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상(斷 想)

[단상(斷想)] 119. 우리나라 개화기의 신여성들

profkim 2024. 8. 15. 11:07

서울 동대문병원 수술실에서 로제타 홀 선교사와 간호사

 

        119. 우리나라 개화기의 신여성들

 

 

 

  칠월 하순부터 나는 오래된 사진들을 정리하였다. 백 년이 좀 지난 사진부터 백 년이 다 돼가는 사진들이다. 우리나라 개화기의 사진을 정리한 것이다. 개인이 소장할 사진이 아니고 박물관 같은 공공기관에서 보관 관리하여야 할 사진들이다. 이들 사진은 주로 여성 관계 사진으로 당시 우리나라 여성 교육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자료를 입수하게 된 계기는 내가 한국특수교육백년사 편찬위원장으로 일하던 1992년에서 1994년에 여러 분야에서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특히 초창기 사진이 부족하여 초기 선교사 후손들에게 연락하게 되었고, 마침 평양에서 맹교육(盲敎育)을 시작한 홀 선교사(Dr. Rosetta S. Hall, 1865-2051)의 손녀와 연결이 되어서 자료를 압수했다. 한국특수교육백년사에 이 자료가 많이 인용되었다.

로제타 홀 선교사의 이들 셔우드 홀(Dr. Sherwood Hall) 가족, 후 열 왼쪽 딸 필리스(Phyllis, 나에게 자료를 넘겨준 분), 우측이 둘째 아들 죠셉(Joseph), 앞 열 좌측 셔우드 홀, 중앙 장남 William, 우측이 부인 마리안(Dr. Marian) * 이사진은 복사본임

  놀랍게 홀 선교사는 대부분 사진에 기록을 남겼고, 사진 등의 자료를 잘 정리하여 보관했기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홀 선교사는 개인적으로는 다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1892년 결혼해서 1893년 아들 셔우드 홀(Dr. Sherwood Hall, 1893-1991)을 얻고, 1894년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Dr. William James Hall, 1860-1894)이 과로로 사망하고 유복자로 1895년 딸 에디스 마거릿 홀(Edith Margaret Hall, 1895-1898)을 얻었으나 일찍이 사망하여 아들 셔우드 홀을 지켜보며 홀로 평생을 사신 분이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남다른 면이 많다. 여자 의사로 한국에 왔고 당연히 여성 진료에 정력을 쏟았지만, 그의 심중에는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한국 여성은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여성 의사가 진료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1890년에 왔는데 그해 이화학당에 여성의학 예비강좌를 개설했던 모양이다. 여기 참석한 한 여성이 190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에 의한 여의사가 된 에스더 김 박(Dr. Esther Kim Pak, 본명은 김점동)이다.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Dr. Esther Kim Pak) * 이사진은 복사본임

  그뿐만이 아니라 한국에 오기 전에 뉴욕맹학교에서 시각장애 교육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와서 1894년 평양에 도착해서 오석형 씨를 만나게 되고 시각장애인인 그의 딸 오봉래를 만나 맹 교육에 연원(淵源)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연원이 된다. 그 후 1909년에 농아교육도 시작하게 되어 평양에서 맹 농아교육이 시작된다. 이 특수교육 관련 자료는 2010년 대구대학교 박물관과 점자박물관에 모든 자료를 기증해서 대구대학교가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이글에서는 주로 여자 의학교육에 관한 내용을 다루려 한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 받기 전에 이미 장애인 교육과 여성의학교육에 관한 비전을 갖고 온 분이다. 그의 선교 후반인 1928년에 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조선 여자 의학강습소(KWMI)를 설립해서 여성 의학교육의 장을 열었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해서 바로 여성 의료인 양성에 주력했다.

로제타 홀 선교사가 길러낸 여의사를 한 사진첩에 모았고, 일일이 설명을 붙여두었다. 사진첩은 양면으로 되었는데 이 사진은 첫 면이다. 김점동과 1912년 평양여자의예과 강좌 수강생 등 관련된 사진이다.
로제타 홀 선교사가 길러낸 여의사를 한 사진첩에 모았고, 일일이 설명을 붙여두었다. 사진첩은 양면으로 되었는데 이 사진은 둘째 면이다. 관립 보통의학교 졸업생과 북경여자의과대학 졸업생과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1928년 1회 입학생 사진을 모아서 여성의학교육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그가 처음 여성 의사가 되도록 도운 사 람은 김점동이다. 1890년 이화학당에 개설한 여성의학 예비강좌에 참여한 김점동(Dr. Esther Kim Pak)1894년 윌리엄 홀이 세상을 떠나고 그해 로제타 홀 선교사 가족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남편 박유산과 같이 가게 된다. 김점동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 Baltimore)에 유학하여 190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여자 의사가 되었다.

