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47. 기독교와 교육

profkim 2020. 3. 16. 14:57



                                     기독교와 교육

 

 






  나는 기독교의 교육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와 교육이 무엇이 다른가? 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종교와 교육"은 나눌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고 구원에 이르는 데는 교육이 매우 중요하고 더욱 믿음 확산을 위해서는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방법이지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나는 기독교가 수행하고 있는 교육이 기독교 본질과 어떻게 차별화해야 하는가를 논의 하고자한다.

 

 

       기독교와 교육의 접근 목적

 

  종교(religion)와 교육(education)은 그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다. 그러나 다름(相異)과 공유(共有)가 상당히 상보적(相補的)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구분이 아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영역은 아주 다른 접근 목적을 갖고 있다.

교육은 지식(knowledge)을 수용하던지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교육은 지식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은 아주 구체적 지식부터 추상적 지식까지 그 수준이 매우 다양하다. 교육이 무엇인가? 또 지식이 무엇인가? 교육이라는 말과 지식이라는 말을 우리는 수없이 하여왔다. 그러나 교육이 무엇이냐? 에 대한 답을 정확히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다음 지식이 무엇이냐? 에 관한 답을 할 수 있다면 자연 교육이 무엇인가? 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지식의 속성은 차이(differences)를 아는 것이다. 차이란 무엇인가? 사물이 같으면 차이가 생기지 아니한다. 사물, 사건, 개념 등이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곧 지식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같은 모양(同形)의 것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지식이 생성되고 부르는 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사물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혼돈과 무질서를 초래하지만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이 그 속에 있다. 만일 내 남편 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어서 서로 자기가 남편이라 주장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 될까? 같다는 것은 혼돈과 무질서를 초래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이 있는데 이는 피조물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을 보라 인간은 동형(同形)의 물건을 만들어 내고 표준을 정하고 사람들로 그 표준에 도달하도록 촉구하게 된다. 일정한 틀이 있어서 그 틀에 맞지 아니하면 잘못되고 사회적으로 용인 되지 아니한다. 특히 산업사회의 가치관은 기계화, 자동화, 대량생산 이라는 메커니즘(mechanism)을 기반으로 하여 동형의 제품을 많이 생산하였다. 산업사회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해져 있던 생각은 모본(模本)이 있고 그에 나를 맞추어 나아가는 형식으로 교육을 생각한 것이다.

                                     

  차이를 아는 것이 교육이라면 차이가 큰 것이 더 알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차이가 미세 할 수 록 알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교육은 차이가 큰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차이가 적은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원리가 교육과정의 계열이 될 것이다. 도형의 차이보다는 실물의 차이가 더 크다. 문자보다는 도형의 차이가 더 크다. 그리고 개념 문맥 맥락 ⟶ 의미 선악의 차이(도덕성)까지 이른다. 교육의 최고의 목적은 도덕성 즉 선악개념을 배우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善惡果)를 먹었다."는 것은 이 전에는 그들이 선악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 "그들이 선악을 구별 할 수 있게 되었다."(2: 25; 3: 7, 8)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인간이 알게 되는 것을 죽음(2:17)이라 하셨다. 그러나 마귀는 이브에게 이 과실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유혹한다. 하나님과 동격이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선악과를 먹게 되고 그 결과 인간에게 지식이 생겨서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지식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자극하고, 바벨탑을 쌓고(11: 1-9), 패륜적 생활(4: 8)을 가져왔다. 아이러니 하게도 교육의 최고의 목적은 도덕적 선(道德的 善)을 추구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인지를 개발하고, 사회제도와 경제를 일으키고, 문화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 등은 타락한 상황에서 최소의 인간다움을 추구하고자하는 노력이다.

 

  오늘 정보사회의 교육은 국가 명운(命運)과 직결되어있다. 인간이 곧 재화(財貨)이며, 사회기반이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힘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인간 교육이 단순지식에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교육은 최고의 목적인 도덕적 선의 추구에 총력을 기우려야 그 존재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사회상황에서 기독교는 사회발전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교육이 지식에 접근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아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구원 얻은 백성들의 "천국 생활"이 기독교의 목적이다. 기독교는 생사(生死)의 문제를 다룬다. 죽었던 사람이 새로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느냐? 의 문제이다. 새 생명으로 부활하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 문제이며 전도란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것이며 생명을 나누는 일이다.

