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코
“사선(死線)을 넘어서”
아주 오래전 나는 “사선(死線)을 넘어서”라는 책 한 권을 읽었다. 책 내용의 구체적 사실 중 기억되는 부분은 거의 없고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년 7월 10일 ~ 1960년 4월 23일) 선생은 폐병으로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으나 기도로 소생하였고 그 뒤 또 재발하여 담당 의사로부터 3년간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은 후 남은 삶을 어떻게 의미 있게 살까 생각하다가 빈민굴에 바치기로 한 것과 일본의 복지 근대화를 이루고 세계평화주의자였다는 정도가 남아있었으나 아주 희미한 기억이었다.
내가 한평생을 살아온 대구대학교와 가가와 선생은 은연중에 관련이 많았음을 알게 되어서 이분에 관해 다시 관심을 두고 그의 삶을 살펴보게 되었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 豊彦) 선생은 어린 시절이 아주 불우(不遇)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기생첩의 다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가가와 선생이 4세 때, 어머니는 5세 때 돌아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본처(本妻) 밑에서 자랐으니 형편이 어려웠을 것이고 정체성에 문제가 있었다. 다행히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이 그를 버티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첩의 아들이란 그 당시 사회적 상황이 자존(自尊)심을 느끼기에는 너무 냉혹했었다. 키도 작고, 신체적 질병도 여러 가지를 갖고 있어서 생존의 조건으로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람에게는 만남이 중요하겠지, 가가와 선생이 12세 때 구세군의 길거리 노방전도(路傍傳道) 대(隊)를 만나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구세군 노방전도 대는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북치고, 나팔 불고 동리가 떠들썩하게 돌아다니며 전도를 했다. 그들은 외친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12살 소년이 그들에게 묻는다. 하나님은 서자(庶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하나님은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 자신에 찬, 확신에 찬 대답을 듣는다. 가가와 선생은 그들을 따르게 되었고 예수를 알기 시작했다.
가가와 선생이 도쿠시마(德島)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 담임선생님이 기독교 신자였는데 온유한 심령을 지닌 분이었고 담임 선생을 통해서 미국 선교사에게 연결이 되었다. 이때 만난 선교사는 로우강과 마야스 두 선교사이다. 이분들은 가가와 선생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었다. 가가와 선생이 신학교에 진학하고 프린스턴대학에 유학하는 일 등에 이분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다.
가가와 선생은 12세 때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요즘 결핵은 치료하면 되고 그리 두려운 병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초 폐병은 지금 암보다 훨씬 무서운 병이고 특히 전염되는 병이니 모두 꺼리는 병이였다. 당시는 치료 약도 개발되지 않았고 따라서 치료가 어려울 때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폐결핵을 제일 무서운 병으로 여겼다.
가가와 선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대학 신학부 예과에 입학해서 19세 때 졸업하고 하기휴가를 이용하여 신앙적 감명을 크게 받은 나가오 마키(長尾 卷) 목사가 시무하는 도요하시(豊橋) 교회 노방전도(路傍傳道)에 참여하여 온 힘을 다하여 41일간 무리한 전도를 했던 모양이다. 선생은 체구는 작았으나 음성이 커서 이런 전도에 잘 적응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리였다. 크게 각혈(咯血)을 하는 중태에 빠지게 된다. 가가와 선생은 기도의 사람이다. 가가와 선생은 항상 기도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한다.
나가오(長尾 卷) 목사는 豊橋에서 교회를 개척했으나 교인이 오지 않아서 부인과 둘이 매 주일예배를 드리는 세월이 5년이나 되었는데 나가오. 목사는 걸인들을 잘 대접해 보내는 사랑의 사람이었고 교회 개척 3년 되는 해 폐결핵 환자, 각혈을 하는 가가와 선생이 찾아왔다. 나가오 목사는 괘념치 않고 기도해주고, 음식을 같이 먹는 사랑의 실천자였다. 나가오 목사에게 가가와 선생은 첫 신자였다. 가가와 선생은 이 나가오 목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배우게 된다. 나가오 목사는 많은 사람에게 전도는 하지 못했지만 가가와 선생 같은 분에게 전도했으니 그 열매가 적다고 할 수 없다.
도요하시교회 노방전도로 가가와 선생의 폐병이 도지고 심한 각혈(咯血)을 하여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독구지마에서 아버지 같은 마야스 선교사가 오고 모두 임종을 기다리는 밤이었다 가가와 선생의 기도와 나가오 목사 가족의 간절한 기도와 마야스 선교사(고베신학교 교수)의 기도는 쇠를 녹이는 열정적 기도였다고 한다. 아침 동쪽의 태양이 떠오를 때 가가와 선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 같은 뜨거운 영감을 느끼며 가가와 선생을 괴롭힌 담은 사라지고 당(糖)이 돌아와서 그는 죽음에서 벗어났다. 첫 번째 사선(死線)을 넘는 기적이었다.
