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단상(斷想)] 44.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회상(回想)

profkim 2022. 1. 5. 11:48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닥터 홀의 점자책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이 1897년 제작한 뉴욕식 점자(4)책을 202215일 자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닥터 홀의 한국 선교사역을 간단하게나마 되돌아보고자 한다.

 

홀의 점자책 표지에 홀이 자필로 기록한 제작경위와 사용자 설명

 

  나는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 Hall)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는 내 이전 세대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닥터 셔우드 홀(Dr. Sherwood Hall) 내외는 1984년 대구대학에서 초대하여 오셨을 때 만나 뵈었고 훨씬 후의 일이지만 2000년에 닥터 셔우드 홀의 아들인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과 따님이신 필리스 홀 킹(Phyllis Hall King) 내외분과 아드님을 초청하여 홀 선교사 내한 110주년에 기념행사를 대구대학에서 가진 일이 있었다. 뜻깊은 행사였고 닥터 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이때 이들 가족과 며칠을 같이 지낼 수 있었다.

 

  많은 선교사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지만 닥터 홀의 활동은 여성의료사업과 여성의학교육 그리고 장애인 교육에 많은 기여를 하신 분이다. 1890년 한국에 오시고 1892년 윌리엄 홀과 결혼하여 1893년 아들 셔우드 홀을 얻고, 1894년은 청일전쟁이 있었던 해인데 이해 윌리엄 홀이 전쟁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과로하여 서거(逝去)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얼마나 어려운 시간이었겠는가!

 

닥터 윌리엄 J. 홀의 묘비(1913년 마포 양화진)

 

  남편 윌리엄 홀이 서거하자 홀 여사는 아들을 데리고 일단 미국으로 돌아간다. 영구히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일시 귀국이었다. 1895년 유복자인 딸 마가렛(Edith Margaret)을 뉴욕에서 낳고 빈민가 여성 의료를 도우면서 1894년 평양에서 가르치던 오석형(吳錫亨)의 딸 맹인 소녀 오봉래(吳鳳來)를 가르치기 위해서 뉴욕맹학교(Institution for the Blind)에서 다시 점자 교육을 받고 189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홀의 미국 귀향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닥터 홀이 귀국하면서 김 에스더(Esther Kim Pak, 에스더는 세례명, 원명은 김점동, 남편 박유산, 1893년 결혼) 부부를 같이 데리고 간다. 박 에스더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닥터 로제타 홀과 보구여관(保救女館; 여성 전용 의료기관)에서 만나서 세례도 받고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한국의 최초의 서양의학에 의한 의사 김 에스더(점동)와 박유산 부부

 

  이들은 18951월에 미국에 도착하였고 에스더 부부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1896년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Shool of Baltimore, 현재는 Johns Hopkins)에 입학하여 1900년 한국 여성으로는 서양의학 공부를 하여 첫 의사가 된다. 아쉽게도 남편 박유산은 에스더가 졸업하기 직전에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박 에스더는 귀국하여 최초의 한국 여성 의사로서 한국 여성을 진료하게 된다. 에스더는 1900년부터 1910년까지 10년간 서양의학을 공부한 한국 의사로 한국인을 진료한 첫 사례가 된다. 그러나 에스더 역시 폐결핵으로 1910년에 서거하게 된다. 매우 아쉬운 일이다.

 

닥터 에스더 김 박의 1900년 졸업당시 사진, 닥터 홀의 자필로 메모,

 

  홀 여사가 뉴욕에서 점자판을 주문하고 왔으나 그것이 도착하기 전에 1897년에 한지(韓紙)를 여러 겹 더하고 기름을 먹인 후 한글 어문에 맞추어 점자를 제작했다. 뉴욕 점자는 4점 식()이기 때문에 이 점자책은 4점 점자이며 우리나라에 4점 점자책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 책이 유일할 것이다. 닥터 홀의 업적은 뉴욕 포인트로 한글 점자를 창제(創製)한 것이다. 닥터 홀은 기도문, 십계명 등도 점자로 제작했던 것 같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으며 이번 국가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배재학당에서 교과서로 사용한 초학 언문(諺文)”의 앞부분을 점역(點譯)한 점자책이다.

