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이야기] 22. 박정희 대통령 생가

profkim 2023. 11. 2. 11:13

박정희 대통령이 쓰신 휘호,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22. 박정희 대통령 생가

 

 

 

  나는 세계 2차대전(1941-1945)과 한국전쟁(1950-1953)을 직접 경험했고 그 참상을 피부로 느껴온 세대이다. 나는 지금도 음식을 버리면 죄의식을 갖는다.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살아온 세대이다. 펄 벅(Pearl S. Buck)의 대지(The Good Earth)를 읽을 때 극심한 배고픔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밥 한 그릇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보아왔다. 풍요의 시절을 사는 오늘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조국 근대화를 이끌어 온 새마을 역군상(役軍像)

 

  가족들이 구미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방문하자 하여 아침에 떠났다. 내가 사는 경산에서는 1번 고속국도로 접근해서 북쪽 서울 방향으로 가다가 남구미IC에서 나와서 10분 이내에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산에서 1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니 그리 먼 곳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 안내비

 

  내가 현직에 있을 때 한번 방문한 일이 있으니 벌써 20 수년이 지났을 것이다. 그때 비하면 도시 개발도 많이 되었고 건물들도 많이 건축되어서 근처가 도시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변화되어 있었다. 생가 앞길의 도로명(道路名)박정희로로 명명되어서 박 대통령 생가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2020년 개관한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 전경

 

  우리가 방문 했을 때는 10월 하순이어서 박정희 대통령 44주기(週忌) 현수막이 많이 걸려있었다. 19791026일 서거하셨으니 벌써 44주기가 된다. 주차장에 차들이 많이 주차되어있어서 제2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보니 우측 북쪽으로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이 번듯하게 보이고 왼쪽 남쪽으로 생가가 나무 뒤로 보일 듯 말듯 윤곽을 드러내었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 옛 모습 그림

 

  우선 생가부터 방문하기로 했다.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는 생가뿐이었으니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초라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새 단장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가 가는 길로 접어들어서 접근하니 전에 없던 박정희 대통령 민족중흥관보릿고개 체험관이 새로 생겼다.

박정희 대통령 생기로 올라가는 길, 민족중흥관 옆길

 

  민족중흥관은 우리나라 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위해 일한 박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과 일화가 연출되어있었다. 민족중흥관에는 박정희 대통령 발자취 홀, 기획전시실, 홀로그램 홀(Hologram Hall)과 돔 영상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기록들이 보존되어있는 곳이다. 대통령 자료가 디지털화되어 보존되어 소개하는 곳이기도 하다.

민족중흥관 평면도
민족중흥관 전면, 뜰에 벼가 익어가고 있다. 쌀 증산은 과제였다.

 

  민족중흥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민족이 중흥(中興)역사이기도 하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한국전쟁이라는 혼돈의 시간을 보내면서 암울했던 우리 민족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아시아최초의 최첨단 하이퍼 돔 영상 상영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생생한 자료가 상영된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 본체(안채, 반 양옥)와 아래채(사랑방, 초가), 왼쪽 창보이는 건물이 추모관

 

  박정희 대통령 생가는 초라한 옛날 초가집(1917년에서 1937년까지 사신 집)이다. 본체(안내자료에는 안채)와 아래채(설명문에서는 사랑채)가 있었는데 본채는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고 1964년에 집이 너무 퇴락해서 재건축했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대로라면 본채나 아래채가 모두 초가집이나 개축하면서 본채는 반 양옥형태가 되었고 아래채는 초가집으로 조성된 것 같다.

아래채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공부 방이었다. ( 문 열린 방)

 

  박정희 대통령은 아래채의 방을 공부방으로 쓰셨던 모양이다. 이 당시 쓰시던 책상과 사물이 아직 보존되어서 전시되고 있었다. 그 당시 어려웠던 살림살이를 보는 것 같았다. 생가 담장에 연이어서 추모관이 있었다. 추모객이 참배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돌아 나오면 마당에 사진 자료가 게시되어있어서 박 대통령의 삶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설이나 사진 자료가 오래전보다는 좀 나아졌지만 대체로 초라한 모습이다.

