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기복사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었고 은총의 생활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구원은 무엇이고 은총의 생활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 우리 기독교인의 생활을 통해서 정말 구원 얻은 백성인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은총의 생활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회의를 느낄 때가 많다.
우리는 주안에서 복을 얻은 사람이다. 우리는 참복(眞福)을 얻은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적인 많은 사람은 참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며 허황된 신기루와 같은 가짜 복(假福)을 찾아 헤매고 있다. 기복사상(祈福思想)이란 가짜 복을 추구하는 생각이며 이런 행위들을 무속(巫俗)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바울 사도는 줄기차게 오로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以信得義)"(갈 3: 6)는 교의(敎義)를 전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섭리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섭리하신다. 하나님의 섭리에 인간이 관여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오늘 교회는 이 진리를 수호해야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거래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일방적으로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오늘 교회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결코 허용하시지 아니 할 것이다. 인간이 이러 이러 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인간의 가정(假定)은 인간이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연유한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행위에 의해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간운데 있는 만물을 스스로 만드시고 우주의 주제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지은 전(聖殿)에 계시지 않으며 또 무엇이 부족한 것같이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니 그 분은 스스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다.(행17: 24, 25). 하나님은 일 년 된 송아지나,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미 6: 7-9).
믿음은 그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정한 사람만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로 3: 23, 24). 자식이 아버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 부모에 의해 자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길을 안내하고 하나님의 자녀 될 사람에게 그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는 죽었던 사람이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니 이 이상의 복이 어디 있겠는가?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촉촉하고 풍요로우며 그에게는 성장이 있고, 활동이 있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힘이 그 속에 있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교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복이 아니고 환각제와 같은 물질을 추구한다. 이런 사상을 기복사상이라 한다.
참 진리가 무엇인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이 길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말씀으로 가능하다. 성경말씀을 배워 아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성령이 허락하시는 사람에게만 그런 축복이 있다.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 6) 하셨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라! 두 여인은 예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신 여인들이다. 또 이 두 여인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르다의 음식 만드는 행위 보다는 마리아의 행위 즉 주님 무릎 아래 앉아서 말씀 듣는 행위는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눅 10: 38-42 참조; 마 26: 6-13; 막 14: 3-9). 고난주간에 마르다의 행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마리아는 아주 귀한 향유 한 근(옥합)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뿌리고 그 머리털로 닦으니 즉 예수의 장사를 기념하는 일을 하게 된다(요 12: 1-8; 마 26: 12, 13; 눅 14: 8, 9; ). 구원을 얻은 자는 항상 감사가 있으며, 항상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진리를 깨달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구원 얻은 사람의 생활
주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는 성경을 통해서 항상 그 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넓으며, 깊으며, 큰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닫게 하여 우리의 전체 생활이 감격과 환희와 승리의 노래로 점철 되도록 하신다(찬송가 통일 495장/ 438장).
성경 해석자는 성경을 통해서 어리석은 대중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그에게 무엇을 구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감격하며 감사하고 그를 찬양하도록 인도하여야한다. 성경의 역사는 무엇이고, 시는 무엇이며, 복음은 무엇인가?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성경해석이야 말로 이 길에서 벗어나면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교회 생활에서 "내가 교회를 얼마나 받들었는데 왜? 하나님은 나로 사업의 실패자가 되게 하셨는가!" 라는 푸념을 들은 일이 있다. 이 사람 내면세계에는 교회를 받드는 일이 곧 복 받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독백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를 한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봉사를 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다." 이 사람의 수고는 "자기의 이익을 위한 행위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거래하시지 않는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을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구원 얻은 백성의 은총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전자에게 신앙생활은 기쁨이고, 항상 즐겁고, 쉽고, 넘치는 환희가 그 가운데 존재한다. 이세상의 조건이 자신을 어렵게 하여도 그것은 어려움이 아니고 축복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길이라 믿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범사에 감사가 있고, 감격의 기도가 있고, 환희가 있다. 그 사람 속에는 자유와 평화와 평강이 넘치게 된다(찬송가 통일 503장/ 373장).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의 피나는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의 봉사, 헌신, 드리는 십일조, 감사 헌물 등은 받은바 은혜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무엇을 더 얻기 위함이 아니다. 모든 생활이 신앙고백이며 자신의 부족함을 항상 고백하는 사람이다. 이들에게 눈물의 기도가 어찌 없겠는가?
후자를 보라 그는 교회 생활이 힘 드는 일이다. 승진을 하고, 부동산에서 이익이 많이 생기면, 자식이 잘되면 그들은 더 많은 봉사와 헌금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리고 이런 복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항상 두렵다. 그 마음에 평화가 없다. 교회 봉사나 헌금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것이어서 거래가 제대로 성사되지 아니하면 항상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구원 얻은 백성과 무엇이 다른가? 왜? 성도에게 불평과 불만이 많은가?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의 은총을 간구해야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항상 깨어 있어서 성도를 살아있는 영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양육해야 한다.
