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단상(斷想)] 90. 여백(餘白)

profkim 2023. 8. 15. 17:30

 

쪽빛 하늘과 구름과 산과 숲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능소화의 어울림

 

                                    90. 여백(餘白)

 

 

 

  여백(餘白 white space)은 종이 전체에서 그림이나 글씨 따위의 내용이 없이 비어있는 부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인쇄물은 글이나 그림으로 채워진 부분과 비어있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글이나 그림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비어있는 부분도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나는 60년대 활판(活版)인쇄로 책도 만들고 자료 제작도 했었다. 당시 물가와 비교하면 출판비가 엄청났다. 가난한 시절에 책 한 권이라도 출간하려 하면 원고작성부터 출판에 이르기까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사이 저자가 워드를 하고 편집하여 출판사에 넘기면 출판사에서는 여러 가지 기술적 가공을 하여 쉽게 출판을 한다. 격세지감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와 대자연에 여백을 메꾸는 능소화(凌霄花=금동화)

  활판인쇄란 활자를 집자(集字)하여 조판(組版)하고 지형을 만들어 인쇄하는 방법인데 시간과 노력이 무척 많이 드는 인쇄술이다. 60년대 이런 방법으로 인쇄를 했으니 얼마나 시간이 걸리고 인력은 얼마나 필요했겠는가! 이런 시절에 출판하려면 출판비 때문에 면(page)마다 글자 수를 많이 넣어서 페이지를 줄여야 출판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책을 열면 답답한 느낌이 들게 된다. 독자의 느낌이나, 글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기보다는 출판비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었다.

 

  인쇄물 즉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은 독자를 위해서 제작하는 것이다. 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독자의 편안함과 독서능력을 고려하고 독자의 접근이 쉽도록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저자나 제작자는 책을 위시한 출판물의 소비자인 사회, 도서관, 독자에게 정보에 접근하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소비자 중심의 출판물이 되어야 한다.

8월의 능소화는 대자연에 여운을 남긴다.

  책을 예로 든다면 종이 위에 까만 활자는 종이 색깔과 대비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주지만, 공간들 즉 여백은 활자와 조화를 이루어서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 주변의 공간, 줄 간의 여백,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여백은 활자에 못지않은 의미 전달을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한다.

 

  한글을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이후 450년간은 한글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고 사대부는 쓰지 않고 아녀자나 사용하는 글 또는 천민이 쓰는 글로 천한 글 언문(諺文)으로 존재했었다. 그런데 한글을 띄어쓰기를 시작한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미국 선교사인 호머 헐버트였다니 놀랄 일이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인데 한글은 언문(諺文)에서 세계적 우수한 글로 명예를 찾았다.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한국명 許轄甫 1863-1949)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1886년 부임했으나 육영공원의 재정난으로 1891년 육영공원을 떠나 잠시 미국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2년 뒤 1893년 배재학당의 교사로 다시 부임하게 된다. 헐버트는 배재학당에서 주시경이란 학생을 만나고 나중에 주시경을 자신이 운영하는 삼문출판사에 채용해서 같이 일하게 된다. 주시경은 이후로 한글연구에 평생을 바쳐 한글 현대화에 크게 기여 한다. 주시경의 선생님은 헐벗이었다.

 

  서재필이 1896년 헐버트를 찾아와서 독립신문 간행(刊行)을 협의하게 된다. 서재필은 민족의 각성과 독립을 이루기 위한 활동을 하려 했고 그 일의 하나로 독립신문을 간행하기로 했으나 당시 인쇄소는 정부의 방문국과 헐벗의 삼문출판사 뿐이 어서 호모 헐벗과 상의하게 되었다. 이들은 독립신문을 한글로 발간하기로 합의했다.

하늘의 영광이 같이하는 꽃 능소화

  그러나 띄어 쓰지 않는 한글은 뜻 전달이 너무 어려워서 한자로 발간하자는 서재필에게 한글은 우수한 문자이고 문화(文化) 독립(獨立)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뜻 전달이 어려운 것은 띄어쓰기하지 않아서라고 설명하고 띄어쓰기하면 뜻이 분명히 전달된다고 설득해서 독립신문을 한글로 간행하게 되었다.

 

  한글처럼 우수한 문자가 천시되고 널리 쓰이지 않았던 것은 사대주의적 사고가 컸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뜻을 이해하기 어려워서이었다. 그러나 띄어쓰기함으로 오늘같이 쉽게 배우고 쉽게 이해하는 아주 우수한 문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자간(字間)의 여백(餘白)이 전달하는 이미지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한글 띄어쓰기는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때를 같이한 것이다.

한글 띄어쓰기로 뜻이 잘 통하게 된 것 같이 능소화는 한여름 자연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줄 간의 여백 역시 많은 이미지를 갖는다. 작가가 쓴 글을 독자는 나름의 해석을 하게 된다. 작가 역시 글로 다 쓸 수 없는 것들을 행간(行間 줄과 줄 사이의 여백)에 남겨둔다. 글을 읽는 독자는 끊임없이 유추하여 저자와 소통한다. 이런 여백이 또 다른 창작물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적절하게 띄어진 행간은 책의 한 면의 이미지를 결정한다. 여백(餘白)에는 미()가 있다. 활자와 여백의 배합은 독자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잘 디자인된 책은 독자에게 편안하고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주황색과 푸르름의 조화

  정신세계에서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 여백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앞만 바라보고 달리면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속도가 올라갈수록 시야(視野)가 좁아진다고 한다. 빠르게 달리면 옆이 보이지 않겠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상황이다.

 

  부자가 되려고 집착하는 사람은 사기를 당하고, 성취욕에 불타는 사람은 삶의 중요한 것을 잃게 되고, 출세에 집착하는 사람은 남는 것이 없고, 돈을 사랑하면 벗이 없고, 입시에만 매달리면 지혜가 없어진다. 건강한 식사는 골고루 먹는 것이라 한다. 참 진리이다.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서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하늘의 구름과 산과 능소화의 어울림은 여백에서 찾는다.

  우리 삶의 모습은 무척 다양하지만 하나의 원리는 너무 집착하지 말고 여백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런 여유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힘을 갖게 하며, 삶을 통달하는 힘을 가질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넉넉히 비워놓아서 사물을 관조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2023815(78회 광복절에)

2023 J. K. Kim

 

 

하늘이 보내주신 이 능소화를 광복 제78주년에 호모 헐버트에게 헌화(獻花)한다.

   주)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는 한글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였다. 고종황제의 명으로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특사 임명을 받아서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Hague)에 파견되는데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을 파견하는 일과 현지에서 돕는 일을 했고 대한제국의 입장을 널리 알리는 일을 했다. 이 일로 한국에서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고 미국에 가서도 계속 대한독립을 위한 활동을 한 분이다. 1948년 우리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광복절에 정부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으나 한 달여의 배편으로 오는 여독과 노령으로 인해서 한국에 도착하여 일주일 만에 소천하여 마포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묻힌 분이다.

 

  헐버트에게 우리나라 정부는 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14년에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헐버트는 188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교육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한국 도착 3년 만에 만들었다. 이 책은 세계 지리와 역사 교과서인데 양반이나 백성이 모두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