좀 나아진 가가와 선생은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진학하게 된다. 고베신학교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설립한 신학교이다. 고베신학교 재학 중 폐병이 악화 되어서 마야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나 가가와 선생은 담(痰)이 너무 많이 차올라서 호흡이 곤란해지고 생존의 가능성이 없었다. 담당 의사는 기독교인인데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단념하게 되지만 가가와 자신과 주변에 나가오 목사가족과 마야스 선교사의 처절한 기도는 담을 제거하고 호흡을 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사선을 넘는 일이 일어났다.
고베신학교에 복학한 가가와 선생은 얼마 안 있어 축농증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출혈이 너무 심하여 도저히 소생할 수 없다고 판단이 되었고 마야스 교수와 신학생들이 와서 고별 기도와 찬송을 부르고 갔으나 다음날 병실에 와보니 가가와 선생은 모든 것이 회복되고 살아있었다. 또 사선을 넘은 것이다.
담당 의사의 말이 앞으로 생존 가능한 기간이 3년이라고 말하였다. 가가와 선생은 이 3년을 어떻게 보람있게 쓸까를 생각했다. 고베신학교 앞에 있는 빈민촌 신가와(新川)를 그는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3개월 동안 그 앞에서 노방전도를 하였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말만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빈민촌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의 애환을 같이하고, 그들을 돕게 된다. 이 일은 나가오 목사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가가와 선생은 1909년 빈민촌에 들어가서 14년간 그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았다. 이 기간이 끝나갈 무렵 가가와 선생은 미국 프린스톤대학(Princeton Theological Seminar)에 2년간 유학을 다녀오게 된다.
가가와 선생은 1920년에 “사선(死線)을 넘어서”를 출간(出刊)하게 된다. 이 책은 일본에서 단번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그 후 13개국어로 번역되어서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가가와 선생은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고, 슈바이처, 간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되었다. 일본의 성자(聖者) 가가와 선생은 “작은 예수”로 통하게 되었다.
가가와 선생은 사랑의 사도(使徒)이고, 기독교 사회주의자이고, 세계평화주의자이다.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이지 이론을 정립한 신학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산 신앙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가가와 선생은 백성의 가난과 고난을 마음 아파했고,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편이었고, 가난한 백성을 부유하게 할 방안을 세우고 실천한 사람이다. 노동조합 운동을 하여 정부로부터 미움을 샀고, 국민의 생활개선을 위해서 협동조합운동을 열었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세계공동체 운동을 주창한 사람이다. 각종 협동조합은 가가와 선생에게서 연원(淵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사회복지제도는 가가와 선생이 그 기반을 세웠다고 보아야 한다. 가가와 선생의 주장과 행동은 불평등의 해소, 가난의 극복, 자유와 평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가와 선생은 반전론자(反戰論者)이며 세계평화를 주창했기에 일본 제국주의 이상과 맞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정부의 요 시찰인(視察人)이었고, 감시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 자들이 가가와 선생에게 왜 전쟁을 반대하십니까? 물으니 선생은 타민족을 괴롭히지 말라, 전쟁하면 진다고 했다.
군부는 가가와 선생에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일본)는 국토가 작고, 인구는 많고,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야 삽니다. 라고 했다. 가가와 선생은 그들에게 나가면 망하니 나가지 말고 너 자신을 개발하라고 하였다. 네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하였다. 패전 후, 일본은 국토가 확장되지 않았고 인구는 증가했고, 부존자원 역시 늘어나지 아니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 대국(大國)이 아닌가? 가가와 선생의 지론은 오늘 정보사회에서 더 생생하게 그 의미를 느끼게 된다. “네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너 자신을 개발하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에는 약 200만 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 장개석 총통은 부인 송미령 여사의 권유로 포고령을 발하여 일인(日人)들이 귀국하는 길을 열어주도록 한다. 송미령 여사는 일본의 가가와 선생을 생각하고 이런 권유를 했다고 하니 나라에 의인이 있으면 국민이 사는 길이 열린다고 보아야겠다. 이런 포고령이 없었으면 일인들의 희생이 많았을 것이다. 중국에서 일인들의 만행이 심하여서 중국인은 일인들을 증오(憎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가와 선생은 의사가 선고한 3년이란 시한부(時限附) 인생에서 좌절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세운 거인(巨人)이다. 이 3년을 어떻게 가치 있게 사용할까? 그러나 가가와 선생은 3년만 산 것이 아니라 72세까지 살았으니 이런 긍정적 가치관이 죽음을 초탈하는 기적을 가져온 것이다.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시한부 인생이다. 그러나 영원히 살 것 같은 생각으로 살며, 무의미한 삶을 살아간다. 범인과 거인의 차이는 이런 데 있다고 보인다.
가가와 선생은 이론 신학자이기보다는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실천가이다.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같이하고 가난한 백성에게 풍요를 주고, 사람이 모두 평등하며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제도는 모두가 다 잘 살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복지 사회의 이상이기도 하다. 사람이 아주 큰 짐을 지고 있지만 무겁지 않은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짐을 지고 산다. 큰 짐을 졌던, 작은 짐을 졌던 모두 짐이 가벼우면 큰 짐을 진 사람이나 작은 짐을 진 사람 모두가 평안할 것이다. 이런 이상이 복지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이다.
오늘은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를 회상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본다.
2022년 10월 26일(수)
Ⓒ 2022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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