전자는 범사에 감사하고, 그 심령에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평화 그리고 기쁨이 넘쳐나지만 후자는 범사에 감사 할 수가 없으며,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고 불평과 불만이 넘쳐난다. 교회가 왜? 필요한가?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원 얻지 못한 백성을 하나님께 인도하여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데 그 사명이 있지 않을까? 이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더 중점적으로 해야 할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8: 32). 자유는 이 세상의 조건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인간이기 때문에 속박되는 일 등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들이 나를 억압 할 수 없는 것이다. 내적 존재가 이것을 초탈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적 조건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적 존재이다. 이것이 구원 얻은 자의 자유이며, 환희이다.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길은 말씀에 있다. 말씀이 바로 서면 그것이 복이 아니겠는가? 말씀은 오묘하고 꿀 송이와 같이 달아서 그에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된다. 숨겨져 있는 말씀을 잘 풀어서 먹이는 사람은 얼마나 복이 있을까? 그것이 어둠의 백성을 새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닌가? 또한 주안에서 복을 얻은 자는 그 마음의 문이 열려 진리를 받아드리게 될 것이다. 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로다.
구원을 얻은 백성은 말씀을 통해 매일 성화의 길(벧후 1:5-7)을 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새 생명은 "믿음" 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사람을 바라보고, 일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랑으로 그 믿음을 완성한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에 의해 내가 좌지우지(左之右之)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일방적으로 사람을, 일을, 세상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은혜를 입은 사람의 생활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신 것같이 구원 얻은 백성은 이웃을, 일을, 자연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요일 4: 18, 19). 손양원 목사(첫째, 둘째 아들은 1948년에 순교, 손양온 목사님은 1950년에 순교)는 아들 둘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유전 받은 사람이 아닌가?
원수를 미워 할 수 없는, 사랑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그 누구인가? 구원 얻은 사람은 이런 사람이며 세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아니라 자신이 주도적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는 살아 역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에 이끌리어가는 존재가 아니다. 죽은 물고기는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급류라도 거슬러 올라간다. 은총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리고 주도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그 힘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생명력이 없다는 말과 같다. 교회는 수만을 헤아리는데, 성도는 천만을 헤아린다는데 우리 사회는 왜? 이토록 혼란스러울까? 우리는 무엇을 잃어 버렸는가? 구호가 아니고, 프란카드가 아니고, 호대한 겉모습이 아니고 우리의 내면세계에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하는가? 우리의 각성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한다.
기복사상에 대하여
원시종교는 대체로 기복사상(祈福思想)을 갖고 있다. 복을 얻기 위해 주술을 한다 던지, 헌금을 하여 그보다는 더 큰 대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신과의 거래를 전제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서 복을 줄 수도 있고 가져갈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간의 고안품으로 목상이나 석상을 만들고, 산에는 산신을, 물에는 물귀신을 마들고,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나 상상의 세계에서 고안한 것들에게 빌고 그들이 복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오늘 교회라는 현상적 존재가 이런 원시 종교를 모방하는 경우가 많다. 성수주일을 하고 마음이 평안한 사람, 십일조 헌금을 드리고 복 받을 것이라 믿는 사람들, 많은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 축복기도를 받으면 소원을 성취 할 수 있다는 생각, 그들은 모두 기복사상에 젖어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마음속에 욕심이 넘치는 사람이다. 적은 것을 드리고 많은 것을 얻고자하는 욕심 그것이 곧 우상 숭배가 아니겠는가?
현세의 기독교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다만 어리석은 군중에게 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교계 지도자들이 성경 말씀을 정말 잘 강론해야한다. 진리가 진리로서 손색없이 강론되어 어리석은 대중이 깨달음이 있어야한다. 오히려 교계 지도자들이 더 기복사상을 고취하고 있지나 않는지 염려스럽다.
나는 기독교의 왕성함을 매우 기뻐한다. 그러나 이런 부흥이 잘 못 기독교적 무속과 연관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만 구원에 이르며 오로지 그 분만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 새 생명에 대한 감사, 넘치는 기쁨, 삶에서 잔잔히 나타나는 환희 같은 것이 이미 복을 얻은 사람의 참 모습이 아닐까?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겁날 것이 없으며, 자신이 있으며,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내는 힘이 그 속에 있지 않을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복은 이런 것이다.
세상의 물질적 복은 여러 가지 개연성(蓋然性)을 갖는다. 누구에게나 세상적인 부귀영화가 좋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재물의 많음으로 멸망에 이르는 많은 사람을 우리는 쉽게 보아왔다. 높은 지위와 명예 때문에 망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이 복인가?
기복사상은 이런 세상의 재물, 영화, 권력을 얻기를 바라는 무속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교회에서 이런 복을 거론 한다면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출32:4-8). 진리를 오도하는 강도(講道)는 무속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오늘과 같이 사회가 혼란스럽고, 가치와 도덕적 기준이 혼재되어 있어서 요행수를 바라고, 땀 흘리지 아니하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는 무리가 판을 치는 시대에는 더욱 더 교회가 말씀에 바로서서 국민이 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고 믿는다. 진리를 수호 할 수 없다면 교회는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맛 잃은 소금과 같이 밖에 내치워 질 것이다(마5: 13). 또한 빛 잃은 등잔과 같다(마5: 14-16). 이 등잔이 무엇에 소용되겠는가?
교회라는 거룩한 이름과 성도라는 택한 백성의 실존성은 진리의 터 위에 서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오늘과 같이 오도된 진리로 세상을 호도한다면 그들은 무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지도자는 샤먼(shaman)이 아니며 하나님의 종이고, 그의 청지기 이며,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케 해야하는 분들이다. 기독교를 빙자한 무속 즉 기복사상을 경계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구 침산제일교회 원로장로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김 정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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