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청지기(manager)
여행중에 지난 주일 한 교회 예배에 참여하였다. 목사의 설교가 청지기(manager)에 관한 것이었다. 설교자의 이야기로 이 성경 내용은 난해하다고 부언(附言) 했다. 사실 난해한 성경 내용임이 확실하다. 이중으로 잘못을 저지른 청지기를 주인이 칭찬하였기 때문이다.
내용의 전개를 보면 옛날에 한 부자가 있었고 그에게는 청지기(manager)가 있었다. 이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고 있었다.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청지기에게 해고 통고를 하였다. 그 뒤 이 청지기는 자신이 살아갈 궁리(窮理)를 하였다. 그래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 빗을 깎아주었다. 기름 100말을 진 사람은 50말로, 밀 100가마를 빚진 자에게는 80으로 빗을 깎아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했다고 한다. 주인은 청지기를 지혜 있게 행동해서 칭찬했다고 한다. 현세의 가치 기준으로는 이 청지기는 분명 이중적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주인은 한 번 더 잘못한 사람을 칭찬했다는 점에서 난해한 성경이라 하는가 보다.
청지기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주인의 뜻을 위배해서 주인의 돈을 지급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불의(不義)한 행동이다. 청지기는 주인에 뜻에 따라서, 그의 명령에 따라서 지급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청지기는 주인의 뜻에 위배해서 자신의 뜻 대로 돈을 지급했다. 이런 경우 이는 청지기가 아니고 주인(owner)이다. 이 점이 청지기와 주인의 차이이다.
이 성경 말씀에서 출현하는 등장인물은 주인, 청지기(선한 청지기와 불의한 청지기) 그리고 빚진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들 사이에 행위는 빚을 주고받는 일과 빚을 삭감해 주는 일 등으로 구성된다.
주인은 하나님일 것이고, 청지기는 모든 인간, 빚진 자들은 죄인일 수도 있고 물질적 부채를 진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성경(눅16:1-13)의 내용은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를 은유(隱喩)하고 있다. 왜 주인은 이중으로 잘못한 사람을 칭찬했을까? 주인은 청지기에게 나누고 섬기는 일을 맡겼는데 이 불의한 청지기는 그 일을 하지 않아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불의(不義)가 무엇인가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이 살길을 찾아 나셨지만, 이것이 우연의 일치로 주인의 본래의 뜻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뜻, 즉 명령을 모르고 행했기 때문에 이들은 선(善)한 청지기는 아니다. 다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지혜있게 행했음으로 이를 칭찬하였다.
나눔과 섬김이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지만 이를 모르고 나누고 섬기는 사람도 많다. 이런 분들은 지혜자이지 선한 청지기는 아니다. 이런 분들의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고 비록 불으l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면 그들이 마지막 날 영주할 곳으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선한 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의 행위는 주인의 뜻에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모든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 주인이 원하는 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 즉 심령의 변화가 먼저여야 한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청지기이다. 우리의 신체, 재능, 재물, 사회적 직위 등 모든 것이 내 소유가 아니다. 이런 것들이 나의 일용할 약식을 제하고 모두 나누고 섬겨야 하는 하나님의 것이다. 많이 소유하고 나누고 섬기지 않는다면 불의한 청지기이다. 그리고 언제고 이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이다. 없어지는 날에 후회해도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선한 청지기이다. 둘째는 불의한 청지기이다. 선한 청지기는 날로 번성하고 평화가 있고, 기쁨이 넘치고, 그 가진 소유가 증식된다면 아이러니하다 할까? 불의한 청지기는 믿음과 사랑에 터 한 삶이 아니므로 불안하고,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잡으러 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가고, 소유가 큰 짐이 된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하지 않을까?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시(敎示)는 주인의 뜻에 따르면 인생이 가장 행복해지고 멋있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반대로 불의한 청지기는 그의 뜻을 위배한 삶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는 가르침이다. 왜 순종이 복인가를 음미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사람이 가장 행복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선행하지만, 그들은 소유자로서 자기 것을 나누어 주기 때문에 항상 자기 이름을 내세우게 된다. 그리고 나눔에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불의한 제물이 되고 나누며 자기를 기억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너스 클럽(honors club)이 있다. 사회에 1억 이상을 쾌척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클럽이다. 이분 중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들어 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의미한 행위라 할 것이다. 진정한 사회 발전을 위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섬겼다면 자기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울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난해한 것이 아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혼란스럽게 보일 뿐이다. 이 비유가 은유하는 바를 알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2024년 10월 9일
ⓒ 2024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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