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이야기] 19. 영광학원의 건학이념 1: 이영식 목사의 사상

profkim 2023. 8. 9. 14:51

사랑의 사도 이영식 목사(1894~1981)

 

 

           19. 영광학원 건학이념 1: 이영식 목사의 사상

 

 

 

<이 원고는 이영식 목사의 생애와 건학이념”(김정권, 황용수, 이근민, 이근용, 2023. 굿에드북)에 실은 내용 중 영광학원 건학이념 부분의 내용이다. 책의 제2부가 영광학원 건학이념인데 특히 이영식 목사의 사상과 건학이념을 다루었다.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은 이영식 목사의 사상에서 연유했기에 건학이념을 다루기 전에 이영식 목사의 사상을 다루고 이어서 영광학원 건학이념을 다루어서 영광학원 산하의 모든 교육기관에서 학원 건학이념에 충실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안내를 하고자 한다. 기독교 정신에 의해 설립된 학교이고 이 학원에서 교육받는 사람은 만인 평등의 복지사회를 이루는 역군이 되기를 바란다. 이 원고는 두 번에 나누어 게재하는데 첫째, “이영식 목사의 사상”, 둘째는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으로 하겠다.>

이영식 목사는 가시밭길을 걸으셨으나 후세대에 평탄한 꽃길을 주셨다.

  한 시대는 와서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고 새로운 일을 이루어서 역사는 진전되어간다, 한 시대는 그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부르고 그가 시대가 요구하는 일들을 일으켜 세운다. 그가 세운 일들을 누리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침체하기도 한다.

 

  강물이 흘러서 긴 여정을 흘러가는 동안 급류(急流)를 이루기도 하고, 완류(緩流)가 되기도 하고, 더러는 소()가 되어서 전연 흘러가지 않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강물은 의연히 흘러가고 그런 과정은 자연의 한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19세기 말 20세기 초중반은 격동의 시대이고 나라를 잃고 울분에 차 있던 시대이다.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광복과 더불어서 사회적 혼란과 빈곤의 문제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도울 힘이 국가에 없었고 외국의 후원단체나 국내 독지가에 의한 구호가 약간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이영식 목사는 이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시고 어려운 유소년시절을 보내시면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으시고 종교단체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새로운 문물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시고 일본 고베신학교에 유학하시면서 가가와 도요히꼬 선생을 만남으로 신학 이론가이기보다는 사랑의 실천자로서 낮은 곳에 처하는 삶을 택하시게 된다.

 

  이영식 목사는 키가 작고 목소리는 우렁차신 웅변가이시다. 또 한 담력이 크신 분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 시대 상황과 소외된 계층을 사랑의 눈으로 보면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다. 고베신학교를 졸업하시고 큰 교회에서 목회하시면 생활과 목회가 모두 안정되고 편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갈등을 겪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동안 거의 유랑생활을 하신 편이다.

 

  자유 대한민국에서 이 선각자가 해야 할 일은 소외된 사람들, 낮은 곳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자연히 눈길이 가게 되었다. 이영식 목사는 자연스럽게 나병 환자와 장애인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 기성교회 목회는 접으시고 온전히 이들에게 집중하시게 된다.

 

  이런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 즉 어렸을 때 어머니를 통한 신앙생활과 기독교계 학교에서 체득한 사랑의 정신이 영향을 미쳤고 결정적 계기는 일본 고베 신학교에서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를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가와 목사는 빈민촌으로, 이영식 목사는 나병 환자와 장애인에게로 눈길을 돌렸으니 대상자는 다를지 모르나 두 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을 실천한 분들이다. 두 분 다 사회개혁에 관심을 두고 계신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 역시 낮은 곳에서 사회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피부로 절감했다고 보아야 한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 豊彦, 1888~1960) 목사의 휘호, 낮은 데서 봉사하라.

  이영식 목사의 생애를 밝힘으로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고 성장 과정에서 체득한 일들이 그의 사상에 어떻게 영향 미쳤는가를 봄으로 이영식 목사의 사랑실천 의미를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영식 목사는 영광학원의 건학이념을 통해서 분명하게 이 학원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히셨다. “사랑, ,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本體)이시기도 하며 모든 성경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이는 사람의 자유, 행복, 연합과 하나 됨과 같은 실현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영광학원은 이런 가치를 실현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런 건학이념은 교훈으로 연계되어서 구체화 될 것이다. “큰 뜻을 품어라.”라는 AD 30년경 이루어진 초대교회가 추구하던 것이다. 초대교회가 추구하였던 예언, 환상, 꿈과 같은 것은 모두 미래로 향한 것이다. 탈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창의성의 요소이다. 생각이 재화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각은 권력이 되고 돈이 되고 제품이 되고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힘을 갖고 있다. 영적 각성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계가 보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혁신이 일어나게 된다.

