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여호와 이레의 동산
김정권 교수의 기독교 역사기행 1
옛 이야기가 서려있는 청라언덕에 선다.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세계의 오지인 우리나라를 찾아온 복음의 사도들과 젊은 시절 애틋한 연애감정이 깃들어있는 “동무생각”의 노래며, 일본 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과 투쟁이 얽혀있는 동산, 그곳이 “청라언덕”이고 “여호와 이레의 산” 이다.
사진 1 담쟁이 넝쿨
청라언덕
청라(靑蘿) 언덕은 기독교 역사가 묻어있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박태준 선생생이 작곡하고, 이은상 선생이 작시한 동무생각의 가사를 통해서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청라라는 말은 푸른 담쟁이 넝쿨을 의미한다. 황무지와 같은 땅에 선교사들이 심은 청라가 무성했던가 보다.
박태준 선생이 계성학교를 다닐 때 연모한 여학생이 있었다하고 후에 그녀와의 연애 이야기를 들은 이은상 선생이 노랫말을 만들고 이에 박태준 선생이 작곡하여 온 국민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다고 하니 청라언덕은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곳인가 보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그 시비 앞에서 “동무생각”을 합창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대구시에서는 골목투어의 한 곳으로 정했으며 이 언덕은 꽤나 유명한 곳이 되었다.
사진 2 동무생각 노래 비
여호와 이레의 땅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대구 경북 복음화의 산실이라는 점이다.
이 언덕은 대구선교의 3인방인 미북장로교 선교사 아담스, 존슨, 브루언 등 세분이 남문 안에 있던 선교본부를 이리로 옮겼고 이 분들이 언덕에 서서 대구읍성을 바라보며 “우리가 선 땅은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이레의 땅(Jehovah-jireh)” 이라고 하였고 브루언 선교사는 대구 읍성을 바라보며 “다윗의 망대가 서있는 예루살렘 같다”고 외쳤다고 한다.
아담스(Rev. James E. Adams, 대구사역 기간 1896-1923, 한국명 안의와) 선교사, 존슨(Dr. Woodbridge Odlin Johnson, 대구사역 기간 1898-1913, 한국명 차인차) 선교사, 브루언(Rev. Henry M. Bruen, 대구사역 기간 1899-1944, 한국명 부해리) 선교사는 영남지역의 복음화의 선두 주자였으며 이 분들에 의해 대구를 중심한 영남지방에 교회가 설립되고 서양식 병원과 학교가 세워지는 등 한국 개화기를 이끌어간 선구자들이라 하겠다.
사진 3 여호와 이레 동산 비
이 동산(東山, 현 달성공원에 비해 동쪽에 있다하여)은 대구제일교회 설립자이신 아담스(James E. Adams) 목사와 제중원(현 동산병원)을 설립한 존슨(Woodbridge O. Johnson) 선교사가 1899년 땅을 구입한 자그마한 산이었다.
여기에 선교본부가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이 생겼고 뒤에는 교회가 들어서는 등 기독교 복음의 요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다. 대구가 제2의 예루살렘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곳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땅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동산에는 현재 1900년대 초의 선교사 주택, 신명학교, 동산병원, 대구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편으로 서문시장과 이웃하여 계성학교, 동산 동편으로는 천주교 계산 주교 좌(主敎座) 성당이 있어서 우리나라 개화기에 세워진 건물들을 볼 수 있다.
1910년 전후에 이곳에 10여 채의 건물이 세워졌는가 보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은 세 채의 선교사 주택만이 남아있어서 19세기 초의 서양 건축양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초기의 대구성경학교(1913년 개교, 1969년 영남신학교와 합병) 건물 등 많은 부분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심었던 나무(특히 제3세목 사과나무)와 자연적 환경은 많이 보존되어있고 사철 아름다운 경관과 꽃들이 찾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안온하고 평안한 동산이라 하겠다.
존슨(Woodbridge O. Johnson) 선교사가 미국에서 사과나무 묘목 3종류 72그루를 가져다 심은 것이 대구를 사과의 주산지로 만들었다. 선교사들은 사과묘목을 농가에 나누는 일을 했는가보다. 이로 인해 대구가 사과의 고장이 되었고 지금 이 언덕에는 그 제3세목 사과나무가 서있다.
남아있는 건물
남아있는 세 채의 선교사 주택은 스윗즈(Miss Martha Switzer) 선교사 주택(대구시 유형문화제 제24호), 블레어(Bleir) 선교사 주택(대구시 유형문화제 제26호)과 챔니스(O. Vaughan Chamness) 선교사 주택(대구시 유형문화제 제25호)등으로 모두 1910년경 지어진 서양식 건물들이다. 이들 건물의 주춧돌은 1907년 일제에 의해 해체된 대구읍성 성곽(城郭)의 돌은 사용했다고 하니 민족적 깨달음이 있어야하겠다. 이 세 채의 건물은 현재 박물관, 역사자료관으로 사용되어 옛 선교사역을 오늘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첫째, 스윗즈(Miss Martha Switzer) 선교사 주택은 스윗즈 여선교사, 계성학교 4대 교장이었던 핸더슨(H. H. Handerson), 계명대학교 초대 학장이셨던 캠벨(Dr. Arch Campbell, 한국명은 감부열) 박사가 거주하기도 하였다.
