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대구대학교 회상(回想)
우리나라 1960년대 초는 암울하고 가난하던 때이다. 한국전쟁의 상흔(傷痕)이 다 가시지 않았고 국가는 가난하고 사회질서 역시 혼란하던 때이다. 무엇하나 정착된 것이 없던 때라 하면 어떨지, 이런 때 나는 대구대학 특수교육과에 부임했다. 오늘 2024년 3월 1일은 내가 대구대학에 부임한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직 내가 건강하여 글을 쓸 수 있어 간단하나마 회상의 글을 쓴다.
대구대학은 각종학교 즉 한국이공학교로 5년을 지내고 1961년에 특수교육과 한과로 대학설립인가(당시 한국사회사업대학)를 받았다. 이 해가 군사혁명이 일어나는 해이고 당시 사회에서는 누구의 부르짖음인지 “대학 망국론”이 나와서 대학을 나라를 망치는 기관으로 매도하게 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대구대학은 4년제 대학에서 초급대학 2년제(한국사회사업초급대학)로 강등되었다. 겨우 신입생 한 번 받고 1962년에는 초급대학 2년제로 강등되면서 1개 과가 증설되어 특수교육과와 사회복지과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1964년에 4년제 대학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특수교육과, 사회복지과, 산업복지과 편제로 확충되었지만 1학년 신입생은 120명에 불과했다.
내가 부임한 1964년 3월 1일은 대구대학이 4년제 대학으로 복귀한 때이다. 당시 초급대학 1회는 그해 졸업을 했고 초급대학 2학년이 있었다. 4년제 1학년과 4학년이 있었고 2, 3학년이 없었던 때이다. 다음 해 1965년에 4년제 1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초급대학 2회 졸업생을 배출함으로 초급대학은 없어졌다.
내가 부임한 1964년의 교수는 이태영 학장, 이영환 부학장, 장기주 교무과장, 박병각 학생과장, 안태윤 교수, 서석달 교수와 배기태 교수가 있었고 1964년 나와 유창우 교수가 신임 교수로 부임해서 모두 9명의 교수진으로 구성된다. 아주 적은 수이지만 당시 대구 시내 대학교수를 모두 합쳐도 200명이 안 되던 때이다. 우리 대학 교수가 대구 시내 대학 가운데 제일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어느 대학이나 교수 수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학교 재정이 항상 어려웠다고 본다. 학생 수가 많으면 자연 모든 문제가 풀려나갈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니 이태영 학장의 짐은 항상 무거웠을 것이다. 혼자서 모든 짐을 져야 하니 고뇌가 크셨을 것으로 안다. 사실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68년에 실시한 대학입학예비고사가 큰 타격을 주었다.
우리 대학이 1969년 신입생을 모집하는데 120명 모집에 단 8명이 지원하여 동아일보 머리기사로 보도가 되고, 학생이 없으니 이 8명은 모두 4년 장학생으로 뽑고 학기 중에도 계속 학생을 모집해도 정원의 반도 채우지 못하였다. 대구대학이 위기를 맞았다. 이해 서울대학에도 미달 과가 있었으니 교육정책의 실패라 해야 할 것이다. 조금씩 나아졌지만 이런 현상은 1972년까지 지속 되었다.
우리 형편이 좀 나아진 것은 1974년인데 특수교육과 정원이 주간 60명, 야간 60명으로 대폭 증원된 때이다. 이때 특수교육과에는 두 개 전공이 있었다. 즉 일반사회교육 전공과 과학(화학)교육전공이다. 나는 교과 전공이 다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이태영 학장과 협의 하여 전공의 다양성의 필요를 공감하게 되었다.
이태영 학장의 노력으로 1974년 기존 2개 전공 외에 국어교육, 영어교육, 수학교육, 그리고 특수교육 전공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처음은 전공이 아니고 코스로 설치했다가 후에 정공으로 편재를 바꾸었다. 이를 계기로 사범대학에 여러 교육과가 생기게 된다.
나는 특수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과 교사를 우리 대학에서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일을 맡고 있었던 기간 중 1974년에서 1982년 사이에 기존 2개 과 외에 전공으로 개설한 것은 국어, 영어, 수학, 특수, 생물, 물리, 역사, 지리, 체육, 유아, 초등특수, 치료, 상업, 전자교육 전공 등 14개 과이다. 이들 전공은 차츰 독립된 과로 승격하게 된다.