 

  교회에서 교육에 열중하는 이유는 교육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아 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의 진리를 많이 안다는 것과 그가 새 생명으로 부활 되었다는 것은 별 문제이다. 진리를 안다고 모두 생명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교회가 교육에 열중하는 이유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라 마르다는 예수님 대접을 위해 음식 만드는 것으로 많이 분주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무릎 밑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다. 이에 대해 마르다가 항의 할 때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길을 택하였으니 결코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마리아가 택한 길은 어떤 의미에서 좋은 길이였는가? (10: 38-42).

 

  고난주간에 접어들어 문둥이 시몬의 집에 예수님이 머무실 때 마르다는 오늘도 음식 만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주 귀한 향유 나드 한 옥합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발을 닦는 일을 하여 예수의 장사를 예비하였으니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적도 전해진다 하였다(12: 3; 14: 3, 8, 9).

 

  마리아는 많은 것으로 예수님을 섬겼으나 항상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과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 발밑에서 그 진리를 알게 된 결과이다. 그 진리가 그로 생명으로 인도한 결과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8:32).

 

  기독교의 목적은 진리를 알아 새 생명을 얻음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며, 세상을 변화시켜 풍요롭고, 촉촉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오늘과 같이 삭막한 세상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촉촉하고 풍요롭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교회는 갖고 있다. 우리 사회가 변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교회가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무엇을 개혁해 나아가야 할 까? 우리는 그 답을 얻도록 주님의 은총을 간구해야한다.

 

 

    접근 방법과 단계의 차이

 

  교육은 차이를 아는 것 즉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다. 차이(差異)는 큰 것과 적은 것이 있고 그 종류(, 모양, 크기, 질감, 무게, 개념    도덕적 가치)도 무척 다양하다. 그래서 그 접근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 교육과정에는 계열(sequence)이라는 용어가 있다. 학습을 수행 하는 계열 즉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산업사회는 기계론적 세계관(機械論的 世界觀)이 지배하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아주 뚜렷하였다. 논리적 계열은 학습에서 꼭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정보사회에서는 질적 사회를 표방하고 유기론적 세계관(有機論的 世界觀)이 지배하면서 계열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아니한다. 그러나 교육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정보사회 교육은 창의성을 "길러야하는 덕목"으로 여기기 때문에 고정적 기존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의미가 적어졌고, 새로이 창출하는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랑"이 교육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창의적 사고를 하는데 있어 제일의 조건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그 속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 나아가는 힘이 들어있다.

 

  정보사회 교육은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산업사회에서 지능은 주로 인지지능 즉 언어, 논리나 수량, 공간지능 등이 주였으나 정보사회에서는 이런 인지지능은 아주 기초적인 능력에 불과하고 음악이나 체육이 중요해졌고, 좀 더 중요한 지능은 "사람을 잘 사귀는 능력"(대인관계 지능; inter personal intelligence)이고 최고로 중요한 능력은 "개인 내 지능"(個人 內 知能; intra personal intelligence) 구체적으로 말하면 태도지능 즉 믿음(긍정적 태도)일 것이다. 긍정적 삶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힘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다.

 

  이 점에서 교육과 기독교는 지금 조우(遭遇)하고 있다.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최고의 지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학교 교육에서 강자(强者)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고 이들은 믿음의 사람들이다.

 

  기독교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1: 3; 10:2).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8: 32).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말씀을 배우게 하시고 진리를 알아 새 생명에 이르게 하신다. 진리를 배우는 것은 교육이지만 깨달음과 구원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로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3:24).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받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생명의 원천이고,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촉촉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해 진다. 믿음에는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고, 넉넉함이 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은 믿음 그 속에 존재한다.

 

  믿음은 패러다임(paradigm)이다. 패러다임이란 렌즈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 노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면 세상이 노랗게 보일 것이다. "믿음"이란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어떠하든 모두가 "믿음직스럽게 보일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객관적 존재와 관계없이 주관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두렵지 아니하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회를 유도하는 힘을 갖는다. 남에게서 문제를 찾지 아니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평화가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얻은 구원은 이런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가 있고, 찬송이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기독교의 생명은 믿음이며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르게 된다. 교육이 지적 접근이며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기독교는 믿음에 의한 생명의 부활이고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사역이다. 개인의 자기혁명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우리에게 생명의 부활이 없다면 진리는 무의미 할 것이다. 교육 중심의 교회가 있다면 잘하는 일이지만 거기에 생명운동이 없다면 맛 잃은 소금과 같다. 이런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학교이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할 것이다.