사진 4 스윗즈 주택
지금은 선교 박물관으로 기독교의 초기 자료가 많이 전시되어있다. 대구 복음화의 pioneer, 성경 자료, 동산병원의 역사 등 귀중한 자료를 많이 전시하고 있다. 특히 쪽 복음 성경 같은 초창기 자료들은 요사이 보기 어려운 자료들이다. 한국 복음화의 파이오니아들의 역사 사진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5
선교역사박물관
둘째, 블레어(Bleir) 선교사 주택은 블레어 목사가 살던 주택인데 현재는 교육박물관으로서 조선시대 서당, 1960-1970대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하고 있으며 시대별 교과서 민족적 자료, 동산병원 홍보관이 있다. 또 3.1운동 사진 등이 전시되어 민족혼을 고취하고 있다.
사진 6 블레어 주택
셋째, 챔니스(O. Vaughan Chamness) 선교사 주택이다. 챔니스 목사에 이어서 1911년 계성학교 제2대 교장을 지낸 레이너어(R. O. Reiner, 대구사역기간 1910-1915, 한국명; 라도래), 그리고 샤워택 선교사가 살았으며 1948년에서 1993년까지는 동산병원을 크게 발전시킨 마펫(Dr. Foword F Moffet, 대구사역기간 1943-1993, 한국명; 마포화열) 원장이 살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사진 7 챔니스 주택
현재 이 건물은 의료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개화기 사용하던 의료장비 등을 볼 수 있으며 마펫 원장의 유품도 많이 볼 수 있다.
사진 8 동산 의료박물관
동산의료원 은혜의 정원(외국인 묘지)
동산의료원 은혜의 정원(외국인 묘지)에는 13개의 묘석(墓石)이 있다. “우리가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가족들이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다“ 대구․경북 지방에 기독교를 전하러 왔다가 순교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가 묻혀 있는 곳이다.
동산의료원의 외국인 묘지는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같은 순교성지로서 대구․경북지방 기독교 선교관광(Mission tour)지로 이 지방 복음 전파의 발자취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아담스 선교사의 부인 넬리 딕 아담스의 묘와 브루언 선교사의 부인 마르타 스콧 브루언의 묘를 소개하기로 한다.
사진 9 동산 은혜정원
첫째, 넬리 딕 아담스(Nellie Dick Adams, 대구사역기간; 1897-1909)는 대구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아담스(Rev. James E. Adams, 안의와) 목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1897년 11월 1일 장남 에드워드(Rev. Edward Adams, DD., 한국 사역기간; 1925-1963, 한국명; 안두화, 安斗華, 계명대학교 설립자, 2대 학장 역임)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 선교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남문안 예배당(제일교회)의 유년주일학교를 창립했고, 부인 주일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전도부인을 돕는 한편 부인사경회 강사로도 활동하였으며, 신명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넬리 딕은 대구에서 차남 벤자민(안변암)과 삼남 조지(안두조)를 낳았다. 1866년 9월 15일 출생한 그녀는 넷째 아이의 유산 후 산후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09년 10월 31일 43세를 일기로 소천 하였다. 대구에서 제일 먼저 소천한 부인 선교사가 되었다.
묘비에는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She is not dead but sleepeth)"라고 새겨져 있다.
사진 10 Mr’s Adams 묘비
둘째, 마르타 스콧 브루언(Martha Scott Bruen, 대구사역기간; 1902-1930, 한국명; 부마태, 傅馬太)은 브루언(Rev. Henry M. Bruen) 목사의 아내이다.
그 녀는 1902년 5월 10일 대구에 와서 남문안 예배당(대구제일교회)구내 초가에서 소녀들을 위한 신명여자소학교를, 1907년에는 동산 위에 있던 부인용 사랑채에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대구 여성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화이트 하벤(White Haven, Philadelphia)에서 1875년 4월 10일 출생한 그녀는 제일교회 부인주일학교 교사와 농촌교회 여전도회 조직, 부인 사경회를 인도했으며 1930년 10월 20일 55세를 일기로 소천 하였다.
여기 묻혀있는 성인들은 한국에 복음을 전하며 우리나라 개화기를 이끌어간 분들로 위에 소개한 두 분을 위시하여 모두 우리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할 분들이다.
사진 11 Mr’s Martha Scott Bruen 묘비
현재 청라언덕에 있는 학교, 병원, 교회 건물들
청라언덕에는 브루언 목사 부인이 설립한 신명학교가 현재로는 신명고등학교로 존재하고, 동산병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초기의 대구성경학교 부지에 세워진 안의와 선교사가 세운 대구 경북의 모교회인 대구제일교회당이 자리 잡고 있다.