아래채 박정희 대통령의 공부방 내면의 모습

 

  보릿고개 체험관에서는 그 시절 음식을 먹어 볼 수 있었다. 실비로 제공되는 음식을 먹으며 옛날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된다.

생가로 올라가는 길의 보릿고개 체험관(음식을 판다.)

 

  오전에 생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으려고 길 쪽으로 나오니 박정희길 변에 식당들이 몇 곳 보였다. 물회 집, 초밥집, 샤부샤부 식당 등이 있어서 우리는 샤브샤브식당에서 점심 특선으로 점심 식사를 마치고 cafe에서 커피 한 잔 들고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으로 갔다.

생가 뒤뜰에 있는 펌프(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가정의 식수원이었다.)

 

  역사자료관(경북 구미시 상모동 156-1 일원, 면적 6,164m)2014년에 사업을 시작해서 2020년에 공사를 마쳤다고 하니 2020년 개관한 셈이다. 이 건물은 지상 3층과 옥상으로 되어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역사자료관의 층별 구성내용을 보면,

 

  1층에는 로비, 카페, 수장고가 있었고,

  2층에는 미디어 웰잘살아보세!”, 상설전시실로는 가난 극복을 위한 영상실, 조국 근대화를 위한 첫걸음, 산업화의 시작, 외자도입, 수출만이 살길이다. 한강의 기적 영상실 등이 있어서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 박정희 대통령 유품전시실이 있어서 박 대통령이 쓰시던 가구며 집기들을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박 대통령의 검소한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3층에는 아카이브실, 다목적실, 세미나실이 있었는데 세미나실에는 박정희 대통령 저서와 박 대통령 관련 저작들이 서가에 전시되어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 주변 안내도

 

  한 시대를 이끌어온 영웅은 한 민족과 국가를 가난과 후진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상(理想)을 갖고 있었으며 생각을 실현할 방략(方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험난했고 암담했다. 가진 것 없이 부를 창출한다는 것이 쉬웠겠는가! 지식도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과학화를 이루기가 쉬웠겠는가! 주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추진하기가 쉬웠겠는가!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내 한 몸 바치겠다는 각오로 나선 이가 박정희 대통령이다.

박정희 대통령 휘호, 근면, 자조, 협동: 근대화를 이루는 기본 정신이다.

 

  우리의 1950, 1960년대의 가난을 회상해 보라, 기가 막히는 일이다. 오늘의 부를 생각해 보라, 너무 잘살고 있지 않은가, 지난 60년간은 우리 민족이 가난에서 부유한 자로, 후진에서 선진으로, 과학화로, 첨단 기술을 가진 민족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자로 우뚝 서지 않았는가!

생가로 올라가는 길의 여유로움

 

  오늘 우리사회는 자유민주주의를 이루었고 더하여 경제적 부를 이루어서 세계가 놀라는 변화를 이룬 나라이다. 그 기반이 되는 경제성장의 기초를 닦은 이가 박정희 대통령이다. 우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서게 되었다.

하천 분수의 모습

 

  오늘 우리 사회는 자유민주주의 터위에서 복지사회를 이루어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 터 해서 생산성을 높이고 부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지사회를 충실히 함으로 사회주의 이상인 공평한 분배를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 안에는 개인주의와 전체주의가 공존한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 무모한 이론 논쟁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할 것이다. 생산성을 높이고, 무역을 증대하여서 부를 창출하고, 국민이 다 같이 잘사는 이상적 국가를 건설하기를 바란다.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실 3층에 전시된 대통령 관련 서적들

 

  역사의 한 시점에 서서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가장 마음 깊이 생각하고 한 몸 바친다는 각오로 국가 발전에 헌신하신 박정희 대통령을 회상하면서 구미를 떠나왔다.

 

 

2023112()

2022 J. K.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