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단상(斷想)] 71. 사랑의 사도(使徒) 이영식 목사

profkim 2022. 12. 21. 15:30

 

만년의 이영식 목사 많은 상과 훈장을 받으셨다.

 

                   71. 사랑의 사도(使徒) 이영식 목사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사회에 빛을 비추신 한 분을 생각해본다. 한 시대는 영웅을 부르고, 영웅은 그 시대를 만들어간다. 구한말과 일본 강점기 그리고 광복과 산업화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혼란과 번영을 지켜보아 왔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어찌 가난했던 시절을 다 알겠는가. 그러나 그 시절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야 한다.

 

  나와 이영식(李永植, 1894-1981) 목사와의 만남은 6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대구대학교(당시 한국사회사업대학) 학장직을 이태영 총장에게 넘겨주시고 재단의 일만 관여하실 때였다. 그래서 자주 만날 일은 없었지만, 대구에서 유명하신 분이니 이전부터 이영식 목사에 관해서는 알고 있던 터였다.

길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길을 찾아가는 사람도있다. 길을 알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

  이영식 목사는 체구(體軀)가 작은 편이시었으나 목소리가 우렁차신 웅변가이셨다. 당시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아무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던 때 맹농학생을 수용해서 기르시면서 자신도 그들과 같이 기거(起居)하셨다. 그들의 벗이 되기도 하시고 아버지이기도, 더러는 할아버지이시기도 했다. 평생 자기 주택 없이 이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구한말(舊韓末)에 태어나시고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시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나셨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자식 교육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셨기에 늦었지만, 성주 옥화교회 부설 영명학교에 입학하시고 신교육을 접하시게 되었다. 기독교회 학교이니 신학문과 성경을 배우게 되고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된다.

계성학교 지하실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 태국기를 만들었다. 현재 그곳에 참가자의 사진이 걸려있다.

  일본 강점기 계성학교 학창 시절 미국 북 장로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영향받은 일과 1919년 기미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시어 옥고(獄苦)를 치르시게 되면서 민족의식과 정의감 같은 것이 자리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이영식 목사가 사랑의 사도로 태어나는 한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영식 목사에게 아주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 고베 신학교(神戶神學校)에서 만난 가가와 도요히꼬(賀川 豊彦, 1888~1960) 목사이며 가가와 목사의 낮은 곳에서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이런 영향은 기성교회 목회에서 신앙적 갈등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낮은 곳에서 봉사하라는 가가와 목사의 휘호이다.

   고베신학교를 1927년에 졸업하시고 대구서문교회 목사로 부임하셨다. 이영식 목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41일 귀국하여 당시 대구에서는 제일 크다는 서문교회(교인 1,000)

   목사가 되었고, 박문찬 목사의 2녀인 박두순과 1110일 결혼했다.

   (이영식 목사 녹음자료에서)

 

  이영식 목사는 계속해서 서문교회 목회 시절, 자신의 신앙에 대한 변을 진술한다.

 

    그해(1927)가 다해 갈 때쯤 해서 나는 신앙에 대해 더욱 불만과 회의감이

    들어서 목사직을 맡을 생각이 없어서 사직했다. (이영식 목사 녹음자료에서)

목백일홍은 아주 늦게 싹트지만 꽃은 오래 지속되어 100일을 간다한다.

  이영식 목사의 녹음 진술을 들어보면, 고베신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 서문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무언가 모를 갈등을 많이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왜 갈등하셨을까. 대구 서문교회는 큰 교회다. 비교적 안정된 목회와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영식 목사는 갈등했다. 일본 고베에서 겪은 경험과 이 목사에게 형성되어있던 복음에 대한 가치관이 교회의 실상과 괴리(乖離)에서 온 갈등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교회를 사임하고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은 길로 나간다.