 

 

 . 이영식 목사의 사상적 배경

 

  이영식 목사의 사상과 실천은 어린 시절의 성장 환경에서 받은 영향 그리고 여러 사람과의 참 만남(encounter)’에 기인한다. 어머니 김덕희 여사의 헌신과 믿음 생활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청년기에 만난 기독교 선교사와 교회 생활, 계성학교 시절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나선 독립운동, 그리고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 유학과 가가와 도요히코(賀川 豊彦, 1888~1960) 목사, 구로다 시로(墨田 四郞) 목사와의 만남 등이 이영식 목사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 어머니 김덕희 여사

 

  이영식 목사(1894~1981)는 진주에서 태어나시었다. 불행하게도 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시게 된다. 당시 여성 혼자서 가계를 책임진다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이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이영식 목사 9세 때 성주로 이거(移居) 하시었고, 성주 안에서도 이곳저곳으로 옮겨 사시었다. 모두 이영식 목사의 교육과 생계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주 후평에 사실 때, 어머니가 심한 피부병과 안질을 앓으신 모양이다. 어머니는 본래 기독교인이 아니셨다. 피부병과 맹인이 되신 일이 계기가 되어 신자가 되시어 온전히 매달리는 믿음을 가지시게 되었다. 믿음의 기도로 다시 눈을 뜨시게 되었고 피부병도 고치셨다. 소년 이영식은 이런 신앙의 힘을 체험하게 되고, 기독교 신앙에 깊숙이 함입(陷入)되신다.

이영식 목사 가족이 성주로 이사 오셔서 신앙을 갖게 된 성주 후평교회

  김덕희 여사는 점차 깊은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시고 두 아드님을 목사로 드리기로 서원(誓願)한다. 하나님과 맺은 일종의 약속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영식 목사와 그 동생 되시는 이용대 목사가 한국 교회의 사역자가 된 것이다.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목사로 기름이 어찌 쉬웠다고 하겠는가.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보부상(褓負商)을 하셨고, 외조모는 적으나마 농토를 팔아 손자 이영식 목사 교육비에 보탰다고 한다. 어머니 김덕희 여사는 아들을 옥화교회(성주군 옥화동 소재)가 운영하는 영명학교(永明學校)에 입학시켜 교육받게 하셨다. 이영식 목사 14세 때의 일이니 요새 말로 만학도인 셈이다. 이때 신학문을 접하고, 성경을 배우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여신다.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한 교회들은 선교사들의 전도로 세워졌기 때문에 교회 부설로 세운 학교가 많았다. 옥화교회 부설 학교도 이와 같았다. 하지만 재정 자립도가 낮아 오래가지 못한 학교도 많았다. 이 목사 17세 때 영명학교가 문을 닫게 되어 18세 때 유성학교(김천시 소재 유성교회 부설)로 전학하셨다. 이 학교마저 얼마 가지 않아 문을 닫게 되어 또다시 대덕학교(김천시 대덕면 소재 대덕제일교회 부설)로 전학하시고 여기서 졸업하신다.

이영식 목사님이 신교육을 받으셨던 성주 옥화교회

  이영식 목사 19세 되는 해에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신다. 대구 초기의 선교사 안의화(Rev. James E. Adams) 목사가 세운 계성학교에서 이영식 목사를 도와준 분은 부헤리(Rev. Henry M. Bruen) 선교사다. 당시 신교육기관은 대체로 기독교에서 세웠고, 이들 학교는 성경과 신학문을 교육과정으로 하였다.

 

  이영식 목사의 청소년기는 기독교 신앙에 깊숙이 빠진 시기였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있고, 성경의 가르침이 있어, 만인 평등사상, 사랑의 실천, 고차원의 도덕성, 자유와 기쁨과 같은 차원 높은 가치관을 배우고 익힌 시기였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자식 사랑과 교육의 방향 정립, 큰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어머니의 소망이 있었다. 이에 부응한 이영식 목사의 자기성찰과 도전정신이 총합을 이루어 이영식 목사의 세계가 열렸다고 할 것이다.

