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48. 소유자와 관리자

profkim 2020. 3. 16. 17:03



                                                             소유자와 관리자

 

 


 

 

  소유자(owner)와 관리자(manager)는 그 직분이 아주 다르다. 소유자는 자기 자산(資産)에 대한 관리와 증식과 사용을 결정한다. 그러나 관리자는 전적으로 소유주의 결정에 따라서 그의 계획대로 행하여야 한다. 스스로 주인의 자산운영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 만일 관리자가 마음대로 결정하여 일을 처리한다면 그는 그 직분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요 인생은 그의 관리자라고 한다. 그래서 관리자(청지기)로서 우리의 재물을 그 주인의 의지에 따라서 지혜롭게 관리해야 한다. 만일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다면 관리자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 정신은 사람의 건강, 지혜, 세상의 지위, 주어진 시간, 재물, 기타 인간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요 인간은 관리자로 본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위탁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용해야 한다. 만일 인간의 뜻에 따라서 사용한다면 그는 불의한 관리자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사회를 보라 ! 얼마나 많은 불의한 관리자가 있는가? 세계금융위기는 불의한 관리자의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런 문제는 언제고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불의한 자들이 관리자가 된다면 말이다. 금융기관, 공기업, 공공단체 등 어느 곳에서나 불의한 사람들이 관리자가 된다면 그들은 그 기관을 망하게 하고 자신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누가 불의한 청지기인가?

 

  예수께서 불의한 청지기에 관한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 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한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려 주인은 그에게 하던 일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그때 그 청지기는 그의 직분을 빼앗겼을 때를 대비하여 그 주인에게 빚진 자를 소환하여 탕감해 주었다.

 

  기름 100말 빚진 자에게 50말을 탕감해 주고, 100석 빚진 자에게 20석을 탕감해 주었다. 본래 이 청지기는 불의한 사람으로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중으로 주인의 재물을 손해 보였다. 그런데 주인은 이 불의한 청지기에게 "일을 지혜 있게 하였음으로 칭찬하였다"(16:8).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이다. 왜 주인은 칭찬 하였을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누구인가를 설명하신다. "주인에게 그 집 종 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는 자로다"(12: 42, 43).

 

  이 불의한 청지기를 인간 사회의 규범으로 본다면 이중으로 잘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에서 보면 이 불의한 청지기는 "지혜롭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원리는 인간의 소유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소유로서가 아니라 관리자로 주신 것이며 그 주인은 그 소유를 이웃에게 때를 따라 나누도록 주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소유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저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용하는 사람이며 이웃에게 나눔과 섬김을 실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청지기가 자신이 소유주로 착각한 것이다. 그 결과는 넉넉한 소유로 인하여 오만해지고, 실수를 하게 되고, 범죄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재물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명예롭지 못한 이름만 남게 된다.

 

  불의한 청지기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위임된 것들을 사용하는 관리자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청지기일 것이다. "나의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 쉽겠는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 쉽겠는가?

 

  주인은 분명 그의 소유를 위탁받은 청지기가 집안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인간의 가치관과 다른 점이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로 드신 불의한 청지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인의 패러다임"을 이해해야한다. 탕감은 나눔의 방식이며 주인이 본래 원한 일들이다.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실직 후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하였다. 왜 불의한 재물인가? 주인의 뜻을 모르고 자기의 지혜로 친구를 사귀었기 때문이다. 만일 주인의 패러다임을 잘 이해하고 그의 뜻에 따라서 주인의 재물을 사용하였다면 그는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가 된다.

 

  자신의 소유를 나눈 사람은 신실한 청지기가 되지 못한다. 그는 불의하다 할 것이다. 그는 나누면서 자신이 드러나고, 스스로 선한 일을 했다 할 것이고, 온유와 겸손 보다는 내심 교만할 것이다(6: 2-4).

 

  두 사람이 이웃에게 똑 같은 것을 나누었는데 하나는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인 반면 다른 하나는 "지혜로우나 불의한 청지기" 이다. 인간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패러다임에 의해 나누고 섬겼는가? 의 문제이다. 즉 소유자 패러다임인가? 관리자 패러다임인가? 어떤 패러다임에 의해 실행하는 가의 문제이다.

