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4. 정답을 가르치는 대학

profkim 2020. 3. 11. 17:08



정답을 가르치는 대학

 

 


 

우리 나라 대학문화는 산업사회 패러다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위 탈 현대성이 지배되어야 할 대학은 아직도 근대적, 군사적 문화에서 탈피하지 못한 교육행정가들에 의해 부당한 간섭과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대학 평가나 교육위원회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 싶으면 서류를 잘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우수한 교육을 수행하고 학생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더라도 서류가 구비되지 않았다면 그의 교육은 나쁜 것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물레방아로 쳐들어가는 기사 돈키호테를 묘사하여 기사의 어리석음을 풍자하였지만 오늘 우리교육은 껍데기 치레 교육으로 속 빈 강정을 만들고 있다는 우려를 하게 한다.


대학에서 학생 학력평가를 하는데 상태평가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성적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교수는 답이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아주 기초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질문하게 된다. 출제경향이 그러하니 학생들은 그에 맞추어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 고등정신능력이나 창의적 사고를 유도하지 못하게 된다. 어리석은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정답을 가르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오랜 기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객관주의, 실증주의, 보편주의에 길들어져 왔다. 실증적으로 증명된 것만이 진리라든지, 진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오래도록 우리를 지배한 것이다. 그래서 학교는 객관적 지식을 가르치고, 객관적인 것만이 지식이고 그것에는 정답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학교교육은 정답을 찾아내고 그것을 암기하고 시험지에 옮겨 쓸 수 있을 때 제대로 교육된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정답인지 또 상황이 바뀌었을 때 그 답은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해 가르친 바가 없다. 우리는 실증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비판 능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산업사회 학교는 그런 점에서 비교적 단순했다고 본다. 지식이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을 알면 되니 소위 학습은 반복적이고 기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기능주의적인 경향이 이런 해답을 얻는 데 매우 유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교육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암기력이나 기능획득은 이런 상황에 매우 걸맞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학교는 정답을 가르치는 것이 소임이라고 생각하였고 지금도 그것은 계속되고 있다.

 

나는 학부와 대학원 강의 개강 첫 시간에 내 안경집의 색깔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누구나 쉽게 검정 색이라 대답한다. 그 다음 왜 이 안경집이 검정 색인가를 묻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면 다음 시간에 그 이유를 써 가지고 오도록 한다.

 

내 안경집이 검정 색이란 객관적이고 구체적 답이다. 그 답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100명에게 물어보아도 모두 검정 색이라 쓸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내 안경집이 검정 색이라는 것은 진실인가? 조건적인 건가? 잠자리도 검정 색으로 보는가? 벌도 검정 색으로 보는가? 등에 대해서 검토를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학생은 교수님이 게을러서 닦기 싫어서 검정색을 선택했느니, 안경점에 검정 색 밖에 없어서 검정 색을 샀느니 등 얼토당토않은 답을 써오곤 한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이 이 문제의 초점을 못 맞추는 것이다.


정답이 있어 정답을 가르친다면 그 배경적인 것 그리고 정답이 어떤 경우 달라질 수 있는지, 어떤 조건 하에서 정답인지 등을 곁들여 학습해야하는 것을 우리학교는 해 오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탈 현대에 살고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성을 인정하고 있다. 정신, 영혼이니 기() 등 가시적, 실재는 아니지만 실존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또 모든 답은 관점에 따라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다고 본다.


자연과학은 비교적 단일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보지만 오늘의 과학은 주관주의가 지배하고 있으며 자연과학에서 얻은 결론도 조건적인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다중패러다임에 지배되고 있으며 탈현대는 더욱 탈패러다임 적이기 때문에 정답은 합의에 의하는 것이고 합의를 위해서 담론적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학교는 단순지식 전달의 장소는 아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개념, 가치, 관계, 느낌을 끊임없이 생성시키고 자기화 할 뿐 아니라 타인의 생각과 자기의 생각을 조정하고 합의하고 협력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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