 

 

닥터 홀의 1897년 제작한 점자책의 내지

 

  윌리엄 홀과 로제타 홀이 1894년 평양에서 오석형 씨에게 전도하여 신자가 되었고 그의 딸 오봉래가 맹인이어서 로제타 홀이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윌리엄 홀이 서거하게 되자 미국으로 귀향했다가 1897년 돌아오면서 점자판, 점관, 점필 등 필기도구를 주문하고 왔으나 당시 배편으로 운송이 늦어서 이런 도구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닥터 홀이 손수 이 점자책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연원을 평양에서 시작한 닥터 홀의 맹여아 교육에서 부터라고 보기 때문에 1994년은 우리나라 특수교육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특수교육학회는 한국특수교육 100주년에 한국특수교육백년사간행을 결의하고 1992년부터 많은 분이 참여하여 준비하였다. 다방면으로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는데 특히 홀의 자료를 찾으려 노력하던 중 1984년 셔우드 홀 부부(Dr. Sherwood Hall & Dr. Marian Hall)가 대구대학교에 다녀간 기록과 그 자녀분들에 관한 사항을 조사하던 중 닥터 로제타 홀의 손녀이고 셔우드 홀의 딸인 필리스 홀 킹(Phyllis Hall king)과 연결할 수 있었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과 아들 셔우드 홀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은 그 아들 닥터 셔우드 홀과 더불어 우리나라 결핵 퇴치 운동을 하였는데 셔우드 홀은 우리나라에서 1932년 크리스마스실(Christmas Seal)을 처음 만든 분이다. 그래서 이분의 후손들은 한국결핵협회와도 깊은 관련을 갖는다. 필리스는 이분의 딸이다. 나는 19942월 필리스에게 자료 요청을 하였고 필리스는 내게 자료가 필요하냐? 묻고 자료는 필요한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로제타 홀의 점자책과 사진 자료와 맹농학생이 만든 작품을 나에게 주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의 유물을 필리스가 갖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자료가 있어서 한국특수교육백년사에 로제타 홀의 평양맹학교에 관한 기록을 충실하게 기술할 수 있었다. 초창기에 특수교육을 서울, 평양, 원산 등지에서도 시도한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기록으로 남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될 수 없다. 기록, 사진, 물품, 구전(口傳) 등 역사적 자료가 될만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대한특수교육학회가 간행한 한국특수교육백년사, 표지 사진은 닥터 홀과 맹농학생들이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은 역사의식과 비전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번 문화재가 된 점자책이 닥터 홀이 만든 것인지 그것이 최초의 점자책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 책 표지에 제작 경위와 사용한 사람 등 구체적으로 자필(自筆)로 기술해 두었기 때문에 다른 고증이 필요 없이 이것이 로제타의 점자책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홀의 관련 사진과 자료에는 대부분 자필로 설명을 기록해두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자료는 많지만, 자료 설명에 대한 기록을 해두지 않으니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무엇인지, 누구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이 점자책 표지에 자필로 기술한 내용을 보아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로제타가 기록한 점자책 표지에 쓴 내용의 영인본은 앞 두번째 그림이고 그 내용을 영문으로 옮긴 자료와 그 번역문을 게재(揭載) 하려 한다.

 

 

 

이 점자책으로 학업을 이어온 오봉래는 1917년 3월 27일 동경맹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다. 산진 앞줄 왼쪽 조배녀, 오른쪽 오봉래

 

  로제타 셔우드 홀의 내한 110주년(1890-2010)을 맞아서 대구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공동으로 셔우드 홀의 아들과 딸을 초청했었다. 고려대학과의 관계는 로제타 홀이 192894경성여자의학강습소”(Women's Medical Istitute)를 설립하여서 우리나라 여자 의사 양성을 시작했었다.

 

1928년 9월 4일 경성의학강습소 첫입학생

 

위사진에 닥터 홀 자필로 쓴 설명문

  이 학교는 1938년 우석학원(友石學園)이 인수하여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되었다가 1948년 서울여자의과대학으로 개편되고 1957년에는 남녀공학으로 개편하여 수도의과대학(首都醫科大學)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71년에 고려대학교에 인수되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고려대학교는 2018년 의과대학 90년사를 편찬한 바 있다. 이는 경성여자의학강습소 설립연도(192894)에 근거한 것이다. 대구대학교는 특수교육의 메카로서 당연히 닥터 홀의 업적을 기려야 해서 공동으로 초청하게 되었다.

 

 

경성여자의학강습소 교수진
위 사진을 설명한 내용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내한 110주년을 기념하여 2000년 초청된 인사는 닥터 홀의 손자, 손녀인데, 이들은 로제타의 아들인 닥터 셔유드 홀의 아들 윌리엄(William J. Hall ; 할아버지 이름과 같다.)과 딸인 필리스(Phyllis Hall King)이다. 필리스는 남편과 아들(Clifford King)이 같이 와서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2000104일 대구대학교 대명동 캠퍼스에서 기념 강연회를 가졌었다. 이 시간은 로제타 셔우드 홀을 회상하며 그가 한국에 심은 숭고한 정신을 후학들이 기억하며 이어받는 시간이었다.

