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세모 방담(歲暮 放談)
한 해를 보내면서 이런저런 상념(想念)에 젖어 든다. 삶에서 오는 괴리(槐里)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모자랐던 부분에 대해 돌이킴도 있고, 지난 세월에서 느낀 노년의 아픔도 있고, 발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한계도 느낀다. 세상에 살고 있으니 모순과 갈등의 상황도 만나게 된다. 모두 삶의 현장에서 맞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러는 기분 좋은 소식도 있었다.
1.
내 생애(生涯) 처음으로 작년 봄 경산에 전셋집을 얻어서 1년여를 살아왔다. 마침 입주한 집이 새로 건축된 아파트여서 자질구레한 A/S를 받아야 하는 것들이 있어서 심심치 않게 주인 노릇을 했다. 대부분은 쉽게 끝이 났는데 화장실에서 생긴 문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새 비데인데 비데가 작동됐다가 안 되고 또 얼마를 지나면 작동되는 것이다. 비데 기사(技士)가 와서 수리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비데 기사가 새것으로 교체를 하겠다고 해서 그러면 좋겠다고 해서 새것으로 교체를 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데 기사가 와서 다시 새것으로 교체를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 했고 또 새것으로 교체를 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기사에게 물었다. 교체한 새 비데라는 것이 반품된 것을 수리해서 보내온 것이 아니냐 하니 사실 그렇다고 했다. 이번에는 정품을 가져오라 했고 기사는 그렇게 하도록 본사와 협의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새것으로 교체를 했다. 세 번째 비데는 아무 탈 없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한국기업 정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문제가 생긴 제품에 대해 불량품 제조회사라는 각인(刻印)이 되고 이런 회사의 제품을 나는 다시 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을 수차례 반복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기업은 이미지를 잘 관리해야 한다.
1980년대 자동차의 품질이 오늘에 비하면 엄청나게 뒤떨어질 때이다. 미국에서 중고차를 살려면 도요타를 사라고 했다. 고장률이 낮다는 것이다. 도요타 직영 메케닉에서는 문제 될만한 것은 다 손보아 내보낸다고 들었다. 도로에서 고장으로 차가 서 있게되면 그 회사의 제품을 누가 사려 하겠는가. 도요타는 자동차 시장에서 세계 1위의 판매율을 자랑하고 있다. 기업 정신은 어떤 것일까? 조그만 이익을 도모하다가 큰 것을 놓친다고 한다. 이미지 관리를 잘하는 회사가 일류기업이 될 것이다.
2.
묘하게도 변기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화장실 바닥과 변기가 접촉하는 부위에서 물이 새 나오는 것이다. 보통 때는 탈이 없는데 변기에 앉았으면 새는데 간헐적으로 샌다. A/S 신청을 했고 두 번 와서 수리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변기를 수리하는데는 입주자에게도 어려움이 많게 된다. 그다음 기사가 와서 변기(便器)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변기를 바꾸었다. 그러니 세 번째 변기를 다시 놓은 것이다. 기사의 말대로라면 문제가 없어야 할 것인데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다음은 기사가 와서 “물이 새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참 황당한 경우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물이 새는 것이 아닌데 이 집에 사는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이니 거짓으로 물이 샌다고 해서 기사들을 고생시킨다는 의미로 추리할 수도 있다. 또 이 집에 사는 사람이 치매가 와서 소변을 흘리고 물이 샌다고 한 것이라는 이론도 가능할 것이다. 한 가지 더 첨부한다면 고칠 자신이 없어서 입주민의 탓으로 돌리려는 심사(心思)일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첫째는 이 사회가 나이만 들면 치매 노인 취급을 하는 문제이다. 어느덧 고령사회가 되고 늙은이들은 정신력이 퇴화하여서 일을 저지르는 부류로 가늠해 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에 가보면 젊은 간호사들이 늙은이들을 어린아이 다루듯이 하는 말투를 더러 보게 된다. 이런 행태는 그들만의 문제이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는 풍조가 아닌가 우려가 된다.
