만장(波瀾萬丈) 그 자체였다. 대구대학교는 이태영 총장의 작품이고 그의 꿈을 실현한 학교다. 이 총장은 영화(映畫)를 좋아했다. 그리고 여유로운 시간에는 변사(辯士)처럼 자기가 본 영화를 재연(再演)하기도 하였다. 그는 꿈의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인류의 번영과 행복에 있었다.
이태영 총장은 선친 이영식 목사와 같이 시각장애 학생, 청각장애 학생의 숙소에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였고 개인 주택 하나 없이 평생을 산 분이다. 일을 같이해온 사람으로서 증언(證言)한다.
이 총장의 삶은 건학이념이나 교훈과 일관된 삶이었다. "사랑, 빛, 자유"의 정신으로 살았고, 꿈, 환상, 미래(未來) 조망(眺望)과 같은 비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이 꿈을 꾸기를 바랐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야 하는 사람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이태영 총장은 젊은 세대에게 꿈을 심어주고 길러주기 위해 《자기 창조의 열쇠》(이태영. 1999)를 간행했다. 이 총장의 이상이 이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꿈을 이룬 많은 사람을 소개한다.
그들은 모두 역경(逆境)에서 자존(自尊)을 세우고 도전하여 자신을 불태운 사람들이다. 인류사회에 빛을 비춘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준 사람들이다. 역경은 역경을 당한 사람의 긍정적 가치관에 의해 큰 업적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사람은 상황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꿈을 품은 사람은 뒤의 사람일 것이다.
이태영 총장은 젊은이에게 다음 두 가지를 권고한다.
첫째, 자기 세계를 열라(창조)는 권고를 한다. 주체성, 자신이 독립변인(獨立變因)이 되는 것, 자기 존재에 대해 확신(자신, 自信)을 가지라는 권고이다. 큰 뜻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확립되어야 한다. 꿈을 꾸는 사람, 환상이 그려지는 사람, 비전을 갖는 사람은 자기 정체성이 확실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정보를 선점(先占)하라는 권고다. 정보사회에서 정보는 재화(財貨)요, 힘이요, 무기다. 정보를 장악하는 자가 권력도, 경제력도, 사회와 문화 지배력도 갖게 될 것이다(이태영, 1999, pp.49, 50). 이 권고는 미래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미리 하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권고는 교훈의 실현 가치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정보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 사는 청년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립하고 정보 수용 능력까지 기른다면, 그 사회, 그 시대에 부응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꿈과 환상과 비전 그리고 성취에 대한 자기 예언(自己 豫言), 자기 확신을 가지라는 권고이다. 정보사회 청년들이 길러야 하는 중심 능력이 될 것이다.
이태영 총장은 “사랑, 빛, 자유,” 곧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을 창조 정신으로 보고 있었다. 사랑하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인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창의성에 영향 미치는 중요한 조건을 사랑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이태영 총장의 창조 정신은 건학이념에서 연유(緣由)됐다고 할 수 있다.
이태영 총장은 자기 창조의 열쇠를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든다(이태영. 1999, pp.59-63).
첫 째, 어떤 경우에라도 원수를 맺지 말라.
둘 째, 정신적 윤리관을 확립하라.
셋 째, 바른 가치관을 확립하라.
넷 째, 자신의 독특한 사명감을 발견하라.
다섯째,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을 가지고 실천하라.
여섯째, 건강을 지켜라.
일곱째,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하라.
여덟째, 절제하는 생활을 하라.
아홉째, 고도한 인생관을 가져라.
열 째, 여가 선용을 잘 하라.
이태영 총장은 창조의 열쇠를 자기관리, 가치관, 도덕성, 이웃, 사회와의 관계 등으로 보았다. 자신의 건강과 바르게 섬(정립, 正立)이 우선되어야 한다.
바르고 높은 인생관, 윤리관, 가치관이 확립되어 세상 환경에 좌우됨이나 휘둘림이 없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어떠한 흔들림이나 동요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해야 자기만의 밝은 세계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이 중요하고, 가족이 중요하고, 부모를 섬기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야 하는 목적은 인류의 평등이나 복지나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실현함에 두었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사랑, 빛, 자유)과 교훈(큰 뜻을 품어라)은 이태영 총장의 자기 창조의 열쇠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일과 연결된다. 그 새로운 세계는 만인의 평등과 복지, 세계의 평화, 하나 된 세계가 통일성을 이룬 세상일 것이다.
2023년 8월 10일(목)
Ⓒ 2023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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