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노인이 사람으로 대우받는 사회
나는 이글의 제목을 “노인을 사람답게 대우하는 사회”로 하려 생각했었다. 그러나 접었다. 이유는 노인이 주체가 아니고 수동이 되기 때문이다. 근래에 카카오 톡과 메일을 통해서 하루에도 수십 통의 글을 받고 있다. 나에게 보내는 사람 중에는 나이 든 사람이 많아서인지 노인 문제에 관한 글이 많다. 그 가운데에는 “요양병원” 이나 “요양원”에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글이 많이 있었다.
요양원은 죽으러 가는 곳이나, 고려장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또 자식들의 부모에 대한 무책임한 자세에 대해서도 언급되어있는 것이 많다. 요양원에 부모를 보내는 자식들은 불효자로 치부하고, 자식들이 부모를 고려장(高麗葬)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 예도 있다. 무척 마음 아픈 일이었다. 만일 요양(병)원이 노인들이 말년을 보내기에 쾌적한 곳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회자(膾炙)되지 않았을 것이다. 말년을 억압(抑壓)과 조악(粗惡)한 환경에서 보내는 곳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노인들 사이에 회피 시설로 인식이 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진정한 복지사회로 이동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한 과정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복지제도가 발전해 가는 데는 일정한 과정이 있겠지, 우선 양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다음 질적으로 좋아지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나라 복지제도는 아직 질적으로 성장한 단계는 아니다. 지식도 부족하고, 복지정책을 운용하는 기법 역시 부족하다. 더욱이 복지정책을 입안하고 운영하는 패러다임과 같은 가치체계의 확립도 다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복지정책의 이유(why)와 방법(how)의 정립이 아직 다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인식수준 역시 매우 낮은 단계라고 생각된다.
이런 기반의 부실은 정책입안자, 시설 설립운영자, 의료진, 의료 보조자, 수혜자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복지의 외형은 커졌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수요자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인다.
한사람이 태어나서 부모의 돌봄을 받으며 자라나고 성인이 되면 자립해서 살다가 늙으면 가족이나 자녀에게 의존해 살아왔다. 이런 유형은 농업사회에서 보편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핵가족제도가 되고 농업사회의 대가족체계는 무너졌다. 더욱이 정보사회로 전환되고 복지사회를 이루고 있는 오늘은 “우리 자식 우리가 기르고, 우리 부모는 우리가 책임진다.”라는 사고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니 부모의 개념이나 자식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이 고려장이고,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처한 시대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독립생활을 하다가 심신이 불편하게 되면 타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더 불편해지면 요양 시설에도 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시설에 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 생각이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 요양 시설에서 입원자들이 당하는 인권침해나 권리 박탈 같은 것은 자유를 속박하고, 이동도 제한하고, 인격적 대우도 받지 못하고, 음식도 조악하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으나 이런 인권침해는 대부분 요양 시설 운영의 편의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이 위에 감시기능이 거의 없다는 것 또한 문제를 심각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런 문제의 개선을 누가 나서서 해야 하겠는가? 노인이 요양 시설을 비판하고 피하면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앞으로 사회에서 노인들은 자연스럽게 요양 시설에 가서 평안하고 행복한 말년을 보내야 한다.
나는 대학강단에서 현직으로 38년 6개월을 보냈다. 내가 주로 한 일은 심신(心身)의 손상(損傷)으로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한 특수교육 교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1960년대 특수교육 대상 학생의 인권은 바닥이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서 학교 교육을 받는다는 그 자체가 사치인지도 모른다. 너무 심각한 문제여서 전문가 집단은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심신의 손상을 가진 학생들의 문제를 잘 몰랐다. 피상적, 형식적 문제해결에 집착했다.
그다음 단계로 나선 이들이 부모이다. 1980, 90년대 부모의 활동은 많은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부모운동이 거둔 성과는 장애 학생 부모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가 지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1990년대 이후 추세는 당사자(當事者)가 직접 권리 주장에 나선 것이다. 나는 부모운동과 당사자 운동을 이끌어왔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당사자가 나서서 당사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이다.
나도 노년이 되었다. 사회에 회자되고 있는 과제를 불평과 불만 그리고 회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노인이 직면한 문제를 정확히 밝히고 우리 사회의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노인들이 직접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평화롭고 행복한 노년을 보장받아야 한다.
누구도 노인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그 고통을 느낄 수 없다. 당사자만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무엇이 해결되어야 하는지도 안다. 이런 문제를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문제를 사회에 알리고 문제가 해결되도록 정치적 과제를 던져주고, 정치인으로 해결하도록 하고, 우리 사회의 인식개선을 위해서 사회 계몽운동도 전개하여 노인 문제를 널리 알려 노인 문제해결에 참여자가 되게 하고, 제도적으로 감시체계가 확립되게 하고, 노인단체에서 노인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노인복지 정책을 입안하여 법제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가 가진 노인 문제를 심각하게 보아야 한다. 통계청 통계에 의하면 2022년 65세 이상 노령인구는 90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7.6%이고 출산절벽과 연계되어서 매년 전체 인구 비율에서 약 1%씩 노령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추세는 2025년에 노령인구는 20.3%가 되고 2036년에는 30,5%가 된다고 하니 우리나라는 머지않아 노인의 나라가 될 것이다.
노인은 죽어가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노인 스스로 서서 자신의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노인에게는 지혜가 있고, 풍부한 삶의 경륜이 있다. 사회는 이런 자원을 폐품으로 처리하면 안 된다. 활용 방안을 마련하고 그들의 재능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활용해야 한다.
노인의 자조(自助, self help) 능력이 상실될 때, 인격적 대우와 안락한 삶을 보장받아 행복한 말년을 보내도록 하는 책무는 사회공동체에 있다고 본다. 이것이 복지사회가 지향하는 길이다. 오늘 이념논쟁은 시대착오에서 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모든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이런 사회는 생산성이 높아지고 분배과정이 투명하고 공평해서 모든 국민이 자아실현을 통해서 실존적 가치를 실현하게 된다고 본다.
오늘 나는 노인의 문제를 단편적으로 다루었다. 노인인 당사자는 우리가 지닌 문제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하는데 머무르면 안 된다고 본다.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문제해결을 위해서 스스로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본인 이외에는 본인이 지닌 문제를 정확히 모른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2023년 7월 15일(토)
Ⓒ 2023 J. 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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