대구의 남문 밖에 있던 조그마한 언덕은 기독교 복음의 요람으로 의료와 교육의 발상지로 역사기행의 한 코스가 되어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우리나라 문화와 서양문화를 같이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신명고등학교는 1907년 브루언(Rev. Henry M. Bruen) 선교사 부인이신 마르타 스콧 브루언(Martha Scott Bruen, 대구사역기간; 1902-1930, 한국명; 부마태)이 동산에 있는 부인용 사랑채에서 1907년 설립하여 개화기 한국 여성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부마태 선교사는 1907-1912까지 신명학교 이사장 겸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1930년 소천 하시어 동산 은혜정원에 잠들어 있다.
신명학교는 대구의 최초의 여성중등교육기관이었다. 당시 여성 교육이 전무하던 시대 즉 여자에게 교육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 생각하던 시대에 신 교육운동을 벌여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복음화 역군으로 길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청리언덕에 있는 동산병원은 제중원(현 동산병원)이란 명칭으로 대구복음화의 삼총사 중에 한분인 존슨(Woodbridge O. Johnson) 선교사가 1899년 대구제일교회 구내에 설립하여 대구 지방에서 첫 번째의 신 의료기관이 되었다.
동산의료원은 6.25 한국전쟁 이후 한국최초로 아동병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무료로 치료해 주는 등 어느 의료기관보다 무료진료를 많이 실시했으며,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들었던 약을 처방해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7대 병원장 마펫 의료선교사는 46년을 재직하며 병원 시설을 신축·확장하고 현대식 의료장비를 도입하는 등 동산의료원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실제로 1960~70년대 동산의료원의 의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1980년 지역 대표적 기독교 사학기관인 계명대학교와 병합하면서 의과대학을 세우고, 1982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거듭났다. 진료와 선교를 넘어 교육과 연구까지 병행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동산병원은 2019년 성서 계명대학교 캠퍼스에 최신식건물과 시설을 갖추어 옮겼고 동산에서도 계속 진료를 하고 있다.
대구제일교회(통합, 담임목사 박창운)는 대구 경북의 모교회로서 청라언덕 위 대구성경학교가 있던 자리에 세워져있다. 이 성전은 대구제일교회 4번째 성전이라 한다. 이 성전은 1989년 착공하여 1994년 완공하여 남문안 성전에서 현재의 이 여호와 이레의 동산으로 옮겨 온 것이다.
제일교회는 아담스(Rev. James E. Adams) 목사가 1896년 대구 남문 안 현 제일교회 선교관 자리를 구입하여 교회를 세웠다. 이곳은 대구제일교회이지만 미북장로교의 선교기지 역할도 같이 하였다.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선교사들이 활동했으며 이들을 통해 전도 받아 신자가되고 훈련받은 사람들에 의해 영남지방의 교회가 번창했고 제일교회에서 나뉘어 나간 교회만도 22교회나 된다고 한다.
사 진 12 대구제일교회
대구제일교회는 현재 청라언덕 즉 “여호와 이레의 산”에 우뚝 서있데 이는 110년 전 대구 복음의 삼총사가 언덕에 서서 대구읍성을 바라보며 “우리가 선 땅은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이레의 땅”이라 외쳤던 그 말이 실현되었다고 믿게 된다.
대구 3.1운동길
대구제일교회 100주년기념관 남쪽에서 청라언덕 노래비 옆으로 올라가는 90계단의 길은 1919년 3.1운동당시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이 길이 솔밭길이어서 숨어서 이 길을 통과하여 1919년 3월 8일 큰 장(서문시장) 현재 섬유회관 건너편에 집결하여 만세운동을 벌렸다고 한다. 대구 만세운동은 학생, 교회지도자들, 시민이 참여하였는데 일제 감시가 심하여 3월 1일 며칠 뒤인 3원 8일 일어났다고 한다. 대구시는 2003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구 3.1운동 길”로 여기를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사진 13 대구3.1운동길
“대구3.1운동길”은 대구 골목 투어의 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필자가 현장에 갔을 때는 중국에서 온 처녀들이 한복을 입고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것을 목격 했다. 민족적 각성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하던가! 왜?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과 같다. 따라서 정체성이 없으며 이런 사람들에게는 비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오지인 이곳 한국을 찾은 복음의 사자(使者)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이곳에 왔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나라가 선교 대국으로 발 돋음 하는 일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청라언덕을 찾는 이들은 그 곳이 “여호와 이레의 땅”인 것을 알까? 오늘 우리의 삶과의 깊은 관계를 이해할까?
일제 한국 강점과 그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 우리가 당한 수모와 수탈 그리고 젊은이는 군대로, 좀 나이가 든 사람들은 보국대로, 어린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가서 당한 고난은 어떤 것일까? 이런 의문을 다시 반추하게 된다.
오늘의 번영을 누리는 우리나라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역사의 반추와 나를 알고 미래를 향한 꿈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말세에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신 예언과, 환상과 꿈이 있어야 할 것이다.
2019년 11월 10일
김 정 권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명예교수,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구 침산제일교회 원로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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