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42. 도약의 시간

profkim 2020. 3. 15. 14:21



도약의 시간

 


 

  

내가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특수교육이란 먼 나라의 이야기 같은 시절이었다. 전국에 특수학교가 12개교 있었으나 국립학교 2개교, 공립학교 1개교이고, 나머지는 사립학교였다. 국공립학교 교사는 월급이라도 제대로 받았지만 사립학교 교원은 제대로 월급도 받지 못하고 학교의 운영도 학생들이 납입하는 공납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학교도 영세하고 교사 역시 제대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별로 없었다. 주변 사람 중에 자원봉사 정도로 학교에 근무할 사람이 있으면 채용해서 썼다.


서울 맹아학교에 사범과가 설치되어 특수 교사를 양성하긴 하였으나 그 수가 미약하였고 대학과정에서의 교사 양성은 그림의 떡이었다. 일반초등학교의 교사 양성도 사범학교 수준에서 하다가 1962년에 2년제 교육대학이 설립되면서 교사를 양성하던 시절이니 특수교육교사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에 부임할 때는 4년제 대학의 특수교육과가 설립되어 있었고 이는 특수교육교사를 양성하는 진일보한 체제였다. 내가 대학에 부임하던 다음 해에 정신지체강의가 개설되었다. 자연 내가 신임교수니 내 과목이 되었으나 학교도 없고 학생도 없는 정신지체 강의를 시작하려니 자료도 없고 정보도 없는 황무지와 같았다. 나는 우선 서울과 대구의 도서관을 뒤졌다.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자료는 찾기 어려웠다. 노력 끝에 찾은 것이 일본에서 간행된 강의록 2권과 Samuel A. Kirk이 저자인 Educating Mental Retardation 3권뿐이었다.


정신지체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무척 부담스러운 강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Kirk의 책을 1장부터 5장까지 타자를 치고 인쇄해서 소위 영어강독이라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1장은 개요가 되어서 그런 대로 이해도 되고 상당한 지식을 갖는 데 도움이 되었다. 2장은 정신지체 원인 부분이었다. 내용의 대부분이 의학 용어여서 내용이해는 고사하고 용어에서 막혀 내용이 제대로 파악 될 리 없었다. 그래서 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매주 하루씩 가서 설명을 듣고 내용을 파악하였다. 정직하다고 할까, 미련하다고 할까. 어쨌든 생소한 내용이었으니 새롭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의를 준비하였고 수업 때마다 진땀나는 강의를 하였다.


우리나라에 특수교육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으니 무슨 자료가 있으며 정보가 있었겠는가! 요사이 학부학생 수 천 명, 대학원생도 수 천 명이니 40년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대구대학교 이 태영 총장의 주선으로 1967년 잠시 동안 일본에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외국여행을 하는 것이니 흥분과 두려움이 엇갈렸다. 동경에서 2주 정도 머물면서 대학과 서점을 돌아다녔다.


마루 젠(丸善) 서점에 가서 나는 매우 놀랐다. 미국유럽일본에서 나온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고 내가 찾는 책들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책을 뽑아 들었다. 아마 2, 30권은 족히 뽑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문서적은 대체로 5,000엔 정도고 일본 책은 1,500엔 내지 2,000엔 정도였다. 내 월급17,000, 내 한달 봉급으로 책 4권은 살 수 있었다.


나는 뽑아놓은 책을 다시 꽂아 두고 4권만 골랐다. 숙소에 돌아온 나는 다시 꽂아 놓고 돌아온 책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다시 가서 또 4권을 사 왔다. 그리고 며칠을 걸쳐 몇 권씩을 더 사 모았다. 이때 가지고 왔던 책들은 내가 특수교육에 대한 학문적 눈을 뜨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잡지 신청을 위해 외환은행에 가면 수십 불짜리 잡지대금을 보내는 것도 지점장까지 결제를 얻어서 보내야 했던 시절이니 자료 수집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던 때였다. 나는 고베(神戶)대학에서의 1개월 동안 도서관과 연구실만을 오가며 자료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고베대학에는 특수교육과 교육학 관계 잡지가 100종 이상 들어오고 있었으며, 그것도 거의 모든 잡지가 초기부터 들어와 있었다. 우리 땅에는 없는 것이 일본에는 그렇게 준비되어 있었다.


근래 인터넷의 정보는 빠른 흐름으로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학문이든 경제 분야든 과거 고난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값진 교훈이 될 수 있다. 특수교육의 불모지에 작은 씨앗하나를 심는 마음으로 공부를 하던 시간에 일본에서 내가 보았던 모든 자료는 물과 거름처럼 귀중하였다. 밭을 일구고 씨앗을 심으며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과정이 더디더라도 농부의 손은 늘 흙 속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특수교육의 황무지를 일구는 일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하였다.


고베(神戶)에서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술잡지를 만나는 귀중한 경험을 한 셈이었다

수없이 여러 번 미국과 유럽과 동남아를 다녔지만 1967년 일본방문이 오늘의 기초를 만들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무척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일본을 견학한 것은 내게 큰 의미를 갖게 하였다. 새 세계를 열기 위해서는 항상 받침 튼튼한 기초가 있어야 하듯 일본 견학은 새로운 차원으로 가게 하는 도약대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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