 

 

   2. 개화기의 한국 교회

 

  한국 교회는 19세기 말 선교사의 도래로 시작되었다. 특히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선교사 사역을 살펴보면, 영남지방 최초의 선교사는 배위량(裵褘良, W. M. Baird) 선교사다. 이분은 곧 서울 본부로 가시게 되어 그의 처남 아담스(Rev. James E. Adams) 선교사가 그 뒤를 잇는다.

 

  아담스(대구사역 기간 1896-1923, 한국명 안의와) 선교사, 존슨(Dr. Woodbridge Odlin Johnson, 대구사역 기간 1898-1913, 한국명 차인차) 선교사, 브루언(Rev. Henry M. Bruen, 대구사역 기간 1899-1944, 한국명 부해리) 선교사는 영남지방 선교의 삼총사라 할만하다. 이 세 분은 영남지역 복음화의 선두 주자로서, 대구를 중심한 영남지방에 교회를 설립하고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등 한국 개화기를 이끌어간 선구자들이라 할 것이다.

 

이영식 목사님이 서양식 신 중등교육을 받으신 계성학교아담스관

  아담스 목사는 계성학교를 설립했고, 존슨 선교사는 동산병원을 설립했으며, 브루언 선교사 부인은 신명여학교를 설립한다. 이분들은 교회를 설립하면서, 교육기관과 의료기관까지 설립한 것이다. 이는 선교의 방침이기도 하다. 선교에는 반드시 교육과 의료가 뒤따른다.

 

  당시 신학문은 신기성(新奇性) 그 자체였다. 과학기술의 도입과 산업사회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에게는 새로운 도전의 동인(動因)이 되었다. 이영식 목사의 도시 생활은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은 사랑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고 나누는 사랑의 행함은 당시 젊은이에게 새롭게 보였다. 신교육학교가 생겨나고 청년들은 세계를 향하여 눈을 뜨게 된다. 후일 대구의 지도층 인사가 된 어떤 분은 시골에서 대구에 나와 계성학교에서 활기찬 젊은이들을 보게 된다. 자신도 신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의지를 굳히고 대구에 눌러앉아 신교육을 받아 결국 사회 지도층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영식 목사는 어머니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교육을 받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한평생 농민으로 사셨을 것이다. 20세기 초 도시의 신교육학교는 젊은이들의 꿈을 키우고 눈을 뜨게 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이영식 목사는 계성학교를 통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온몸으로 흡수하시었다. 믿음과 사랑, 그 사랑에서 발현(發顯)되는 빛, 그 빛에서 얻게 되는 자유에 관한 진리를 체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이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이상이 확실하고 구체화 된 것은 고베신학교에서 만난 가가와 도요히꼬 선생과 구로다 선생과 교유하는 동안이었을 것이다.

 

 

  3.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가가와 도요히꼬(賀川 豊彦, 1888~1960) 선생은 어린 시절이 아주 불우(不遇)했던 것 같다. 아버지와 기생첩 슬하의 다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가가와 선생 4세 때 아버지가, 5세 때 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본처(本妻) 밑에서 자랐다. 형편도 어려웠을 것이고 정체성의 혼란도 심했을 것이다. 다행히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이 그를 버티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당시 사회적 상황은 첩의 아들이 자존(自尊)을 느끼기에 너무도 냉혹한 것이었다. 키도 작고, 신체적 질병도 여럿 있어, 제대로 갖춘 생존의 조건이 없었던 것 같다.

 

  이영식 목사 역시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시고 어린 시절 가난과 싸워야 했다. 어머니가 보부상을 하시며 가계를 이어나가셨으니 고난의 행군이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가가와 선생의 삶과 다른 모습이지만, 어린 시절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분 모두 키는 작으나 목소리가 우렁차 웅변가의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코(賀川 豊彦, 1888~1960) 목사. 사선을 넘어서 저자&nbsp; &nbsp;자료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AGAWA_Toyohiko_young.JPG#/media/파일:KAGAWA_Toyohiko_young.JPG

  사람에게 참된 만남은 소중하다. 가가와 선생이 12세 때 구세군의 길거리 노방전도(路傍傳道) ()를 만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구세군 노방전도 대는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북치고, 나팔 불며, 동리가 떠들썩하게 돌아다니면서 전도했다. 그들은 외친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12살 소년이 그들에게 묻는다. “하나님은 서자(庶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하나님은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 자신에 찬, 확신에 찬 대답을 듣는다. 가가와 선생은 그들을 따르게 되었고 예수를 알기 시작했다.