1894년 홀의 남편 William J. Hall이 사망하고 미국에 가서 1895년 뉴욕에서 김점동(Dr. Esther Kim Pak)과 남편 박유산(후열 우측), 그리고 로제타 가족 왼쪽이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 씰을 처음 만든 셔유드 홀, 다음이 유복자로 태어난 에디스 마가렛, 그리고 로제타 홀 선교사

  기록을 보면 김점동은 의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여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모양이다. 로제타 홀 선교사와 같이 뉴욕으로 갔지만, 의과대학에 다니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남편이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남편 박유산은 미국에서 과로와 폐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런 희생에 터 해서 김점동은 1900년에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우리나라 여성을 진료했고, 보구녀관(普救女館) 원장(1901-1903)도 지냈다. 보구녀관은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의 후원으로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1832~1909) 선교사가 18871031일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이다. 보구녀관은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이다.

관립 보통의학교를 1918년 졸업하고 의사면허증을 받은 3 사람과 홀 선교사.

  두 번째 사례로 로제타 홀 선교사는 1912년에 평양에서 여자의예과를 개설했다. 이들 학생 중 3명은 서울 관립 보통의학교(필자 주(): Government General Medical School, 광복 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같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됨)에 전학시키고 이들 3명은 1918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의사 면허증을 받았다. 이들 세 명은 Dr. H. Kim, Dr. Y. Kim. Dr An이라고 홀 선교사는 사진에 기록했다. 평양에서 시작한 의예과 교육을 서울 관립 보통의학교에 접목해서 여자 의사로 길러낸 사례이다.

 

  이 세 사람은 머리 모양과 복장이 특이하다. 당시의 여성 패션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이들을 길러낸 어머니로서 이들 뒤에 의졌하게 서 있다.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북경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1년 의사가 된 Dr. A. N. Kim

  세 번째 사례는 북경연합 여자의과대학(Union Women's Medial College of Paking)에서 의사가 된 DR. A. N. Kim이다. 이들은 모두 로제타 홀 선교사와 직접적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홀 선교사는 이 다섯 명의 여의사와 1928년 설립한 조선 여자 의학강습소(Korea Women's Medical Institute)의 첫 입학생 사진을 한 사진첩에 모아 두었다. 그리고 설명문을 첨부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영어: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어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이분이 우리나라 개화기에 한국 교육에 관한 책을 펴냈는데 이 책에 로제타 홀의 의학교육과 특수교육을 소개하고 있다. (Underwood, H. H. 1926. Modern Education in Korea p. 154).

 

  언더우드 선교사는 당시 선교사로 여자 의사들이 여러 명 조선에 와서 진료를 한 일을 기술하고 로제타 홀 선교사만이 여성의학교육에 전념했음을 기술한다. 결국, 로제타 홀 선교사의 비전은 오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라는 실체를 남겼고, 개화기 여러 명의 여의사를 배출하는 성과를 걷었다. 우리나라 여의사 양성과정에 획기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보아야 한다.

 

  뒤에 일본여자의과대학에 유학해서 여의사가 된 기록들도 있지만, 이글에서는 로제타 홀 선교사와 관련된 의사 양성만을 기술하고자 한다. 암울했던 우리나라 개화기에 오지를 찾아온 선교사들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데 기여했고, 로제타 홀 선교사의 경우는 한국의 여성의학교육과 특수교육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하겠다.

로제타 홀 선교사가 1933년 은퇴하게되어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교수와 학생이 환송만찬 후에 한강변에서 기념 촬영

  로제타 홀 선교사는 1933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홀 선교사가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1928년 입학생부터 1933년 입학생까지 6년간의 입학생을 받아서 교육시켰고, 이 학교는 계속되어서 오늘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의 선구자이며 개척자로서의 비전은 아름다운 결실을 보았다 할 수 있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1회 입학생(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2회 입학생(1929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3회 입학생(1930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4회 입학생(1931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5회 입학생(1932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6회 입학생(1933년)

  개화기에 로제타 홀 선교사를 만난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고, 그 세계에 도전함으로 신여성으로, 지식인으로 우뚝 서서 여성 사회를 선도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로제타 홀 선교사가 은퇴한 후 조선여자의학강습소(KWMI) 교수 일동, 로제타(Dr. Rosetta S. Hall) 선교사와 셔우드(Dr. Sherwood Hall) 선교사 사진은 뒤에 사진으로 첨부되었다.

  오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은 선현들의 피땀을 흘린 노고의 터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오늘 잘 살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는 잘 유지하여 후손에게 유산으로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은 79회 광복절이고, 대한민국 건국 76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간에 무모한 이념논쟁으로 많은 희생이 있었고, 국력을 낭비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논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논쟁은 나라를 쇠퇴하게 할 것이다. 산업을 일으켜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모든 국민이 풍요롭고 행복한 사회를 이루는 길로 가야겠다.

 

 

2024815()  79회 광복절, 76회 대한민국 건국일에

2024 J. K.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