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45. 다윗 왕의 지혜

profkim 2020. 3. 15. 14:52



                                                              다윗 왕의 지혜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가 있다. 또 반대로 잘 풀리고 일이 잘되는 때도 있다. 이럴 때 우리의 자아는 어떠해야 할까? 항상성을 지닐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나서 지금은 후배들이나 제자들이 많이 정년퇴직을 하고 있다. 더러 메일로 퇴임 후를 걱정하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현직은 무엇이고 퇴임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현직이기도 하고 퇴임이기도 하다. 사람은 변함이 없는데 환경이 바뀌는 것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된다.


  환경이 나를 지배한다면 나는 종속변인이다. 내가 주체로 살아간다면 내가 독립변인이 될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내가 존재한다면 나의 삶의 의미를 추구해 나아가게 될 것이고 환경의 변화를 수용할 만한 능력은 내 안에 갖게 될 것이다.


나는 다윗 왕으로부터 두 가지 지혜를 빌리려 한다.


  첫째, 다윗 왕은 사울 왕에게 10년을 쫓겨 다녔다. 사울왕은 다윗을 왕권 도전자로 간주하여 이를 제거하려 했고 다윗은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땅의 사해 서쪽의 마사다, 엔게디와 같은 곳이 피란처였고 심지어는 모압(지금은 사해 동쪽의 암만 땅)이나 블레셋(지금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를 포함한 서부 해안지대)과 같은 적성국가에 도피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갖게 된다. 첫 번째는 엔게디 (En-gedi)광야에 있는 굴에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가지나 사울을 살려 보낸다(삼상24:1-7). 두 번째는 십(Ziph)황무지에서 사울을 또 살려 보낸다(삼상26:1-5). 왜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다윗은 죽이지 않았을까? 자신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역할과 자신의 역할을 잘 구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처리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고 그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앞으로 자신의 왕국에 누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악을 행하지 않았고 항상 자신의 길로 갈수 있었다. 고난 중에서 오히려 다윗은 더 강해지고 자신의 정체성은 확실히 정립되어있어서 흔들리지 않았으며 이 고난의 십년을 잘 견디어내고 결국은 헤브론(Hebron)에서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때로 사람에게 고난은 더 자기강화의 기회가 되고 발전하는 힘을 얻게 된다. 정체성이 정립되어 있지 못한 경우 고난은 더 힘들어지고 좌절하게 되고 결국은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둘째,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그는 영토 확장을 하게 되고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리고 정치적 갈등 때문에 지금 암몬의 수도인 암만을 공격하는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에 다윗은 참전하지 않았고 장군과 병사들만 보냈다(삼하11:1-5).


  왕은 왕궁에서 오수를 즐기고 저녁에 테라스를 거닐 때 민가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발견하고 불러 들여서 간통한 사건이 있었다(삼하11:1-5). 이 여인이 임신하게 되어서 이를 은폐하려고 다윗왕은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의 남편은 다윗의 30인 용사 가운데 한사람인 우리아 였는데 교묘한 방법으로 사지로 보내어 전사하게 한다. 이 사건은 다윗의 일생 중 가장 큰 실수였다. 이런 일로 다윗은 수많은 고난을 자초하게 된다.


  이 여인의 이름은 밧세바이고 솔로몬 왕은 이 여인이 낳은 네 번째 아들이다. 하나님은 이 죄악의 씨를 죽이시기로 했기 때문에 아이가 죽을병으로 눕게 되었다. 이때 다윗의 삶을 우리는 엿 볼 수 있다. 다윗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린다. 그 모습이 너무 처참하여 신하가운데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7일 만에 죽었다. 다윗의 신하들은 왕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 할 수 가 없었다. 병들어 누웠을 때도 처참한 상황 이였는데 아이가 죽었다고 하면 왕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기우였다(삼하12:16-23).


  왕은 눈치로 아이의 죽음을 간파했다. 아이의 죽음을 확인한 후 신하들에게 세수 물과 음식을 가져오게 하여 씻고 먹고 여상스럽게 정사를 보았다. 신하들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죽은 후의 행동은 너무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하들이 왕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다윗왕은 아이가 살아있을 때는 내가 간구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살려 주실지 아느냐? 그러나 지금은 아이가 죽었으니 끝난 일이 아니냐? 라고 대답하였다.


  일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삶이야말로 지혜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다윗의 위대성은 이런 삶에서 잘 묻어나고 있다. 오늘 우리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결과를 원망하는 어리석음에 처 할 때가 많다. 인간의 책임은 최선이고 결과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결과는 신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이원고는 교수신문 <원로칼럼>으로

 2014621일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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