 

  이후 이영식 목사의 삶은 유랑(流浪)이었다. 17년여의 세월을 대구 계성학교 교목으로(1928), 대구 나병 환자 교회로(1929-1937), 경북 의성교회 목사(1937), 이북의 성진교회로(1938), 만주의 명월교회로(1941), 일본의 요코하마(橫浜) 교회로(1943) 전전하며 보낸다. 복음주의적 삶의 길을 찾아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약자를 돌보고 보살피는 긴 여정을 걷게 된 것이다.

숲이 있기 전에 숲에 관한 꿈을 꾼 사람이 있었다.

  서문교회 사임 후 계성학교 교목으로 가게 된 이유 역시 신앙의 갈증을 해소해 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젊은이들과의 토론은 새로운 길을 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낮은 곳으로 가서 봉사하라는 소명이 있었다. 결국, 그는 나병 환자 교회로 옮겨서 8년여를 목회하시게 된다.

 

  이영식 목사는 두려움이 없는 분이다. 가난도,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미래도, 어떤 위협도, 심지어 죽음도 그분을 두렵게 하지 못했다. 두려움이 왜 없었던 것일까. 그 영혼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세상사(世上事)를 당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자신(自信)을 갖게 하고, 긍정적 결과를 기대하게 하며, 더 나아가 행동하게 할 것이다. 이 행동이 사랑의 행위이다.

광복 후 세운 맹학교 졸업식에서 앉은이 좌로부터 신후식 목사, 이영식 목사, 박영생 교장

  광복 후의 이 목사의 삶은 완전히 낮은 곳으로 임하여 그의 사랑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센병 환자에게로 다시 향했고, 심신의 손상(損傷)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품었고, 범죄를 저지른 교도소에 갇힌 수인(囚人)의 친구가 되었다. 말년에는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 이름 없이 객지에서 죽은 원혼(冤魂)을 수습하여 귀국시켰다. 이런 일들은 오직 사랑의 행동인 것이다. 그가 이런 일을 행하시기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갈등과 방황과 공분(公憤)의 삶을 살았다고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무겁든 가볍든, 짐을 지고 산다. 그 모든 짐이 작고 가벼워지면, 큰 짐을 진 사람이나 작은 짐을 진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평안할 것이다. 아주 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크지도 무겁지 않은 사회를 이루는 것이 오늘날 복지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이다. 이영식 목사는 우리나라 복지사회를 이루는데 많은 기여를 하셨다고 본다.

대구맹아학교를 찾은 기독실업인들 좌에서 셋째 이영식 목사, 다음이 안두화 목사, 다음이 이태영 총장

  이영식 목사의 만인 평등사상, 자유주의, 도전정신, 불의에 대한 항거 등 그의 삶을 이루었던 가치들은 많은 고난과 참 만남을 통해 생성된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가가와 선생과 만남은 이영식 목사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두 분 모두 신학 이론가이기보다는 성경이 이르는 사랑의 실천가(實踐家)였다.

 

  이영식 목사와 가가와 도요히꼬 선생은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이영식 목사가 유학한 고베신학교에서 두 분이 만났고, 고베신학교 동문이다. 같은 장로교 목사로서 사상이나 그 실천에도 유사점이 많다. 가가와 선생의 후배요 그를 측근에서 지키고 보살핀 구로다 시로 목사 역시 고베신학교 교수로, 또 동문으로 이영식 목사와 사상이나 실천에서 영향을 주고받은 것 같다.

 

작약꽃은 왕자의 품격을 갖추었다. 영적 세계에서 왕자의 품격을 갖춘 이영식 목사께 드린다.

  이영식 목사는 평안한 길을 내려놓고 낮은 곳에서 봉사한다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한센병 환자에게로 갔으며, 당시 사회적으로 돌봄이 없었던 심신의 손상을 입은 장애인과 더불어 살았고, 한때는 교도소에 갇힌 분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을 도왔다. 누구나 평안한 삶을 바란다. 그러나 이영식 목사는 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사랑을 실천했으니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른 그의 사도(使徒)임이 확실하다.

 

 

 

20221221()

2022 J. K.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