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8. 의지를 세운 사람

profkim 2020. 3. 14. 14:15

 

의지를 세운 사람

 


 

 

  

대구대학교 경산 캠퍼스는 무척 아름답다. 캠퍼스 앞에 드넓은 문천지(文川池)가 젊은이의 도량을 마음껏 키워주고 그 뒤로 겹겹이 놓인 산줄기는 문천지를 둘러싼 병풍과 같다. 백 만여 평에 달하는 캠퍼스 부지가 높고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잘 가꾸어진 수목과 건물들의 배치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경산캠퍼스를 개발한 것이 벌써 50여 년이나 되었다. 처음 개발을 시작한 때는 아직 교통이나 생활여건이 불편하여 경산으로 이사하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경산 캠퍼스에 이사를 한다든지 강의를 하는 것에 저항하고 가능한 경산으로 옮기는 것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 시설, 주변환경이 좋아지고 캠퍼스가 자연 친화적이어서 연구실이나 실험실이 모두 비교적 좋은 환경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2만여 학생이 미래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내가 대구대학에 부임한 것은 한국사회사업대학 시절19643월이었다. 당시 학장이신 이태영 교수는 나이 36세의 젊은이였으며 영국 신사풍의 외모를 지니셨을 뿐 아니라 대단한 웅변가이 셨다. 당시 여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3개학과에 교수는 열명이었고 교사는 불실 하고 학교 경제여건은 극히 피폐되어 있어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2, 3차 분할하여 받는 실정이었다.

 

이태영 총장은 이런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오늘의 대학을 이루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공학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신 이영식 목사가 대구 맹아학교를 운영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일본서 개최되는 리헤빌리테이션 회의에 대신 참여하게 되고 거기서 특수교육의 필요, 장애인 대책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영식 목사께서 경영하시고 계신 맹아학교에는 제대로 훈련된 교사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이태영 총장은 지도자 양성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총장은 지도자 양성을 위한 대학설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형식이야, 문서야 어찌되었던 대학에 대한 이상은 이태영 총장의 것이었으며 그가 실질적 대학의 설립자인 것이다.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1956년 학원을 설립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각종 학교(대학인가 받기 전 학교)5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 총장이 대학인가를 받은 것은 1961년이다. 그가 문교부로부터 받은 대학인가는 특수교육과’ 1개 과에 1년 정원 20명이었다. 인가를 주는 사람이나 받아오는 사람이나 이것을 대학이라고 주고받은 것이니 우리의 안목이 얼마나 천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총장을 가슴 아프게 한 것은 혁명정부가 대학망국론을 들고 나와 대구대학교를 2년제 초급대학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대학인가를 받고 채 1년도 안 되어 초급대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초급대학이 되면서 특수교육과와 사회사업과로 두 과가 되었고 신입생 정원이 80명이 되었다.

 

참담한 노력 끝에 1964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켰고 학과도 특수교육과, 사회사업과, 산업복지과에 각 40명씩 120명의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때 나는 한국사회사업대학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몇 년 안 되어 대학 입학예비고사라는 것이 생겼고 전국대학생 정원의 120%만 합격시켜 대학진학 자격을 주었으나 이들의 과반수는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되었고 한국사회사업대학은 1차 시험을 치르니 단 8명이 응시하였다. 이것이 동아일보의 톱기사로 났었다. 8명은 모두 장학생으로 뽑고 23차 모집을 해도 절대수가 부족했다.

 

이 총장은 학생이 없는 것도 걱정이지만 다시 초급대학으로 격하하든지 폐교 등의 말이 나올까 더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위기를 신앙인으로서 잘 넘겼다.

 

큰 강이 실개천에서 연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대구대학은 이런 미미한 출발과 험난한 고난의 길 위에서 이루어 진 결실이다. 만난을 무릅쓰고 불굴의 투지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오늘의 대구대학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사회사업대학이 시작되던 1950년 대 이와 유사한 대학이 대구에 우후죽순과 같이 생겨났고 그중 생존한 것은 대구대학 뿐이다.

 

나는 이 태영 총장의 불굴의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그의 인내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그가 널리 편 인간애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곤란할 때 항상 빙긋이 웃는 그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이 태영 총장과 원 영조 교수는 새로운 캠퍼스를 찾아 참으로 많은 곳을 헤매었다. 그들이 마음으로 점찍은 곳이 진량들이다. 그들의 혜안을 높이 평가한다. 대구대학 캠퍼스는 정말 일품이다. 60만 평의 문천지가 앞의 시야를 넓혀주고 100만 평의 부지는 2만여 명의 학생과 교직원을 품어 안기에 넉넉하다.

 

한 사람의 이상과 의지는 놀랄만한 결실을 걷는다. 이태영 총자의 꿈과 의지력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힘을 가진 것이었다. 오늘 대구대학교에 관계되는 모든 분들은 이태영 총장의 꿈과 이상을 같이 실현해 가는 동역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을 지키지 못하면 내일을 보장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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