알 수 없는 것은 체육교육과가 인문대학으로 옮겨간 일이다. 그래서 사범대학에서 빠졌고, 치료 특수교육과는 교육부 방침으로 폐과가 되었다. 전자와 상업교육과는 내 보직 기간에 폐과를 시켰다. 이때 만들어진 14개 학과 중 현재 10개 과가 사범대학의 과(科)로 남아있다.
1960년대 특수교육은 소외된 영역이다. 일반 학교 역시 어려운 시기였지만 특수교육은 제도적 보장을 받는 처지가 아니니 완전히 소외된 영역이었다. 이런 때 대학운영이나 부속 특수학교 운영은 더 어려웠다. 힘든 시간이었다. 1968년 당시 문교부는 우리 대학에 전국 일반 초중등학교 교사 80명을 선발하여 장애 영역(시각, 청각, 지적장애, 지체)별로 20명씩 선발하여 240시간 연수와 교사 자격증 부여를 목표로 하여 연수를 시킨 일이 있는데 이로 우리 대학은 무척 고무된 적이 있었다. 일반 학교 교사가 우리 대학에서 연수를 받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
우리나라 일반 학교에 개설된 특수학급은 1974년에 전국 시군구(市郡區)에 1학급씩 개설한다. 이 해에 177개 학급이 개설되었는데 1973년에 문교부에서 특수학급 설치 방향을 정하기 위한 세미나를 우리 대학에 위탁해서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세미나를 열었고 정책 방향을 제시한 일이 있었고, 당시로써는 일반교사 가운데 특수교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문교부는 시군구에서 한 사람씩을 뽑아서 우리 대학에 위탁하여 1974년 1월에 대명동 본관 강당에서 연수를 시켜 특수학급에 배치한 일을 했다. 이는 1975년에 똑같은 형태로 한 번 더 실시했다.
우리나라 특수교육이 제도권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일은 1977년에 제정된 특수교육진흥법이다. 물론 이 일을 성취하는데 우리 대학의 기여는 아주 컸었다. 이영식 목사, 이태영 총장의 노력이 제일 컸고 당시 한국 특수교육협회장인 김동극 교장을 위시한 특수교육의 원로들 기여를 잊을 수 없다. 이 법으로 장애인 문제가 제도권에서 보호받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대구대학교는 1982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게 된다. 대학 인가받은 후 21년 만이다. 이태영 총장은 이일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구대학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때 교명도 “한사대학”에서 대구대학교로 바뀌게 된다. 많이 흥분되던 때이다. 대구 시내 대학들이 교명으로 대구대학교를 쓰는 일에 반대하여 잠시 주춤했지만, 이태영 총장이 잘 마무리하셨다.
당시 문교부에서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제도권에서 처음 제정하게 되었다. 문교부 연구관에게서 내게 전화가 왔다. 우리나라 제4차 교육과정 개정의 하나로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처음 개정하려는데 일을 맡아주겠는가? 나는 그리하겠노라 하고 일을 맡고 교육과정 개정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어서 교사용 지도서와 교과서를 만든 일을 하였다.
제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1982년에 다 마쳤고, 그다음 해에는 특수학교 교사용 지도서와 교과서 제작도 28권이나 해냈다. 1986년에 제5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위원장으로 개정작업을 하였고,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제6차 개정작업은 하지 않았고, 1996년에 제7차 특수학교 개정위원장으로 세 번 국가 교육과정 개정위원장을 맡았었다.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전자화하여 교사가 편집할 수 있게 한 것은 상당히 선진화한 것이었다. 이는 내가 대구대학교 교수이기 때문에 가능했었고, 또 내가 있어서 대구대학교에서 세 번 개정작업을 맡았다고 생각한다.
대구대학교가 종합대학이 되고 학교 발전이 눈부실 때 이태영 총장에게 신병(身病)이 생겼다. 이 일은 대구대학교에 가장 어두운 그늘이었다. 1980년 학생들의 극렬한 시위와 학교 격무(激務)에 시달리시던 이 총장께서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결국 미국으로 치료차 가시게 되었다. 험난한 시절이면서 학교가 급성장하는 때였다. 주체가 빠지니 학교는 선장을 잃은 배와 같이 되었다. 이 총장의 신병(身病)은 대구대학교의 먹구름이었다. 이 총장 꿈의 실현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었지만 기대하기에는 과불급(過不及)이었다. 너무 아쉬운 일이었다.