 

가가와 선생이 도쿠시마(德島)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담임선생님이 기독교 신자였다. 온유한 심령을 지닌 담임선생님을 통해 미국 선교사와 연결되었다. 이때 만난 선교사가 로우강과 마야스(H. W. Mayas) 두 선교사다. 이분들이 가가와 선생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가가와 선생이 신학교에 진학하고 프린스턴대학에 유학하는 등의 일에 이분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다.

 

  이영식 목사 역시 교회 부설 학교에서 신자들을 만났고 대구 계성학교에서 선교사들과 만났다. 이영식 목사가 계성학교에 진학하는데 브루언 선교사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다. 물질적 도움도 필요했지만, 비전을 길러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주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정신을 심어준 것이 더 중요했다. 인도에 철도(鐵道)가 부설된 후에 인도인들이 인도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한다. 조국에 대한 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가와 선생은 12세 때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요즘 결핵은 치료할 수 있기에 그리 두려운 병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초 폐병은 지금 암보다 훨씬 무서운 병이었다. 특히 전염되는 병이니 모두 꺼리는 병이었다. 당시는 치료 약도 개발되기 전이었고 따라서 치료가 어려울 때였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폐결핵을 제일 무서운 병으로 여겼다.

 

  가가와 선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明治)학원(學院) 신학부 예과에 입학해서 19세 때 졸업한다. 하기휴가를 이용하여 신앙적 감명을 크게 받은 나가오 마키(長尾 卷) 목사가 시무하는 도요하시(豊橋) 교회의 노방전도에 참여하였다. 온 힘을 다하여 41일간 무리한 전도를 했던 모양이다. 선생은 작은 체구지만 음성이 커서 이런 전도에 잘 적응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리였다. 크게 각혈(咯血)하는 중태에 빠지게 된다. 가가와 선생은 기도의 사람이다. 가가와 선생은 항상 기도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한다.

 

  나가오 목사는 도요하시에서 교회를 개척했으나 교인이 오지 않았다. 매 주일예배를 부인과 단둘이 드리는 세월이 5년이나 되었다. 교회 개척 3년 되던 해에, 걸인들을 잘 대접해 보내는 사랑의 사람이었던 나가오 목사에게 폐결핵 환자, 각혈(咯血)하는 가가와 선생이 찾아왔다. 나가오 목사는 괘념치 않고 기도해주고, 음식을 같이 먹는 사랑의 실천자였다. 나가오 목사에게 가가와 선생은 첫 신자였다. 가가와 선생은 나가오 목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배우게 된다. 나가오 목사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한 것은 아니지만, 가가와 선생 같은 분에게 전도했으니 그 열매가 작다고 할 수 없다.

 

  도요하시교회 노방전도로 가가와 선생의 폐병이 도지고 심하게 각혈하여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도쿠시마에서 아버지 같은 마야스 선교사가 오고, 모두 임종을 기다리는 밤이었다. 가가와 선생의 기도와 나가오 목사 가족의 간절한 기도 그리고 마야스 선교사(고베신학교 교수)의 기도는 쇠를 녹이는 열정적 기도였다고 한다. 아침 동쪽의 태양이 떠오를 때 가가와 선생은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 뜨거운 영감을 느꼈다. 가가와 선생을 괴롭힌 담()은 사라지고 당()이 돌아와 그는 죽음에서 벗어났다. 사선(死線)을 넘은 첫 기적이었다.

 

  좀 나아진 가가와 선생은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진학한다. 고베신학교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설립한 학교다. 고베신학교 재학 중 폐병이 악화되어 마야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가와 선생은 담이 너무 많이 차올라 호흡이 곤란해지고 생존의 가능성이 없었다. 기독교인인 담당 의사마저 생존할 수 없다고 단념한다. 그런데도 가가와 자신과 나가오 목사 가족과 마야스 선교사의 처절한 기도로 담은 제거되고 호흡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한 번 사선을 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고베신학교에 복학한 가가와 선생은 얼마 되지 않아 축농증 수술을 받게 되었다. 출혈이 너무 심하여 도저히 소생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마야스 교수와 신학생들이 고별 기도와 찬송을 부르고 되돌아갔다. 다음날 병실에 가니 가가와 선생은 모든 것이 회복되고 살아있었다. 또 다시 사선을 넘은 것이다.

