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나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할머니는 이미 70대 노인이셨다. 동리에 환갑이 지난 노인은 손으로 셀 정도로 몇 분 안 되었고 당시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대략 40세 정도여서 우리 할머니는 동리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이셨다.
내 유년 시절의 많은 꿈은 할머니 방에서 키를 키웠다. 같은 방을 쓰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사랑을 많이 주셨고, 그 사랑은 내 성장의 거름이었다. 할머니의 말과 눈빛은 다사로움으로 정겨웠고 군불 넣은 아랫목처럼 따뜻했다. 나는 할머니 수발드는 일을 하곤 했다. 저녁이면 방에 군불을 때고 타고남은 숯불을 화로에 담아 방에 들여놓는 일이며, 물 한 그릇을 떠다 할머니 머리맡에 놓아드리는 일이며 요강을 깨끗이 비워다 놓는 일이 으레 내 몫이었다.
저녁에 화롯가에 앉아서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 이야기 듣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었다. 옛날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옛날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경계 하는 말씀을 하시다가도 한 가지만 더 이야기 해 달라고 귀찮게 졸라대는 손자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셨다. 나는 한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하나만 더 이야기 해 달라고 또 졸랐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 이야기는 참으로 다양했다. 뒤에 성장해서야 할머니의 화롯불 곁에서 들었던 옛 이야기가 대부분 우리나라 민담이며 전설이며 고전소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밤 두, 세 시가 될 때쯤 할머니께서 나를 깨우는 날이 더러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정권아!’ 라고 부르시고 또 흔들어 깨우시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깨어서도 얼른 할머니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를 깨우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께서 잡수실 물이 떨어진 것이다. 그 오밤중에 물을 뜨러 가는 것은 어린 나로서는 무섭고 괴로운 일이었다. 물독은 부엌에 있었다. 그 밤중에 부엌까지 가려면 깜깜한 마루를 건너는 일이며 귀신이라도 나올까 싶어 여간 두려운 게 아니었다. 내가 계속 자는 척하고 있으면 할머니는 슬며시 내 손을 잡아 당겨 당신의 혀에다 대셨다. 그럴 때 할머니의 혀는 모래알처럼 파삭하게 메말라 있고 내 손가락의 미세한 선으로 할머니의 갈증이 전해 오곤 했다. 잠시 할머니를 외면하려 했던 마음이 미안해진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물을 떠다 드리곤 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항상 자애로우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격하셨다. 할머니는 카톨릭 신자이셨다. 일본 강점기에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나도 성당에 가게 되었다.
옛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뒤편에는 종암 국민학교가 있었고 그 두 학교의 사잇길로 내려가면 언덕 아래로 포도원이 있었다. 그 포도원 사잇길을 지나 정겨운 누이 같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 붉은 벽돌집이 있었는데 그게 내가 다니던 제기동 성당이었다.
사실 나는 성당엘 가고 싶지 않았다. 성당마루가 무척이나 거칠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미사를 드릴 때 몹시 아팠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는 무릎이 아픈 성당의 미사에 가지 않기 위해 자주 꾀를 내기도 했었다. 종암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그네를 타고 놀다가 할머니가 언덕으로 올라오시는 것이 보이면 나는 성당에서 어린이 미사 시간을 마치고 이제 막 돌아가는 것처럼 태연히 걸어나와 할머니와 마주치고 ‘할머니 그럼 잘 다녀오세요’ 하고는 집으로 왔다.
할머니의 성화로 십 이 단도 외우고 교리문답도 공부하였다. 할머니는 나를 신실한 카톨릭 신자로 만드시려 무진 애를 쓰셨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면 할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날까만 생각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피난을 다니면서 할머니와 상당 기간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성당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멀리 있는 성당을 찾아가느니 이웃에 있던 개신교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할머니의 소망을 저버리는 일이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아시게 된 할머니는 무척 섭섭해 하셨다. 할머니로서는 정성 들여 교육을 시켰는데 내가 변심을 한 것으로 여기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나의 개종에 대해 ‘교회는 열교란 말이다’ 하시며 서운해 하셨다. 말하자면 개신교는 원가지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여기셨다. 사실 할머니가 종교개혁이나 기독교의 역사적 지식을 아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손자의 개종에 대해서는 무척 못마땅해 하셨다.
아들 삼 형제를 낳아 기르신 우리 할머니는 백수(白壽)를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70대 노인이셨는데 내가 교수가 되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하실 때까지 사셨다. 아들만 낳아 기르신 분이라 그런지 손녀보다는 손자에게 애정이 깊으셨고 나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셨다.
90 노인이 되었어도 나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의 개종에 대해서도 수용하게 되셨고 손자인 나에 대해 항상 칭찬과 사랑의 표현을 많이 하셨다.
그러시던 할머니께서도 세월의 힘은 거역하지 못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자신만 아는 할머니로 변하셨다. 잡술 것을 드리면 그것을 치마 밑에 숨겨 두기도 하셨다. 점점 더 기력이 떨어지는 할머니를 두고 보는 일은 가슴이 아팠다.
요새같이 좋은 세월이었더라면 할머니께 좋은 의복 입으시게 하고 자동차 타고 지리산이며 설악산에도 같이 가보고 금강산도 모시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계시지 않으니 생각해 무엇하겠는가.
농업사회가 산업사회로 이동하면서 아이들에게 꿈과 사랑을 키워주던 노인 문화가 사라져 간다. 핵가족화 되어 가면서 총체적 환경의 한 부분이 없어진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모자식간의 완충적 역할을 하며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노인과 같이 생활한 아이는 폭넓은 사고를 하게 되며 사려성이 깊은 아이로 자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가정의 아이들은 경거망동을 하지 않는다. 신중하게 행동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
산업 사회 핵가족아래에서 노인과 함께 하는 삶을 거부하게 되었다. 노인이 가정의 지주가 아니라 부담으로 느껴지는 현대의 가정이니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노인 문화가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이 노인 문제를 해결하고 자원으로 활용해 나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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