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선농단(先農壇) 방문기
장맛비가 며칠 계속되었다. 궂은 날씨에 일정을 변경할 수 없어서 서울 제기동(祭基洞) 선농단(先農壇)을 우중(雨中)에 찾았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1번 출구로 나가서 갈비탕집에서 점심을 들고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서울 선농단에 도착했다. 이곳은 너무 많이 변해서 옛 이미지를 가진 나에게 이방(異邦)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선농단 옛터의 북쪽 끝에 선농단 역사문화관 건물이 있어서 조그만 영역을 차지하고 있고 선농단이 조성되어있으나 대부분 지역은 주택가로 변해있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이 자리에 일제(日帝)에 의해 세워진 경성여자사범학교가 있다가 그 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거의 고급주택가로 변해있었다.
광복을 맞을 때 선농단 남쪽 길(신작로)은 동대문과 청량리를 잇는 전차가 지상으로 다녔는데 지금은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지하로 연결되어있다. 선농단 동쪽으로는 정릉천이 흘러서 청계천에 연결되고 청계천이 흘러서 한강으로 합류한다. 정릉천에는 옥수(玉水)가 흘러서 7, 80년 전만 해도 정릉에는 빨래터로 유명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겠지,
선농단은 조선조 태조 이래 역대 임금들이 그해 풍농(豐農)을 기원하는 선농제(先農祭)를 지냈다. 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바로 남쪽에 마련된 적전(籍田; 임금이 농사를 짓는 땅)에서 왕이 친히 밭을 갊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이 소중함을 알리고 권농(勸農)에 힘쓰기도 하였다. 1476년(성종 7)에는 이곳에 관경대(觀耕臺)를 쌓아 오늘날의 선농단이 이룩되었다.
왕이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할 때에는 농부 중에서 나이가 많고 복 있는 사람을 뽑아 동참하게 하였다. 이처럼 왕이 선농단에서 친경(親耕) 하는 제도는 1909년(융희 3)을 마지막으로 일제하에서 폐지되었다.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선농단 [先農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농단은 우리 선조들이 농사의 중요성을 백성에게 알리고 권농하는 뜻도 있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지녔다.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는 매년 경칩(驚蟄)이 지난 때 드렸다고 한다. 이때 소를 잡고 큰 가마에 소고기 각 부위를 넣어서 끓이고 양념을 하지 않아서 다된 다음에 소금, 파, 고춧가루를 넣어서 먹는 설렁탕을 먹었다고 한다. 야외에서 식사이니 가장 합리적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처음 선농탕(先農湯)이었는데 내려오면서 발음이 변형되어서 설렁탕이 되었다고 한다.
선농단은 1476년에 건립되었고 2001년에 문화재(사적 제436호)로 지정되었다. 주소는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서울시 동대문구 무학로44길 39)인데 제기동(祭基洞) 명칭은 선농단에서 온 것으로 제사를 지내는 터란 뜻이다(자료: 제기동[祭基洞] 서울지명사전). 선농단 제사는 1909년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70년이 지난 후인 1979년에 지역주민이 중심이 되어 선농단친목회를 구성하고 선농제를 재개했다가 1992년부터는 동대문구에서 계승하여 매년 선농제를 지낸다고 한다.
선농단 역사문화관(02-3296-5560)은 종암초등학교와 그리 넓지 않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1층에는 안내대, 전통찻집 등 편의 시설이 있었고, 지하 1층에는 역사문화관 소개, 삶의 바탕 농업, 선농의 시대적 기록, 제신(祭神) 농씨와 후직씨, 신농 대제와 선농단, 왕의 행차, 어가행렬, 하늘에 올린 제사, 왕의 친경(親耕) 의례(儀禮) 등이 전시되어있었고, 지하 2층은 주차장이고 지하 3층은 설렁탕의 유래, 유물전시, 여러 가지 체험, 조상들의 생활과 농기구, 세미나 공간, 쉼터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나는 어릴 때 선농단 근처에서 자랐다. 그 당시 이곳은 숲과 포도원과 한옥마을이 주였다. 종암초등학교에서 선농단을 바라보면 높은 언덕이었다. 지금은 그런 언덕은 다 없어지고 높이가 비슷하게 조성되어있었다. 세월의 흔적이라 할까, 내가 선농단을 방문한 날 종암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진전이 지하 1층에서 열리고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갔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종암초등학교를 졸업한 해가 1950년이니 벌써 72년 전이다. 공립학교가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이 쉽겠는가? 이 학교의 동창들이 나서서 100년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비록 100년의 모든 과정을 잘 연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장한 일이다. 한국전쟁 시 자료가 대부분 소실되었고 1970년 학교 화재 시 초기의 자료가 소실되었으니 학교 전반(前半)부 자료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종암초등학교 100년사를 만들면서 모아진 사진 자료 중에서 일부를 뽑아서 오늘 전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고 그것을 자산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은 고귀하다. 역사가 없으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과 같다. 정체성도 없고 미래도 없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선농단은 우리 조상이 오래도록 지켜온 문화이며 다시 그것을 찾아서 재현하고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한편 종암초등학교의 100년사를 간행하여 나를 찾고 나아갈 길을 찾으려는 의지는 무엇일까? 살아있는 사람들의 꿈틀거리는 도전정신이 아닐까!
비를 맞으면서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총총히 떠나왔다. 많은 여운을 남겼다. 살아있는 사람이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갈 길도 알아야 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오후였다.
2022년 7월 3일(일)
Ⓒ 2022 J. K. Kim
'단 상(斷 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斷想)] 58. 떠 남 (0) | 2022.07.23 |
---|---|
[단상(斷想)] 57. 오 늘(today) (0) | 2022.07.16 |
[단상(斷想)] 55. 길 (道) (0) | 2022.06.18 |
[단상(斷想)] 54. 운현궁(雲峴宮) 소회(所懷) (0) | 2022.05.31 |
[단상(斷想)] 53. 창녕에 다녀와서 (0) | 2022.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