 

  이일이 있고 난 뒤 담당 의사는 앞으로 생존 가능한 기간이 3년이라고 말하였다. 가가와 선생은 이 3년을 어떻게 보람되게 쓸까 고민했다. 고베신학교 앞에 있는 빈민촌 신가와(新川)를 그는 주목한다. 그리고 3개월 동안 그 앞에서 노방전도를 하였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말만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빈민촌으로 들어가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의 애환을 같이하고, 그들을 돕게 된다. 이 일은 나가오 목사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아 행한 것이라고 한다. 가가와 선생은 1909년 빈민촌에 들어간 이래 14년간 그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았다. 이 기간이 끝나갈 무렵, 미국 프린스턴대학(Princeton Theological Seminar)2년간 유학을 다녀오게 된다.

 

  가가와 선생은 1920사선(死線)을 넘어서를 출간(出刊)한다. 이 책은 일본에서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후 13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가가와 선생은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슈바이처, 간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일본의 성자(聖者) 가가와 선생은 작은 예수로 통하게 되었다.

 

  가가와 선생은 사랑의 사도(使徒), 기독교 사회주의자, 세계평화주의자다.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일 뿐, 이론을 정립한 신학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살아있는 참 신앙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가가와 선생은 백성의 가난과 고난에 마음 아파했고, 착취당하는 노동자 편이었고, 가난한 백성을 부유하게 할 방안을 세우고 실천한 사람이다. 정부로부터 미움받을 노동조합 운동을 벌였고, 국민의 생활개선을 위해 협동조합 운동을 열었으며, 세계평화를 위해 세계공동체 운동을 주창했다. 각종 협동조합의 연원(淵源)은 가가와 선생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 사회복지제도의 기반은 가가와 선생이 세웠다고 보아야 한다. 가가와 선생의 주장과 행동은 불평등의 해소, 가난의 극복, 자유와 평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영식 목사는 가가와 선생의 사상과 사랑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자세로 가가와 선생은 빈민굴로 향했고, 이영식 목사는 한센병 환자와 장애인에게 향했다. 평생 개인 주택 없이 이들의 거처에서 동거하며 그들을 돌보았으니 두 분의 삶은 맥이 같다 하겠다.

 

  가가와 선생의 후배 목사이신 구로다 시로(墨田 四朗)는 그의 저나의 가가와 연구에서 가가와 선생이 신가와 빈민촌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좌절이 컸을 수도 있었다 한다. 빈민촌에 들어간 것이 오히려 삶의 활력을 주었다고 한다. 고난이나 역경은 그에 직면한 사람에 따라 오히려 삶의 생동감을 더하기도 하는가 보다. 이영식 목사가 장애인들을 보살핀 삶도 내면세계의 충만함을 더하여 한국의 사랑의 사도(使徒)”가 되게 하였다.

이영식 목사의 고베신 학교 유학(1924 &sim; 1927)

  이영식 목사의 만인 평등사상, 자유주의, 도전정신, 불의에 대한 항거 등 그의 삶을 이루었던 가치들은 많은 고난과 참 만남을 통해 생성된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가가와 선생과 만남은 이영식 목사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두 분 모두 신학 이론가이기보다는 성경이 이르는 사랑의 실천가(實踐家)였다.

 

  이태영 총장이 자신의 저서 《창조의 열쇠》에서

 

  (가가와) 선생이 일생을 통하여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건설세계평화 운동에 희생적으로 헌신하였기에 미국에서는 금세기가 낳은 가가와 간디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아무 자원이 없는 이 일본을 경제 대국, 장수 대국으로 만든 정책 아이디어의 80%가 가가와 목사의 발상이라고 어느 교수는 말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선생의 일생은 선친이신 이영식 목사와 본인(이태영 총장)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태영, 2005, pp. 84, 85)

 

  이태영 총장은 이어 가가와 목사와 이영식 목사의 관계에 대해 말씀했다.