 

  전자에게는 자랑 할 것이 없다. 항상 주인의 뜻에 따랐는가? 살핀다. 그리고 자신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주인의 뜻을 더 잘 수행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후자는 자신의 것으로 타자(他者)에게 베푸는 입장이니 자신이 자랑스럽고, 자기만족에 빠지며, 자신은 부요한 자라 생각하며, 마음대로 행한다. 이 두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행위는 같았는데 그의 영적 상태는 상반되지 아니한가?

 

  우리가 하나님의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경을 인간의 패러다임으로 해석 하고자 할 것이다. 여기서 오류가 생기게 된다. 인간의 사고의 틀은 역사적 배경, 문화, 사회사조(社會思潮; pathos)나 정념(情念; ethos), 자연 환경, 정치 환경, 도덕관 등에 따라서 형성된다. 이런 요인에 의해 형성된 사고의 틀로 하나님의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이 난해한 것은 인간의 사고의 틀로 성경을 해석 하려할 때 이다. 불의한 청지기와 지혜롭고 신실한 청지기는 하나님의 패러다임으로 이해 할 때 분명해진다.

 

 

      청지기 경제의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동양경제는 소유경제(所有經濟)이고 서양경제는 관리경제(管理經濟)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대체로 인정 할 수 있다. 서양이라고 모두가 소유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고, 사회 체제가 그렇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나는 뉴욕에 잠시 머무른 때가 있었다. 그때 나에게는 의료보험이 없었기 때문에 뉴욕 롱아일렌드쥬위시병원(Long Island Jewish Medical Center)의 무료 환자로 치료 받은 일이 있었다.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그때 이병원에 근무 하고 계신 이원제 박사를 알게 되었는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고마워하니 이 박사께서 내가 진료 받는 모든 경비는 연구기금에서 지출된다며 부담스러워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면서 며칠 전에도 수백만 불을 이 기금에 헌납하고 천국에 가신 분이 있다고 하였다.

 

  근자에 우리나라에서도 유산 안남기기 운동이 전계되고 있다. 이런 운동은 성서적 배경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이요, 일용할 양식을 충족하고 남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왜 이것을 주셨을까? 주신 목적이 있지 않을까? 그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관리자이다.

 

  관리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 갈 수 없는 사람이다. 항상 주인의 의지를 살펴야하고 주인의 지시에 따라야한다. 그래서 청지기에게는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이 있어야한다.

첫째, 주인의 의지대로만 행동할 것

둘째, 주인의 재물을 잘 관리하여 증식하고(25:15-18).

셋째, 주인의 뜻에 따라서 나눌 것(24:45-47; 25:34-40; 12:42, 43).

넷째, 계산을 명료하게 할 것 등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친히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고자 하는 분이 아니다(17:25). 모든 것을 주시는 그 분은 "모든 것"을 소유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이웃과 나누고 복음을 확산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관리자이다.

 

  주인의 영광을 위해 관리자는 최선을 다해야하고 관리자가 그 소명을 다 했을 때 더 큰 것으로 주인이 마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를 보라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국영기업이 도산하고, 공영기업에서 수없는 부정이 나오지 아니 하는가. 이것은 개인의 소유가 아닐 때 도덕적 해이가 심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소유가 아닐 때 인간은 소홀히 다룰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공산주의의 붕괴이유는 국민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산체계가 붕괴된 것이다. 생산성이 저하되므로 사회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청지기 경제에서 중요한 부분은 관리자로서 생명력과 도덕성을 갖는 문제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보여 주듯이 모든 것이 국가소유이고 생산성과 성과급과 아무 관계가 없고 균등한 배분을 한다면 양적평등은 이루어지지만 개인의 동기 부여가 되지 아니한다. 그 결과 누구도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는다. 공산국가를 경험한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동독이나, 중국, 이북의 국민을 보라 그들은 생산성이 떨어진다.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되지 아니한 결과이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집을 팔고 땅을 팔아 나누었다면 가상(嘉尙)한 일이지만 계속 팔아 나눌 집과 땅이 없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 할까? 그 집단은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다. 생산이 없는 소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사이비(似而非) 종교들이 말세론을 내세우고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여 재산을 헌납하도록 하고 헌신이란 미명아래 강제노동을 하게하여 그들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가? 이런 집단에 연루된 사람들은 결국 그 영과 육이 다 같이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청지기 경제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서 분배가 이상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이 고도의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 생명, 살아 역사하는 생명 즉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믿음에서 터져 나오는 사랑 즉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살아있는 사람 그는 도덕성을 넘어 사랑의 실천자 이다.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는 누구인가?