다음 두 번째 문제는 전문 기술자들의 능력이다. 이런 문제는 한 번으로 끝내어야 한다. 문제가 어디 있는지 그리고 문제를 분명히 알고 대응이 정확했다면 한 번에 끝났겠지, 원인을 모르니 수리가 되겠는가, 이때 A/S를 받는 사람이 피해자가 된다. 독일에서 기술자 양성은 마이스터(meister)를 기르는 것이다. 마이스터는 기술 대응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양성하는 것이다. 두 번 세 번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실수한다면 그는 기술자가 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경제 손실이 얼마나 크게 생기겠는가, 회사와 소비자 모두에게 큰 손실을 입히게 된다. 그리고 끝에는 남의 탓으로 돌리는 파렴치(破廉恥)를 저지른다.
3.
나는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 뉴스며 토크 쇼 등 보면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그래서 아예 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근년에 들어서 우리 국민은 양분된 것처럼 보인다. 좌(左)는 무엇이고 우(右)는 무엇인가, 인류는 20세기를 지나오면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 투쟁이 있었고 패러다임이 여러 번 이동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데올로기 문제이기보다는 국민의 복지, 행복이 문제이다. 성공한 이데올로기도 없고 실패한 이데올로기도 없다. 부분적으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해왔다.
공허한 이론 논쟁은 우리 사회를 와해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생산성이 높아야 그 열매로 재분배할 수 있다. 생산의 중요성만큼 재분배 역시 아주 중요하다. 사회의 통합(統合)과 안녕(安寧)을 유지하기 위해서 두 가지 요소가 잘 융합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1960년대 지배 패러다임은 구조주의(structuralism)였다. 사회문제를 계급 간의 불균형으로 보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강성 학생 운동(student power)과 노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문제해결의 해답이 아니었다. 미국 디트로이트(Detroit)는 1980년대 자동차 산업으로 번창한 도시였다. 그 후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디트로이트는 쇠퇴하고 말았다. 강성 노조는 기업의 발목을 잡았고 기업은 발전하지 못했고, 미국 자동차는 고장이 잦은 차로 전락하게 되었다. 미국이 자동차의 종주국(宗主國)임을 고려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사회에는 기업이 있어야 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노동조합도 있어야 한다. 이 둘은 상생(相生)의 관계여야 한다. 기업이 없는데 노동자가 있겠는가, 노동자가 없는데 기업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기업과 노동자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서 힘을 합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멸하게 될 것이다. 한편이 과해서 소멸된 기업은 수 없이 많다.
오늘 우리 사회는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를 표방하고 복지국가(福祉國家)를 지향(指向)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지향하지만, 복지국가는 전체주의 모델을 수용한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주요 이유는 생산성 저하에서 왔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 국가의 국민은 왜 일을 해야 하는가? 즉 일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오늘 부모에게 의존해서 사는 젊은이들과 비슷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자연 이런 사회는 생산이 저조하게 되고 따라서 공동분배가 어려워지지 않겠는가. 나눌 것이 없으니 못 나누게 된다.
오늘 우리 사회는 생산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명제(命題)가 있고 재화를 재분배해야 하는 과제(課題)가 있다.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융합이 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토론을 거쳐서 답안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오늘 이데올로기 논쟁은 시대에 뒤진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이런 사회적 과업을 효율화하기 위해서 정치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종교계 인사, 교육계 인사,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생동력이 넘치는 사람을 기르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오늘 종교계 인사들은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교육은 지식을 전수하는 기능도 있지만 자라나는 세대가 가치관을 바르게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 대립과 갈등 구조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내려놓고 토론을 통해서 국민 전체가 가치를 공유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서로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웃은 나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소중한 존재들이다.
2022년 12월 29일(목)
Ⓒ 2022 J. K. Kim
'단 상(斷 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斷想)] 74. 만 남 (10) | 2023.01.19 |
---|---|
[단상(斷想)] 73. 자연에서 배우는 지혜: 토끼(兔) (12) | 2023.01.09 |
[단상(斷想)] 71. 사랑의 사도(使徒) 이영식 목사 (6) | 2022.12.21 |
[단상(斷想)] 70. 자연에서 배우는 지혜: 협동(協同) (6) | 2022.12.10 |
[단상(斷想)] 69. 남천에 겨울이 오면 (10) | 2022.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