 

  가가와 선생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영식 목사는 한국에서 장애자와 나환자의 교육과 복지사업에 일생동안 헌신하신 것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채프만(William F. Chapman)은 이영식 목사의 사상과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이태영, 2005, p.85)

 

  대구대학교에서 열린 가가와 도요히코 학회(2022112)에서 이시베(石部 公男) 회장은 두 분 모두 사랑의 실천가라 칭하며, 가가와 선생과 이영식 목사의 공통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가와 선생은 목사이면서 동시에 사회사업가였으며 여러 소설을 쓴 문필가였으며 사상가였습니다. 사상가이면서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실천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대학교의 기초를 닦은 이영식 목사님과 가가와 선생은 함께 그리스도교의 굳은 신앙과 사랑에 뿌리를 둔 실천가였다고 생각합니다. (p.13)

 

  가가와 선생과 이영식 목사, 이 두 분은 공유하는 특성이 많다. 이영식 목사가 수학하신 고베신학교에서 가가와 선생과 구로다 목사를 만난 그때가 이영식 목사가 기독교 사상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가와 선생은 반전론자(反戰論者)로서 세계평화를 주창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이상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요 시찰인(視察人)이었고, 감시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자들이 가가와 선생에게 왜 전쟁을 반대하느냐 물으니, 선생은 타민족을 괴롭히지 말라, 그렇게 하면 전쟁하면 진다고 했다.

 

  군부가 가가와 선생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일본)는 국토가 작고, 인구는 많고,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야 산다고 했다. 가가와 선생은 그들에게 나가면 망하니 나가지 말고 너 자신을 개발하라고 하였다. 네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하였다.

 

  패전 후, 일본은 국토가 확장되지 않았고 인구는 증가했으며, 부존자원 역시 늘지 아니했다. 그런데도 세계 경제 대국(大國)이 되지 않았는가. 가가와 선생의 지론(持論)에 담긴 그 의미를 오늘 정보사회에서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네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너 자신을 개발하라!”

 

  이영식 목사는 타국 일제에 항거하시고 탄압을 받으셨고, 가가와 선생은 자국 군부의 억압과 탄압을 받으셨다. 이러한 두 분의 행함은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한 투쟁이었고 인간성 회복에 초점이 있었기에 맥이 같고, 상통(相通)한다.

 

  가가와 선생은 의사가 선고한 3년의 시한부(時限附) 인생을 살아야 했다. 좌절하지도 않았고, 방황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여생(餘生)을 어떻게 가치 있게 살까 고민하고 실천했다. 자신을 스스로 세운 거인(巨人)이다. 가가와 선생은 3년만 더 산 것이 아니라 72년을 향년(享年)’했다. 이분의 긍정적 가치관이 죽음을 초탈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모두 시한부다. 많은 사람은 영원히 살 것 같이 시간을 낭비하며, 무의미한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범인(凡人)과 거인의 차이다.

대구대학교와 가가와 목사의 관계

  가가와 선생은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실천가다.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같이했고, 가난한 백성에게 풍요를 주었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제도는 모든 사람이 더 잘 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 복지사회의 이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무겁든 가볍든, 짐을 지고 산다. 그 모든 짐이 작고 가벼워지면, 큰 짐을 진 사람이나 작은 짐을 진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평안할 것이다. 아주 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크지도 무겁지 않은 사회를 이루는 것이 오늘날 복지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이다.

 

  이영식 목사와 가가와 도요히꼬 선생은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이영식 목사가 유학한 고베신학교에서 두 분이 만났고, 고베신학교 동문이다. 같은 장로교 목사로서 사상이나 그 실천에도 유사점이 많다. 가가와 선생의 후배요 그를 측근에서 지키고 보살핀 구로다 시로 목사 역시 고베신학교 교수로, 또 동문으로 이영식 목사와 사상이나 실천에서 영향을 주고받은 것 같다.

 

  이분들의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이었다. 평등과 자유, 가난한 자 섬기기, 사회 정의 바로 세우기 등을 이 두 분은 성실히 실천하였다.

 

  이영식 목사는 두려움이 없는 분이다. 가난도,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미래도, 어떤 위협도, 심지어 죽음도 그분을 두렵게 하지 못했다. 두려움이 왜 없었던 것일까. 그 영혼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세상사(世上事)를 당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자신(自信)을 갖게 하고, 긍정적 결과를 기대하게 하며, 더 나아가 행동하게 할 것이다. 이 행동이 사랑의 행위이다.

 

  그의 사랑은 여러 행위로 나타났다. 한센병 환자에게로 향했고, 심신의 손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고, 범죄를 저지른 교도소에 갇힌 수인(囚人)에게 향했다. 말년에는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 이름 없이 객지에서 죽은 원혼(冤魂)을 수습하여 귀국시켰다. 이런 일들은 오직 사랑의 행동인 것이다. 그가 이런 일을 행하시기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갈등과 방황과 공분(公憤)의 삶을 사셨을 것이다.

