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한국 특수교육 130년
한국 개화기는 국난(國難)의 시기이기도 하고 새로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고요한 은둔(隱遁)의 나라 조선에 서양 선교사들이 찾아와서 신교육과 서양 의료를 펴는 시기이기도 하다. 19세기 말엽 우리나라를 찾아온 여의사 Rosetta Sherwood Hall(1865-1951, 한국 체재 기간 1890-1933)이란 분이 있다. 닥더 홀은 25세의 젊은 여성이었다. 미국 감리교회 선교부의 파견으로 한국에 와서 평생을 보낸 분이다. 닥더 홀은 1890년 한국에 도착해서 주로 한 일이 여성 진료, 여자 의학교육 및 여의사 양성, 맹 농아 교육 등이었다.
닥터 홀이 선교사로 파송되기전에 이미 품었던 이상은 어렴풋하지만 여성 인력 양성과 맹아에 대한 교육이었다. 그가 파송되기 전에 이미 뉴욕맹학교에서 다양한 지식을 얻어서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여성 의료인력 양성에 관한 꿈은 그녀가 한국에 도착한 1890년에 이화학당에서 다섯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의학교육을 시작한 점이다.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를 연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에 도착해서 선교지를 물색하는 중 최적지로 평양을 지목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당시로써는 소외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선교의 적지(適地)로 생각했었다. 1894년 평양에서 여성병원(진료소)을 개설하게 되고 당시 남편 Dr. William J. Hall의 첫 번째 신자이며, 조수였던 오석형 씨의 딸 오복래가 맹인 임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교육을 착수했으나 이해가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해여서 서울로 철수하게 된다.
이해를 한국 특수교육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닥더 윌리엄 홀이 이해 과로로 서거하게 되고 1893년 태어난 Dr. Sherwood Hall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에 의한 첫 여의사가 된 Dr. Esther Park(김점동, 1900년에 의사가 됨) 내외를 데리고 잠시 뉴욕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기간에 김점동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 Baltimore)에서 의학 공부를 하게 되고 닥터 홀은 뉴욕맹학교에서 점자에 관한 연구를 더 하게 된다.
당시 점자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부라유(Louis Braille, 1809-1852) 점자는 6점 점자로 개발되었고, 미국 뉴욕 점자는 4점 점자로 개발되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6점 점자로 대체로 통일이 되었다.
닥터 홀이 제작한 배재학당 교과서인 초학언문을 점역한 것은 단순한 점역이 아니다. 뉴욕 점자를 한글 어문에 맞게 한글 점자를 창안한 것이다. 그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897년 초학 언문을 점자로 번역해서 오복래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점자에 의한 신교육을 받았다. 닥더 홀의 이 점자책은 현재 4점 점자책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 최초의 점자책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고 대구대학교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개화기에 서울, 평양, 원산 등지에서 특수교육을 시작한 일들이 있었으나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어서 그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다. 1909년 닥터 홀은 한국 선생 2명을 중국 체후 농학교에 파견해서 훈련을 받게 하여서 이분들이 돌아와서 평양에서 농아 교육을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농교육은 1909년에 그 연원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지금은 특수교육 관련 국제회의나 세미나가 빈번하지만, 개화기에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았다. 닥터 홀의 주도로 1914년 평양에서 동아시아지역 맹 농 교육자대회를 열었다. 홀의 간단한 기록과 사진이 남아있어서 그 정황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은 회의 후 대동강 변에서 만찬을 마치고 사진사가 출사(出寫)해서 촬영한 것이다.
일본 강점기 제생원(濟生院 1913년 설립)에 맹아(盲啞)부가 설치되어 운영되었고 광복 후 서울맹학교와 서울농학교가 되었다. 광복과 한국전쟁 후 우리 사회가 재건되기까지 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교육은 아주 미미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62년 특수교육 통계를 보면 특수학교 10개교, 교원 수 120명, 그 많은 대상자 중에서 학생은 1,343명뿐이었다(자료: 교육부. 2023년 특수교육통계. pp. 10, 11).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설립된 첫 특수학교는 대구맹아학교이다. 이영식 목사는 그의 신앙 신조에 따라서 “낮은 데서 봉사하라”라는 명령대로 장애 학생에게로 향했고 평생 장애 학생 기숙사에서 같이 살면서 장애 학생 교육에 일평생을 바치셨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은 특수교육의 양적 증가를 촉진했다. 물리적 교육환경도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최근 30여 년간의 발전은 눈부시다 할 것이다. 특수교육이나 복지 정책은 그 국가의 경제적 부가 이루어져야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나라 역시 경제 성장과 특수교육의 양적 발전이 같이 이루어지게 된다.
홀의 평양맹학교를 한국 특수교육의 연원으로 보아서 1994년 한국특 수교육 100년을 맞게 되고 불충분하지만 1992년부터 한국 특수교육 100년사 편찬작업을 시작해서 1994년에 마치고 1995년에 “한국특수교육백년사”(대한특수교육학회 간)를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특수교육 발전을 대강 본다면 특수학교는 1962년에 10개교, 학생수 1,343명, 교원수 120명이었다. 2023년에 194개교, 학생수 28,942명, 교원수 10,146명으로 증가 되었다(자료: 교육부. 2023년 특수교육통계. p. 9).
특수학급 통계는 1974년 전국 시군구에 1개 학급씩 설치하여 210학급, 2023년에 학급수 13,287, 학생 수 61,993명, 교원 수 13,888명으로 증가 되었고 일반학급에 통합교육을 받는 학생이 18,474명이 된다. 특히 최근 30년에 많이 증가 되었다고 보인다(자료: 교육부. 2023년 특수교육통계. p. 9).
전체 특수교육 학생 수를 보면 109,703명이며 교원 수는 25,599명이다(자료: 교육부. 2023년 특수교육통계. p. 9). 대부분 학교는 학생이 감소하는 추세이고, 시설설비와 교원은 상당히 확충되어있는 추세이다. 한국 특수교육 130년을 맞아 지난날을 돌아보면, 원시시대부터 탈현대까지를 경험하는 것 같다.
양적 증가와 교육기술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보면서 그사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 가를 돌아보게 된다. 호대(浩大) 해진 한국 특수교육의 비전은 무엇인가? 130년 전 홀이 가졌던 열정과 꿈이 살아있는가? 초창기 교사들이 추구하던 몸부림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는가? 학생과 학부모들은 더 행복해 졌는가?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의식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 화려해진 특수교육 현장에서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좋겠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동력을 얻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와 한국 특수교육의 무궁한 발전을 꿈꾼다.
2024년 4월 28일(일)
Ⓒ 2024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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