 

2000년 내한한 홀의 후손들 앞열 좌로부터 필리스 홀 킹 부부, 4번째가 윌리엄 홀, 5째가 필리스의 아들(닥터 홀의 외손자)

 

  닥터 홀 내한 110주년을 맞아서 초청받아온 홀의 자손분들을 대구대학교에서 경주에 모시고 관광을 하도록 하였고 하루 저녁은 내가 이분들을 초청하여 경주 코오롱호텔에서 우리나라 고전 무용이 곁들인 만찬을 대접하였다. 손님들이 한국을 조금 더 이해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손님들에게나 우리에게 모두 따뜻하고 정겨운 시간이었다.

 

대구대학교 본관(경산)을 방문한 닥터 홀의 후손들

 

  서울 마포의 양화진에는 개화기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신 선교사들의 묘역(墓域)이 있다. 이 묘역 제일 높은 곳 양지바른 곳에 홀 가족의 묘가 있다. 1894년 서거한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Dr. William J. Hall)1951년 하늘나라로 가신 로제타 셔우드 홀(Dr. Rosetta S. Hall)의 묘, 이 두 분의 유복자로 태어난 마가렛(Edith Margaret) 그리고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Dr. Sherwood Hall)과 부인 마리안(Dr. Marian Hall) 이 두 분 사이에서 1934년 출생해서 그날 사망한 프랭크(Frank Sherwood Hall) 3대가 이곳에 묻혀있다(양화진 묘역 아-1013). 나는 여러 번 양화진을 방문하였다. 특히 한국특수교육백년사를 편찬할 때는 더 많이 다녔다. 가면 느낌 같은 것이 있다. 감성적으로 와 닫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특수교육백년사를 편찬할때 방문한 양화진 묘역, 왼쪽 비석은 셔우드 홀 부부, 오른쪽은 로제타 셔우드 부부 묘비이다.

 

  나는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의 점자책을 2006년 우리나라 제80회 점자의 날(114)을 기념하여 대구대학교가 점자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어서 홀의 점자책과 관련된 10여 종의 자료를 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다. 이 점자책 외에 로제타 홀의 관련 자료 35점은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여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잘 관리하여 후손에게 전달될 것으로 믿는다. 그 후 박물관에서는 자료를 잘 관리하고 보관하여왔다. 더욱이 최초의 점자책을 박물관에서 국가 문화재로 등록하도록 모든 절차를 밟았다. 경산시를 거쳐서, 경상북도의 심의를 거치고 중앙문화재청에서 국가 문화재로 등록하게 되었다.

 

대구대학교 점자박물관 개관식에서 홀의 점자책을 위시한 역사자료 15점을 이해균 박물관장에게 기증했다.

 

  이 점자책을 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절차로 2021 9월 말, 문화재청 관계자와 실사 위원 3명이 대구대 점자도서관을 방문해 문화재 확인 실사(實査)했을 때 내가 자료의 중요성과 입수 경위 등을 설명하였다. 실사 위원이 유물 확인과 검토 조사한 결과 로제타 홀 한글 점자 교재가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 태동의 상징적 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를 했다.

 

  문화재 위원회는 2021114일 점자의 날을 기하여 이를 문화재등록예고를 하였고 30일이 경과 하여 위원회의 결의로 2022년 1월 5일 정식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하게 된 것이다.

 

  점자박물관 직원들의 노고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문화재청에서 절차를 밟아서 국가 문화재로 등록해 주셔서 감사한다. 이미 고인이 된 필리스 홀 킹에 대해서도 감사하며 로제타 셔우드 홀의 유물이 국가 문화재로 등록되어 나는 매우 기쁘다. 모든 분에게 넘치는 감사를 드린다.

 

 

202215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의 점자책(1897 제작)이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는 날

2022 J. K. Kim

 
 

이미지들을 통해서 본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회상

 

 

닥터 홀이 주최해서 1914년 평양에서 개최된 극동맹농아교육자회의, 한국 최초의 특수교육 국제회의이다.
닥터 홀과 라퀠 선생의 맹인 개인지도(tutoring)

닥터 홀의 맹인 진료
닥터 셔우드 홀의 회갑(1926) 아들 셔우드홀과 며느리 마리안

 

닥터 홀이 평양에서 처음 크리닠을 개설한 건물, 글은 홀의 자필로 첫 건물이었음을 설명한다.
닥터 로제타 홀이 다섯번째로 옮긴 크리닠 건물, 신축한 것으로 평양에 첫 2층건물이라한다.
닥터 로제타 홀이 1909년에 세운 농학교의 첫졸업생이 결혼해서 아들과 함께, 이 사진은 미국 우정성에서 발행한 엽서에 실린 사진이다.
닥터 로제타 홀 회갑때 맹학교 졸업생과 같이
닥터 홀과 맹학교 농학교 졸업생
경성여자의학강습소 1930년 신입생과 재학생
닥터 로제타 홀의 수술실(192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