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단상(斷想)] 106. 퇴색(退色)한 사진 이야기

profkim 2024. 4. 7. 14:03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1928년 입학생(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 이며, 9월 4일 개교했다.

 

                    106. 퇴색(退色)한 사진 이야기

 

 

 

  오래전, 백 년 전쯤에 촬영한 사진 몇 장을 손에 들었다. 사진기가 귀하던 시절이니 사진사(寫眞師)가 출사(出寫)하던지 귀한 카메라를 사용했던 시절의 사진이다. 아날로그 사진 초기이다. 그 시절 사진을 촬영하면 으레 사진 하단에 촬영한 날짜며 중요 사연을 글자로 써넣는다. 이런 기록마저 없었으면 사진에 관한 정보를 전연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내가 손에 든 사진들은 좀 색다르다. 사진 전면과 후면 그리고 별도 용지에 사진에 관한 설명을 기록해 두어서 100여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진들은 우리나라 문화재로서의 훌륭한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잘 보존되기를 바란다.

우리나라 최초(1900)의 서양의학 의사가 된 김점동(Dr. Esther Kim Pak)과 남편 박유산이다. 에스더 박은 1900-1910, 10년간 의사로 활동했으나 1910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우리 삶의 실상(實狀)을 글로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기록을 잘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디지털시대 사진 촬영도 많아졌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내용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내게도 사진이 수천 장이 있지만 지금 꺼내 놓으면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개념이 없고,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의문을 갖게 되지만 답은 간단하다. 사진 촬영과 더불어서 사진에 관한 기록을 해 두지 않아서이다.

 

  어떤 일들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곧 망각하게 된다. 본인도 모르겠지만 그 후세대들은 내용을 전연 모르니 내용전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현장이 후세대에 전달되지 못하게 된다. 중요한 문화 자산이 소실되는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로 남지 않는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이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1933년 입학생 사진인데 홀 선교사는 사진 뒤에 기록을 해 두었다.

 

  삼십 년 전에 나는 한국 특수교육 백년사를 편찬해야 했었다. 우리처럼 기록에 소홀한 민족에게 백년사 편찬이란 허구가 될 가능성이 무척 크다. 역사 과정(過程)의 자료가 보존되지 않은 경우, 소설을 쓸 가능성이 크고, 책을 만들 당시의 일들을 중심으로 편찬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특수교육(맹인교육)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Dr. Rosetta. S. Hall(1865-1951)의 자료를 접할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분은 자료를 잘 보관했을 뿐만이 아니라 자료 대부분에 자필로 설명을 붙여 두었었다. 개화기 우리나라에서 선교 활동은 신교육과 서양의학을 들여와서 선교의 수단으로 삼았었다. Dr. R. S. Hall(홀 선교사)이 평양에서 특수교육을 시작하고 서울과 평양에서 여성의학교육과 여성 환자를 상대로 의료 활동을 시작한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특수교육에 관한 자료는 이미 소개한 바가 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의학교육 관계 자료를 봄으로 Dr. Hall의 역사의식을 다시 조명해 볼 수 있다. 홀 선교사는 1890년에 미국 감리교화 여성 선교단체에 의해 조선에 파견되었고 1892년에 William J. Hall(1860-1894)과 결혼해서 아들 Sherwood Hall(183-1991,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만든 분)을 얻었고 1894William Hall이 과로로 하늘나라에 가신 후, 유복자로  Edith Margaret Hall(1895-1898)을 얻었으나 이 딸도 어려서 하늘나라로 갔다. 불행한 일들이 겹쳤다고 보아야겠지, 그러나 그의 활동은 눈부셨다.

홀 선교사 회갑에 아들 Dr. Sherwood Hall과 같이한 사진이다. Dr. Sherwood Hall은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Christmas Seal을 만든 분이다. 모자가 결핵 퇴치 운동을 하였다.

 

  홀 선교사는 의사로서 여성 환자 진료에 끝난 것이 아니다. 여성 의료전문인력 양성의 필요를 절감했었다. 한국 여성은 한국 여성 의사가 진료해야 한다. 그래서 에스더 박(김점동)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 Baltimore)에 유학하게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의사를 1900년에 탄생 시켰는데, 박에스더는 1890년 홀 선교사가 이화여자대학에 개설한 의예과(pre-medical) 입학생 5명 중 한 명이었다. (H. H. Underwood. 1926. p. 154). 5명 중 한 명은 일본 여성이었는데 후에 약사가 되었다고 한다.

Dr. Esther Kim Pak은 1900년에 Wome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 Maryland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에 의한 여의사가 되었다.

 

  홀 선교사는 1912년에 평양에서 여자의예과를 개설했다. 이들 학생 중 3명은 서울 관립 보통의학교(필자 주(): Government General Medical School, 광복 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같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됨)에 전학시키고 이들 3명은 1918년 정부로 부터 의사 면허증을 받았다. 이들 세 명은 Dr. H. Kim, Dr. Y. Kim. Dr An이라고 홀 선교사는 사진에 기록해 두었다. 1921Dr. A. N. Kim은 북경에서 Union Women's Medial College of Paking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증을 받았고 일본 동경 여자의과대학에도 여러 명의 한국 여성이 유학하도록 했던 모양이다. 이들 이름을 첫 글자(initial)로만 표기해서 한국 이름을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관립 보통의학교(Government General Medical School)를 1918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세 분은 Dr. H. Kim, Dr. Y. Kim. Dr An이라고 써 놓았다.

 

  홀 선교사는 그의 선교 말년에 해당하는 1928년에 조선여자의학강습소(Korea Women's Medical Institute)를 설립해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여성 의료인력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는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前身)으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38), 서울여자의과대학(1948), 수도의과대학(1957), 우석대학교 의과대학(1966)을 거쳐서 1971년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된다.

홀 선교사의 은퇴와 환송을 위한 만찬이 있은후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교직원과 학생이 한강 변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홀 선교사는 말년의 사업으로 한국 여자 의학교육의 기둥을 세운 분이다. 1933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가시기 전까지 매년 입학생의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기록을 써넣어서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초기 입학생의 면모를 소개 한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1930년 입학생

 

  나는 오늘 이 사진 몇 장을 손에 들고 역사여행을 하였다. 사진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록이다. 물론 사진도 기록이지, 그러나 의사소통이 되도록 기록해야 한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분명 가르침이 있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1931년 입학생

 

  요즘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 유품을 불살라 버린다고 한다. 어리석은 일이지, 물론 버려야 할 것도 있겠지, 그러나 정신적 유산이 될 것들이 있을 것이다. 가치를 모르면 버리게 된다. 문화유산으로 남아야 할 것들이 사라지게 되면 상실이겠지, 홀 선교사는 감리교 선교 보고를 통해서 기록을 남겼고, 그 후손들이 많은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기록하고 보관하는 지혜가 그에게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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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J. K.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