이영식 목사께서 낮은 데서 봉사하신 첫 번째 일은 한센병 환자를 섬기는 일이었다. 신동에 있는 한센병 음성환자분들의 교회. 애락교회

  이영식 목사의 녹음된 진술을 들어보면, 고베신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 서문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무언가 모를 갈등을 많이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왜 갈등하셨을까. 대구 서문교회는 큰 교회다. 비교적 안정된 목회와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영식 목사는 갈등했다. 일본 고베에서 겪은 경험과 이 목사에게 형성되어있던 복음에 대한 가치관이 교회의 실상과 괴리에서 온 갈등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교회를 사임하고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은 길로 나가셨다.

 

  이후 이영식 목사의 삶은 유랑(流浪)이었다. 17년여의 세월을 대구 계성학교 교목으로(1928), 대구 나병환자 교회로(1929-1937), 경북 의성교회 목사(1937), 이북의 성진교회로(1938), 만주의 명월교회로(1941), 일본의 요꼬하마(橫浜) 교회로(1943) 전전하며 보낸다. 복음주의적 삶의 길을 찾아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약자를 돌보고 보살피는 긴 여정을 걷게 된 것이다.

 

 

  나. 사랑의 사도(使徒) 이영식 목사

 

  이영식 목사는 성경의 원리에 충실한 기독교 사상가요 사랑의 실천가이시다. 이영식 목사는 신학 이론가라기보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실천한 분이고 진리에 관해서는 본질주의자이셨다. 기성교회의 시각으로 보면, 상당히 선진적인 생각으로 비쳤을 수 있다.

 

  형식화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이단시한 것이나, 교권화된 중세 가톨릭이 성경으로 되돌아가려는 개혁주의자들을 탄압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오늘날도 형식화된, 교권주의적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호도(糊塗)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1. 그리스도의 사랑

 

  이영식 목사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 목사에게는 사랑의 실천 강령이었다. 광복 후 이영식 목사는 교회 목회보다 낮은 곳을 향하여 소외된 사람들과 같이한다. 광복 후의 삶은 한센병 환자를 돌보시는 일로 시작한다. 1945년에 대구시 대명동에 천막치고 한센병 환자를 돌보시고, 그 이듬해인 1946년에는 맹인과 농인을 돌보시는 일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b; 4:16b). 이영식 목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버려진 사람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 그가 다가간 것은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정신이다. 예수님은 고난주간 화요일 저녁에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에 가신다. 여기서 제자들을 훈련하시기 위해 많은 강화를 하셨다. 제일 마지막 강화가 최후의 심판(審判)이다.

 

  우측에 선 자와 좌측에 선 자, 양과 염소로 나누신 예수님의 강화는 두 부류의 구분이 매우 간단하다. 우측에 선 자는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다.”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다.”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다.” “헐벗었을 때 옷을 주었다.” “병들었을 때 돌보았다.”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25:35, 36). 이들은 인정받은 자들이고, 좌측에 선 자는 그렇게 못한 사람들이다.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 1950년대 황량한 대지 위에 세워진 라이트하우스(맹 농아 기숙사), 이곳에서 이영식 목사는 일생을 그들과 같이 생활하셨다.

  이런 일은 예수님에게 행한 것이 아니다. 이웃에게 행한 일이다. 내 이웃에게 행한 것은 곧 예수님에게 행한 것이라는 강화다. 임금(심판주)은 우측에 선 자, 즉 양들에게 천국을 상속받으라 하셨다. 좌측에 선 자들은 버림을 받고 영벌(永罰)을 받는다는 강화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삶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대 원리를 깨닫게 된다. 교회 안이나 가정에 머무는 삶은 주님께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 사회적 약자까지, 내가 만나는 모든 분을 섬김은 곧 주님께 행하는 것임을 배운다. 내가 만나는 모든 분이 VIP이고 주님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이영식 목사의 사랑은 두려움이 없는 사랑이다. 믿음에서 나오는 사람 사랑이다. 그는 낮은 곳에 임하여 소외된 사람,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인간다움을 세워주고, 자유하게 하며, 그들의 짐을 덜어내 가볍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정과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정의는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고, 법이 제정되어야 하고, 이 분야의 지도자 양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2. 빛의 사상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1:5; 9:5).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동시에 빛이시다. 이 원리는 촛불에서 빛이 나오는 것과 이치가 같다. 초는 불을 붙였을 때 그 기능을 발휘한다. 촛불은 초가 제 기능을 발현(發顯)한 것이다. 초의 생명은 곧 촛불이다. 초가 빛을 발현한다는 것은 초가 불타고 있다는 증거다. 촛불(사랑)이 빛을 낼 때 비로소 초가 제 기능을 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 빛이 있다고 요한은 말했다(1:4).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이시다(요일1:2, 14:6).