  첫째,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사랑으로 삶을 점철(點綴)하는 것이다. 일을 사랑한다면 그 일이 즐겁고, 건강에 도움이 되며, 삶의 활력을 갖게 된다. 일을 많이 해서 피로가 쌓이는 것이 아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심리적으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피로하게 된다. 사랑하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 간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청지기는 그에게 마껴진 일을 사랑하는 생명력을 가져야한다. 이 생명력이 없다면 사회주의의 붕괴나 마찬가지로 기독교 경제 원리는 성립되지 아니한다. 가난하게 되는 중요 원리는 개인의 욕구가 무시 되었을 때이고, 개인의 욕구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어 공동체를 돌보지 아니하게 된다.

 

  이 두 경우 어느 것이라도 사회(경제) 파괴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경계한다. 성서적 원리는 이런 사회사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유기적 사랑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사회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나눔과 섬김"은 청지기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구성원이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갖고 있지 아니하다면 이는 허구(虛構)에 불과하다. 공허한 메아리로 울려 퍼지게 되고 교회가 내세우는 구호에 끝이게 된다.

 

  나는 진정한 나눔과 섬김은 참 청지기(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가 전제 조건이라 생각한다. 기독교의 생명은 믿음에서 이루어지고 믿음의 실현가치가 사랑이라 한다면 사랑은 성화된 사람의 삶의 표현일 것이다(벧후 1:5-7). 바로 이 사람이 청지기의 자격을 갖은 사람이다.

 

  둘째, 청지기는 주인이 위탁한 재물을 최선을 다해 증식시켜야 한다. 주인은 위탁받은 사람의 재산증식을 양적 다과(多寡)로 평가하지 아니한다. 결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최선을 다 하였는가? 주인이 위탁한 재물을 관리하고 증식 시키는 일이 청지기가 해야 할 일이다(25:15-28).

 

  우리는 자유(自由)와 평등(平等) 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어떤 것인가? 객관적이고 양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이고 질적인 것인가? 성서에서 자유는 내적 자유이고 평등은 질적이다.

 

  우리를 속박하는 어떤 것이 있다 하여도 내적 자유는 속박할 수 없으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와 평화는 그 누구도 가져 갈 수 없다. 이런 내적 자유를 가진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기독교는 양적 평등을 지양(止揚)한다. 10명에게 김밥 2줄씩을 주었다. 평등한 처사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1줄로 족한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2줄로 배를 채울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양적으로 평등은 개인의 욕구를 다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사람의 능력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알맞게 맡기셨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양으로 평가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과정에서 최선을 다 했는가? 이것이 중요한 평가 요소이다. 성서적 원리는 개인차 인정과 인간의 책임은 "최선의 노력"으로 다 한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집안 식구들에게 나누었다고 하자 그 때 나눔을 받은 사람들이 타성에 젖어서 노력을 하지 아니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 할까?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 할 것이다. 교회가 선한 청지기로서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 사회를 민주 복지국가라 한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에 토대한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전체주의에 토대한다.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융화라 해야 할 것이다. 이 두 축은 사회 안정과 발전에 기둥이 된다. 그러나 복지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에 주요한 것은 국민이 해이(解弛)해 지지 아니 하도록 하는 것이다. 잘못된 복지 정책은 국민의 노동의욕과 성실성을 상실하게 한다.

 

  진정한 나눔과 섬김은 물질에 국한 되어서는 아니 된다. 영적 각성과 생명력의 강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한다. 청지기 경제가 이를 간과(看過) 한다면 오히려 사회 병리 현상을 초래 할 것이다. 청지기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잘 다룰 수 있어야한다.

 

  참 지혜는 성서의 원리에서 나오며 살아있는 생명의 원리이다. 나눔과 섬김의 자세는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생명력의 충만이 전제되어야 하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청지기이며 그들은 위로부터 받은 생명력을 지녀야한다.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모든 성도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기 위해 건물마다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감을 설명한 바(2:20-22)와 같이 만인(萬人)이 주안에서 청지기이며 서로 나누고 섬겨서 생령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한다.

 

 

김 정 권  

대한 예수교 장로회 대구 침산제일교회 원로장로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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