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1. 사랑의 씨를 뿌린 사람

profkim 2020. 3. 13. 14:08



사랑의 씨를 뿌린 사람

 


 

  

우리 나라 개화기는 역사적으로 어두운 시기이다. 조선왕조의 난정과 세도정치 그리고 쇄국주의로 인해서 산업사회로 이동하지 못하였으며 국운이 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이 유입되는 실학사상이나 실용주의를 수용할 수 없는 당시의 사상적 배경은 우리나라가 산업화되는 데 저해 요인이었다.


천주교와 신교는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서양 문물을 동시에 전해주는 매체였다. 또한 산업사회체제에 부응할 새로운 교육체제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서양 의학의 도입으로 건강관리의 새로운 장르를 열게 했다.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51)는 필라델피아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는 해인 1890년 감리교회 여자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 되어 온 분이다. 그는 1892년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과 결혼하고 서울 동대문 병원동에서 의료 선교사업을 하다가 19845월 내외가 새로운 선교지인 평양으로 가게 된다.


이 해는 노일전쟁이 일어나는 해로 홀 내외는 평양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서울로 귀환하게 된다. 전쟁으로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고 윌리엄 선교사는 전염병에 감염되어 1894년에 사망하게 된다. 홀 여사는 휴식과 남편 사후의 재정비를 위해 그 해 11,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는 윌리엄과 사이에서 얻은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110일생)과 태중에 유복자 딸 에디스 마가렡(Edith Margaret Hall, 189518일생)를 데리고 가게 된다. 이들 셔우드는 한국에서 출생한 최초의 백인이며 셔우드는 후에 성장하여 그 역시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어 한국민을 위해 일했으며, 특히 이들 모자는 한국의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다.


불행히도 마가렡은 1898년 사망하여 홀여사는 남편과 딸을 한국에서 잃은 아픈 경험을 한 분이다. 그러나 평생을 한국여성에 대한 진료와 여자의학 학교(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통해 여자 의사양성에 진력했을 뿐 아니라 1894년 평양에서 그의 첫 신도가 된 오석형 목사의 맹인 딸 오복래에게 점자를 지도하는 것으로부터 특수교육을 시작하여 한국특수교육의 연원을 만든 분이다.


평양에서 그의 사업은 아주 미미하게 시작하였고 단 한명의 맹소녀를 교수하는 데서 특수교육을 시작하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점자의 개발과 맹소년 소녀를 교육하는 일과 더 나아가 농아 학생 교육으로 확장하였다.


홀 여사의 노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선각적이었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는 평양맹아학교 학생을 평양 정진소학교와 통합하는 형식으로 운명한 것이다.


요사이 통합교육의 당위성이나 그 수행 이론과 방법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그 당시로서는 선각적 조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홀의 평양맹아학교에서는 직업교육에 역점을 두고 운영하였다. 당시 수공(manual work)을 통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 맹농학생들로 실생활에 적응력을 높이고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학생들의 뜨개질 작품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미국의 구매자들에게 보내져 판매하였고 이를 통한 후원금도 모금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기도 하였다.


한국특수교육 성과를 미국에 알리기 위해 평양 맹아학교 졸업생에 관련된 사진을 넣는 엽서를 우정국에서 발행하는 일과 사진 엽서를 만들어 사용한 것들도 매우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홀여사는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인 것 같다. 여자의사 양성은 물론이고 평양맹아학교 졸업생인 여자맹인을 동경맹아학교 사범과에 유학시켜서 필요한 교사를 양성한 것과 농아교육을 시작하기 위해 중국농아학교에 교사를 파견하여 배워오게 한 것 등 우리나라 인재양성에 기여했다.


홀여사가 1894년 일시 귀국할 때 김 에스더 내외를 동반하였고 김 에스더를 여자의과대학에 진학시켜 1900년 의사가 되게 함으로써 에스더는 한국최초의 여자의사가 된다. 김 에스더는 1910년 요절하였지만 홀의 의료사업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홀은 한복을 즐겨 입는 한국화 된 미국인이었다. 그녀는 여행할 때 3등칸 기차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일본기자가 “2등칸이라도 타시지요?”라고 권면하였더니 홀여사는 조선에 할 일이 많아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결핵퇴치, 장애학생을 위한 교육, 인재양성 등 그의 과제는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조그마한 여인이 이 땅에 심은 씨앗은 싹트고 자라고 꽃피우고 열매 맺고 있다.

홀여사는 퇴임하여 뉴욕에서 노년을 보내다 한국전쟁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그녀는 그 이듬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 그의 유해는 그의 남편 윌리암이 편히 쉬고 있는 마포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남편 곁에 묻혔다. 그는 죽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의 아들 셔우드 내외도 그들의 부모 옆에 묻혀서 그들은 영원히 한국과 같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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