 

  이영식 목사는 살기 어렵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자유인(自由人)이 되게 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사랑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것이 빛이며, 이 빛이 있어 자유롭게 된다.

 

  천지창조 첫날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보시기 좋았더라.” 하나님의 천지창조 전 우주는 혼돈(混沌)과 공허와 흑암이었다. 첫날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우주 창조의 신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으로 맨 먼저 빛을 창조하신데 있다. 첫날 빛을 창조하시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질서와 채움과 밝음이 대신하게 하신 것이다. 빛의 창조로 혼돈(chaos)에서 조화와 질서(cosmos)를 이루셨고, 공허(void)에서 충만(fullness)을 이루셨고, 흑암(darkness)에서 광명 곧 밝음(lightness)을 이루신 것이다. 천지창조는 엿새 동안에 이루어진다.

 

  창조 전의 혼돈, 공허, 흑암은 빛의 도래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이영식 목사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전쟁과 가난 그리고 사회의 무질서 등을 몰아내고 바로잡는 길은 사랑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야 광명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기성교회와 한국사회의 문제는 혼란과 공허와 흑암 때문이라 할 수 있기에, 낮은 데로 빛을 비추면 이 문제들이 해소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과 빛은 동시적이다. 빛은 사랑 안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밝음이 있고 어둠은 사라진다. 세상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예수님 말씀임을 요한은 증언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빛을 증언할 소명이 있다. 이 책무(責務)가 이영식 목사와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에게는 강렬한 소명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자신을 빛이라 하시고 그 빛은 잠시 머문다고 하셨다. 그리고 빛이 있을 때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하시고 아직 빛이 있을 때 빛을 믿어라.” 하셨다. 자기를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왔으나 어두운 세상은 빛을 알지 못하였다.

 

  이영식 목사는 그 빛을 갈구하셨고 확신하셨다. 낮은 데 임하여, 소외된 사람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속박된 사람들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셨다. 그리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며, 자존(自尊)하게 되어 사회정의가 구현될 것이라 믿었다.

아무 구애됨이 없는 작약은 자연에 순응하는 자유의 화신일께다.

 

  3. 진리에서 오는 자유

 

  사랑의 빛은 자유를 보장한다. 예수께서 이르시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진리란 무엇일까.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원리일 것이다. 흑암에 사는 사람이 광명(光明)의 세계로 나오게 하는 길일 것이다. 진리는 듣고 깨달아야 한다(7:14). 깨달아 아는 것을 넘어 정신세계가 변해야 한다(12:2; 고후5:17).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 행함이 있어야 한다(6:4).

 

  자유로움이란 삶에 구애됨이 없는 것이다. 막힘이 없는 것이다. 속박됨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사람을 속박할까. 물리적 환경, 신체적 손상, 사회적 편견, 사회적 불평등, 이 모든 것이 사람을 억압하고 짐을 무겁게 하는 것들이다.

 

  이영식 목사의 사랑의 빛은 소외된 자가 자유인으로 변모하는 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다. 사람을 자존적 존재로 세우는 길이다. 이러한 사람의 변화와 더불어, 사회도 바뀌어야 한다고 보셨다. 그리하여 사회제도의 변화, 법과 정책의 변화, 사회계몽 등 모든 면에서 노력하셨다.

 

  이영식 목사는 자유인이었다.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갈파한다. 이는 진리에 통달한 자에게 나타나는 삶의 모습이다. 물질세계를 초탈한 삶이었다. 삶과 죽음까지 뛰어넘은 초인(超人)의 모습이다. 이런 삶의 모습은 기성 교회지도자들이 그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영식 목사는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적 문제를 달통(達通)한 분이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법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한 선각자(先覺者) 이시다.

 

 

202389()

2023 J. K.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