장애 영역 중 가장 소외된 곳이 지적장애이다. 지체부자유나 시각장애인들은 분명하고 강력하게 자기 의사를 표하고 권리를 주장한다. 지적장애인은 의사표시가 불분명하고 따라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1960년대 이들 부모 특히 엄마를 만나면 우울하였다. 이분들에게는 웃음이 없었다. 자식 문제 때문에 지친 상태였다. 전문가가 이분들의 문제를 10%나 느낄 수 있었을까? 1960, 70년대 미국에서 지적장애와 뇌성마비 부모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운동을 일으킬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1990년대 초에 사단법인 지적장애인복지협회(당시 명칭은 대한정신지체인애호협회) 회장직을 맡아야 했다. 이태영 총장이 계셨더라면 이 총장이 하셔야 할 일이다. 이 일을 맡은 것은 1991년이었고 이해 11월에 파키스탄 카라치(Karachi, Pakistan)에 가서 아시아지적장애연맹(AFID) 회장직을 맡고 1993년 8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1,300여명이 참석하는 11차 아시아정신지체복지대회(11th Asian Conference on Mental Retardation, 1993)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아시아정신지체복지대회 참석인원이 1,000명이 넘은 경우는 처음이었고, 이로 한국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성공적으로 회의를 하기 위해서는 기금 확보, 참가회원 확보, 효율적 프로그램 운영, 알찬 메시지 구성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 대회를 치르면서 지적장애아 부모대학을 운영한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1992년과 1993년 두 해 사이에 1년 32일 64시간 과정으로 3년 과정을 운영했는데 전국 15개 시도(市道)에서 무려 연인원 5,000여 명이 수료하여 우리나라 부모 운동의 활성화를 기하였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오늘 부모의 역할은 무척 증대되었다고 보이며, 앞으로는 본인 중심의 당사자(當事者) 운동이 전계 되어야 하는데 지적장애인들은 이 일이 어려워서 도우미가 필요하다.
나는 대구대학을 중심으로 많은 분을 만나고 사귀고 같이 일해왔다. 우선은 동료 교수분들 특히 초창기 교수와는 고락을 같이했다. 1960년대 교수는 몇 분 되지도 않았지만, 퇴근 시간에는 같이 나가는 날이 많았다. 삶이 어려운 시절에 어려움을 서로 나누는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안태윤, 장기주, 장 훈, 서석달, 김인환 교수와는 많은 시간을 같이했다. 이태영 총장은 가끔 시간이 나면 영화 보신 이야기를 변사처럼 재미있게 말씀하셔서 청중은 항상 진지했었다.
교육부 편수실과도 많은 교유가 있었다. 20여 년을 같이 일하면서 맺어온 인연이 깊다. 갈등도 있었지만 서로 믿고 일해 가는 도정은 진지했다고 본다. 편수 관리관(국장)을 지낸 함수곤 교수, 유천근 선생, 교육과정 담당관을 지낸 김상대 선생, 한상진 선생 등 많은 분과 교유가 있었다. 대구대학교 졸업생인 김만곤 과장은 성심껏 나를 도왔다. 우리 대학 국어교육과 초기 교수였던 이현규 교수의 제씨 되는 이목규 과장은 제7차 교육과정 개정 시 많은 힘이 되어주셨다.
1980, 90년대 대학원에 수많은 학생이 모여와서 활발하였다. 전국에서 우리 대학원에 수학하러 왔다. 이때가 특수교육 확산 시기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반대학원뿐만 아니라 교육대학원과 특수교육대학원에 지원자가 줄을 섰었다. 이로 현장의 교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특수교육과가 더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만난 많은 분이 대구대학교 발전의 도우미들이었다.
많은 분이 유명을 달리했고, 오늘 나는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지내고 있어서 회고의 글을 쓰게 되니 감회(感懷)가 깊다.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는 분이 많지만 모든 분에게 신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2024년 3월 1일(목)
Ⓒ 2024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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