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의인(義人)의 삶
사전에서 의(義 righteous)의 정의를 보니 “사람으로서 지키고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道理)”라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도리라는 뜻이다. 기본 도리가 무엇인가는 보는 눈(viewpoint) 에 따라 달라질 것이니 삶의 가치를 어디서 찾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성경에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다. 의인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믿음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사회를 바라보고, 자연을 바라본다는 뜻이겠지, 그러면 보는 사람마다 믿음 직 슬어 보일 것이고, 사회를 신뢰하게 되고, 자연이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객관적 사실(事實)과 관계없이 나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내가 주체가 되어 모든 것을 본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내가 독립변인(獨立變因)이 된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 도덕적으로 볼 때 정직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도 있다. 이때 우리는 사람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정직한 사람은 믿음직하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부정적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런 경우, 나는 종속변인(從屬變因)이 될 것이다. 이때, 정직한 사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인의 조건으로 보지는 않는다.
상대하는 사람이나 사회나 자연 즉 객관적 사실과 관계없이 내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이를 의인의 조건인 “믿음의 눈”이 될 것이다. 내가 변화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게 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평안하고, 막힘이 없고, 자유롭고, 기쁨이 있겠지, 그러면 사람하고 통(通)하고, 하늘과 땅과 통하고, 하나님과 통할 것이다. 정신세계에서 이 길을 고속도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믿음의 길 즉 고속도로이다.
고속도로가 기반시설(基盤施設)인 것처럼, 정신세계에서 “믿음”은 기반시설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기능은 무엇일까? 바울은 분명하게 이 관계를 설명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사랑으로 가시화(可視化)된다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설명한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행위(action)로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그 행함을 바울은 사랑이라 설명한다. 야고보는 더 나아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설명한다. 믿음과 사랑의 관계는 안과 밖의 관계라고 보면 되겠다. 고속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관계로 보아도 좋겠고, 나무의 뿌리와 수간을 포함한 눈에 보이는 나무 전체와의 관계로 보아도 좋다.
사랑의 행위에는 기쁨이 있고, 새로운 생각이 무궁무진하게 떠오르고, 나누고 섬기는 일이 즐겁고, 큰 수고를 하여도 힘들지 않고, 사람들에 대해 긍휼(矜恤)히 여기는 마음이 샘솟듯 하고, 타인과 내가 하나가 되는 동고동락(同苦同樂)이 이루어진다. 이런 일을 갈구(渴求)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 전 세계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나누고 섬기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 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다.” 의로운 행위를 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받을 복은 “배부름” 이다. 음식에 의해 배부름이 아니라 정신세계에서 풍요를 누린다는 의미겠지, 밝은 빛과 충만함과 질서정연한 정신세계가 열린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이런 가치추구에 저해하는 요인이 생긴다면 의로운 사람들은 저항할 것이다. 그리고 저항 세력은 핍박해 올 것이다. 그것은 세속 정부일 수도 있고 교권 주위자일수도 있고, 다른 종교일 수도 있다. 의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저항할 것이다. 이런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이 관계를 다음 도식(圖式)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것이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은 천국의 소유자이다. 천국을 소유했기에 배부르게 된다. 천국은 빛과 충만하고 조화로운 질서정연한 곳이다. 팔복(八福)의 두 개 항목(의에 주리고 목마름→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은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의(義)를 갈망하는 사람이 이에 대한 도전을 받았을 때 이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의에서 이루는 가치는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진리는 수호할 가치가 있다. 의에 대해 핍박하는 삶들은 누구일까? 이는 아주 다양한 무리일 것이다.
의로운 삶을 핍박하는 무리는 세속 정부(政府)일 수 있다. 이에는 로마제국의 경우가 있다. 황제가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기독교에 화살을 돌려 핍박한 예일 것이다. 네로나, 도미티아누스 같은 사람이 예가 될 것이다. 또 유물사관에 의한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를 부정하고 말살한 예가 있다. 이런 사상은 몰락하였다. 실패한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이교도(異敎徒)에 의한 핍박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이스람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배타적 종교관을 가진 경우 이교도를 핍박할 것이다.
제일 중요한 핍박을 가하는 세력은 기독교 안에 있다. 교권주의자들이나 형식화된 기득권세력일 것이다. 이들은 성경의 본질에서 멀어져 있으므로 세속화된 무리이고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세력에 대해 제재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자연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형식화된 가톨릭교회에 대해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종교 개혁자들을 핍박하게 된다. 이런 경우 수많은 종교 개혁자들이 핍박을 받아서 순교도 하고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다.
영국성공회는 가톨릭교회의 모순(矛盾)을 개혁했지만 철저하지 못했고 이에 대해 본질주의자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 영국의 청교도 집단은 성공회가 핍박한 대상이고 이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건국의 초석이 된다.
의로운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무리는 가족안에도 있고 직장안에도 있고, 이웃에도 있고, 어느 곳에나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그 삶이 더 빛날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의를 갈망하는 사람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고 이런 사람들이 천국을 소유한다는 가르침이다. 팔복의 내용구조를 살피면 이들의 천국은 배부른 곳임을 알 수 있다. 물리적으로 배부름이 아니라 영적으로 풍요를 누린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교시하는 바는 의인이 누리는 천국은 풍요로운 곳이란 의미로 보면 좋을 것 같다.
2023년 4월 26일(수)
Ⓒ 2023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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