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단상(斷想)] 67.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profkim 2022. 11. 4. 10:01

 

가을을 밝히는 홍초는 뿌리에서 수분과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67.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믿음(, faith)과 사랑(, love)은 추상명사이다. 믿음과 사랑에 대한 정의나 관념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모두 다를 것이다. 그래서 해석도 모두 다르고 적용 역시 다를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성경의 원리에서 보면 사랑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 했다(5:6). 그렇다면 믿음이 어떤 행위인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원초적으로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사랑이 없다면 무용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뭇 생명이 자신의 존재(存在) 감(感)을 유감 없이 자랑하지만, 그 생명은 뿌리로부터 온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네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전 13:2)고 했다. 그러니까 믿음은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 현상은 나무에 비교해 본다면 나무뿌리는 눈에 보이는 나무 즉 둥치, 가지, , , 열매 등이 있어야 비로소 나무라 할 것이다. 여기서 뿌리는 믿음에, 눈에 보이는 나무는 사랑에 가늠해도 좋겠지, 비로소 완전한 나무가 된다.

 

뿌리만 있으면 죽은 나무다. 믿음이있는데 사랑의 행위가 없으면 죽은 것이지!

  바울은 계속해서 네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네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13:3)고 하였다.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내어준다면 그보다 큰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네게 아무 유익이 없다.”라고 하니 모순이 되지 않을까? 사랑이 없이도 자기 몸을 희생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사람의 어떤 행위는 사랑이 없어도 행할 수 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해관계를 따져서 덕을 보기 위해서,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등 많은 이유로 사랑이 없이도 어떤 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나무에 비유한다면 뿌리가 없는 나무이다. 이런 나무는 생명력이 없겠지, 곧 시들어 죽게 되겠지, 이런 행위는 일시적이고 생명이 없어 곧 사라지게 된다. 사랑이 없는 행위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참사랑이란 믿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영속적이고 생명력이 있어서 점차 왕성해진다. 누룩과 같이 부풀어 오르고, 겨자씨같이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를 이루게 된다

 

이 나무가 살아있다는 것은 뿌리에 붙어있어서이고 뿌리에서 분리되면 죽은 것이다.

  사랑 안에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어서 우리가 사랑이라고 한다면 믿음과 동시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믿지 않는데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믿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겠지, 식물도감이나 사전을 찾아보면 어떤 나무를 소개한다. 나무의 분류, 크기, 가지와 잎, 개화기 등을 소개한다. 그러나 뿌리에 관한 소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부분은 눈에 보이는 부분이 아니다. 이같이 사랑의 행위는 설명할 수 있지만 믿음은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뿌리 없는 나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믿음이 없는 행위는 화려하다고 해도 죽은 것이고 그를 통해서 얻을 것은 없다.

 

고난을 겪고 가을에 꽃피운 국화는 생명의 활력이 넘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믿음의 길을 세례 요한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서 잘 설명하고 있다. 마태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3; 40:3). 주의 길은 예수님이 세상에 주실 믿음의 길인데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 (40:4) 이라고 설명한다.

 

  믿음의 길을 보면 첫째, 골짜기가 메워진다. 둘째, 산과 높은 언덕이 낮아진다. 셋째, 험한 곳이 평지가 된다. 오늘의 말로 한다면 산을 깎아내리고 골짜기를 메워서 길을 낸다. 즉 고속도로를 낸다고 하면 어떨까? 믿음은 우리의 삶의 고속도로라 할 수 있다. 산을 오르내리지 않고 골짜기를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쉽겠는가, 고속도로는 지반시설(infra structure)이고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infra function)는 고속도로가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길에 통행하는 이가 있어서 길이되고, 그 기능은 살아있다.

  사랑이라는 자동차가 믿음이라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달리지 않는 고속도로, 고속도로가 없는데 자동차가 달린다면 무엇 잘못된 것이겠지, 도로는 있는데 운행하는 차량이 없다면 이는 공허(空虛)한 것이겠지, 믿음이 있는데 사랑이라는 행위가 없다면 이는 공허한 것이다. 도로가 없는데 차량이 달리고 있다면 분명 허상(虛像)일 것이다. 주변에 허상이 너무 많다. 생명력이 없는 삶이겠지, 경계해야한다.

 

통행이 없는 길은 공허하고 계속되면 길은 없어진다.

  우리 삶에서 공허한 삶이나, 허상을 추구하는 삶은 실패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은 하나이고, 나무의 뿌리와 눈에 보이는 둥치가 하나이고, 길이 있는 곳이 자동차가 달리는 것이 모두 하나이다. 사랑의 행위는 믿음에 터 해야 하고 사랑의 실체(實體)는 믿음에서 찾아야 한다.

 

 

2022111()

2022 J. K.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