 

  유교(儒敎)는 종교가 아니다. 그들에게 추구하고자하는 도덕적 가치는 있으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유교는 다만 "도덕성"이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교육의 최고의 가치가 도덕성 즉 선악개념(善惡槪念)을 아는 것이라면 유교는 교육이다. 이들에게 영혼이나 생명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유교를 종교라 할 수 없다.

 

 

      교육과 기독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생활

 

  교육이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교육의 결과로 얻어지는 삶은 도덕적 인격체이며 이를 통해 우리사회를 도덕적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교육받은 사람이 많다면 자연 그 사회는 도덕성이 높을 것이다.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아니했다면 그 사회는 도덕성이 낮을 것이다.

 

  오늘처럼 교육이 보편화되고 교육기간(敎育期間)이 연장되어 교육이 양적으로 성장하고 질적으로 심화된 사회라면 당연히 이 사회는 도덕적으로 승화(昇華)되어야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과거 어느 때 보다 도덕성이 향상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그렇다면 왜 도덕성은 더 추락했는가? 오늘 교육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교육의 성취도를 기술이나, 지식의 창출이나, 지식의 실용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도덕성위에서 성립될 때에만 가치를 갖게 된다.

 

  A. Einstein"인간의 행위는 그것이 도덕성위에서 이루어 질 때에만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갖는다." 고 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라 과학적 지식, 경영학 지식, 정치학 지식, 특히 정보사회에서 뉴 미

디어(new media), 전자상업(e-business), 나노공학(nano technology), 국가안보, 유기농과 같은 학문이 각광 받고 이런 지식이 첨단지식으로 크게 발전해 왔는데 오늘 세계적 경제위기는 왜 왔을까?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도덕성 해이(道德性 解弛)에서 온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교육이 본질적인 것 보다는 지식이나 기술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인생사의 근본적인 것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지식의 발전이 중요하지만 도덕성 위에서 이루어 져야한다. 만일 이를 소홀히 한다면 인류의 희망은 사라질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은 그 사회의 도덕성과 직결되어있다. 도덕적 해이는 암세포와 같아서 조직을 파괴하고 무력화해서 쇠퇴(衰退)하게 한다. 어느 사회나 도덕성의 해이로 인해 붕괴 된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다. 교육이 왜 중요한가? 그 답은 역사가 말 할 것이다.

 

  기독교에는 계명이 있다. 계명을 잘 지키면 훌륭한 교인이다. 이를 잘 실현한 사람들이 바리세인이다. 이들은 율법을 가장 잘 지킨 사람들이다. 율법을 잘 지키면 도덕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며 그런 사회가 건전한 사회일까? 율법주의라는 것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뿐으로 생명이 없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지키는 사람들이다.

 

  옷자락에 성경을 써 붙이고, 이마에도 성구를 붙이고, 주기적으로 금식 기도를 하고, 안식일에는 철저히 일하지 아니하는 이들의 모습은 경건하고 성스러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야 말로 가장 충실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부 할 것이다.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아왔다. 그리고 예수께 "내가 어찌해야 영생을 얻으리까?" 물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 하셨다. 이 청년은 계명을 지키는 일은 확실히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 만만하게 "나는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라"고 하셨다. 이 청년은 재물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10: 17-22). 이 대화가 계속되었고 부자 청년이 모든 재물을 팔아 이웃에 나누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예수님은 청년에게 "네가 영생을 얻었다."고 하셨을까? (고전 13: 3과 대비해보라). 예수님이 "계명을 지키라" 는 개념과 부자 청년이 받아드린 "계명을 지키라"의 개념은 너무 차이가 있었다.

 

  부자 청년의 계명은 율법으로서의 계명인 반면 예수님의 계명은 생명의 사랑의 계명이었다. 부자 청년에게 계명은 "행위"에 초점이 있었다. 예수님의 계명은 율법의 완성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살아있음의 표현으로서 계명이다(12: 29-31).

 

  기독교인은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살아있음의 표현으로서 행위가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성장이 있고, 활동이 있고, 결실이 있다. 그 속에는 삶의 찬가가 있고, 풍요로움이 있고, 넘치는 환희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고전 6: 19, 20).

 

  이런 사람은 도덕성을 넘어 사랑이 지배하는 성화된 사람이며 이런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는 도덕성을 초월하는 사랑이 지배하는 성화된 사회(벧후1:5-7)이며 인간들이 추구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이상향(理想鄕; James Hilton의 소설 Lost Horizon에 나오는) 섕그릴라(Shangri-La)나 아마존(Amazon)강 어디엔가 있다는 황금의 나라(엘도라도; El Dolado)와 같은 것으로는 비교 할 수 없는 거룩한 백성들의 나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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